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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화. 신혼여행 준비 중 (79/145)


79화. 신혼여행 준비 중
2022.11.02.


나타니엘은 내 다리에 얼굴을 기댄 채로 한참을 말이 없었다.

나는 손을 뻗어 그의 머리를 토닥여 주었다.


“다른 마력이 느껴져서, 무슨 일이 생긴 줄 알았다.”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가 웅얼거렸다.


“아무 일 없었어요. 다행히 마탑주가 와 줬거든요.”

“킬리언 경이?”

“네. 흑마법에 대해 꽤 잘 아는 것 같더라고요.”

그러고 보니 예전에도 자신이 나타니엘보다 마법 이론에 대해서는 더 잘 알고 있다고 자신했었다.


‘그땐 그냥 허세인 줄 알았는데 그 정도는 아닌가 보네.’

나는 여전히 무릎에 얼굴을 기댄 채 눈을 감고 있는 그의 뺨을 톡톡 건드렸다.


“일어나서 이리 앉아요.”

옆자리를 손으로 탕탕 치자 그가 쭈뼛거리며 올라와 앉았다.

본인도 부끄러웠는지 뺨이 붉었다.

시선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는 모습에 슬그머니 웃음이 나왔다.

그의 한 줌뿐인 자존심을 지켜 주기 위해 모르는 척해 주기로 했다.


“이거요.”

두꺼운 노트를 건네받은 그가 내용을 보다가 투덜거렸다.


“대체 뭐라고 쓴 건데?”

“하……하하.”

킬리언은 천재라는 명성에 걸맞지 않게 글씨를 정말 못 썼다. 나도 그가 옆에서 설명해 주지 않았다면 아마 뭐라 썼는지 못 알아봤을 것이다.


“흑마법의 매커니즘이라고 하던걸요. 어려워서 저는 잘 모르겠지만 나타니엘은 알아볼 거라고 했어요.”

“흠.”

내 말에 다시 나타니엘이 다시 노트를 들여다보았다.

꽤 진지한 얼굴로 읽던 그가 입을 열었다.


“이런 쪽 자료는 구하기 어려운데 잘되었군.”

“그래요? 도움이 될 것 같아요?”

“몇 가지만 살짝 바꾸면. 황실 소속 마법사들을 불러서 장치를 손보면 될 것 같아.”

“공작가에 알려 줘도 될까요?”

“내가 개발한 것도 아닌데, 마탑주 쪽에 물어봐야지.”

“그건 저에게 맡겨 주세요.”

날 보는 나타니엘의 눈에 불신이 아른거렸다. 이건 킬리언이 아나이스를 어떻게 대하는지 못 봐서 저러는 거다.

분명 킬리언은 아나이스에게 마음이 있어 보였다. 이건 수년간 로맨스 소설을 읽은 내 직감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여동생의 연애사를 알려 주는 건 좀 별로겠지?’

일단 나만의 비밀로 간직하기로 했다.

하지만 웃음이 자꾸 나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 * *

다이애나는 자리에 앉아서 창밖을 내려다보았다.

흐릿하게 보이는 창밖의 모습에 다이애나는 초조하게 드레스 자락을 만졌다.


‘날 구해 줄 동아줄인 줄 알았더니.’

황제의 정부로 지내던 시절, 다이애나는 자신을 찾아온 마법사 집단을 보고 그런 생각을 했었다.


“멍청했어.”

오라버니를 제물로 바쳐서 완성한 비약은 갑자기 들이닥친 그들에게 빼앗겼다.

게다가 무슨 생각인지 자신을 알 수 없는 장소에 감금해 두었다.


“마침 일어나 계셨군요.”

“아.”

후드를 쓴 남자가 스르륵 벽을 통과해서 나타났다.

갑자기 나타난 인기척에 다이애나는 경계심을 숨기지 않으며 뒤로 물러섰다.


“그렇게 경계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날 감금해 놓고 그런 말을 할 수가 있나요?”

“감금이라니요. 저희는 당신을 보호하는 것뿐입니다. 아니었다면 당신이 이렇게 태연하게 말을 할 수는 없었겠죠.”

남자의 말은 사실이었지만, 불안한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들의 목적도 모르니 더욱 그랬다.


“얼마 전까지 황후에게 이용당했던 걸 생각하면 이런 반응도 이해합니다.”

남자의 말에 수치스러움을 느낀 다이애나는 얼굴을 붉혔다.


“일단 저희 목적은 당신과 같습니다. 테레사 메니실, 그녀를 제거하는 것이죠.”

“그…… 여자를요?”

특별한 능력을 가진 것도, 권력의 정점에 선 것도 아닌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런 여자를, 스스로 세계의 조정자라 부르는 집단이 도대체 왜?’

남자는 낮게 웃더니 조용히 말을 건넸다.


“너무 자세하게 알려고 하지 마십시오. 지금은 당신과 우리가 한 편이라는 게 중요하죠.”

“날 배신할 수도 있잖아요.”

“우리가 배신해도 당신은 죽고, 아니어도 당신은 죽습니다.”

조곤조곤 말했지만 사실상 협박이었다. 다이애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고분고분한 태도에 남자는 만족스러운 듯 웃었다.


