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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화. 이런 과보호는 사양이야! (82/145)


82화. 이런 과보호는 사양이야!
2022.11.12.



“으음…….”

아침 햇살에 눈이 부셨다. 겨우 눈을 뜨고 일어나자 늘 옆에서 자고 있던 나타니엘이 보이지 않았다.


“나타니엘?”

부르기가 무섭게 옆에서 툭 튀어나온 나타니엘이 침대에 앉았다.


“몸은 좀 어때?”

걱정스러워하는 말투에 심장 근처가 간질간질했다.

누군가가 이렇게 날 걱정해 주는 모습에 입꼬리가 올라가는 걸 숨길 수 없었다.


“뭐야? 왜 웃는 건데?”

“흐흠. 아니에요.”

혼자 웃으면서 침대에서 내려오려는데, 갑자기 그가 내 앞을 막아섰다.

그러고는 내 어깨를 꾹 눌러서 다시 앉혔다.


“아직 움직이면 안 된다.”

“예?”

“식사를 준비시켰으니 일단 씻도록 하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하녀들이 들어왔다.


“목욕물을 준비해 두었습니다, 비 전하.”

“아, 그래…….”

나타니엘은 날 부축하려고 다가오는 하녀들을 손으로 막아섰다. 그러고는 나를 번쩍 안아 들었다.


“헉.”

“욕실까지 데려다주지.”

“자, 잠깐만요. 내려 줘요!”

“안 돼.”

단호하게 거절한 나타니엘은 그대로 욕실로 향했다.

그의 어깨 너머로 하녀들의 당황한 시선과 마주쳤다. 그러자마자 그들이 후다닥 고개를 숙이긴 했지만 민망해하는 눈이 뇌리에 콕 박혔다.

이곳에서 제일 평온한 사람은 나타니엘 하나뿐이었다.


 

* * *

식사가 끝나고 나타니엘은 한발 늦게 도착한 마틴과 함께 히에라 영주를 만나러 갔다.

나는 아침 먹은 게 얹혀서 방에 남아 있기로 했다.


“부담스러운 아침이었다.”

식사 시간에도 나타니엘의 과보호는 끝나지 않았다.

마치 내가 숟가락을 들면 큰일이 날 것처럼, 하나하나 떠먹여 주려는 걸 말리느라 꽤 고생했다.


‘결국, 몇 입 먹긴 했지만.’

절대 물러서지 않을 것 같아서 어쩔 수 없었다. 부끄러움은 나의 몫이었지만.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정말 그거 한번 쓰러졌다고 저렇게 과보호하는 건가?


“흐음…….”

사실 어제 쓰러진 데에는 특별한 다른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다 지나간 일이라 굳이 꺼내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데 아예 모르는 척 지나가기엔…….’

나타니엘의 반응이 너무 과했다.

어째야 하나 고민하던 중, 하녀가 조용히 문을 두들겼다.


“비 전하, 레이디 데메테르가 알현을 요청했습니다.”

“아…….”

평소와 다른 나타니엘 때문에 세실리아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아마 나타니엘도 그녀를 제대로 신경 쓰지 않았을 텐데.


“일단 들어오라 하렴.”

“예, 비 전하.”

말을 전하러 나간 하녀가 돌아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세실리아가 들어왔다.

방 안을 쓱 살피고는 앉아 있는 내 눈을 똑바로 보기만 했다.


‘어, 이거 기 싸움인가?’

난 이미 황실 사람이고, 그녀는 결혼 전 성을 갖고 있으니 내가 윗사람이 맞았다.

오라버니나 아버지는 사적으로 만날 때를 제외하고는 나에게 존칭을 써 주었다.

그러니 세실리아 역시 하녀가 있는 자리에서는 내게 예를 표해야만 했다.


“레이디 데메테르, 황태자비 전하께 예를 갖추십시오.”

결국 보다 못한 하녀가 그녀의 태도를 지적했다.

세실리아는 억지로 내게 몸을 숙이며 인사를 했다.


“황태자비 전하를 뵙습니다.”

미안하지만, 나 역시 호락호락한 사람은 아니었다.


‘황후하고도 한판 붙어 봤는데 어머니쯤이야.’

그리고 나는 일어나라는 말없이 시간을 보냈다. 하녀 역시 이미 한 번 지적했기 때문에 나서지 않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세실리아의 몸이 가늘게 떨리는 걸 보며 내가 말했다.


“그래요, 고개를 들도록 해요.”

몸을 일으킨 세실리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치맛자락을 쥐고 있는 손이 파르르 떨렸다.

