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6화. 내 삶의 전부였던 (86/145)


86화. 내 삶의 전부였던
2022.11.26.



 
막시밀리안은 피곤했다.


‘마탑주는 아주 말이 많군.’

성의 경비를 보강해 준 그는 공작령에서 채굴되는 마석에 관심을 보였다.

결국, 절대 외부에 발설하지 않겠다는 맹약을 받고 마석 시설까지 함께 둘러보았다.

하지만 단 한 순간도 쉬지 않고 떠들어 대던 킬리언 탓에 막시밀리안은 환청이 들리는 것 같았다.


‘잠깐 산책이라도…….’

막시밀리안은 성 뒤쪽에 있는 후원으로 향했다.

그곳은 어린 시절 살벌했던 부모님의 부부 싸움을 피해 도망치던 장소였다.

예전과 똑같이 보존하기 위해 정원과 달리 일부러 관리도 최소화했다.


“하아…….”

산책로 초입에 도착한 막시밀리안은 천천히 길을 걷기 시작했다.

서늘한 공기 가득한 겨울 내음이 물씬 배어 있었다.

어릴 때 보았던 풍경과 별반 다르지 않아서 마음이 가라앉았다.

그때, 메마른 가지 사이로 살짝 익숙한 모습이 보였다.


“테레사?”

그는 자리에 멈춰 섰다. 자신을 향한 말간 눈에 눈물이 가득했다.


“무슨 일 있어?”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은 걸 꾹꾹 눌러 담은 채로.

그러나 가까이 가기도 전에 테레사는 시선을 돌려버렸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중얼거렸다.


“실례하겠습니다.”

그의 옆을 지나치려는 테레사를 막시밀리안이 붙들었다.


“테레사.”

불투명했던 그녀의 눈동자 위로 분노가 뒤덮였다. 제 이름을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가 시발점이었다.


“이거 놔!”

당황한 막시밀리안이 뒤로 물러섰다.

테레사는 눌러 담았던 것들이 와르르 쏟아지는 것을 느꼈다.


“날 좀 그냥 내버려 둬.”

“미, 미안……. 몸이 안 좋아 보여서.”

우물쭈물하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그의 모습에 테레사는 더 울화가 치밀었다.


“왜 이렇게 갑자기 잘해 줘?”

“나는, 그냥…….”

“예전에는 그냥 나한테 관심이 없는 줄 알았어. 그런데 아니더라.”

막시밀리안은 말문이 막혔다. 그녀의 말이 맞았다.

테레사의 취향을 모르진 않았다.

하지만 그것보다 자신의 눈에 비친 테레사가 더 중요했다.

처음에는 그녀의 수수한 취향은 사교계에서 비웃음을 살 게 뻔하다고 생각했다.

더 화려하고, 더 돋보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런 화려함에 어울리지 않는 테레사를 점점 무시하게 되었다.


“미안, 그때는…….”

“다 알면서 무시했던 거야. 그런데 이제 와서 티를 내면서…….”

테레사는 다시 목이 메었다.

그가 자신에 대해 알면서 모른 척했다는 사실이 더 화가 났다.

그리고 그가 보여 준 것 중에는, 사실 어린 막시밀리안이 좋아해서 테레사도 좋아하는 척 맞춰 주었던 것도 있었다.


“이게 다 너 때문이야.”

“어?”

“내 인생에서 널 빼면 아무것도 남은 게 없어. 내 취미도 좋아하는 것도 모두, 오직 널 위한 것만 남고…….”

말을 내뱉으며 테레사는 점점 더 자신이 비참하게 느껴졌다.

진짜 테레사는 사라지고, 좋아했던 사람의 취향으로 가득 찬 허상만이 남았다.

그리고 그 선택을 한 것은 테레사 본인이었다.


“내가 원래 뭘 좋아했는지, 어떤 사람이었는지 모르겠어.”

공허한 목소리와 함께 테레사는 바닥에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제이나 곁에서는 늘 일로 바빠서 이런 생각을 할 여력이 없었다.

어쩌면 생각하고 싶지 않아서 다른 일에 과하게 몰입했었는지도 몰랐다.


“혹시 기억해? 내가 원래 뭘 좋아했는지?”

눈물이 가득 고인 테레사의 눈을 보며 막시밀리안은 아무 말도 못 했다.

젖어 가는 뺨을 한참 보던 막시밀리안은 그녀의 옆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망설이던 그는 품에서 꺼낸 손수건으로 테레사의 눈가를 닦았다.


“내가 도와줄게.”

