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비참한 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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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화. 비참한 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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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화. 비참한 최후
2022.12.03.
비앙카는 금방이라도 세실리아를 죽일 것처럼 나를 노려보았다. 세실리아는 공포에 질려 덜덜 떨고 있었다.
“그 칼, 내려놔.”
“미안하지만 그럴 수 없어.”
아, 저 목소리.
어쩐지 익숙하다고 생각했던 이유가 있었다. 얼굴은 달랐지만, 내가 알고 있던 다이애나 그로반의 목소리가 맞았다.
“다이애나?”
내 말에 비앙카, 아니 다이애나의 몸이 흠칫 떨렸다.
대답을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정말 끈질기군.”
“닥쳐.”
“이렇게까지 해서 얻으려는 게 뭐지?”
다이애나는 몸을 파르르 떨었다. 그 탓에 들고 있던 칼날이 세실리아의 목에 살짝 스쳤다.
가느다란 핏줄기가 흘러내리자 세실리아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그녀는 한 손으로 품에서 약병을 하나 꺼내 세실리아에게 쥐여 주었다.
“황태자비, 당신이 이걸 마셔 줬으면 좋겠어.”
나는 직감적으로 그것이 황제에게 건 흑마법의 수단이라는 걸 깨달았다.
“어서. 당신 어머니가 죽어도 상관없는 거야?”
세실리아가 죽는 것까지는 바라지 않았다.
하지만 순순히 저 약을 먹어 줄 생각은 없었다.
나는 마력을 펼쳐서 나타니엘이 어디쯤 있는지를 찾았다.
‘아래층에 있어.’
다행히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나는 다이애나를 노려보며 마력을 모았다.
단숨에 바닥을 무너뜨려야 했다.
“뭐 하는 거야, 어머니가 눈앞에서 죽는 걸 보고 싶은 거야!”
“제, 제나!”
세실리아의 비명에 정신을 차렸다.
나는 그들을 보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세실리아에게서 병을 건네받았다.
“대체 이러는 이유가 뭐야?”
“이, 이건 다 소공작 탓이야. 그, 그 사람이…… 날 받아 주지 않았으니까!”
“이해할 수 없어. 너와 오라버니는 스치듯 한 번 만난 것뿐인데 목숨을 건다고? 이렇게까지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진짜 이유가 뭐지?”
“그건…….”
시간을 끌기 위해 건넨 말이었으나 의외로 다이애나는 크게 반응했다.
당황한 그녀가 틈을 보이는 순간, 나는 약병을 품에 넣고 일격 필살의 마법을 발동했다.
쾅!
엄청난 소리와 함께 바닥이 무너져 내렸다.
무너지는 바닥 사이로 놀란 나타니엘의 얼굴이 보였다.
“제이나!”
나타니엘은 손을 뻗어 날 받아 냈다.
나타니엘이 아래층에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믿고 바닥을 부술 수 있었다.
세실리아가 다칠 수도 있겠지만, 난 그 물약을 먹어 줄 생각이 없으니 죽는 것보단 낫지 않겠는가.
결국, 받아 주는 사람이 없는 다이애나와 세실리아는 바닥에 그대로 내동댕이쳐졌다.
“괜찮나?”
“전 괜찮아요. 그것보다 어머니와 다이애나를!”
“다이애나?”
“같이 온 여자요!”
내 말에 나타니엘은 마법으로 다이애나를 붙잡았다.
다행히 떨어지면서 발목이 삐었는지 그녀는 일어서지도 못하고 있었다.
“비 전하!”
별장을 지키고 있던 기사들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가 무너진 2층 바닥을 마주했다.
“이 자를 지하 창고에 넣도록.”
나타니엘은 마법으로 다이애나의 몸을 들어 올려 기사들에게 던져 주었다.
이것저것 정리를 명한 뒤, 그는 나를 조심스럽게 내려 주었다.
“다친 데는?”
“전 멀쩡해요.”
그리고 난 품에서 다이애나에게서 받은 병을 꺼냈다.
“이거 아까 저에게 먹으라고 했던 약이에요. 아무래도 황제 폐하께서 이걸 드신 모양인데…….”
어쩐지 날 보는 나타니엘의 눈빛이 이상했다. 나는 조용히 입을 다무는 걸 선택했다.
“일단 방에 들어가서 쉬고 있도록.”
“아니, 저 진짜 멀쩡해요.”
“제이나.”
그는 내 양어깨를 쥐고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손이 떨리고 있는 걸 모르나.”
그의 말에 시선을 내리자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아무렇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그런 게 아니었다.
나타니엘은 그런 날 데리고 2층으로 올라갔다.
내 마법이 그렇게 강력하지 않아서 다행히 침실 바닥은 말짱했다.
그는 날 소파에 앉히고 따뜻한 차와 담요까지 챙겨 왔다.
“잠시 쉬고 있어.”