예법상 윗사람에게 감사의 인사를 해야 하지만, 그녀는 말이 없었다.

오, 화났나 본데?

나는 방긋 웃으며 그녀에게 자리를 권해 주었다.


“자리에 앉아요.”

“감사합니다, 비 전하.”

세실리아는 고저 없이 대답하고는 자리에 앉았다.


“단둘이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비 전하.”

대놓고 주변을 물려 달라는 요구에 나는 주변을 물렸다.

뭐라고 말하는지 궁금하기도 했고, 앞으로 어떻게 나올지 알고 싶기도 했다.


“하고 싶은 말이 뭔가?”

나는 내 태도를 분명히 했다.

어제는 어머니로서 그녀를 맞이했기에 존대를 해 주었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하.”

고개를 돌리며 짧게 한숨을 내뱉은 세실리아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녀답지 않게 감정을 조절하는 것처럼 보였다.


“부탁이 있어서 무례를 무릅쓰고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비 전하.”

나긋나긋한 말투에 어이가 없었다.

얼굴은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붉은 주제에.


“원하는 것이 뭔가?”

일단 한 발짝 뒤로 물러서기로 했다.

원작에서도 이 여자가 그렇게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었단 걸 알고 있으니까.

최대한 정보를 많이 캐내는 게 중요했다.


“잠깐 저와 제 친구가 머무를 곳이 필요합니다. 그간의 정을 생각해서 좀 도와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머무를 곳이라…….”

세실리아가 머무는 것은 상관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데려올 친구라는 사람이 마음에 걸렸다.


‘오라버니에게 붙여 줄 아이인가?’

원작에서 그녀는 내 친구로서 막시밀리안과 만났다.

일종의 신분 세탁이었다.

별것도 없는 그녀를 소공작에게 붙여 주려면, 동생의 친구로 사교계에 입성시키는 방법이 제일 빠를 테니까.


‘이제 보니 자식들을 철저하게 이용해 먹을 생각만 하네.’

뇌와 심장이 차갑게 식어 가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잠시 고민하는 척 턱을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렸다.

세실리아의 불안해하는 모습을 즐기며.


“제발, 자비를 베풀어 이 아무것도 없는 어미를 거두어 주세요.”

손수건까지 꺼내서 눈물을 콕콕 찍는 모습이 가소로웠다.


“좋습니다.”

“역시 절 도와주실 줄 알았습니다!”

금세 기뻐하는 그녀를 보며 난 방긋 웃으면서 선을 그었다.


“하지만 아무리 나라도 아버지의 소유지에서 전처를 거두는 건 부담스럽군.”

한마디로 넌 참 예의 없는 부탁을 염치도 없이 한다는 뜻이었다.

세실리아의 웃고 있는 입가가 파르르 떨렸다. 난 모르는 척 한쪽 소파 팔걸이에 몸을 기댔다.


“일단 숙소로 돌아가 있도록. 곧 연락하도록 하지.”

“하, 하지만!”

사실 그녀가 왜 저렇게 매달리는지 알고 있었다.

이혼하면서 아버지는 데메테르 가문에서 엄청난 배상금을 뜯어냈다.

그 결과 세실리아의 상속분은 거의 없었다.

아껴서 살았다면 그럭저럭 먹고 살았겠지만, 애석하게도 제국 최고의 부호, 윈터스 공작 부인이었던 그녀의 소비는 쉽게 줄지 않았다.

그리고 아마 지금쯤이면 돈이 다 떨어져서 불안하게 살고 있을 것이다.


“왜 그러지?”

아무것도 모른다는 내 표정에 세실리아가 입술을 물었다.

자존심이냐, 실리냐를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닙니다. 기다리겠습니다.”

그래도 아직 판단력은 남았나 보다.

이 정도 몰아붙였으니 어디 가까운 리조트라도 잡아 줘 볼까?


“제이나!”

그때, 쾅, 소리와 함께 나타니엘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빠른 속도로 걸어와서는 내 몸을 이리저리 살폈다.


“뭐, 뭐예요?”

“몸은 괜찮은 건가?”

“예?”

갑자기 몸은 왜?

나타니엘은 날 숨기듯 내 앞에 서서 세실리아를 노려보았다.


“저 여자가 그대 건강에 악영향을 주고 있다.”

“…….”

꽤 뻔뻔한 세실리아였지만 나타니엘의 억지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화, 황태자 전하. 오해이십니다.”

“그때 쓰러진 것도 가짜인 거 안다. 심장 소리가 아주 평온했으니.”

음. 예상은 했지만 역시 연기였군.

일단 잔뜩 흥분한 나타니엘을 말리는 것이 먼저였기 때문에 그의 옷자락을 잡아끌었다.


