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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화. 선을 긋는 법 (83/145)


83화. 선을 긋는 법
2022.11.16.



 
나타니엘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조용히 물었다.


“그대는 메니실 영애를 볼 때마다 짜증 나고 한 대 치고 싶나?”

“예?”

“난 킬리언 경을 볼 때마다 그런 생각을 하는데.”

“…….”

아직 친구라고 말하기에는 너무 나간 걸까.

아쉬운 마음이었지만, 일단 물러서기로 했다.

아직 킬리언이 돌아갈 때까지는 몇 주의 시간이 더 있었다.


‘그 사이에 둘이 더 친해지면 좋은 거고.’

그것보다 당장 더 중요한 일은 따로 있었다.


“결계를 만들러 몇 시에 갈 생각이에요?”

고민하고 있던 나타니엘이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노골적으로 싫은 기색을 드러냈다.


“왜, 왜 그런 눈으로 보는데요?”

“설마 따라오려는 건 아니겠지?”

“당연한 거 아니에요! 빌의 가족들이랑 소통하려면 제가 있어야 하잖아요.”

“그대는 아직 몸이 다 회복되지 않았어.”

아니, 이 파충류가!


“저 진짜 멀쩡하다니까요!”

“그때도 쓰러지기 전까지는 멀쩡했다.”

“아니, 그냥 놀란 것뿐이라니까요.”

“의사도 며칠간 절대안정을 취하라고 했다.”

안 봐도 뻔했다.

의사는 내일이면 움직일 수 있을 거라고 말하면, 황태자에게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겠지.


“그 며칠간이 얼마나인데요?”

“2주?”

“그럼 휴가 내내 방에 누워만 있어야 하잖아요!”

어차피 하루 만에 될 일도 아니니 며칠 더 있어도 되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2주는 너무하잖아.


“그야 몸이 안 좋으니까…….”

이제야 그가 내 눈치를 보며 말꼬리를 흐렸다.

이렇게 불안해할 줄이야.

나는 손을 뻗어서 그의 양 볼을 꽉 잡고 내 쪽으로 돌렸다.


“그냥 놀란 것뿐이라고 했죠.”

“응…….”

“몸에 이상도 없고요.”

“우웅.”

대체 왜 이렇게 과보호람.

아무리 그의 어머니의 일이 있었다지만, 이건 많이 심했다.


“그리고 나타니엘이 옆에 있는데 무슨 걱정이에요.”

대답이 없다. 게다가 시선까지 피하며 고개를 푹 숙이는 모습이 이상해 보였다.

늘 자신감이 가득한 그였는데.

이렇게 풀이 죽은 모습을 보니까 강하게 나가기도 힘들었다.


“이틀.”

“음?”

“이틀 얌전히 쉴 테니까 그 뒤부턴 같이 놀아 줘야 해요.”

나타니엘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도 불만스러워 보였지만. 그래도 합의에 성공했다.


“나 참, 왜 이렇게 겁이 많아졌어요?”

“내가 언제?”

아닌 척하는 모습을 보며 모르는 척해 주기로 했다.


“점심은?”

“아직이요. 같이 먹어요.”

또 바로 날 안아 올리려는 손을 막아섰다.


“제가 직접 걸어갈 거예요.”

또 불쌍한 소동물처럼 어깨를 축 늘어뜨린 그 모습에 다시 측은한 마음이 올라왔다.

하지만 이대로 두었다간 또 제자리로 돌아오니 냉정해져야 했다.


“제가 걷겠습니다.”

단호한 거절에 나타니엘이 뒤로 물러섰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돌아보며 말했다.


“어서 내려가요.”

그는 말없이 일어나서 내 손을 잡았다.

마치 내가 쉽게 부서질 유리처럼 조심조심 다루는 모습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원래대로 돌아오려면 멀었네.’

눈앞에 고생길이 훤히 보였다.

* * *

막시밀리안은 테레사의 눈치를 살폈다.

분명 좋아할 줄 알았는데, 반응이 없으니 불안하기만 했다.


‘대놓고 물어보자니 좀 그런데…….’

오늘 아침도 메니실 백작가의 요리사에게 부탁해서 테레사가 자주 먹던 메뉴로 준비해 둔 것이었다.

평소처럼 잘 먹고는 있었지만 영 시원찮아 보였다.


“흠…….”

식사가 끝이 나고 차가 올라왔다.

막시밀리안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오늘은 잠깐 시간 될까?”

