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진짜 여행
(84/145)
84화. 진짜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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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화. 진짜 여행
2022.11.19.
잠에서 깬 나는 여전히 옆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 나타니엘을 보며 몸을 일으켰다.
드디어 지옥 같았던 이틀이 지났다.
‘여기까지 와서 방콕 생활이라니!’
잠깐 밖에 나가려 하면 나타니엘이 안절부절못하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심지어 제어해 가던 변신 능력도 들쭉날쭉해진 바람에 고생이었다.
“분리 불안증 걸린 용도 아니고 이게 뭐람.”
꾸욱, 뺨을 누르자 나타니엘의 미간이 구겨졌다.
“이제 일어나세요.”
“우웅.”
“빨리요.”
일부러 미적거리면서 자는 척하는 거 다 안다 이놈아.
그래도 처음 쓰러졌을 때보다는 많이 나아졌다.
이제 혼자서 걸어 다니고, 밥도 먹을 수 있고, 산책도 할 수 있으니까!
‘끔찍했던 이틀이었어.’
드디어 나타니엘이 눈을 뜨고 스르륵 이불 밖으로 나왔다.
이미 밖에 서 있는 내가 마음에 안 드는 듯, 여전히 얼굴이 굳어 있었다.
“제이나…….”
“이불 밖은 위험하다는 이상한 소리는 하지 말아요.”
내 말에 나타니엘은 입을 꾹 닫았다.
하고 싶은 말을 막아 버린 탓인지 뺨이 살짝 부풀어 보였다.
“빨리빨리 준비해야 해요.”
“왜?”
“아직 히에라 축제 중이잖아요.”
“축제?”
내가 이 시기에 여기를 선택한 이유가 있었다.
히에라 축제는 북부에서 아주 유명한 축제였다.
사람들은 신년을 맞이해서 히에라 중앙에 있는 거대한 신목에 소원을 빌며 하얀 리본을 묶고, 밤에는 배를 타고 강으로 나와 풍등을 날리곤 했다.
“그걸 다 하겠다고?”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게 하나 있어요.”
나타니엘은 묻고 싶지 않은 듯 보였지만, 결국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뭔데?”
“흐흠. 밤에 가면을 쓰고 하는 무도회가 있거든요.”
“지금 거길 같이 가자는 건가.”
“네! 완전 재밌을걸요?”
나타니엘은 가만히 고민하더니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예전에도 가본 적 있는 것처럼 말하는군.”
“아, 아니요! 그럴 리가요.”
“그런 평민 축제에 대해 잘 알고 있다니. 그대는 참 특이해.”
“하, 하하하…….”
한국인이라면 놀러 갈 때 맛집부터 지역 축제까지 찾아 두는 것이 미덕 아닌가.
그래서 잊고 있었다.
이런 사고방식이 이곳과 얼마나 다른지.
“하여튼 전 꼭 가 보고 싶어요!”
“하아……. 위험한 곳만 가는군.”
“어차피 옆에 나타니엘이 있는데 무슨 걱정이에요.”
“…….”
부끄러운지 고개를 돌려 버린다.
요즘 난 나타니엘의 자신감 키워 주기 운동을 하고 있다.
처음에는 그 사실을 모르던 나타니엘도 반복되는 내 말에 슬슬 알아차리는 눈치였다.
별로 싫어하는 기색도 아니어서 난 그에게 더 칭찬과 믿음을 퍼부어 주었다.
“그럼 준비 좀 하러 가 볼까요.”
“응.”
드디어 이 집 밖으로 나갈 시간이 왔다.
* * *
나가서 이것저것 사 먹을 걸 생각해서 아침은 일부러 가벼운 음식들로만 준비했다.
식사를 마치고 옷을 갈아입는데 밖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인지 나가서 살펴보고 오렴.”
“예, 비 전하.”
내 명을 받은 하녀는 금방 다시 돌아왔다.
“정문에서 레이디 데메테르가 어떤 여성분과 함께 비 전하를 뵙겠다며 행패를 부리고 있다고 합니다.”
“아…….”
그간 불안해하는 나타니엘을 달래느라 어머니의 일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사실 리조트에 넣어 놓고 정신을 차리게 할 생각이었다.
‘오라버니에게 이상한 여자를 붙이는 건 나도 사양이라고.’
아무리 미워도 가족은 가족이었다.
원작에서 막시밀리안은 제게 ‘돈’이라는 목적을 갖고 접근한 어머니에게 크게 실망한다.
그 사건은 그가 거의 인간불신에 가까운 상태가 되는 결정적 원인이 되었다.
이후 막시밀리안은 겉으로는 상냥하고 자상했지만, 자신이 그어 놓은 선 안에는 가족들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들여보내지 않게 되었다.
