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비앙카의 정체
(87/145)
87화. 비앙카의 정체
(87/145)
87화. 비앙카의 정체
2022.11.30.
얼마 전, 다이애나는 그들에게 ‘새로운 역할’을 받았다.
- 당신의 새로운 역할은 비앙카입니다.
새로운 이름과 아름다운 외모를 준 기사단은 그녀에게 명령을 내렸다.
황태자비에게 접근해 호의를 살 것, 그리고 그것을 이용해 막시밀리안에게 다가갈 것.
‘분명 별로 어렵지 않을 거라 했는데.’
어째서인지 황태자비가 제 어머니에 대한 불신이 상당해 보였다.
다이애나는 초조한 얼굴로 방 안을 왔다 갔다 했다.
이대로라면 막시밀리안을 만나기도 전에 기사단에게 제거당할지도 몰랐다.
‘어떻게 해서든 방법을 찾아야 해.’
다이애나는 초조하게 얼굴을 쓸어내렸다.
지금 그녀에게는 초라한 오두막 문제보다 간당간당한 목숨 줄이 더 급했다.
* * *
세실리아 일행을 돌려보내고 난 뒤 나타니엘과 나는 빌의 가족을 숨긴 마을로 향했다.
단둘이 피크닉을 간다는 핑계로 수행원들도 다 떼어 놓고 나왔다.
“진짜 두 분이서만 놀러 가신다고요.”
마틴은 영 불안한지 우리가 말을 탈 때까지 쫓아와 물었다.
“그럼 어디 가시는지 정도는 알려 주셔야죠.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쓸데없는 걱정을.”
질린다는 표정을 지으며 나타니엘이 마틴을 밀어냈다.
마틴의 걱정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이 일은 외부에 알려지면 안 되는 일이었다.
“위험한 곳을 가는 것도 아니고, 그냥 말을 타고 산책을 하는 것뿐이니 걱정 말게.”
“비 전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알겠습니다.”
내가 중재에 나서자 마틴이 순순히 물러났다.
나타니엘의 표정이 조금 안 좋아졌지만, 난 모르는 척하기로 했다.
말에 올라탄 우리는 별장 뒤에 있는 숲으로 들어갔다.
적당한 장소에 도착한 우리는 말에서 내렸다. 나무에 말을 묶어 두고, 나타니엘이 날 안아 올렸다.
‘이것도 몇 번 해 보니 이제 익숙해지네.’
지난번 쓰러지고 나서 호들갑을 떨고 난 뒤, 이제 나타니엘에게 안기는 게 자연스러워졌다.
“꽉 잡아.”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가 달리기 시작했다.
‘진짜 달리는 거 맞아?’
이건 달리는 게 아니라 거의 날아가는 수준이다.
난 떨어지지 않도록 그의 목에 더 꼭 매달렸다. 순식간에 산을 하나 넘고 나서야 그가 겨우 멈춰 섰다.
“이제 놔도 돼.”
하도 힘을 줘서 그런가 그를 붙들고 있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나타니엘은 그런 내 손을 꾹꾹 누르며 풀어 주었다.
별로 신경 안 쓰는 듯한 무심한 표정이었지만, 마사지를 해 주는 손길은 퍽 다정했다.
“이제 괜찮아요.”
순순히 놓아 주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가 금세 다시 손가락을 걸어 왔다.
나타니엘은 예전보다 훨씬 스킨십에 익숙해졌고, 좋아하기까지 했다.
오히려 내가 민망할 정도였다.
‘그래도 지금은 아무도 없으니까.’
손에 힘을 주어 호응해 주자 앞서가던 나타니엘의 어깨가 움찔 흔들렸다.
귀 끝도 붉어졌다.
‘귀엽다니까.’
나는 웃으며 나타니엘의 뒤를 쫓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커다란 바위가 있는 곳에 도착했다.
나타니엘은 간단한 손짓으로 마을의 입구를 열었다.
“결계를 완성했나 봐요? 어제 혼자 했어요?”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니까.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다.”
결계의 틈으로 들어가 마주한 마을은 생각한 것보다 근사했다.
스무 채 정도 되는 집과 공동 우물, 작은 회관까지 있었다.
나타니엘과 나는 회관 바로 옆에 있는 집으로 향했다.
“빌의 가족말고도 몇 가족을 더 찾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정말요? 어떻게요?”
“사라진 마을 주변을 수색하다가 마물들이 집단으로 숨어서 사는 걸 발견했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이쪽으로 부를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마물이라면 아마 1순위로 척결당할 것이다. 그들을 보호하려면 이 마을로 데려오는 것이 최선일 것이다.
하지만 그들을 이곳까지 데려오는 것 자체가 문제였다.
“우리가 직접 가기는 힘들 것 같고, 이들에게 부탁해 볼 생각이다.”
마치 내 마음을 알고 있는 것처럼 나타니엘이 계획을 알려 주었다.