그렇게 말한 그는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나는 찻잔을 받아 들고 한참을 넋이 나간 채로 앉아 있었다.
아직도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아무렇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이윽고 나타니엘이 다시 돌아왔다.
내 옆자리에 털썩 앉은 그가 말했다.
“전부터 묻고 싶었는데 왜 이렇게 무리하는 거지?”
“무리라니요, 전 그런 적 없는데요.”
내 대답에 나타니엘이 말없이 날 빤히 보았다. 어쩐지 찔리는 기분이 들어서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그대 성격에, 사람을 싫어해도 적당히 무시하더니 이번에는 이상할 정도로 과하게 반응하더군.”
그의 말에 나는 입을 닫았다.
“잘못했다고 책망하는 게 아니다. 자꾸 혼자서 무리하게 일을 진행하는 것 같아서 속상한 거지.”
“저는…….”
“이번 일만 해도 그래. 나랑 같이 있어도 될 일을 혼자서 처리하려다가 이렇게 된 거 아니야.”
맞는 말이긴 했다.
하지만 나타니엘을 이런 일에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다.
“이건 저희 가문 일이고…….”
“그게 싫다는 거야.”
나타니엘은 단호하게 내 말을 끊어 내고는 내 뺨을 잡아 제 쪽으로 향하게 했다.
“그대는 매번 날 도와주었고, 난 그걸 부담스럽다고 생각한 적 없다.”
“아, 전…….”
“제이나, 내가 도와주는 게 부담스러운가?”
나타니엘의 말에 머리를 한 대 맞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니요, 그런 게 아니라…….”
“날 도와줄 때마다 그랬지. 우린 부부니까, 가족이니까 서로 도와주고 힘이 되어 주는 거라고.”
서운한 건지 그의 눈가가 조금 붉어 보이기도 했다.
“제가 남에게 도움받는 걸 좀 불편해해서 그래요.”
“불편? 왜?”
“으음…….”
여기서부터는 내 개인적인 문제였다. 정확히는 전생의 ‘내’가 문제였다.
“도움을 받는 거에 익숙하지 않아서요.”
나타니엘은 설명을 요구하듯 내 얼굴을 빤히 보았다.
“어렸을 때부터 본인 일은 본인이 책임지는 거라고 배웠거든요. 그래서 남에게 대가 없이 도움받으면 이상해요.”
“그러고 보니 처음 내게 도와달라고 할 때도 내 비밀을 숨겨 주는 대가라고 그랬지.”
고아원에서 자란 나는 남들보다 더 빨리 성숙해질 수밖에 없었다.
선생님들은 좋은 사람이었지만, 돌봐야 할 아이들이 많았다.
결국, 어느 정도 나이가 든 아이들은 모든 걸 스스로 해야만 했다.
“제가 부탁하는 데에 익숙하지 않아서…….”
“흠.”
나타니엘은 빤히 내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그럼 앞으로 내가 멋대로 도와주지.”
“예?”
“도움을 요청하는 게 어렵다며, 그럼 내가 마음대로 하면 되는 거 아니야?”
그의 말도 안 되는 선언에 잠시 넋이 나갔다. 나타니엘은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럼 쉬고 있어. 다이애나 그로반의 일은 내가 처리하도록 하지.”
“잠, 잠깐만요!”
“방 밖으로 나올 생각 하지 마. 문은 잠글 테니까.”
쾅 소리와 함께 나타니엘이 문을 닫고 나가 버렸다.
‘대체 무슨 일을 벌이려는 거야.’
어디로 튈지 모를 나타니엘의 행동에 잔뜩 불안해졌다.
* * *
밖으로 나온 나타니엘은 가벼운 마음으로 지하로 내려갔다.
다이애나는 어두운 창고 한구석에서 덜덜 떨며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 약, 네가 만들었나?”
그녀는 대답이 없었다. 나타니엘은 가만히 그녀를 보다가 손가락을 튕겼다.
“……!”
다이애나는 목을 손으로 붙들었다.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마주친 황태자의 붉은 눈에는 어떤 감정 하나 보이지 않았다.
‘정말 죽일 거야.’
다시 한번 느낀 공포에 다이애나의 눈에 절로 눈물이 고였다.
“커, 커헉.”
눈앞이 흐려지기 직전, 나타니엘이 마법을 풀어 주었다.
한참을 콜록거리던 다이애나는 악에 받친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래요, 제가 만들었어요!”
“폐하를 조종하던 것도 이건가 보군.”
다이애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타니엘은 구석에 있는 의자를 끌고 와 앉아 물었다.
“다시 돌아온 이유가 뭐지?”
“…….”
“이번엔 정말 봐주지 않을 거야.”
“저, 저도 어쩔 수 없었어요! 그 사람들이 말을 듣지 않으면 절 죽인다고 그랬단 말이에요.”
절박해진 다이애나는 비명처럼 사실을 토해 냈다.
그러고는 깜짝 놀라 손으로 입을 막았다.