‘결국 고생한 건 테레사지만.’
어차피 다 끝난 일이긴 했지만, 그래도 오라버니가 같은 고통을 느끼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제이나.”
문밖에서 나타니엘이 내 이름을 불렀다.
“아, 옷 다 갈아입었어요. 들어오세요.”
그는 두꺼운 갈색 셔츠에 목도리를 두르고, 검은색 바지에 부츠를 신었다.
거기에 겉옷으로 후드가 달린 로브까지 걸치자 잘생긴 여행객으로 보였다.
“흠. 괜찮네요.”
수도도 아니고, 작은 시골 마을인 히에라였다.
그의 얼굴을 알아볼 사람은 거의 없었다.
“제이나도 귀엽다.”
“어.”
기습적인 칭찬에 얼굴이 화르륵 달아올랐다.
“가, 갑자기 뭐예요.”
“사실을 말해 준 것뿐이다.”
요즘 점점 뻔뻔해 보이는 건 내 착각일까?
나타니엘은 살짝 웃으며 내 손을 잡았다.
“그럼, 나가야 하는데……. 저 날파리들은 어떻게 할 생각이지?”
여전히 창밖에서는 고성이 오가고 통곡 소리가 들렸다.
어찌나 큰지 유리창이 흔들리는 것 같았다.
“글쎄요. 어디다가 잡아넣을 수도 없고…….”
“왜 잡아넣으면 안 되는 거지?”
“예? 그야, 가족이고…….”
나타니엘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윈터스 공작과 레이디 데메테르는 이미 정리한 사이 아닌가.”
“그렇죠.”
“혹시 어머니에 대한 특별한 감정이라도 있나?”
“그…… 그건 아니에요.”
“그럼 뭐가 문제지? 저자는 황태자비인 너에게 청탁을 하려는 사람일 뿐이다.”
냉정한 나타니엘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소중한 것과 소중하지 않은 것을 또 구분 못 할 뻔했다.
난 마음을 단단히 먹고 고개를 들었다.
“당신 말이 맞아요. 저 사람은 제가 신경 쓸 사람이 아니네요.”
나타니엘은 마음에 드는 듯 씩 웃었다.
“그댄 가끔 보면 생각이 너무 많아.”
“나타니엘은 너무 직선적이어서 탈이죠. 그래서 우리가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내 말에 나타니엘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고는 큰 소리를 내며 웃었다.
나타니엘이 이렇게 소리를 내면서 웃는 모습은 정말 처음이었다.
“그래, 맞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나는 나타니엘의 손을 잡았다.
날파리가 더 증식하기 전에 원인을 제거해야만 했다.
우리는 밖으로 나왔다.
철로 된 문 앞에는 여전히 우아하고 꼿꼿한 모습의 세실리아가 서 있었다.
눈가에는 처연한 눈물방울이 그렁그렁한 채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얼굴로 소리쳤다.
“어찌하여 저에게 이리 가혹하게 구십니까! 아무리 제가 윈터스 가문의 사람이 아니라 하여도, 전…….”
“그만.”
더는 개소리를 못 하도록 내가 손을 들어 말을 멈추었다.
“그대가 내 생물학적 어머니인 건 맞지만, 내게 그런 대우를 바라는 건 좀 양심의 문제인가 싶군.”
내 말에 금방이라도 연민을 바라며 연기하던 얼굴에 본심이 드러났다.
그때였다.
“레이디, 그만하세요. 이러시면 비 전하가 곤란해할 거란 걸 아시잖아요.”
나는 고개를 돌려 여자를 보았다.
진한 검은 머리에 선명한 녹색 눈을 가진 여인은 묘한 분위기를 풍겼다.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저렇게 화려한 얼굴이라면 이름을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는데.
“저 여자 좀, 이상하다.”
나타니엘이 몸을 숙여 내 귀에 속삭였다. 사람들의 시선이 있어 빨리 처리해야 했다.
“그래도 난 그대에게 선의를 베풀어 머물 곳을 준비해 주었건만…….”
“그곳은 레이디 데메테르가 지내기에 너무 협소합니다, 비 전하.”
내어 준 곳이 이 지역에서 손꼽히는 리조트라는 사실은 쏙 빼놓고 말하는 인성에 할 말을 잃었다.
“좋아, 윈터스 공작의 별장에는 발을 들일 수 없지만, 대신 황실 별장을 빌려 주도록 하지.”
내 말에 세실리아의 눈이 반짝거렸다.
아마도 황실 별장이라고 하니 여기보다 더 좋을 거라고 생각하겠지.
