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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화. 그들이 함께했던 시간 (81/145)


81화. 그들이 함께했던 시간
2022.11.09.



 
간단히 옷차림을 정리한 막시밀리안은 식당에서 테레사가 돌아오길 기다렸다.


‘방이 마음에 들었을까?’

막시밀리안이 준비를 위해 윈터스성으로 오기 전, 갑자기 윈터스 공작이 찾아왔었다.

복잡한 표정의 그가 한참을 막시밀리안을 보다가 원래대로라면 제이나가 썼을 방의 열쇠를 건네주었다.

공작 부인이 쓸 방을 줄 생각이었던 막시밀리안은 그걸 거절했다.

그러자 공작은 이렇게 대답했다.


-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지 말고, 그 사람이 어떻게 받아들일지를 생각해라.

그리고 군말 없이 나가 버렸다.

막시밀리안은 곧 그 말의 뜻을 깨달았다.

그가 아는 테레사는 공작 부인의 방을 받는다고 좋아할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부담스러워 했겠지.’

결국, 막시밀리안은 아버지의 말대로 공녀의 방을 테레사에게 주기로 했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 오라버니는 정말 자기만 생각하는 사람이야.

언젠가 제이나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 이후로 많이 변했다고 생각했지만…….


“결국은 아버지보다도 배려하지 못했다니.”

자신은 누구에게나 관대하고, 친절하다고 생각했다.

주변 사람에게 한없이 너그럽고 자상하다는 평을 받았으니까.

하지만 그건 얄팍한 자기만족이었다.

며칠 전, 막시밀리안은 공작성에 돌아오는 내내 고민했다.


‘테레사가 뭘 좋아하지?’

기억을 더듬던 그는 어린 시절 테레사에게 받았던 선물이나 편지를 모아 둔 상자를 떠올렸다.

그리고 성에 도착하자마자 서재 한 편에 놓인 상자에서 과거의 유물들을 꺼냈다.

어렸을 때 쓴 일기까지 뒤져서 테레사가 좋아했던 것들을 정리했다.

그녀는 작고 아기자기한 꽃무늬를 좋아했고, 은은하고 부드러운 색채를 선호했다.

가구도 금이나 보석이 달린 것이 아닌 나무 무늬를 그대로 살려 만든 걸 좋아했다.

사실 생각해 보면 테레사의 취향에 대해 아주 모르는 것도 아니었다.


‘뭘 좋아하는지도, 어떤 걸 선호하는지도 알고 있었지.’

하지만 한 번도 테레사가 원하는 것을 준 적은 없었다.

뻔히 알고 있었는데도…….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봐 주길 바랐어.’

테레사는 단 한 번도 싫은 티를 내지 않았다. 그래서 매번, 밀어붙였다.

테레사가 공작 부인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려면, 그녀가 좋아하는 것들은 다 버려야 한다고 생각했으니까.

한심한 짓이었다.


‘아직 그때처럼 모든 게 끝난 건 아니야.’

테레사는 살아 있고, 시간은 많았다. 막시밀리안은 거기서 희망을 얻었다.

그때 하인이 식당 문을 두들겼다.


“소공작님, 메니실 영애가 왔습니다.”

“아, 어서 안으로 들어오라 해.”

마지막으로 옷매무새를 다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재빨리 문 앞에 섰다.

곧, 평소보다 조금 피곤해 보이는 테레사가 식당 안으로 들어왔다.


“이쪽으로 앉아.”

막시밀리안은 재빨리 의자를 빼 테레사에게 권했다.

테레사는 잠깐 그의 얼굴을 보고는 자리에 앉았다.


“이렇게 반겨 줘서 고마워요.”

“아니야. 오느라 많이 피곤했지? 금방 식사 준비 시작할 거야.”

어색한 침묵이 잠깐 흘렀다.

막시밀리안은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초조해했고, 테레사는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다행히 하인들이 바로 음식을 가져오기 시작했다.

웜 샐러드와 버섯 크림수프가 식탁 위에 올라왔다.


“어서 먹자.”

테레사는 묘한 눈으로 샐러드와 수프를 보았다. 그리나 곧 아무렇지도 않은 듯 식기를 들고 천천히 식사를 시작했다.

며칠이 걸린 긴 여행 동안 약해졌을 속을 달래기 위해 따뜻하고 부드러운 음식이 나왔다.

메인 디시도 담백하게 쪄 낸 생선 요리였다.

후식으로 따뜻한 계피차까지 마시고 나자 테레사는 긴장이 절로 풀리는 것 같았다.


“음식은 좀 어땠어?”

막시밀리안의 물음에 테레사는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오랫동안 알아 왔지만, 오늘처럼 그가 낯설어 보인 적은 처음이었다.

마치 자신에 대해 전부 알고 있는 것처럼 구는 것이 테레사의 신경에 계속 거슬렸다.


“이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됩니다, 소공작님.”