“그만해요.”

“왜?”

그가 정말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얼굴로 날 돌아보는데 할 말이 없었다.

문 앞에는 나타니엘을 뒤쫓아 온 하녀들이 들어오지 못하고 서 있었다.

나는 손짓으로 하녀 한 명을 불렀다.


“레이디 데메테르를 근처 리조트로 안내해 주렴.”

“예, 비 전하.”

하녀는 조용히 세실리아의 옆에 섰다. 그녀는 다시 한번 몸을 숙이고 돌아 나갔다.

나타니엘은 그런 세실리아를 끝까지 노려보았다.

그녀가 나가고 문이 닫히자 방 안에는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정확히는 나한테만 어색한.

나는 일단 분위기를 바꾸기로 했다.


“잘 다녀오셨어요?”

“응.”

여전히 의심스러운 눈으로 날 이리저리 살피는 나타니엘을 보며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렇게 노골적인 걱정이라니.


“저 진짜 괜찮다니까요.”

“그때도 쓰러지기 전까지는 괜찮았다.”

드디어 안심했는지 소파에 푹 앉은 나타니엘이 사탕이 담긴 유리병을 들었다.


“당분간 다른 사람도 만나지 말고, 어디 나가지 마.”

이건 너무 과보호인데.

나는 뚜껑이 안 열려 당황하는 그의 손에서 유리병을 뺏어 가볍게 뚜껑을 열고 사탕을 꺼냈다.


“봐요. 저 완전 튼튼하잖아요.”

“유리병 정도는 아이도 딸 수 있어.”

방금까지 낑낑댄 주제에.

짜증이 나려는 걸 참으며 그의 입에 사탕을 밀어 넣었다.


“그러고 보니 빌의 가족은 어떻게 되었어요?”

“일단 마을까지 진입했다. 오늘 밤에 가서 마을에 결계를 치면 걱정 없을 거다.”

“다행이네요. 이제 없어진 사람들을 찾고,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방법만 알아내면 되겠네요.”

입 안에서 사탕을 굴리며 나타니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제일 어려운 거지.”

“흐음. 다들 아직 괜찮은 거죠?”

내가 묻는 건, 그들이 감정을 잃어 가는 정도에 대한 것이었다.

빌 가족의 증상은 나타니엘과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그래서 아직 방법을 찾느라 고생이었다.


“일단 고대 마법들 중 저주와 비슷하다는 건 알겠는데……. 흑마법이 섞여 있어서 그런지 해석이 쉽지 않군.”

흑마법에 관련된 서적은 아무래도 황실에 많이 없었다.

있다고 해봤자 흑마법을 방어하는 방법이나, 흑마법의 악영향을 정리해 둔 정도였다.

그때 누군가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킬리언 경이요.”

“응?”

“킬리언 경이라면 흑마법에 대해 더 잘 알지 않을까요?”

나타니엘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번 킬리언이 결계에 대해 조언해 준 이후로 그의 능력을 꽤 신뢰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믿을 수 없는 자다.”

“으음…….”

“외부인에게 이런 걸 알리기엔 위험 부담이 너무 커.”

“그렇다고 그냥 방치할 수는 없잖아요? 나타니엘은 어때요, 킬리언 경을 정말 못 믿을 자라고 생각하나요?”

그의 붉은 눈이 나를 빤히 보았다. 그러더니 곧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다면 한번 조언을 얻어 보죠. 어차피 나쁜 짓을 하려고 하면 나타니엘이 마법으로 그 사람의 기억을 지워 버리면 되는 거잖아요.”

내 말에 나타니엘은 조금 놀란 얼굴이었다.


“왜 그래요?”

“기억을 지울 생각은 한 번도 못 했어.”

그는 기본적으로 사람을 잘 믿지 않았다.

군신 관계인 마틴과의 신뢰 관계도 요즘 들어서야 조금씩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런 나타니엘이 몇 번 보지도 않은 킬리언을 쉽게 믿는다는 사실은 꽤 고무적이었다.


“킬리언 경은 제법 단순한 사람이죠. 거짓말도 안 하고요. 무엇보다 나타니엘에게서 무언가를 얻을 필요가 없는 사람이기도 해요.”

빙글빙글 웃으며 그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그러자 나타니엘이 얼굴을 찡그리며 뒤로 물러섰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나타니엘에게 친구가 생긴 것 같다고 말하는 거예요.”

“친구?”

덜컹, 소리와 함께 나타니엘이 충격을 받은 표정으로 날 보았다.

친구가 그렇게 위험한 단어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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