반쯤 잠긴 목소리로 막시밀리안이 중얼거렸다. 이렇게 무너진 테레사의 모습은 처음이었다. 자신의 알량한 배려심이 다시 한번 테레사를 상처 입혔다.


“난 네 제일 오래된 친구잖아.”

어떻게 해야 할까.

뭘 해야 그녀를 도와줄 수 있을까.

다시 테레사를 잃고 싶지 않았다. 지금 바라는 건 오직 그녀가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뿐이다.

* * *

부끄러움을 잊기 위해 억지로 잠을 청하고, 다음 날이 왔다.

눈을 뜨자 이미 일어난 나타니엘은 어색한 얼굴로 반대편에 앉아 있었다.


“흠, 흠.”

늘 뻔뻔했던 그답지 않게 어색한 몸짓으로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게 건넸다.


“이게 뭐예요?”

“어제 급하게 마틴에게 사 오라고 시킨 건데…….”

그렇게 말한 나타니엘은 고개를 휙 돌렸다.

사적인 심부름을 시킬 정도로 부하에 대한 믿음이 생겼다는 게 기특했다.

하지만 선물을 뜯자 그 기특한 마음이 싹 사라졌다.


“이, 이걸 마틴 경한테 사 오라고 했다고요!”

“마틴이 추천해 준 거다.”

내 손에 들린 건 『훌륭한 엄마가 되는 법』이라는 책이었다.


“참고로 나도 샀다.”

그렇게 말한 나타니엘은 당당하게 『훌륭한 아빠가 되는 법』이라는 책을 내게 보여 주었다.

얼굴에 열이 훅 올라왔다.


“아, 아니…….”

물론 어제 내 말실수로 이런 걸 준비해 온 거긴 하겠지만.

나는 어제의 나를 마음껏 욕하며 침대에 앉아 있는 그의 옷을 잡아당겼다.


“그…… 어제는 제가 너무 멀리 나갔죠?”

“생각지도 못한 거긴 하지만…….”

응?

생각지도 못한 거라고?

내가 아이 이야기를 꺼낸 건 나타니엘이 하루 종일 애들을 보고 있어서였는데.


“그래도 언젠가 있으면 좋겠다 싶기는 했다.”

뺨을 발그레 붉히며 시선을 돌리는 나타니엘의 모습에 나는 입만 벙긋거렸다.


“그럼 왜 애들을 그렇게 본 거예요?”

“내가?”

“어제 애들만 보고 있었잖아요.”

나타니엘은 정말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나를 빤히 보았다.

어쩐지 좀 억울한 기분이 들어서 괜히 울컥했다.


“흠, 내가 그랬던가…….”

“아니에요. 그냥 제가 착각했나 봐요.”

게다가 괜히 서운한 마음도 들었다.

나도 분명 아직 이르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그가 별생각 없었다고 하니 정말 기분이 이상했다.

나타니엘은 자연스럽게 나를 안아 들어서 창가에 있는 의자에 앉혔다.

몇 번 반항하긴 했지만, 나타니엘의 강경한 반응에 결국 이 정도는 허락하기로 했다.

테이블 위에는 어느새 늘 아침으로 먹는 것들이 차려져 있었다.


“그나저나, 밖에 그대 어머니가 와서 기다리고 있다.”

“어머니가요?”

“아무래도 별장이 마음에 안 드나 본데. 오늘 아침 마틴에게 알현을 시켜 주지 않으면 죽겠다고 칼을 제 목에 들이밀었다더군.”

당연히 그럴 줄 알았다.


‘그래도 하루나 참았네. 당장 못 살겠다고 도망칠 줄 알았는데.’

나는 카디건을 걸치고 하녀를 불러 어머니를 안으로 모시라 전했다.

곧 세실리아와 어제 보았던 검은 머리의 여자가 들어왔다.


“두 분 전하께 예를 갖추십시오.”

둘을 데려온 하녀가 서늘한 말투로 뒤에서 말했다.

세실리아와 여자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천천히 몸을 숙였다.


“이렇게 두 분을 뵐 기회를 주셔서 영광입니다, 황태자 전하, 비 전하.”

세실리아 대신 옆에 있는 여자가 인사말을 전했다.

그녀의 정체가 궁금하긴 했지만, 일부러 물어보지는 않았다.

무엇이 목적인지 뻔히 아는데 굳이 먹이를 물어 줄 필요는 없었다.

나는 물끄러미 둘의 뒤통수를 내려보다가 말했다.


“고개를 들어도 좋네.”

밤사이 둘의 얼굴은 꽤 핼쑥해져 있었다.

마치 무슨 일이라도 겪은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나는 모르는 척 물었다.