‘그러면 내가 거기 가 있지 여기에 왜 와 있겠니.’
말이 별장이지 그냥 평범한 타운 하우스에 가까웠다. 게다가 관리도 미흡해서 아마 지내기는 더 힘들 게 뻔했다.
“마차를 내어 주어 두 사람을 그리로 데려가거라.”
“예, 비 전하.”
두 사람이 기뻐하며 마차를 타러 사라졌다.
나타니엘은 조용히 마틴을 불러 속삭였다.
“저 둘이 황실 별장에서 나오지 못하도록 감시하라 해.”
“예? 그래도 될까요?”
“내 명이다.”
“알겠습니다.”
마틴은 신뢰감 없어 보이는 특유의 미소를 짓고 재빨리 사라졌다.
드디어 주변이 정리된 것 같아서 마음이 놓였다.
* * *
나와 나타니엘은 함께 작은 상점들을 구경하며 축제 거리를 걸었다.
“히에라는 수도와 분위기가 많이 다르군.”
나타니엘은 신기하다는 듯 주변을 살폈다.
가로수인 전나무에는 다양한 색의 전구와 리본으로 장식해 두었다.
붉은 벽돌을 쌓아 만든 집과 파란색 지붕이 강렬한 대비를 일으키며 시각을 자극했다.
“비슷한데 좀 다른 느낌이에요.”
크리스마스와 비슷한, 신년 축제 느낌이었다.
“신기한 것도 많군.”
그런 말을 하며 나타니엘이 보고 있는 건 군것질거리였다.
“저게 뭔지?”
“어, 저도 처음 봐요.”
아무래도 지방 토속 음식이라 그런지 처음 보는 빵이었다.
나타니엘의 시선이 쉽게 떨어지지 않는 걸 보니 꽤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들어가 볼래요?”
“응.”
나타니엘은 먼저 문을 열고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호쾌한 인상의 주인이 활짝 웃으며 우리를 맞았다.
“어서 오십시오!”
주인의 인사에도 나타니엘의 시선은 진열대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그 대신 웃으며 물었다.
“히에라에는 처음 놀러 왔는데, 이 빵은 뭔가요?”
“아, 이건 히에라 지방 전통 음식입니다. 안에 자두 무스가 들어 있고, 위에 바닐라 소스를 뿌려서 먹지요.”
오…….
설명만 들어도 입 안이 아린 느낌이다.
“두 개 사도록 하지.”
“예,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주인은 싱글벙글 웃으며 찜기에서 꺼낸 뜨거운 빵을 작은 나무 접시에 올렸다.
그리고 그 위에 바닐라 소스와 잼을 올리고 작은 나무 포크를 꽂아 주었다.
“두 개에 20페니입니다. 접시랑 포크 반환하시면 4페니를 돌려 드릴 거예요. 그리고 이건 서비스.”
그러면서 종이컵에 붉은색 액체를 담아 주었다.
“글루바인이라는 음료수인데 이렇게 추울 때 아주 좋습니다. 두 분이 신혼인 것 같아서 주는 거예요.”
윙크하며 넘겨준 잔은 아직 따뜻하기만 했다.
“감사합니다!”
나는 잔을 받고 멀뚱멀뚱 서 있는 나타니엘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쿡 찍었다.
“잘 먹겠다.”
무뚝뚝한 말투였지만, 다행히 진심이 전해졌는지 가게 주인도 활짝 웃어 주었다.
“히에라에서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인사를 뒤로하고 가게를 나온 우리는 광장 쪽에 있는 테이블로 향했다.
이미 테이블에는 연인과 가족들이 자리를 잡고 앉아 음식을 나눠 먹고 있었다.
“여기쯤 앉을까요?”
“어? 으응.”
나타니엘은 뭐가 그리 신기한지 앉아서도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왜 그래요?”
“다들 즐거워 보여서.”
“그야 놀러 나왔으니까 즐겁죠. 나타니엘은 안 그래요?”
나타니엘은 잠시 생각에 빠진 채로 주변을 살폈다.
한참을 둘러보던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도 즐거운 것 같다.”
“같은 건 뭐예요.”
포크로 빵을 자르자 안에 들어 있던 자두 무스가 흘러나왔다.
아직 젖지 않은 빵을 바닐라 소스에 묻혀서 그의 입에 넣었다.
“맛있어.”
입꼬리가 올라가면서 날 선 눈이 부드럽게 풀렸다.
나는 그를 보며 웃었다.
나타니엘도 민망한지 뺨을 붉혔다.
그리고 무언가를 깨달은 듯 주변을 다시 한번 둘러보았다.
마치 행복한 사람들의 얼굴을 눈에 담아 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