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두 번 차일 주인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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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화. 두 번 차일 주인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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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화. 두 번 차일 주인공
2022.10.29.
테레사는 초조한 얼굴로 옷자락을 만지작거렸다.
막시밀리안과 오랜 기간 약혼한 채로 지냈지만, 공작과 단둘이 자리를 함께한 기억은 없었다.
윈터스 공작은 늘 바빴고, 막시밀리안 역시 그런 부분에 신경 쓰는 남자는 아니었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제이나가 있을 때 만나는 게 차라리 나았을지도.’
뒤늦은 후회를 하며 그녀는 자신을 초대한 사람을 기다렸다.
곧, 덜컥 응접실 문이 열리고 윈터스 공작이 들어왔다.
테레사는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숙였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윈터스 공작님.”
“그래……. 오랜만이로구나. 앉거라.”
윈터스 공작은 복잡한 얼굴로 테레사를 보다가 자리에 앉았다.
“내가 부른 이유를 너도 알 거라고 생각한다.”
“예…….”
테레사 역시 공작이 둘의 약혼을 쉽게 허락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런 자리가 한 번쯤은 있을 거라 예상했다.
“하나만 묻자. 무슨 생각으로 막스와 다시 약혼하겠다고 한 게냐?”
공작의 물음에 테레사는 잠시 말을 아꼈다.
막시밀리안은 그녀에게 아버지께 서로 사랑을 확인했다고 말하자 했다. 하지만 테레사는 거짓을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가족의 안녕을 위해 본가를 떠나 공작가로 숨어든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전 지금 목숨을 위협받고 있는 상황입니다.”
“대체 누가……?”
“처음에는 그로반 남작가인 줄 알았습니다. 저희 가문을 몰락시키고 그걸 빌미로 소공작님을 협박하려 하더군요.”
테레사의 말에 공작의 얼굴이 심각하게 변했다.
그로반 남작가라면 얼마 전 완전히 몰락했다. 다이애나가 황제의 목에 칼을 들이미는 반역을 저질렀기에 가문의 직계는 모두 죽고 방계는 작위를 박탈당했다.
“하지만 그들이 몰락하고 나서도 암살 위기에 시달렸습니다. 심지어 마법사까지 가담한 일이었어요.”
“아직 그로반 영애가 잡히지 않았다지만……. 마법사를 고용할 정도로 대단한 힘을 가진 것 같지는 않던데.”
“소공작님은 모종의 집단이 관여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습니다.”
테레사의 말에 공작 역시 짚이는 것이 있는 듯 보였다.
귀족들 사이에서 조용히 소문이 돌았던 그 ‘기사단’의 이야기를 그도 들어보았다.
“하지만, 대체 왜?”
“글쎄요. 우연의 일치일지도 모르지만, 이상할 정도로 사고가 자주 일어났습니다. 불안해하던 때, 소공작님이 저를 지켜 주겠다 하셨어요.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염치없이 안전한 곳에 숨어 있고 싶어지더군요.”
공작은 테레사를 잘 알았다.
그녀는 남에게 폐를 끼치는 걸 결벽적으로 싫어하는 아이였다.
‘그러니 공작가에서 그 수모를 겪으면서도 불평불만 한마디 하지 않았겠지.’
복잡한 표정의 공작을 보며 테레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에게도 목숨이 걸린 문제였으니 막시밀리안에게만 모든 걸 맡길 생각은 없었다.
“이번 한 번만 도와주시면 다시는 공작가를 귀찮게 하지 않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테레사가 허리를 굽혀 예를 갖췄다.
공작은 한 박자 늦게 그녀의 말에 의문을 가졌다.
“더는 귀찮지 않게 하겠다니?”
“제 안전이 확보되면 조용히 파혼할 생각이에요.”
제 아들이 지금 두 번 차이게 생겼다.
* * *
신년제가 미루어지고, 조금 여유가 생기면서 나도 주변에 신경 쓸 수 있게 되었다.
그간 제일 궁금했던 테레사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시간이 나자마자 그녀를 불렀다.
“오라버니와 다시 약혼하기로 결정했다면서요.”
“그렇게 되었어요. 비 전하가 신경 써 주셨는데 이렇게 되어서 죄송해요.”
“아니요, 저한테 미안할 게 뭐가 있어요. 전 테레사의 선택을 믿어요.”
나는 테레사의 행복을 바라지만, 그녀의 의지를 제한하는 방향으로 몰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꼭 묻고 싶은 것이 있었다.
“용서……하기로 한 거예요?”
테레사가 화를 풀고, 막시밀리안을 조금이라도 품어 줄 생각이 있는지.
“용서라고 할 게 있을까요? 제가 멋대로 막시밀리안의 마음을 착각했던 것뿐인데요.”
