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5화. 작은 오해와 커다란 오해 (85/145)


85화. 작은 오해와 커다란 오해
2022.11.23.



 
생각했던 것보다 디저트는 훨씬 달았다.

같이 줬던 음료수가 아니었다면 다 먹지 못했을 것이다.

접시와 포크를 반납하고 나온 우리는 다시 구경을 시작했다.


“어.”

길을 걷던 우리는 과자 가게 앞에 멈춰 섰다. 하트 모양의 빵 위에 색색의 크림으로 글씨와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우리의 눈길을 끄는 건 그중 가장 크고 화려하게 만들어 둔 빵이었다.


“저기에 왜 나와 그대 이름이 적혀 있는 거지?”

“하, 하하…….”

살짝 민망하기도 했다.

밑에 작은 푯말로 저 커다란 하트 빵에 대한 설명이 적혀 있었다.

[황태자 전하의 결혼을 축하하며, 영원한 행복과 무궁한 영광을.]


“우리 결혼이 이렇게 중요한 건가?”

“아. 여기 보니까 연인끼리 와서 자기 이름도 장식하고 그러는 것 같아요. 이건 일종에 자기들이 이 정도 할 수 있다! 하고 과시하는 샘플 같은 거죠.”

“그런 걸 왜 우리 이름으로 만드는 거지?”

“그야 나타니엘이 차기 황제가 되어 제국을 다스릴 테니까요.”

나타니엘은 한참 동안 장식을 들여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제 다른 걸 보러 갈까요?”

“저건 안 사나?”

“으음…….”

저것도 너무 달아 보였다.

극단적으로 단 음식은 아까 그걸로 충분했다.


“다른 거 보고 옵시다.”

단호한 내 표정에 나타니엘은 기세에 눌린 듯 주춤 뒤로 물러섰다.

때를 놓치지 않고 재빨리 손을 잡고 가게 앞을 탈출했다.

목표는 저 멀리 보이는 작은 신전이었다.

* * *

나타니엘은 제이나의 손에 이끌려 히에라를 둘러 보았다.

결혼 직후 잠깐 황성 밖을 나간 적 외에는 일상 서민들의 삶을 체험해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도착한 신전 앞뜰에는 작은 노점이 몇 개 있었다.

작은 가판 위에는 온갖 용 모양 기념품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저건 뭐지?”

“아, 아아!”

제이나는 깜짝 놀라더니 살짝 웃으며 속삭였다.


“제국에서 용은 거의 신이나 다름없잖아요. 그래서 다들 올 한 해 불운을 막아 달라는 의미에서 사는 거예요.”

“난 불행을 막거나 그런 능력은 없는데?”

“음……. 일종의 부적 같은 거죠.”

나타니엘은 제 앞에서 어린아이가 용 모양 나무 인형 품에 안고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아이의 얼굴엔 행복이 가득했다.


“신전은 작지만, 안에 아주 중요한 성물이 들어…… 나타니엘?”

“아, 아아……. 미안.”

제이나의 부름에 그는 아이에게서 시선을 뗐다. 그리고 그녀의 손을 잡고 신전 문을 열었다.


“안에도 장식을 해 두었군.”

수도에 있는 화려하고 위압적인 신전과 달리 내부는 소박한 편이었다.

대리석으로 만든 기둥에 색색의 전등을 달아 장식하고 여기저기 하얀 리본을 묶어 두었다.


“신전도 이 축제에 엄청 적극적이라고 하더라고요.”

신전 곳곳에 히에라 사람들의 애정이 듬뿍 느껴졌다.

나타니엘은 천천히 신전 내부에 있는 전시품을 보았다.

투박한 용 조각상이라든가, 그간 위대한 힘을 발휘하던 성인들의 흉상도 있었다.

엄청난 미술적 가치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나타니엘은 그것들을 둘러보며 묘한 기분을 느꼈다.


“이쪽이에요. 이쪽에 제가 말한 성물이 있어요.”

제이나는 나타니엘의 손을 붙잡고 한쪽으로 끌고 갔다.

천장에 있는 스테인드글라스를 통과한 색색의 빛이 떨어지는 자리.

거기에 낡고 녹슨 검이 놓여 있었다.


“이게 뭐지?”

“음, 저도 말로만 들었는데…….”

몸을 숙여 안내판을 읽던 제이나는 어깨를 흠칫 떨었다.


“과거, 폭주하는 용을 봉인한 검. 검날에 묻은 피가 마르는 데까지 무려 오백 년이 걸렸다.”