“지난밤은 잘 보냈는가? 내 두 사람을 위해 특별히 황실 별장을 내려 준 것인데.”

태평한 내 말투에 화가 났는지 세실리아의 몸이 바르르 떨렸다.

나는 가만히 그녀의 반응을 기다렸다.


“비 전하, 저는 전하를 믿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어찌 그런 곳에 이 어미를 밀어 넣을 수 있단 말입니까!”

세실리아가 소리치자 옆에 있는 여자가 눈물을 훔치며 나타니엘을 힐끗 보았다.

같은 여자가 보기에도 꽤 가련한 모습이었지만, 상대가 나타니엘이어서 별로 걱정도 되지 않았다.


“레이디 데메테르!”

안달이 난 사람은 오히려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하녀였다.

나는 손을 들어 그녀의 말을 막고 세실리아에게 물었다.


“레이디 데메테르, 지금 황태자비인 내가 내어 준 선물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건가?”

내 말에 세실리아의 몸이 움찔 흔들렸다.

그녀는 여태껏 날 이용할 딸로 생각했지, 황태자비로서 생각해 본 적은 없을 것이다.

내가 어제 그녀에게 준 것은 사실상 황실의 선물이었다.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절대 거절할 수 없는.


“그, 그것이…….”

그제야 자신의 처지를 이해한 세실리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불행히도 옆에 있던 여자는 그러지 못했다.


“비 전하, 그곳은 레이디 데메테르가 머물기 너무 협소하고 지내기 어려…… 아!”

세실리아가 먼저 나서서 그녀의 뺨을 쳤다.

살기 위해서 한 것이라지만, 여자는 알 리가 없으니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었다.


“네, 네가 감히 비 전하께서 내려 주신 선의를 무시하는 게냐!”

“레이디……?”

“감히 황실의 은총을 모욕하려 하다니, 내가 널 너무 안하무인으로 키웠구나.”

그제야 세실리아가 하는 말을 알아차린 여자는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죄, 죄송합니다, 비 전하. 제가 미천하여 비 전하의 은혜를 모르고…….”

“되었네. 뭐, 두 사람의 마음에 안 들 수도 있지.”

나는 뒤에서 분한 표정을 짓고 있는 하녀를 불렀다.


“마틴 경에게 레이디들에게 새로운 숙소를 배정해 달라 전하렴.”

“예, 비 전하.”

하녀가 둘을 재촉해서 데리고 나가는 것을 확인한 나는 나타니엘을 보았다.

그는 묘한 얼굴로 닫힌 문을 보고 있었다.


“왜 그래요?”

“아니, 저 여자 어디서 많이 본 듯한데 기억이 안 나서.”

“나타니엘도 그래요?”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저번 그 이상한 기운도 한 번만 더 보면 어떤 건지 알 것 같다.”

“흐음, 그래요?”

어차피 저들은 다시 한번 찾아오긴 할 것이다.

이번에 보내는 곳은 전처럼 조금 불편한 정도가 아닐 테니까.


 

* * *

세실리아와 비앙카는 멍하니 제 앞에 있는 오두막을 보았다.

그들을 내려 준 마틴은 혀를 차며 설명했다.


“이곳은 황태자 전하의 사유지입니다. 가끔 사냥을 오실 때 전하께서도 머무시니 불편하진 않으실 겁니다.”

마틴의 말과 반대로 이 오두막은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이곳은 원래 사냥꾼들이 사용하는 곳이었다. 당연히 나타니엘은 단 한 번도 머무른 적이 없었다.

얼마 전 나타니엘의 명으로 마틴이 급히 사 둔 것이었다.


“가, 감사합니다…….”

아까 황태자비의 협박에 잔뜩 움츠러든 세실리아와 비앙카는 그렇게 말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 들어가 불을 켜자 더욱 비참해졌다.

오두막은 어제 지냈던 별장의 화장실보다 작았다.


“이게, 대체.”

세실리아는 침대에 털썩 앉아 중얼거렸다.

비앙카는 그런 그녀를 보며 입술을 문 채로 중얼거렸다.


“절 황태자비에게 소개해 준다 했잖아요! 그런데 이게 뭐예요?”

“우리 딸이 저런 애는 아니었는데.”

세실리아의 변명에 비앙카는 거칠게 머리를 쓸어 올리며 손톱을 물어뜯었다.

이대로라면 계획에 차질이 생긴다.

그리고 계획에 차질이 생기는 걸 ‘그들’은 제일 싫어했다.


‘모처럼 완벽한 외모도 얻었는데.’

어떻게 해서든 황태자비의 친구가 되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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