“저에게 무슨 선택권이 있겠어요.”

테레사는 저도 모르게 뾰족하게 튀어나온 말에 스스로 놀랐다.

하지만 사과하고 싶지는 않았다.

매번 막시밀리안의 눈치를 보는 자신은 더 이상 없었다.


“아…….”

날카로운 말에 막시밀리안은 뭐라 답해야 할지 몰라서 입을 꾹 닫았다.

예전에는 그녀와 어떤 이야기를 하고, 어떻게 지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그래서 더 어려웠다.

수십 번 쌓인 중첩된 기억은 현재의 테레사를 왜곡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어떻게 해서든 더 가까워져야 했다.


“혹시 시간이 된다면, 성을 구경시켜 줄까 해서…….”

“이제 와서요?”

원래대로라면 약혼녀에게 성을 구경시켜 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장거리 이동으로 테레사의 컨디션이 나빠 보여서 잠시 휴식 시간을 준 것뿐이었다.


“난 네가 몸이 별로 안 좋아 보여서…….”

막시밀리안의 말에 테레사는 당황했다.

당연히 귀찮고 필요 없다고 생각해서 안내해 주지 않는 거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한시적 약혼자이니 그냥 지나친 거라고, 멋대로 착각했다.


“미안. 내가 제대로 설명했어야 했는데. 오늘, 시간 된다면 정식으로 공작성을 안내하고 싶어. 소개해 주고 싶은 사람도 있고.”

막시밀리안은 붉어진 뺨을 손등으로 누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네…….”

민망해진 테레사는 결국 그의 제안에 응했다. 막시밀리안이 저렇게 솔직하게 대답할지도 몰랐다.

게다가 자신이 너무 꼬아 생각했다는 걸 알아차리자 창피함이 밀물처럼 밀려들었다.


“그럼 이따가 오후에 볼까?”

“네.”

“미리 사람을 보낼게. 들어가서 쉬도록 해.”

그렇게 말하고는 막시밀리안이 손을 내밀었다.

테레사는 그것을 빤히 보았다.

예전과 그가 많이 달라진 건 확실했다. 그런데 어딘지 모르게 꺼림칙한 부분이 있었다.


“테레사?”

“아, 네 그럴게요.”

정신을 차린 그녀는 막시밀리안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 * *

시간이 지나 테레사가 점심까지 먹고 나자 누군가 문을 두들겼다.


“들어와.”

“안녕하십니까, 테레사 님.”

깐깐해 보이는 중년의 여성이 테레사에게 인사했다.


“저는 이 윈터스성을 관리하는 리 자작가의 아리아드네라고 합니다.”

리 부인에 대해서는 테레사 역시 들어 본 적 있었다.

오랫동안 윈터스 공작 부인이 될 준비를 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이야기는 많이 들었어요. 만나서 반가워요. 테레사 메니실이라고 합니다.”

“편히 말씀하십시오. 어차피 곧 안주인이 될 분이시니까요.”

“하, 하하…….”

테레사는 어색하게 웃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 약혼이 시한부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손에 꼽았다.

그러니 적당히 맞장구쳐 주는 수밖에 없었다.


“알겠네.”

“감사합니다. 아래층에서 소공작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내려가시지요.”

테레사는 리 부인을 따라 계단을 내려갔다. 넓은 응접실에는 윈터스성에서 일하는 모든 사용인이 모여 있었다.

리 부인은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막시밀리안은 테레사를 제 옆에 세웠다.


“약혼녀인 테레사 메니실이다. 당분간 윈터스성에서 지낼 것이니 공작 부인에 준하는 대우를 하도록.”

테레사는 그의 말에 조용히 앞으로 나섰다.


“만나서 반갑네. 앞으로 잘 부탁하지.”

곧 한 사람씩 나와 테레사에게 예를 갖추며 제 소개를 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기사단장 데이먼 카퍼입니다.”

“다시 한번 인사드립니다. 아리아드네 리입니다.”

“이렇게 뵐 수 있어 영광입니다. 집사인 피아제 리입니다.”

가장 중요한 사람들의 인사만 받는 데도 한참 걸렸다.

테레사는 어린 시절부터 이 순간을 오랫동안 꿈꿔 왔었다.


‘이런 인사를 받으며 막시밀리안과 행복하게 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비록 시한부 약혼녀라는 형태로 인사를 받게 되었지만, 꿈을 이룬 것이었다.