나타니엘은 무심하게 설명을 읽어 내렸다. 제이나는 당황해서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아, 아니. 이게…….”

“앞으로 조심해야겠군.”

“제가 이런 건지 모르고, 엄청 특이한 유물이 있다고 해서!”

그녀의 얼굴이 이번에는 터질 것처럼 붉게 변해 있었다. 나타니엘은 결국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자, 장난치지 말아요!”

“미안. 놀리려던 생각은 아니었는데 너무 귀엽잖아.”

나타니엘은 그녀의 머리를 톡톡 두들겼다. 드디어 진정된 건지 제이나가 한숨과 함께 중얼거렸다.


“사람 많은 곳을 돌아다녀서 피곤하죠? 이제 그만 들어가요.”

나타니엘은 제이나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불과 며칠 전만 해도 여행 와서 무엇을 할지 귀찮을 정도로 종알거리던 그녀였다.

일부러 자신 때문에 일정을 줄이려는 게 틀림없었다.

나타니엘은 제이나의 보드라운 손을 붙잡았다.


“좀 더 보고 가자.”

“네?”

“며칠 방 안에만 있었으니 그 시간만큼 더 열심히 구경해야지.”

아닌 척 애를 쓰지만 분명 그녀의 얼굴에 기쁜 기색이 역력했다.

제이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잡힌 손에 힘을 주었다.

둘은 신전에서 하는 아이들이 하는 연극을 보고, 기념품도 샀다.

중앙 광장에 있는 전구와 리본으로 장식한 커다란 전나무 아래에 가서 올해의 운세를 보기도 했다.

해가 져서 저녁을 먹을 때가 되어서야 둘은 별장으로 돌아왔다.

* * *

별장으로 돌아온 나는 후원에 있는 노천탕으로 향했다.

뜨거운 물이라면 질색하는 나타니엘은 방 안에 있겠다고 선언한 탓에 홀로 가야만 했다.


“흐음. 이렇게 좋은 걸 왜 싫어 하나 몰라.”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자 근육이 노곤하게 풀리는 것 같았다.


“아, 이게 천국이구나.”

하늘을 올려다보니 까만 밤하늘 가득 별빛이 반짝거렸다.

이 세계에 빙의하고 나서 정말 제대로 휴식을 즐기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나타니엘도 즐거웠으면 좋았을 텐데.”

그가 오늘 무리해 줬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도 사람 많고 시끄러운 건 딱 질색인 남자인데.

축제 기간이라 그런지 가족 단위로 놀러 온 사람도 많았고, 아이들도 많았다.


‘그러고 보니 예전보다 아이들에게 좀 유해진 기분이야.’

나타니엘은 기본적으로 사람을 싫어했다.

거기에 감정을 제대로 제어하지 못하는 어린아이들은 더 싫어했다.


“헨리 황자님이랑 함께 지낸 덕인가?”

그런데 오늘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 주었다. 심지어 장난치는 아이들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기도 했다.

마치 무언가를 찾는 것처럼 집요하게.


‘헉!’

무언가 머릿속을 스쳤다.

벌써 우리가 부부가 된 지 1년이 다 되어 가고 있었다.

아직 둘 다 젊으니 다들 쉬쉬하지만, 후계에 대한 이야기가 간간이 나오기는 했다.


‘황후 폐하만 질색하면서 싫어했지만.’

그걸 중간에서 잘 막아 준 건 나타니엘이었다. 결혼 초, 손자를 보고 싶어 어쩔 줄 몰라 하는 황제 앞에서 그가 뻔뻔한 얼굴로 말했던 것을 떠올렸다.


- 폐하, 저희는 아직 한창 연애하는 기분이라서요. 신혼을 만끽하고 아이를 낳고 싶습니다.

시키는 대로 결혼까지 했으니 더는 신경 쓰지 말라는 은근한 협박이었다.

물론 이런 일이 있는지 몰랐던 귀족들 탓에 더 큰 일이 벌어졌지만.


“생각이 삼천포로 흘렀네.”

아무튼 중요한 건, 나타니엘이 아이들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가족도 아닌 아이에게!


‘혹시 아이를 갖고 싶은 건가?’

순간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얼마 전에 서로 마음도 확인했고, 아이를 갖는 것은 언젠가부터 생각하던 일이긴 했다.


“아직 테레사의 일이 정리된 것도 아니고, 여러 가지로 복잡해.”

게다가 나타니엘도 나도 일로 몸이 두 개여도 부족한 판이었다.

