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0화. 전 윈터스 공작 부인 (80/145)


80화. 전 윈터스 공작 부인
2022.11.05.



 
마차에서 하루를 보내자 온몸이 삐걱삐걱했다.

나는 어두운 표정으로 따뜻한 밀크티를 마셨다.


“눈 밑이 어두워.”

나타니엘은 그렇게 말하며 손가락으로 눈가를 문질렀다.


“으, 잠을 제대로 못 잤나 봐요.”

“그러니까 중간에 다른 도시에 머물렀다 가면 좋았잖아.”

원래 나타니엘이 세운 계획은 중간에 작은 도시에 들러서 하루 쉬고 출발하는 것이었다.


“거기서 머물면 빌네 가족이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하잖아요.”

게다가…….


‘이건 마차에서 자서 그런 게 아니야.’

지난밤, 꿈에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윈터스 공작 부인이 나와서 내내 시달렸다.

얼굴은 흐릿했지만 확실히 미인인 그녀는 무언가를 끊임없이 이야기했다.

질릴 정도로.

세실리아 윈터스, 윈터스 전 공작 부인 역시 원작에서 나왔었다.

그리고 시어머니라는 위치에 걸맞게 테레사에게 아주 독하게 굴었다.


‘그 엄마에 그 딸이라고 욕했던 게 생각나네.’

이혼까지 했으면서 자신이 소개해 준 여자를 막시밀리안에게 붙였다.

세실리아의 목적은 하나였다. 그녀를 통해 윈터스 공작가를 장악하고, 돈을 뜯어낼 생각이었다.

다행히 막시밀리안이 그 여자에게 넘어가지 않았다.

대신, 테레사와 막시밀리안의 사이가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되었지만.


‘설마 만나지는 않겠지?’

세실리아는 이혼하고 나서 온천 도시 히에라에 머물고 있었다.

이유는 하나였다. 그녀의 친정 가문에서 쫓겨난 데다가 그나마 남은 돈도 위자료로 다 내고 나니 남은 것은 히에라에 있는 그럴듯한 리조트 하나뿐이었다.

그것도 얼마 지나지 않아 말아먹었지만.

그걸 잊고 있었다니!


“어제부터 표정이 안 좋던데, 대체 이유가 뭐지?”

고민에 빠진 사이에 나타니엘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혹시 내가 말실수라도 한 건가?”

“아, 아니에요. 그런 게 아니라…….”

“그게 아니면?”

“사실은 히에라에 저희 어머니가 계시거든요.”

내 말에 그의 얼굴이 꿈틀거렸다. 그 역시 전 공작 부인인 세실리아에 대해 들은 것이 있을 것이다.

그녀의 화려한 전적 때문에 막시밀리안이 냉소적으로 변했고, 방치된 제이나는 고집쟁이로 자랐다.


“왜 그렇게 당황했는지 알 것 같군.”

“네……. 아버지가 그쪽 영지에 관심 없던 이유가 다 있었는데 깜빡했어요.”

원작을 읽은 지 좀 되어서 그런지 잊고 있었다.


“그동안 어머니와 연락한 적 있나?”

“있겠어요?”

아버지는 철저하게 우리와 세실리아의 만남을 막았다.


“서로 어색하겠군.”

“하아, 마주치지 않길 바라야죠.”

하지만 언제나처럼 내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 * *

드디어 히에라에 도착했다.

도시 입구가 보일 즈음 빌 일행은 내가 알려준 샛길로 빠져나가서 기다리기로 했다.


“이국적인 도시군.”

“그렇죠?”

나타니엘은 창밖을 내다보며 아름다운 풍경을 구경했다.

높이 솟은 산꼭대기에는 만년설이 쌓여 있었다. 그 밑에 자리 잡은 중소 도시엔 오밀조밀 예쁜 집들이 모여 있었다.

호화롭게 장식한 마차는 사람들의 시선을 모았다.


‘어머니가 모를 수 없겠는데.’

하긴, 황태자 부부가 방문하는데 화제가 되지 않을 리가 없었다.

드디어 마차가 윈터스 공작가 별장에 도착했다. 하얀 벽에 붉은 기와지붕을 얹은 2층짜리 건물이 보였다.


“도착했습니다.”

마부의 말에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신선한 공기가 폐부를 가득 채웠다. 아까까지 머릿속을 가득 채우던 걱정이 싹 사라지는 느낌이 들었다.

높은 톤의 낯선 목소리를 듣기 전까지는 그랬다.


“제니!”

나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한때 사교계의 꽃이라 불리던 세실리아 윈터스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틀어 올린 백금발이며, 서늘한 눈매의 녹색 눈이 나와 똑같았다.