“부담……스러워?”

그답지 않게 제 눈치를 보는 것도 이상하게 짜증이 났다.

오늘, 막시밀리안이 잘못한 것은 없었다.


“부담스러운 건 아니에요. 그냥……. 하아, 피곤해서 그래요. 그만 일어나겠습니다.”

테레사는 자리에서 일어나 도망치듯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푹신한 감색 소파에 앉아 멍하니 천장을 보았다. 너무 넓지도, 좁지도 않은 적당한 크기의 방.

완벽하게 제 취향에 맞는 인테리어.

거기에 식탁에 올라온 음식들은 평소 테레사가 즐겨 먹던 것들이었다.


‘처음에는 긴가민가했는데.’

제이나가 알려 주지 않았을까 싶었지만, 식사 메뉴를 보니 아니었다.

막시밀리안은 처음부터 제 취향에 대해 다 알고 있었다.

그녀가 뭘 좋아하는지,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 전부.


“이럴수록 더 비참해.”

결국, 예전 막시밀리안은 알고 있으면서 모르는 척한 것이다.

테레사가 그와 어울리는 여자가 되고 싶어서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걸.

오늘 그가 좋은 뜻으로 제게 잘해 준다는 건 알았다.

하지만 테레사에게 그 태도, 반응들은 과거의 자신을 반추하는 거울처럼 느껴졌다.


‘이 정도도 덤덤하게 못 버티다니.’

테레사는 앞으로 어떻게 이 성에서 1년이라는 시간을 버텨야 할지 눈앞이 깜깜해졌다.

* * *



“호호호, 황태자 전하께서는 참 대단하시네요.”

나는 이 몸의 생물학적 어머니를 보며 말을 잃었다.

나타니엘을 향한 노골적인 아부성 멘트에 내 얼굴이 화끈거릴 지경이었다.

그녀는 식사하는 내내 자신의 처지에 대해 한탄했다.

이 시골에 처박혀서 젊음을 다 날리고, 얼마나 가난하게 사는지 일장 연설을 했다.

그러면서 있지도 않은 가족 간의 정을 거론하며 자신을 황성으로 데려가 주길 은근히 바랐다.


‘정말 엄청난 뻔뻔함이다.’

힐끗, 옆에서 차를 마시고 있는 나타니엘의 태도를 살폈다.

그는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대꾸조차 하지 않고 쿠키를 먹는 데 열중하고 있었다.


“흐흠…….”

점심만 먹으면 내쫓으려 했지만, 세실리아의 행동이 더 빨랐다.

재빨리 나타니엘에게 달라붙어 딸의 어린 시절을 알려 주고 싶다며 그를 꼬여 냈다. 그 바람에 지금까지 자리가 이어진 것이다.


‘후, 나도 모르니 알려 줄 수 있어야지.’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세실리아 데메테르는 훨씬 강적이었다.

마주친 그녀의 녹색 눈이 살짝 휘어졌다.

마치 날 비웃는 것처럼.


“제이나의 어린 시절을 알려 준다더니, 별 영양가 없는 이야기만 늘어놓는군.”

드디어 인내심의 한계를 느꼈는지 나타니엘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더 낮아졌다.

이런 나타니엘을 처음 본 세실리아가 몸을 움찔 떨며 뒤로 물러섰다.


“아, 제이나의 어린 시절을 말씀드린다는 게 그만……. 뭐 아주 평범한 여자아이였죠. 외모는 저를 닮아 꽃처럼 아름다웠지만, 어찌나 말괄량이에.”

가만히 듣고 있던 나타니엘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

“네?”

“그대와 제이나는 전혀 닮지 않았다.”

당당한 나타니엘의 말에 세실리아의 가면 같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렇지 않나?”

날 보며 되묻는데 할 말이 없었다.

객관적으로 보아도 내 얼굴은 세실리아의 외형을 그대로 빼다 박았으니까.


“그럼요. 황태자 전하의 말이 다 옳죠.”

하지만 뭐 어떤가.

저렇게 대놓고 나와 나타니엘을 이용하려는데.


“이제 그만 돌아가 주겠어요? 더는 제 어린 시절에 대해 하실 말도 없어 보이는데.”

나는 살짝 웃으며 고개를 까닥였다.

내 축객령에 세실리아의 얼굴이 바로 굳었다.

빨리 좀 가라는 뜻이었을 뿐인데 어쩐지 기분이 상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곧 표정이 바뀌었다.


“그래요. 제가 눈치 없이 신혼인 두 사람 사이에 끼어 있었네요.”

아니 그렇게까지 말한 적 없는데.

살짝 민망해진 난 표정 관리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


“눈치가 없는 건 제이나가 어머니를 닮았군. 너무 심려치 말게.”

“…….”

나타니엘의 말에 나도 세실리아도 할 말을 잃었다.