“곧 기회가 올 겁니다. 우리가 당신을 도와줄 터이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말하고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내 효용 가치를 높여야 해.”

다이애나는 입술을 물고 중얼거렸다. 테레사를 죽이는 것이 저들의 목적이라면, 그들이 원하는 걸 먼저 쥐는 것이 중요했다.


“아.”

드디어 비약의 사용처를 정했다.

그들에게 약을 빼앗겼지만, 그렇다고 모든 걸 잃은 건 아니었다.

머릿속에 들어 있는 건 빼앗아 갈 수 없으니까.

예전에는 꺼림칙해서 얻기 힘들었던 재료들도 이제는 아무렇지 않게 다룰 수 있었다.

다이애나는 기억을 더듬기 시작했다.

* * *

당연하게도 킬리언은 흑마법을 막는 방법을 윈터스 공작가에 전수해 주기로 했다.

수도에 있는 저택과 영지에 있는 공작성까지 봐 주겠다며 나섰다.

나는 예상을 뛰어넘는 그의 친절에 고마워했다.


“이렇게까지 해 주시지 않아도 되는데요.”

“그 유명한 윈터스 공작성을 볼 기회 아닙니까! 당연히 함께해야죠.”

“…….”

눈치도 없이 신혼여행에 끼겠다고 말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이쪽에서 부탁한 것이라, 저렇게 의욕적으로 가서 보고 싶은 것들을 말하는 모습에 거절할 수 없었다.

힐끗 옆을 보자 뾰로통한 표정의 나타니엘이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


“설마 같은 마차를 타고 간다는 건 아니겠지?”

나타니엘의 말에 킬리언이 화들짝 놀라며 양손을 저었다.


“저에게도 양심이라는 게 있습니다. 당연히 마차는 따로 탑니다! 제 첫 번째 목적지는 공작성이니까요.”

그럼 다른 날 출발해도 되는 거 아닌가?


“그래도 혼자 가면 좀 쓸쓸하잖아요.”

마치 내 생각을 읽어낸 듯 킬리언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도와주려는 사람에게 면박을 준 기분이라 머쓱해졌다.


“음……. 그럼 메니실 영애와 함께 가 주실 수 있나요?”

“윈터스 소공작의 약혼녀하고요?”

“예. 먼저 출발했지만, 천천히 갈 예정이라 금방 따라잡을 수 있을 거예요. 제가 따로 연락해 둘게요.”

“좋은 여행 친구가 생겼네요.”

활짝 웃는 킬리언에게 진짜 부탁을 꺼냈다.


“여행 친구도 있지만, 메니실 영애의 호위도 좀 겸해 주었으면 해서요.”

“아, 아아……. 저만 믿으십시오!”

어쩐지 의심이 들었지만, 킬리언의 호들갑에 금방 잊혀졌다.


“전하, 출발 준비가 끝났습니다.”

시종의 보고를 들은 나타니엘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마차에 올랐다.


“그럼, 조만간 뵙겠습니다!”

킬리언은 손을 흔들고는 뒤로 물러섰다. 우리가 탄 마차가 덜컹거리며 출발했다.

다리를 쭉 펴도 될 만큼 넓은 내부에는 푹신한 붉은 쿠션이 깔려 있었다.


“멀리 가야 하는데 괜찮겠나?”

“이 정도는 아무렇지 않아요.”

마석과 마법을 이용한 마차라 승차감이 아주 좋았다.

이 정도면 시골길을 달리는 버스보다 훨씬 좋았다.


“그대는 가끔 보면 정말 귀족 영애로 큰 게 맞는지 의심스러워.”

나타니엘의 말에 괜히 뜨끔해져서 방긋 웃는 것이 다였다.


“그나저나, 잘 따라오고 있겠죠?”

“좀 피곤하긴 하겠지만 잘 쫓아올 거다. 문제가 생기면 신호를 주기로 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아라.”

우리가 탄 마차 뒤로 빌과 그 가족들이 따라오고 있었다.

아이들은 작은 마차에 타고, 부부가 그 마차를 끌기로 했다.

그리고 나타니엘이 그들에게 은신 마법을 걸어 주었다.


“아이들이 답답할까 봐 걱정이에요. 이틀이나 마차 안에만 있는 건 어른들도 힘든데…….”

갑자기 나타니엘이 내 얼굴을 빤히 보았다.


“왜 그러세요?”

“그대는 마물이 무섭지 않은 건가?”

“네?”

“날 처음 보았을 때도 놀라지 않더니, 외형이 바뀌었다지만 그들을 정말로 인간 아이처럼 생각하는군.”

“음…….”

물론 생긴 건 무서운 괴물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나타니엘과 달리 난 그들과 말이 통했다.


“아무래도 말이 통해서 그런가 봐요. 게다가 나타니엘한테 익숙해진 것도 있고요.”

“그렇군.”

조금 뺨이 붉어진 채로 나타니엘이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아직 그가 말하지 않는 것이 있어 보였다.


“왜 그래요?”

“별거 아니다.”

“뭔데 그러는데요?”