“오, 오랜만이에요. 어머니.”

그녀가 가까이 다가와 내 손을 덥석 잡았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움찔하며 뒤로 물러나려 했지만, 고집스럽게 달라붙었다.


“그간 잘 지냈지? 내가 너희를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모를 거다.”

“아, 예…….”

그녀가 원작에서 나를 통해 막시밀리안에게 여자를 소개시켜 주려고 했던 걸 생각해 보면 왜 보고 싶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런데, 이쪽은 황태자 전하가 맞으신지?”

세실리아의 시선이 내 옆에 서 있는 나타니엘로 향했다.

끈적한 시선이 그를 위아래로 훑었다.

설마 그럴 일은 없겠지만, 역시 기분이 나쁜 건 어쩔 수 없었다.


“네, 맞아요. 나타니엘, 이쪽은 제 어머니인 레이디 데메테르입니다.”

“만나서 반갑군, 레이디 데메테르.”

나도 나타니엘도 그녀를 결혼 전 이름으로 불렀다.

세실리아의 고운 얼굴이 꿈틀거렸다. 윈터스 공작가에서 쫓겨났지만, 이곳에서 그녀는 공작 부인처럼 군림하고 있었다.

그러니 저런 이름으로 불린 적이 없었을 것이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황태자 전하.”

하지만 상대는 황태자였다. 그 불만을 마음대로 표출하기에는 어려웠다.

허리를 숙였다가 일어난 그녀가 물끄러미 나를 보았다.


“언제까지 날 여기에 세워 둘 셈이니, 응? 안에 들어가서 즐거운 이야기도 하고, 그래야지.”

금방이라도 날 잡아먹을 것 같은 시선이 집요하게 따라다녔다.

힐끗 나타니엘을 보자 그는 전혀 관심 없다는 얼굴로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오세요.”

“이렇게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비 전하.”

결국, 그 시선에 굴복한 나는 그녀를 안으로 초대했다.

어쩐지 들어가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 * *

막시밀리안은 초조한 얼굴로 공작성 앞을 왔다 갔다 했다.

그를 지켜보고 있던 윈터스 공작가의 기사단장, 데이먼이 한숨을 쉬었다.


“가만히 좀 계십시오, 그런다고 테레사 양이 빨리 오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달래듯 하는 말이었지만, 막시밀리안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창밖을 내다보고 다시 방 안을 빙빙 돌다가 소파에 앉았다 일어나기를 반복했다.

그때였다.

하녀가 노크를 하고 안으로 들어왔다.


“소공작님, 마차가 도착했습니다.”

“마차가?”

기다리던 소식에 막시밀리안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곧바로 문을 열고 계단을 따라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처음 보는 소공작의 모습에 데이먼은 처음으로 그가 한심하다는 생각을 했다.


‘모양 빠지게 여자한테 목을 매면 어쩌자는 거야.’

데이먼 역시 테레사에 대해서는 들은 바 있었다. 윈터스 공작가 적장자의 약혼녀라기엔 많이 부족하다고 느꼈다.

그래서 파혼 소식에 은근히 기뻐했던 것도 사실인데…….


‘후, 곧 안주인으로 모시게 될지도 모르니 정신 차리자.’

그는 재빨리 막시밀리안의 뒤를 따라갔다.

계단을 내려가 현관에 다다르자 막시밀리안이 막 문을 열고 있었다.

둘은 거의 동시에 밖으로 나왔다.

현관 앞에 선 평범한 갈색 마차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내렸다.

먼저 내린 것은 붉고 긴 머리카락을 느슨하게 묶은 남자였다. 그리고 그의 손을 잡고 단아한 인상의 여자가 마차에서 내렸다.

막시밀리안은 단숨에 달려가 그녀의 앞에 섰다.


“어서 와, 테레사.”

“소공작님, 이렇게 맞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여행은 피곤하지 않았나?”

“괜찮았습니다. 길동무가 있어서 더 그랬던 것 같아요.”

그제야 막시밀리안의 시선이 제일 먼저 내린 킬리언에게 향했다.

방금까지 철저히 무시당하던 킬리언이 어색하게 앞으로 나섰다.


“하, 하하.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소공작님. 프리체 공국에서 온 킬리언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윈터스 공작가의 막시밀리안입니다.”

막시밀리안은 킬리언이 왜 이곳에 왔는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테레사와 같이 온 그에 대해 좋은 마음이 드는 것은 아니었다.

속이 좁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비 전하께 하실 일에 대해 들었습니다. 먼 길을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완벽하게 웃는 막시밀리안의 모습을 보며 데이먼이 움찔 몸을 떨었다.