자조 섞인 테레사의 말투에 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에 대한 막시밀리안의 사랑이 거짓은 아닐 것이다.
원작에서도 제 마음을 꽤 솔직하게 보였으니까.
‘그때도 후회는 하지 않고 꼿꼿이 제 방식대로 테레사에게 마음을 표현했지.’
그 모습이 얼마나 재수 없었는지, 악플을 달았던 기억이 새삼 떠올랐다.
잠시 딴생각에 빠졌을 때, 테레사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다이애나 양이 잡히면, 깨끗하게 헤어질 생각이에요.”
그 말에 나는 입이 절로 벌어졌다.
한 사람과 두 번 파혼이라니.
처음 그 얘기를 들었을 땐 설마 했는데 진심이었나 보다.
막시밀리안이 불쌍한 건 둘째 치고 그렇게 되면 테레사의 결혼 또한 어려워질 것이다.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어요.”
정말 아무렇지 않게 웃는 얼굴에선 걱정이나 두려움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약혼 기간 동안 막시밀리안이 했던 짓을 생각해 보면 결혼 생각이 없어질 만도 했다.
“걱정이라니요. 테레사에게는 황태자비인 제가 있는데 왜 걱정을 해요.”
“맞아요. 제 뒤에 거물이 버티고 있는데요, 뭘.”
테레사를 위한 자리 정도는 충분히 만들어 줄 수 있었다. 계승권이 없는 준남작 자리라도 내어 주면 누구도 그녀를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약혼식은 안 할 생각이에요.”
“약혼식을 안 한다고요?”
뒤이어 나온 선언에 나는 들고 있던 쿠키를 떨어뜨렸다.
원래 태중 약혼이었기에 약혼식조차 없었던 둘이었다. 앞으로 결혼을 안 할지도 모르니 이런 행사는 화려하게 치러 주고 싶었는데.
“네. 그냥 조용히 약혼 서류만 주고받고 공작령에 함께 내려갈까 생각 중이에요.”
“공작령에는 왜요?”
“아무래도 수도는 한동안 시끄러울 거 같아서요.”
“흐음……. 그렇죠.”
둘이 꽤 화려하게 파혼하고 그 결과로 내가 결혼까지 했는데, 다시 약혼을 한다면?
확실히 내려가는 편이 정신건강에 좋을 것이었다. 아쉽긴 하지만 이해할 수 있었다.
“비 전하, 당분간 옆에 있어 드리지 못해 죄송해요. 아직도 일이 많은데.”
“아니에요. 요즈음 황제 폐하께서 아주 의욕적으로 일하고 계시거든요.”
“어머, 그래요?”
“네. 그 덕에 제가 처리하던 일이 다시 황후 폐하께 넘어갔지 뭐예요?”
마치 젊음을 되찾은 것처럼 황제의 의욕이 대단했다.
그 결과 나와 나타니엘의 여가 시간이 대폭 늘어났다. 우리는 마물이 된 사람들이 머물 장소에 마을을 만드는 일에 집중했다.
“그래서 우리 부부는 조만간 윈터스 공작령에 있는 온천 마을에 놀러 갈 거예요.”
“온천 마을이요?”
“네!”
마물로 변한 사람들을 숨겨 둘 마을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보안이었다. 그래서 나타니엘의 도움을 받아 주변에 결계를 세워 두기로 했다.
그러려면 직접 그 장소에 가야 했고, 우리는 그 핑계로 그간 미뤄 두었던 신혼여행을 떠올렸다.
다행히 주변에 꽤 유명한 온천 마을이 있었다. 거리상으로는 살짝 멀었지만, 나타니엘의 마법이라면 이동하는 데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러니 테레사, 그때 즈음 놀러 오세요.”
“그럴게요.”
가벼운 화제로 넘어가자 분위기가 훨씬 부드러워졌다. 한참 이야기하다 보니 어느새 저녁 시간이 다 되어 갔다.
테레사는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하고 떠났다. 아마 당분간은 만나기 힘들 것 같아서 더 아쉬웠다.
창으로 그녀를 태운 마차가 멀리 사라지는 모습을 보고 있는데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나타니엘?”
뒤를 돌아보자 그 자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무언가 이상했다.
나는 애써 침착하게 나타니엘이 알려 준 방법으로 마력을 움직였다.
그가 알려 준 마법은 세 가지였다.
탐지 마법, 몸을 숨기는 마법, 그리고 일격필살 마법.
‘탐지 정도는 할 줄 안다 이거야.’
천천히 마력을 바닥을 따라 퍼뜨렸다. 섬세하게 퍼진 마력이 구석에 있는 누군가와 반응했다.