회관 옆에 있는 집 앞에 도착하자 나타니엘이 문을 두들겼다.
곧바로 문이 열리고 밝은 표정의 마리가 보였다.
- 어서 오세요.
“그동안 잘 지냈어요?”
그녀는 반갑게 우리를 맞아 주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아이들과 빌은 보이지 않았다.
- 다들 뒤에 있는 밭을 보러 갔어요.
마리는 우리를 테이블로 안내했다. 그러고는 간단한 차를 내어 주었다.
고급스러운 건 아니었지만, 마리가 최선을 다해 대접해 준다는 것이 느껴졌다.
“잘 마실게요.”
옆에 앉은 나타니엘은 마뜩잖은 듯 쉽게 손을 내밀지 않았다.
테이블 밑으로 그의 옆구리를 쿡 찌르자 그가 겨우 잔을 들었다.
“잘 마시도록 하지.”
나 역시 찻잔을 들고 입을 댔다. 생각했던 것보다 맛이 훨씬 좋아서 오히려 놀랄 정도였다.
나타니엘 역시 같은 생각이었는지 홀짝거리며 차를 계속 마셨다.
“그것보다, 그대들에게 부탁이 있어서 왔다.”
나타니엘은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나는 마리에게 현재 상황과 우리 계획을 전달해 주었다. 처음에는 조금 놀란 것 같았던 마리도 진지하게 우리 이야기를 들어 주었다.
“아주 위험하지는 않을 거다. 내가 투명 마법과 공격 마법 아티팩트를 제공할 예정이니까.”
- 제가 가겠습니다. 덩치가 큰 빌보다는 제가 더 움직이기 편할 거예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말하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깜짝 놀랐다.
“위험할 수도 있어요.”
- 전하께서도 위험을 무릅쓰고 저희를 도와주셨잖아요.
그녀의 단호한 눈빛이 나와 나타니엘을 향했다. 마리의 불투명한 검붉은 눈이 불타오르는 것처럼 느껴졌다.
“조만간 지도와 아티팩트를 보내도록 하지. 위험하다 싶으면 반드시 뒤로 물러서도록.”
그렇게 말한 나타니엘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몇 번이고 마리에게 조심하라는 말을 남기고 집에서 나왔다.
이대로 돌아가기는 조금 아쉬워 새로 만들어진 마을을 구경하기로 했다.
아직 부지 대부분이 텅 빈 마을은 을씨년스럽기도 했다.
“아이들이 무서워하겠어요.”
“전에 살던 곳보다는 나을걸?”
“그야 그렇지만요.”
어째서 마물들이 이렇게 늘어난 건지, 그리고 얼마나 많은 사람이 마물로 변했을지 생각하자 조금 무서워졌다.
“어서 사람으로 돌아갈 방법을 찾았으면 좋겠어요.”
“무언가 열쇠가 될 만한 게 필요해. 단순한 흑마법은 아닌 거 같아서.”
그렇게 말한 나타니엘은 짧게 한숨을 쉬었다.
그가 생각보다 압박감을 느끼는 것 같아서 속이 상했다.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나타니엘은 최선을 다하고 있잖아요.”
“모르는 것이 있다는 건 이렇게 무력한 일이군.”
나는 그의 등을 손으로 톡톡 두들겼다. 나타니엘은 고맙다는 듯 내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별장으로 돌아올 때까지 그는 말이 없었다.
* * *
다음 날, 오라버니에게서 며칠 내에 이쪽으로 놀러 오겠다는 편지를 받았다.
“오라버니가 오기 전에 어머니를 어서 치워 버려야겠어요.”
소파에 누워서 내 머리카락을 가지고 놀던 나타니엘이 물었다.
“어머니를 그렇게까지 경계하는 이유가 뭔가? 고작해야 돈을 바라는 것 같던데.”
“어머니는 욕심이 많아요. 제가 주는 용돈으로는 만족하지 못하실 거예요. 옆에 여자까지 데려온 거 봐요.”
내 말에 나타니엘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에게 자세히 설명할 수 없으니 일단 모르는 척하기로 했다.
“잠깐 자리 좀 비워 줄래요?”
“내가 들으면 안 되는 일이라도 있는 건가?”
“아니, 뭐 그런 건 아닌데…….”
굳이 모녀가 싸우는 모습을 나타니엘에게 보여 주고 싶지는 않았다.
나타니엘은 가만히 날 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물었다.
“일단 그대의 부탁이니 들어주지. 하지만 너무 무리하지 마.”
“무리 안 해요.”
내 말에 그는 어깨만 으쓱이고 밖으로 나갔다. 나는 바로 하인을 불러 두 사람을 별장으로 데려오라 명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더 핼쑥해진 세실리아와 여자가 하녀의 안내를 받아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이름이 뭔지도 모르네.’
테레사의 적이라고 느껴서 그런지 그녀의 존재 자체를 완전히 무시하고 있었다.
굳이 이름을 물어야 할까 싶긴 했지만.