이 방에 있는 사람 중 눈치가 제일 없는 건 나타니엘이 아닐까?


“그럼 평안한 여행 되시길.”

드디어 세실리아가 인사를 하고 방을 나갔다.

탁, 문이 닫히는 소리까지 들리자 몸에서 긴장이 풀렸다.


“후…….”

“긴장했나?”

나타니엘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어, 음. 그런 거 같아요.”

“그대가 이렇게 긴장하는 건 오랜만이군. 황후 앞에서도 당당하더니.”

그러고 보니 그랬다.

아무래도 원작 속 세실리아의 패악질을 기억하는 탓일까.


‘하지만 황후도 원작에서 만만치 않았는데.’

둘의 차이가 뭐지?

잠깐 고민하려던 찰나, 다급한 목소리가 밖에서 들렸다.


“황태자 전하, 비 전하. 레이디 데메테르가 쓰러졌습니다.”

“뭐?”

이건 또 무슨 일이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현관문 근처에 세실리아가 바닥에 쓰러진 채로 있었다.

축 늘어져서 창백한 얼굴을 보자 내 심장이 툭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아…….”

순간, 머리가 지끈거리면서 눈앞이 핑 돌았다. 귓가에선 비명이 들리고 비릿한 향기가 났다.

그리고 눈앞이 까맣게 변했다.

* * *

낯선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기시감에 주변을 살펴보자 침대 옆에서 졸고 있는 나타니엘이 보였다.


“어.”

그를 부르려고 했지만, 목이 잠겨서 쉰 소리만 나왔다.

물을 마시고 싶어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깨어났나?”

언제 눈을 떴는지 나타니엘이 가까이 다가와 등을 받쳐 주었다.

침대에 앉자 그는 미지근한 물이 담긴 유리컵을 건네주었다.


“으, 이제 살 것 같아요.”

“갑자기 쓰러져서 놀랐다. 몸은 괜찮은 건가?”

“어디 이상한 곳은 없는 것 같아요.”

하지만 나타니엘은 꽤 불안한 모양이었다.

내 손을 꼭 잡고 꼼지락거리며 내 얼굴을 빤히 보았다.


 


“진짜 괜찮다니까요?”

“누구나 다 그런 말을 한다.”

“아…….”

그의 어머니도 처음에는 이런 증상을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내 증상의 원인은 확실했다.

독살이나 뭐, 그런 특별한 위협을 받아서가 아니었다.

갑자기 어렸을 때가 떠오른 탓이었다.

어머니는 불리한 상황이 닥치면 종종 기절하는 척을 했다. 어렸던 나는 그걸 보고 놀라 경기를 일으키기도 했다.


‘근데 내가 이걸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 거지?’

여전히 머릿속이 복잡했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으음.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진짜, 놀라서 그런 거라니까요.”

나는 손을 뻗어 그의 뺨에 손을 댔다. 보드랍고 말랑한 뺨을 만지작거리자 기분이 나아졌다.

평소 같으면 싫어하면서 뒤로 도망쳤을 나타니엘이었지만 오늘은 얌전히 있었다.


“그런가?”

“네. 아, 그러고 보니 어머니는 어떻게 하셨어요?”

“……?”

나타니엘은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레이디 데메테르요. 아까 현관 앞에서 쓰러졌잖아요.”

“아아.”

그제야 기억이 난 듯 나타니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딘가에 넣어 놨겠지.”

“…….”

전혀 신경 쓰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내일 세실리아의 반응을 상상하면 벌써부터 골치가 아파 왔다.

그래도 나쁘지 않았다.

소소하게 복수를 해 준 기분이랄까?


“배가 고프진 않은가? 아까 점심을 먹고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그제야 주변이 눈에 들어왔다.

밤이 되어 어둑어둑해진 창밖이 보였다. 시계를 확인해 보니 벌써 저녁 시간이 지나 있었다.


“간단한 거라도 먹을까 봐요. 나타니엘은요?”

“같이 먹지.”

그렇게 말한 나타니엘이 자리에서 일어나 문밖으로 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하녀들이 간단한 음식이 실린 트롤리를 끌고 들어왔다. 그리고 테이블 위에 접시를 세팅하고 조용히 나갔다.


“으아악!”

침대에서 나오려는 나를 나타니엘이 번쩍 안아 들었다.


“또 쓰러질지 모르니 내가 안고 가지.”

“아, 아니…….”

그는 내 대답은 듣지도 않고 성큼성큼 걸어서 테이블 옆에 있는 의자에 날 내려놓았다.


“배고플 텐데, 어서 먹어.”

나타니엘의 말에 난 얼떨떨한 표정으로 식사를 시작했다.

저녁을 다 먹고 나서도 그는 한사코 날 안아서 침대로 옮겨 주었다.


‘불안해서 그런가?’

불을 끈 나타니엘의 품에 안겨 잠이 들면서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내일이면 평소와 같아질 거라고 믿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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