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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화. 비밀의 화원 (89/145)


89화. 비밀의 화원
2022.12.07.



 
나타니엘이 그렇게 나가고 난 뒤, 나는 방 안에서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그의 말이 맞았다.

모든 일을 전부 혼자서 감당하려는 건 그렇게 좋은 방법은 아니었다.

우리 입장이 바뀌었다면, 나는 분명 나타니엘에게 서운하다고 느꼈을 것이다.


“그렇다고 방에 가두는 건 너무하잖아.”

가볍게 문고리를 돌려 봤지만, 문은 여전히 꼭 잠겨 있었다.

침대에 걸터앉아 나타니엘을 기다리던 나는 잠깐 잠이 들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눈을 뜨자 어느새 나타니엘이 돌아와 있었다.


“어, 왔어요?”

“응.”

“다이애나는요?”

“지하에 잘 가둬 뒀지.”

“기사단에서 찾으러 오면 어떻게 하고요.”

“아마 그럴 일은 없을 거야.”

나타니엘은 왠지 신이 난 표정이었다.


“뭔가 알아낸 게 있어요?”

“디에스 기사단에 대해 알아냈다.”

“어떻게요?”

나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자리에 앉았다. 나타니엘은 어깨를 가볍게 으쓱였다.


“다이애나가 순순히 이야기하던걸.”

싱글벙글 웃으며 나타니엘은 자신이 알아낸 것들을 알려 주었다.


“조직은 크지 않은 것 같더군. 흑마법을 사용하는 것 외에는 그렇게 대단한 조직 같지도 않고.”

“그렇게 대단한 조직이 아닌데 어떻게 제국을 멋대로 주무르는 거죠?”

흑마법을 사용하는 소수의 집단치고는 너무 강한 힘을 발휘하는 것 같았다.

마치 미래를 알고 있는 것처럼 구는 모습이 꺼림칙했다.


“목적은 나도 정확히 몰라. 하지만 그 정도로 강력한 힘을 얻는 방법은 알아냈다.”

그렇게 말한 나타니엘의 표정이 전에 없이 차가워졌다.

나는 긴장감에 그의 손을 꽉 잡았다.


“마을 단위로 사람이 사라지거나 마물이 되는 사건의 배후가 이들이다.”

“네?”

“아마도 그들을 제물로 삼아 흑마법을 부린 것 같더군.”

“그렇게까지 해서 뭘 얻으려고…….”

내가 지금까지 느껴 왔던 불안감이 서서히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원작을 비틀었다고 생각했지만, 어느 분기점에서 한 번씩 원작과 유사한 일이 벌어지곤 했다.

테레사가 습격을 당하기도 하고, 잠시 헤어졌지만 결국 테레사와 막시밀리안이 다시 약혼하기도 했다.


‘그리고 둘이 약혼한 상태에서 어머니가 다이애나를 이용해 오라버니를 유혹하려고 계획했지.’

게다가 원작에서처럼 나를 통해 비앙카를 막시밀리안에게 소개하려 한 것까지 똑같았다.


‘디에스 기사단은 원작을 알고 있어.’

아마 내가 모르는 곳에서 조금씩, 이야기를 원래의 틀에 맞추고 있는 것이다.

오싹한 느낌이 몸을 덮쳤다.

나타니엘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를 보았다.


“무슨 문제라도?”

“아, 아니에요…….”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쪽은 내 존재를 모르지만 나는 그들의 존재를 알고 있다는 건 아주 큰 무기였다.


“그것보다 지금 레이디 데메테르가 문제다.”

“어머니가요?”

“그래. 어지러워서 걸을 수가 없다며 드러누워 울고 난리도 아니더군.”

“하아…….”

잠깐 한눈을 팔았더니 그새를 못 참고 또 난리를 치고 있다니.

그렇다고 아프다는 사람을 내치면 곤란한 소문이 날 게 뻔했다.

며칠 요양할 시간을 주고 쫓아내는 것이 최선이었다.


“1층에 있는 손님방을 내어 주어야겠어요.”

“그냥 쫓아내지 않고?”

“아프다고 하니 약간의 시간은 줘야죠. 의사도 붙여서 최대한 간호하는 시늉은 해 줘야 해요.”

세실리아는 이런 쪽에 비상한 재주가 있었다.

분명 먹을 수 있는 건 전부 뜯어먹으려고 달라붙을 것이다.


“최대한 빨리 내쫓아야 해요. 곧 테레사가 오라버니와 함께 놀러 올 거란 말이에요.”