불안한 눈으로 주변을 살피는 모습을 보며 나타니엘은 혀를 찼다.
“널 지켜보고 있는 녀석이라면…….”
손을 쭉 뻗어 허공에서 누군가를 끌어내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크윽.”
후드를 눌러쓴 남자는 곧바로 도망치려다가 나타니엘에게 붙들렸다.
우득, 소리와 함께 양 손목과 발목이 꺾였다.
남자는 이를 악물고 비명을 참아 냈다.
“소리 질러도 상관없는데. 우리 부인은 이런 거 몰랐으면 해서.”
남자는 나타니엘의 말에 몸을 흠칫 떨었다.
이곳에 잠입하기 위해 뚫은 결계가 두 개였다. 그런데 그의 말은, 잠깐 사이에 소리가 빠져나가지 않는 새로운 결계를 생성했다는 뜻이었다.
‘인간이 아니야.’
선배들로부터 듣기는 했지만 실물은 상상 이상이었다.
그런 남자의 생각을 모르는 듯 나타니엘은 다이애나를 끌고 나와 제 앞에 무릎 꿇렸다.
“이제 걱정하지 않아도 되니 전부 말해.”
“하, 하지만…….”
나타니엘의 얼굴이 굳으면서 다이애나 근처에 있던 바닥에 금이 갔다.
“그, 그들이 비 전하의 소개를 받아 소공작에게 다가가라 했습니다. 모든 지원을 해 주겠다고.”
자신들의 목적을 술술 불자 남자가 고개를 번쩍 들어 다이애나를 노려보았다.
남자와 눈을 마주친 다이애나는 입을 다물고 고개를 돌렸다.
“흐음……. 소공작, 소공작이라. 대체 왜 매번 윈터스 소공작 이야기가 나오는 걸까.”
나타니엘은 이 모든 이야기의 중심에 그가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윈터스 공작가가 물론 중요한 가문인 건 확실했다.
그런데 이상할 정도로 사건의 중심에 소공작과 그 약혼녀가 있었다.
나타니엘은 고개를 돌려 바닥에 쓰러져 있는 남자를 보았다.
“그 이유는 네가 알겠지.”
“내게서 아무것도 얻을 수 없을 겁니다.”
“하, 붙잡힌 주제에 말은 잘하는군.”
나타니엘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남자에게 다가갔다.
쓰고 있던 후드를 훅 잡아당기자, 아주 평범한 남성이 나타났다.
“고문 같은 건 통하지 않을 겁니다!”
“그런 건 너처럼 힘없는 놈들이나 하는 짓이고.”
피식 비웃는 나타니엘의 모습은 정말로 비열한 악당처럼 보였다.
남자는 원초적인 공포에 몸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백여 년이 넘는 삶을 살았지만, 이렇게 두려움을 느낀 건 처음이었다.
“정보를 얻는 데 꼭 폭력을 사용할 필요는 없지.”
나타니엘은 그의 머리 위에 손을 올렸다. 그가 하려는 마법을 깨달은 남자는 입술을 비틀었다.
“정신 조작 마법은 제게 걸 수 없을 겁니다.”
“내가 흑마법에 대해 잘 모른다고 생각하나 본데.”
그는 천천히 마력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킬리언이 알려 준 흑마법의 원리는 아주 간단했다.
기존에 사용하던 마법 수식을 뒤집어 발동시키는 것.
흑마법에 대한 몇 가지 중요한 정보를 얻고 나자 파훼법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얼마 전에 누군가에게 배웠거든.”
놀란 남자가 나타니엘의 손에서 벗어나려 몸을 틀었다. 하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나타니엘의 손에서 피어오르는 검은 연기가 남자를 휘감았다.
“으, 으아아아악!”
지금까지 참았던 공포가 단숨에 터졌다.
남자는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며 발버둥을 쳤다.
머릿속을 파고드는 무언의 기운이 뇌를 엉망으로 휘젓는 기분이 들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축 늘어진 남자를 나타니엘은 무심하게 내려놓았다.
남자의 몸은 마치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렸다.
“히, 히익!”
다이애나는 자신을 돌아보는 나타니엘을 피해 뒤로 물러났다.
그녀를 감시하던 자는 그 누구에게도 질 것 같지 않던 남자였다. 그런 남자를 손가락 하나로 죽이는 나타니엘은 괴물이었다.
이미 얼굴은 눈물과 침으로 엉망진창이었다.
“사, 살려만 주세요.”
다이애나는 미친 사람처럼 양손을 비비며 나타니엘에게 빌었다.
‘어떻게 할까.’
어차피 반역자로 죽을 목숨이니 이대로 두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제이나는 죽은 기사단원의 존재를 모르지만, 이 여자는 알고 있으니까.
“오늘 여기서 일어난 일은 말하지 않는 편이 좋을 거야.”
나타니엘의 말에 다이애나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필요한 정보를 얻은 그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지하에서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