아이는 지금 벌이고 있는 일을 좀 마무리하고서 갖는 편이 나아 보였다.


“좋아!”

생각을 정리한 나는 얼른 욕탕에서 나와 몸을 닦고 옷을 입었다.

두꺼운 솜을 누빈 외투까지 걸치고 침실로 향했다.

그러자 창가에 걸터앉아 있던 나타니엘이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수도보다 훨씬 따뜻해 보이는 히에라의 야경이 그의 얼굴을 물들였다.


“얼굴이 빨갛다, 제이나.”

“바, 방금 뜨거운 물에서 나와서 그래요.”

갑자기 그의 얼굴을 마주하니 부끄러움이 몰려왔다.

결국, 나타니엘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려 버렸다.

발치에 보이던 그의 그림자가 갑자기 움직이기 시작했다.


‘뭐, 뭐야.’

차가운 손이 부드럽게 내 팔을 쓸었다.

첫 키스도 아닌데 이상하게 심장이 터질 것처럼 두근거렸다.


“제이나.”

달콤한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절박하게 소리쳤다.


“아이를 갖는 건 좀 더 나중에 생각해요!”

“오늘 몸이 안 좋다면 결계를 치는 건 나 혼자 가도록…….”

헉.

나타니엘의 말에 나는 입을 꾹 닫았다.

부끄러움에 하늘로 날아가든, 땅속에 파묻히든 둘 중 하나 하고 싶다.


 


“내, 내일 가도 될까요?”

결국, 눈물을 머금고 말을 뱉어냈다.

여전히 나타니엘의 얼굴은 볼 수 없었다.


“어? 어어……. 쉬도록 해.”

그 역시 당황한 듯 목소리가 떨렸다.

발걸음 소리가 내 옆을 지났다. 끼익, 문을 여닫는 소리까지 들리자 몸에 힘이 풀렸다.

나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하아……. 내가 못 산다. 진짜.”

대체 왜 이런 착각을 한 거야!

* * *

테레사는 막시밀리안에게 화를 내고 나서 내내 불편했다.


“하아……. 화내는 것도 쉽지 않네.”

오히려 막시밀리안은 평소와 다름없어 보였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상냥하게 대하고 이전처럼 눈치를 보았다.

전과 좀 다른 것이 있다면, 테레사가 원하는 대로 약간의 선을 지키고 있었다.

편안할 줄 알았는데 이상하게 신경이 쓰였다.


‘정신 차려, 대체 몇 번을 당하려는 거야.’

테레사는 산책이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외투를 걸치고 계단을 내려갔다.

예쁘게 다듬어진 이국적인 후원은 막시밀리안과는 와 보지 않은 곳이었다.


‘원래대로라면 여기도 돌아봤어야 했지만…….’

며칠 전 결국 참지 못하고 터지는 바람에 혼자 오게 되었다.

테레사는 잘 조성된 산책로를 걸으며 주변을 살폈다.

높이 뻗어 오른 자작나무 위로 녹았다 다시 얼은 눈이 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보석 같아.”

근처에 있는 나무 벤치에 앉아 동화처럼 반짝거리는 풍경을 감상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왜 겨울에 후원을 봐야겠다고 생각했었지?’

생각해 보면 처음부터 윈터스성에 오면 후원을 꼭 보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이곳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이미 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처럼.

리 부인도 후원에 놀러 가고 싶다는 자신을 이상하게 보긴 했었다.

잠시 고민하던 테레사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나한테 여기에 대해 알려 줄 사람은 한 사람밖에 없잖아.”

아마도 어린 시절 막시밀리안이 했던 이야기 때문이겠지.

그녀는 멍한 얼굴로 그림 같은 후원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생각해 보면 지금까지 이 짧은 생을 늘 막시밀리안을 위하며 살았던 것 같다.

놀러 가고 싶은 곳도, 좋아하는 것들도 모두 막시밀리안의 취향에 맞춰져 있었다.


‘대체 내게 남은 건 뭐지?’

막시밀리안의 약혼녀라는 타이틀을 빼고 나니 아무것도 없었다.

테레사는 그동안 애써 외면하고 있었던 제 모습을 마주 봐야만 했다.

모든 것이 타인에게 맞춰진 빈껍데기인 자신.

테레사는 멍한 얼굴로 눈부신 오후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잊고 있었던, 아니 이미 극복했다고 생각한 감정들이 밀려들었다.


“테레사?”

그런 그녀 앞에 이 모든 일의 원흉이 나타났다.

그런 그를 보자 꾹꾹 눌러 놨던 모든 것이 터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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