“소공작도 레이디 데메테르와 사이가 안 좋은가?”

“그게, 좀 복잡해요.”

사이가 좋지는 않았다.

어머니는 나와 막시밀리안을 버린 것이나 다름없었으니.

하지만 그녀는 막시밀리안에게 복합적인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막시밀리안은 세실리아를 증오했지만, 한편으로는 어머니에게 인정받고 싶어 했다.


‘원작에서는 제대로 설명되어 있지 않았지만, 세실리아가 막시밀리안을 꾸준히 학대한 것처럼 묘사했어.’

그러니 둘이 만나는 건 최대한 피해야만 했다.

아직 오겠다고 한 날짜까지 시간이 있으니 다행이었다.

* * *



“테레사 님.”

책을 읽고 있던 테레사는 문을 두들기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들어와요.”

리 부인이 방에 들어와 살짝 무릎을 굽히며 인사를 건넸다.


“곧 약속 시간이 다 되어 왔습니다.”

“아!”

테레사는 어제 그녀를 통해 막시밀리안이 티 타임을 청했던 것을 떠올렸다.


“곧 준비할게요.”

그녀는 읽고 있던 책에 책갈피를 꽂고, 일어나 안쪽에 있는 드레스 룸으로 향했다.

옷만큼은 그녀의 취향을 잘 모르는지 외투 몇 가지와 간단한 실내 드레스만 준비해 두었다.

리 부인은 드레스 룸을 한번 훑어보고는 민망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더 필요하신 것이 있다면 바로 사람을 부르도록 하겠습니다.”

“아, 아니에요. 이 정도면 충분한걸요.”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테레사 님은 윈터스 가문의 안주인이 되실 분입니다. 여기 있는 정도로는 부족한 게 사실입니다.”

“아, 그게…….”

“미래의 공작 부인이 얕보이는 건, 이 북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게다가 테레사 님께 필요한 것이 있다면 지원을 아끼지 말라는 소공작님의 명이 있었습니다.”

단호한 어조의 리 부인에게서 제이나가 보였다.

테레사는 어쩌면 그런 점이 북부 사람들의 특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겉으로는 냉정해 보이지만, 자기 사람에게만큼은 무한에 가까운 애정과 관심을 보여 주는 모습이.


“제 생각이 짧았네요. 필요한 것이 있는지 살펴보고 알려드릴게요.”

순순히 그러겠노라 하자 이번에는 리 부인이 조금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두꺼운 망토를 꺼내 테레사의 어깨에 둘러 주었다.


“제가 말이 너무 과격했다면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수도에서는 이런 식으로 대화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몇 번이고 잘못을 고하는 리 부인에게 테레사는 오히려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생각해 보면 리 부인이 잘못한 것이 없었다.

사교계는 겉으로는 우아해 보이지만, 수면 아래선 잔혹할 정도로 철저하게 힘의 논리로 돌아가는 곳이었다.


‘막시밀리안이 내 옷이나 보석에 신경 쓴 이유가 다 있긴 했어.’

그때에는 그의 강요가 너무 부담스럽고 속이 상했지만, 한발 뒤로 물러서자 오히려 전체 흐름이 확실히 보였다.

몇 달 전, 제이나 덕분에 화려하게 차려입고 연회에 갔을 때 느꼈다.

사람들이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얼마나 다른지.


‘어찌 보면 나도 내 고집을 너무 부린 건가.’

복잡한 생각이 머리를 가득 채웠다.

매무새를 가다듬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하녀를 따라 걷다 보니 어느새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많이 낡아 보이는 작은 온실 앞이었다.


‘그날 이후로는 처음이지.’

며칠 전, 후원에서 무너진 모습을 보이고 나서 테레사는 막시밀리안을 마주하는 게 부담스러워졌다.

하녀가 문을 열자 끼이익 하는 거친 소리가 들렸다.


“소공작님이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테레사는 온실 안으로 들어갔다.

한눈에 내부가 다 보일 정도로 작은 온실이었다. 최근에 보수 공사를 했는지 낡은 유리 사이사이에 깨끗한 유리가 끼어 있었다.


“아, 왔어?”

가운데에 서서 종이를 들고 있던 막시밀리안이 뒤를 돌아보았다.

살짝 상기된 얼굴의 막시밀리안은 평소와 달리 가벼운 차림새였다.


“함께 차를 마시자는 줄 알았는데요.”

아무리 둘러봐도 차를 마실 만한 장소는 아니었다.

폐허나 다를 바 없는 곳에 약혼녀를 불러서 대체 뭘 하려는 것일까.