“비 전하를 뵙습니다.”
두 사람은 처음 만났을 때보다 훨씬 고분고분한 태도였다.
“앉도록 해.”
내 눈치를 살피던 두 사람이 소파 반대편에 앉았다. 나는 일부러 활짝 웃으며 둘에게 물었다.
“새로 옮긴 거처는 마음에 드나?”
마음에 들 리가 없었다. 크기도 작고 허름한 데다가 춥기까지 할 테니까.
하지만 황태자비가 내린 선물이니 싫은 소리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 사실을 지난번에 철저하게 깨닫지 않았던가.
“예,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세실리아는 억지로 대답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일단 채찍을 휘둘렀으니 당근을 던져 줄 때가 되었다.
“마음에 든다니……. 조금 아쉽겠지만, 내 그대들에게 다른 곳을 제안하려 하네.”
“다, 다른 곳이요?”
세실리아의 얼굴이 살짝 창백해졌다.
지금보다 더 안 좋은 곳으로 쫓겨날까 봐 걱정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주변을 모두 물리고 나는 노골적으로 본론을 꺼냈다.
“남부에 있는 크라비에 내려가는 걸 제안하고 싶군.”
“크라비……에요?”
크라비는 1년 내내 따뜻한 휴양도시였다. 게다가 수수한 히에라와 달리 크라비는 정말 화려했다.
세실리아로서는 받아들이지 않을 수가 없는 조건이었다.
“정말……이신가요?”
그녀가 눈을 반짝이며 나를 보았다.
“물론이에요. 추운 곳에 계신 어머니를 생각하니 마음이 아파서 잠을 잘 수가 있어야지요.”
사실 세실리아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을 것이다.
갖고 있던 돈도 거의 다 떨어졌고, 믿었던 딸은 철저하게 그녀를 밀어냈다.
평민들이나 살 법한 집에서 며칠 동안 지낸 탓에 세실리아는 간절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공손한 태도로 미끼를 더 던졌다.
“머무를 곳이랑 생활비는 제공할 거예요. 또 어머니를 위해 소정의 용돈도 매달 드릴 거구요.”
어차피 내게는 큰돈도 아니었다.
안전하게 세실리아를 묶어 둘 수만 있다면 완벽했다.
“좋…….”
“안 됩니다!”
옆에 있던 여자의 말에 나는 얼굴을 찡그렸다.
그녀 역시 당황했는지 얼굴을 붉혔다.
“난 그대에게 발언권을 준 적이 없는데.”
내 말에 여자가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치맛자락을 꽉 쥔 채로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어머니, 저 여자는 대체 누구길래 매번 데리고 다니는 거죠?”
일부러 사근사근하게 대하자 세실리아의 방어막이 낮아졌는지 별말 없이 여자를 소개해 주었다.
“비앙카 리틀이라고, 내게 후원해 주던 자작가의 영애란다. 괜찮은 남자가 있으면 소개해 주려고 데려왔지.”
그 괜찮은 남자가 막시밀리안이라는 사실이 문제였지만.
나는 비앙카를 다시 한번 보았다.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느낌이 드는 건 아마 다이애나와 비슷한 처지 때문일지도 몰랐다.
“크라비가 그래도 히에라보다 크니 결혼 상대를 구하기 나쁘지 않을 텐데.”
내 지적에 비앙카는 고개를 숙인 채로 대답했다.
“저, 저는 히에라에서 멀어지고 싶지 않아서요.”
비앙카의 말에 질색하는 것은 오히려 세실리아였다.
그녀는 표독스러운 눈으로 비앙카를 노려보며 물었다.
“난 여기에 더 머물 생각이 없는데……. 미안하지만 널 후원하는 건 여기까지겠구나.”
재빠르게 손절하는 것이 정말 그녀다웠다. 원하는 것을 얻었으니 필요 없어진 것은 빠르게 버릴 생각인 것이다.
“아…….”
비앙카는 당황했는지 눈을 커다랗게 뜬 채로 세실리아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도와 달라는 듯 날 보았다.
안타깝기는 했지만,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하나였다.
“함께 크라비로 내려간다면 내 도와줄 수 있네만.”
원작에서 그녀 역시 야망에 가득 차 막시밀리안에게 달라붙었다.
그러니 둘 중 하나는 이곳에 남을 수 있다는 선택지는 처음부터 없었다.
비앙카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럼 그렇게 하는 걸로 알고 준비하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비 전하.”
세실리아는 감격한 얼굴로 내게 몇 번이고 감사 인사를 했다.
아마 예전 같았으면 이 정도 조건을 절대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요 며칠 황태자비의 선물이라는 거절할 수 없는 생활 경험이 세실리아의 정신을 뒤흔들었다.
“곧 정리해서 내려갈 수 있도록 도와줄……!”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나는 그대로 멈췄다.
비앙카가 칼을 꺼내 세실리아의 목에 겨누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