‘여기서 아는 척해야 해?’
상대는 대담하게 황태자궁까지 쳐들어온 실력자였다. 이제 막 마법을 익힌 초보인 내가 이길 확률은 거의 없었다.
‘누, 누가 좀…….’
나타니엘은 어디에 있지? 오늘은 시찰을 나간다고 한 것 같은데.
일단 누군가를 불러야 할 것 같은데 몸이 굳어서 입이 열리지 않았다.
그때 하녀가 문을 두들겼다.
“비 전하.”
“들어오거라.”
순간 안도감이 밀려왔다. 곧 문이 열리고 하녀가 안으로 들어왔다.
“아나이스 황녀 전하와 킬리언 경이 찾아왔습니다. 급한 일이라고 하는데 어찌할까요?”
예고 없이 갑작스러운 방문은 큰 실례였다. 하지만 목숨을 위협받는 지금 상황에선 아주 고마운 일이었다.
“안으로 들어오라고 하렴.”
최대한 자연스럽게 웃으려 얼굴 근육을 움직였다. 이러다가 경련이 날까 걱정스러웠다.
곧 킬리언과 아나이스가 들어왔다. 그러자 의심스러운 기척이 사라졌다.
순간, 긴장이 풀리면서 몸이 휘청였다.
“비 전하!”
아나이스가 재빨리 다가와 내 몸을 잡아 주었다. 킬리언은 방 안을 스윽 훑더니 어깨를 으쓱였다.
“도망쳤군요.”
짧은 말에 그가 침입자의 존재를 느끼고 올라와 줬다는 걸 깨달았다.
간신히 정신을 수습하고 자리에 앉았다.
“와 줘서 감사합니다, 킬리언 경.”
“별일이 없으셔서 다행입니다.”
아나이스만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눈만 깜빡거렸다.
나는 짧게 한숨을 삼키고 말을 이어 갔다.
“다른 곳도 아니고 황궁이 뚫릴 줄은 몰랐어요. 방심했던 거죠.”
“황태자 전하가 계셨다면 절대 이런 생각을 하진 못했을 겁니다.”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아나이스의 표정이 굳었다.
이곳은 황궁에서 가장 보안이 보장되는 곳 중 하나다.
돈을 퍼부어서 마석으로 곳곳에 마법 감지 장치를 설치해 두었는데 외부인이 몰래 들어오다니!
“지금 황태자궁에 누군가가 침입했다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황녀 전하. 하지만 너무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그들이 사용하는 마법이 좀 특이해서 걸리지 않은 것뿐이니까요.”
킬리언은 아나이스를 안심시키듯 방긋 웃었다. 그러고는 과장된 몸짓으로 자기 자랑을 시작했다.
듣다 보면 못 들어줄 정도로 미친 소리였지만…….
‘이것 봐라?’
항상 타인에게 가시 돋친 반응을 보이던 아나이스의 태도가 눈에 띄게 부드러웠다.
아까 전까지 불안해서 어쩔 줄 몰라 하던 소녀가 이제는 작게 웃기까지 한다.
“흐음…….”
눈을 가늘게 뜨고 둘의 모습을 지켜보다가 소리가 새어 나왔다. 아나이스와 킬리언은 그제야 내 존재를 깨닫고 어색하게 시선을 돌렸다.
부자연스러운 침묵이 잠깐 이어졌다.
“하여튼, 이 위대한 마법사 킬리언이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결국 침묵을 참지 못하는 병에 걸린 킬리언이 가슴을 탕탕 치며 호언장담했다.
어째서일까.
내 마음속에서 킬리언의 신뢰도가 급격하게 추락하는 느낌이다.
“하, 하하. 이래 보여도 이쪽 분야 최고의 권위자라고…… 자부할 수 있습니다.”
내 눈치를 보며 말끝을 흐리는 모습에 웃음이 튀어 나왔다.
마탑주의 확언이니 아주 못 믿을 정도는 아니긴 했다.
‘게다가 꽤 재밌는 상황이잖아, 이거.’
나는 킬리언을 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좋아요. 한번 믿어 볼게요.”
* * *
킬리언과 아나이스가 돌아간 뒤, 나는 방에 앉아서 킬리언이 제안한 방어법이 적힌 노트를 보고 있었다.
“제이나!”
우당탕 소리와 함께 나타니엘이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평소에도 창백한 얼굴이 핏기 하나 없이 하얗게 질려서 꼭 시체처럼 보였다.
“오셨어요?”
태평한 반응에 그가 얼굴을 구겼다.
이게 아닌가?
뭐라고 말해 줘야 할지 고민하는 사이, 그가 성큼성큼 걸어오더니 내 발치에 쓰러지듯 주저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