그래서 테레사는 한 사람, 한 사람 얼굴과 이름을 기억하고 싶었다.

헛된 꿈을 꾸었던 과거를 이렇게라도 보상받고 싶었다.


“인사는 이쯤 하고 성을 둘러볼까.”

어느 정도 분위기가 정리되자 막시밀리안이 다가왔다.

테레사는 하나하나 가신들을 살피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쪽이야.”

그녀는 막시밀리안의 손을 잡고 자리를 떴다. 둘은 천천히 계단을 따라 내려갔다. 회색빛 돌로 만들어진 벽은 겨울 햇살을 받아 조금 따뜻해 보였다.


“역시 북쪽이라 그런가, 아직 춥네요.”

“뭐, 그렇지. 이쪽 지역에 봄이 오려면 두 달은 더 기다려야 할걸.”

그렇게 말한 막시밀리안은 살짝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테레사에게 물었다.


“혹시 춥지 않나?”

“처음엔 추웠는데 지금은 괜찮아요.”

어렸을 때, 언젠가 북부에서 살 날을 대비해 추위에 단련되겠답시고 옷을 얇게 입고 다닌 적도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그녀는 추위에도 더위에도 꽤 강한 편이었다.


“그렇군.”

테레사는 1층에서부터 천천히 성 내부를 살폈다.

내부는 튼튼하고 실용적으로 보였지만, 곳곳에서 우아함이 돋보였다.

수백 년을 제자리를 지켜낸 성답게 갖고 있는 유물도 많았다.

둘은 성 내부를 둘러보고 밖으로 나왔다.


“성벽에 상처가 많네요.”

“마석을 사용하는 법을 알아내기 전까지는 여기가 최전방이었으니까.”

“이 가혹한 땅에 마석은 정말 축복이었네요.”

마지막으로, 길을 제외하고는 아직 곳곳에 눈이 남아 있는 정원으로 향했다.

테레사는 신기하다는 듯 바닥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산책로에만 눈이 없어요.”

“마석을 이용해서 눈을 녹이거든. 아버지께서 어머니의 마음을 돌리고 싶어서 만든 건데…….”

애석하게도 그 끝은 좋지 못했다.

그의 어머니는 화려한 삶을 원했지, 이런 배려를 원하지 않았다.

막시밀리안은 주머니에 넣어 둔 장갑을 만지작거렸다.


‘손이 시릴까 봐 준비해 온 건데.’

테레사가 어머니와 같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어머니가 남긴 깊은 트라우마는 막시밀리안의 움직임을 제한했다.


“저에게 하실 말씀이 있으신가요?”

테레사의 말간 눈을 보며 막시밀리안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미래를 바꾸려면 자신도 변해야만 했다.


“이거…….”

테레사는 막시밀리안이 주섬주섬 꺼낸 연한 갈색 가죽 장갑을 보았다.

안쪽에 얇은 털을 누벼서 보온력을 높였고, 겉엔 메니실 가문의 상징인 물방울 꽃이 수놓여 있었다.


“아무래도 필요할 것 같아서.”

테레사의 눈동자가 커졌다.

그녀의 심장 소리도 쿵쿵거리면서 너무 커졌다.

마치 찬물을 머리 위에 뒤집어쓴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렇게 애쓰시지 않아도 돼요.”

평소보다 더 냉정한 테레사의 말투에 막시밀리안은 당황했다.


“아니, 난…….”

“그냥 평소처럼 대해 주면 좋겠어요.”

“더는 네가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의 말에 테레사는 입술을 꽉 물었다.

상처라니.


“제가 왜 이런 일에 상처받는다고 생각하시죠? 저희가 그럴 사이인가요?”

테레사는 무감한 얼굴로 말했다. 상처 입은 듯한 막시밀리안의 눈은 그녀에게 큰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않았다.

그가 상처 입는 것보다, 자신의 상처를 돌보는 것이 더 중요했다.


 


“난, 그냥…….”

“소공작님. 이럴수록 제가 더 부담스럽고 여기 있는 게 불편해져요.”

맞는 말이었다.

막시밀리안은 시선을 바닥에 떨구었다.


“피곤하니 돌아갈게요.”

테레사는 혼자 정원을 빠져나갔다.

그녀가 사라지고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막시밀리안은 천천히 움직였다.

둘 사이에 흐릿해졌다고 생각했던 선이 그 어느 때보다 명확해 보였다.

마치 그의 뺨에 남은 물 흔적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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