어린 시절부터 소공작을 보아 왔던 그는 알았다.

저런 미소는 막시밀리안이 제 감정을 억누르느라 필사적일 때나 짓는 것이다.


‘약혼자 호위를 위해 붙은 사람이라고 했는데.’

막시밀리안은 하인들을 시켜 두 사람의 짐을 방으로 옮기라 명했다. 그리고 뒤를 돌아 한 걸음 뒤에 서 있는 데이먼을 불렀다.


“데이먼, 이쪽으로.”

제 주인의 마음을 세심하게 살피던 데이먼은 갑작스러운 부름에 정신을 차리고 앞으로 나아갔다.


“이쪽은 성의 경비를 맡고 있는 데이먼 경입니다. 데이먼, 그대가 도와주길 바라.”

“만나서 반갑습니다.”

시원스럽게 악수를 건네는 킬리언의 손을 데이먼이 덥석 잡았다.


“오셨으니 일단 제가 방으로 안내하도록 하겠습니다.”

“예?”

“이쪽입니다.”

데이먼은 당황한 킬리언을 끌고 서둘러 자리를 떴다.

드디어 둘만 남자 막시밀리안이 테레사의 곁에 섰다.


“우리도 들어갈까?”

“네.”

언제나 웃고 다녔던 예전과 달리 테레사의 얼굴에는 냉기만 돌았다.

그래도 막시밀리안은 좋았다.

그녀가 제 옆에 있다는 그것만으로도.


“한동안 머물 방을 준비해 뒀어. 이쪽이야.”

막시밀리안의 말에도 테레사는 자리에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왜 그래? 뭐 따로 챙겨 가야 할 것이라도 있어?”

“아, 소공작님이 절 안내해 주실 거라고는 생각 못 했어요.”

그제야 테레사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막시밀리안은 멍청히 서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뒤를 쫓았다.

마물과의 전쟁, 그 최전선에 위치한 성답게 실용적이고 단단한 인상을 주는 곳이었다.

화려해서 눈이 멀 것 같은 수도의 윈터스 공작저와는 완전 딴판이었다. 한동안 말없이 걷던 테레사가 입을 열었다.


“성이라 그래도 따뜻하지만…….”

“하하, 그래도 여전히 춥지? 북쪽이라 어쩔 수 없네.”

복도는 몸이 움츠러들 정도로 찬 바람이 불었다.


‘공작저는 따뜻해서 겨울에도 여름옷을 입을 수 있을 정도였는데.’

“왜 이렇게 지내는 거예요? 마석이 부족한 것도 아니잖아요.”

“아? 음……. 그냥 딱히 불편한 것도 없고.”

별거 아닌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둘은 부드러운 갈색 나무 문이 달린 방에 도착했다.


“이따가 점심이라도 같이…… 먹을 수 있을까? 소개해 주고 싶은 사람도 있고.”

막시밀리안은 손바닥으로 목 뒤를 쓸어내리며 말했다.

어쩐지 목이 발갛게 달아오른 것처럼 보였지만, 테레사는 신경 쓰지 않았다.


“네, 그럴게요.”

그러고는 몸을 돌려 방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밖에 덩그러니 남아 있던 막시밀리안은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제 방으로 돌아갔다.


“후우…….”

막시밀리안의 발소리가 멀어지자 방에 있던 테레사가 길게 숨을 내쉬었다.

철저하게 막시밀리안을 이용하자고 생각하면서 왔건만, 막상 그의 얼굴을 마주하니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일단, 나나가 올 때까지…….”

혼잣말을 하던 테레사는 방 안의 모습을 보고 잠시 말을 멈췄다.

연한 민트색 위로 작은 들꽃이 수놓인 벽지를 바른 방엔 진한 오크색 원목 가구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테레사는 천천히 방 안을 걸으며 그것들을 살폈다.

가구에는 보석이나 금칠을 하진 않았다.

하지만, 조각의 형태나 나무 재질을 보면 틀림없는 고급품이었다.

곳곳에 놓인 작은 소품들과 꽃들은 얼마나 세심하게 방을 꾸몄는지 알려 주었다.

누가 보아도 자신의 취향을 꼭 빼다 놓은 방이었다.


“이걸 막스가?”

지금껏 그에게 받은 것들은 테레사의 취향에 하나도 맞지 않았다.

비싸고 화려한 물건들은 그녀의 공간에서 너무 튀었다.

마치 그의 옆에 있는 자신의 처지 같아서 씁쓸했던 기억이 가득했다.


“비 전하가 해 주신 거겠지?”

테레사는 금방 생각을 고쳐먹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막시밀리안은 이 정도로 세심한 남자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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