이런 별거 아닌 게 쌓여서 나중에 얼마나 큰일이 생기는데!

내가 한참을 묻자 나타니엘이 겨우 입을 열었다.


“내가 이렇게 유치한지 몰랐는데.”

오, 그걸 모르셨다니.

장난치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웃어 주며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뭔가 특별한 걸 빼앗긴 기분이야.”

“어…….”

그의 말에 나 역시 침묵했다.


‘지금 아이들한테 질투한다는 건가?’

나타니엘은 손으로 얼굴을 쓸다가 밖을 내다보며 중얼거렸다.


“됐다, 아까 한 말은 잊어버려.”

부끄러운지 말이 빨라지고 귀 끝이 붉었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반대편에 앉아 있는 그의 옆자리로 옮겼다.

나타니엘에게 감정은 약이기도 하고 독이기도 했다.

최대한 그가 긍정적인 감정을 느끼기를 바랐다. 나는 그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제가 제일 신경 쓰는 사람은 당신뿐인 거 알죠?”

여전히 창밖을 보고 있던 나타니엘이 느릿하게 고개를 움직였다. 그의 귀가 더욱 붉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차는 윈터스 공작령 근교에 도착했다. 이동에만 꼬박 이틀이 걸리기 때문에, 오늘은 이곳에서 야영할 계획이다.


“흐음.”

마차 창밖으로 나타니엘의 명을 따라 기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모닥불을 피우고, 음식을 만들기 시작했다.

대단한 요리는 아니지만 그래도 꽤 고급 식자재로 만든 것이라 맛이 있긴 할 것이다.


‘꼭 캠핑하는 것 같아서 재밌다.’

물론 요리까지 내가 하면 더 재밌겠지만, 지금은 내 위치를 지키는 게 나았다.

내가 나가서 도와준다고 해봤자 다들 불편해할 게 뻔했다.


‘지금 나타니엘만으로도 저렇게 뻣뻣하게 굳어 있는데…….’

나는 꼭 인형처럼 삐걱거리며 움직이는 기사들의 모습을 보며 키득거렸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나타니엘이 그릇에 스튜를 담아 들고 마차로 돌아왔다.


“우와, 맛있을 것 같아요.”

“그런가?”

나타니엘은 꽤 무표정한 얼굴로 내게 그릇을 넘겼다.

그리고 반대편에 앉아 천천히 식사를 시작했다.

음식은 생각보다 더 괜찮았다. 처음 먹어 보는 향신료가 있어서 조금 부담스러웠지만, 그것 빼고는 완벽했다.

한 그릇을 다 비우고 나자 나타니엘의 그릇에 스튜가 한참 남아 있는 것이 보였다.


“왜 입맛에 안 맞아요?”

“아니.”

아, 혹시 음식을 누가 먼저 먹어 주지 않아서 그런가?

하지만 같은 냄비에서 나온 거라 딱히 기미를 할 필요는 없어 보였는데.


“그런데 왜 그래요?”

나타니엘은 고개를 젓고는 다시 식사를 시작했다. 그리고 나처럼 한 그릇을 다 비우고 그릇을 치웠다.

어느새 밖은 어둑어둑해져서 별이 하나둘, 뜨기 시작했다.

하루 종일 마차에만 있었던 탓에 몸이 찌뿌둥했다.

난 산책이라도 할 생각에 마차에서 내렸다.

밖에는 그 사이에 야영지 주변을 살피고 돌아온 나타니엘이 있었다.

편한 복장인 날 물끄러미 보다가 물었다.


“왜 나와?”

“산책이나 할까 해서요. 나타니엘도 갈래요?”

“그러지.”

바로 허락한 나타니엘이 슬그머니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가 내민 손을 잡고 숲으로 들어갔다.


“으, 역시 북쪽은 춥네요.”

“어쩔 수 없지. 그래도 그대의 고향 아닌가?”

“북부에서 태어났지만 쭈욱 수도에서 컸다고요.”

“윈터스 공작가 사람들은 다들 추위에 강하다고 들었는데……. 그대는 아닌가 보군.”

“흠, 오라버니나 아버지는 추위에 강한데 전 어머니를 닮아서 그런가 봐요. 이상하게 추위에 약하더라고요.”

나타니엘이 작은 빛 구슬을 띄워 산책로를 밝혔다.

푸른 잎을 다 떨군 자작나무 숲의 앙상한 가지 위로 눈이 남아 있었다.

구슬의 노란 빛에 물든 숲의 모습은 신비로웠다.

나는 오랜만에 하는 여행에 살짝 들떠서 발걸음이 빨라졌다. 공기도 좋고 풍경도 좋은 데다가 나타니엘과 함께 있으니 아무 걱정도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우리는 작은 것에 즐거워하고 웃으며 길을 걸었다.

정말로 이렇게 평화로운 시간은 오랜만인 것 같아서 몸이 가벼웠다.

한 바퀴 돌고 돌아오는 길, 멀리 마차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그대 어머니는 어떻게 지내고 계시지?”

나타니엘의 물음에 나는 그대로 걸음을 멈췄다.

너무 바빠서 잊고 있었다.


‘어머니가 거기에 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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