“아……. 일단 여길 좀 보고 갔으면 해서. 혹시 기분 나빴다면 미안.”

“아니요, 그런 건 아니에요.”

눈치를 살피는 막시밀리안은 여전히 부담스러웠다.

테레사는 일부러 주변을 휙 둘러보며 말했다.


“그런데 여기로는 왜 부른 건가요?”

막시밀리안은 살짝 긴장한 표정으로 들고 있던 종이를 테레사에게 건넸다.


“이건…….”

“그, 우연히 발견한 건데. 혹시 도움이 될까 해서.”

그녀가 어린 시절 만들었던 작은 화원 계획서였다.

아직 막시밀리안과 서먹서먹한 사이였을 때, 그와 친해지고 싶어서 제 미래 계획이라며 가져갔던 계획서였다.


“시간도 있고 빈 땅도 있으니까 만들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서.”

비록 낡고 빛이 바랬지만 잘 관리했는지 구겨진 곳은 거의 없었다.

종이에는 삐뚤빼뚤한 글씨와 그림이 빼곡했다.

색색의 색연필로 식물 사전을 뒤져 가며 꽃과 나무를 그리고 적었던 기억이 테레사의 머릿속에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물론, 강요는 아니야!”

막시밀리안은 말없이 계획서만 보고 있는 테레사 앞에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차라리 화를 내면 좋겠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나랑 많이 친해지기 전에 줬던 건데…….’

며칠 전, 테레사가 무너져 내린 걸 본 막시밀리안은 큰 충격을 받았다.

파혼으로 상처받은 사람은 자신뿐이라고 생각했었다.

테레사는 가뿐한 마음으로 새로운 삶을 살 거라고 착각했다.

하지만 상처 입고, 회복하지 못한 채로 하루하루 버티는 건 테레사도 마찬가지였다.

그걸 깨닫자 막시밀리안은 자신이 혐오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혹시 마음에 안 든다면…….”

“고마워.”

테레사의 물기 어린 목소리에 막시밀리안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이걸……. 아직도 갖고 있어 줄 줄은 꿈에도 몰랐어.”

그리고 이걸 기억하고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아직 그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았던 그녀의 취향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보물이나 다름없었다.

테레사는 종이를 조심스럽게 접어 품에 넣으며 말했다.


“나, 이거 해 보고 싶어.”

이대로 만들 수는 없을 것이다.

어린 테레사는 예쁘기만 하면 전부 키우고 싶어 해서, 식물의 특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으니까.

그래도 해 보고 싶었다.

누군가를 위해 살았던 테레사가 아닌, 자신을 위해 만들었던 계획을 한 번쯤은 실행해 보고 싶었다.


“정말 고마워. 이런 걸 찾아 줘서.”

“어? 아니, 그렇게 대단한 것도 아닌데.”

테레사는 진심으로 막시밀리안에게 고마웠다.

그와 헤어지기로 결심한 이후로 이런 따뜻한 감정이 드는 것은 처음이었다.

테레사는 다시 한번 계획서를 손으로 만져 보며 중얼거렸다.


 


“이걸 어떻게 찾은 거야?”

“아. 예전에 네게 받은 것들은 모두 따로 보관해 두었…….”

막시밀리안은 말을 하다가 입을 닫았다.

어쩐지 민망함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테레사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다시 한번 되물었다.


“내 선물을 전부 갖고 있다고?”

눈을 데굴데굴 굴리던 막시밀리안은 결국 사실을 고백했다.


“응…….”

전부 버렸을 거라고 생각했던 테레사는 의외의 대답에 멍하니 막시밀리안을 보았다.

목까지 붉어진 그의 모습에 결국 웃음이 터져 나왔다.

테레사는 손을 뻗어 막시밀리안의 어깨에 떨어진 나뭇잎을 살짝 털어 주었다.

그리고 움찔 놀라며 자신을 바라보는 자색 눈동자를 향해 상냥하게 웃어 주었다.


“있지, 다음에 보여 줄 수 있을까?”

“으……응.”

막시밀리안은 멍하니 그녀의 말에 대답했다.

방금 그녀가 유난히 반짝거려 보였다.

테레사는 그에게서 돌아서서 온실 곳곳을 살피기 시작했다.

무엇을 고칠지, 어디를 어떻게 바꿀지 꼼꼼히 확인했다.

막시밀리안은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쫓았다.

두근.

그는 손을 들어 심장에 올렸다.

유난히 빠르게 뛰는 것처럼 느껴지는 건, 착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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