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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화. 고백 이후 (77/145)


77화. 고백 이후
2022.10.26.



“어!”

순간, 펑 소리와 함께 나타니엘이 원래 모습으로 돌아왔다.

나도 나타니엘도 놀라서 그대로 굳어 버렸다.

나타니엘은 천천히 제 몸을 살피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떻게 돌아온 거지? 분명 아까는 안 됐는데.”

그의 말에 나도 잠시 고민해 보았다. 변수가 무엇인지 차근차근 되짚어 보던 난 설마 하는 마음으로 물었다.


“다시 용으로 변해 봐요.”

“으음.”

잠깐 빛이 나더니 자연스럽게 그의 모습이 변했다. 작아진 그를 두고 나는 욕실로 들어가서 소리쳤다.


“다시 변신해 봐요!”

“아…….”

이번엔 낮은 탄식이 들려왔다.

문을 열고 침실로 돌아오자 그는 여전히 새끼 용의 모습이었다.

그 순간.


“흐음.”

다시 펑 소리와 함께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나타니엘의 얼굴이 조금 붉었다.

그 역시 이유를 깨달은 듯했다.

부끄러운지 얼굴을 숨기려고 필사적으로 이불을 끌어 올렸다.

나는 놀리고 싶은 마음에 그의 위에 올라타서는 이불을 잡아당겼다.


“내가 없으면 안 되겠네.”

“뭐, 뭐! 그런 거 아니야.”

큰 소리를 내며 도망치려는 그를 꼭 끌어안았다.


“으악!”

그러자 나타니엘이 다시 도망치듯 뒤로 밀려났다. 그 바람에 우리는 우당탕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다행히 그가 날 받아 줘서 크게 다치지는 않았지만…….


“안 다쳤어요?”

“안 다쳤다. 큰일 날 뻔했잖아.”

번쩍, 그가 날 안아 들어 침대 위에 내려 주었다.

멀어지려는 나타니엘의 목을 확 끌어당겼다. 단단한 가슴팍에 뺨을 대고 가만히 눈을 감았다.


“혼자 보내서 미안해요.”

“으음. 그대가 간다고 했어도 데려가진 않았을 건데.”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절대 혼자 보내지 않았을 거예요.”

나타니엘은 내 말에 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커다란 손이 머리를 토닥여 주었다.


“다치거나 그런 건 아니야.”

“그럼요?”

“그냥, 어렸을 때 생각이 나서.”

나타니엘은 날 끌어안고 어렸을 적 이야기를 꺼냈다.

나약하고 무력했던 시간. 폭력에 무방비하게 노출되었던 시절이 떠오르면서 말 그대로 공황상태가 왔다고 했다.


“나도 내가 그렇게 당황할 줄 몰랐는걸.”

그를 안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나타니엘의 입가에 입을 맞추고 그에게 속삭였다.


“이제 괜찮은 거죠?”

“응.”

우리는 가만히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다 살짝 입을 맞추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그가 어린 시절 입은 상처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게다가 점점 감정을 잃어 가던 원작과 달리 지금은 오히려 감정이 풍부해지고 있었다.


‘긍정적인 감정만큼 부정적인 감정들도 커지는 걸 거야.’

불안정한 그의 상황에, 기반이 되어 줄 단단한 주변의 애정이 필요했다.

나는 습관적으로 그의 머리카락을 쓸었다. 손가락 사이로 사르륵 빠져나가는 부드러운 머릿결에 기분이 좋아져서 웃음이 나왔다.


“왜 웃는 거야.”

“나타니엘이 좋아서요.”

“뭐, 뭐야…….”

그는 부끄러운지 고개를 숙이고 애꿎은 이불만 만지작거렸다.

나는 진지하게 그의 동그란 머리통을 빤히 보며 물었다.


“이런 모습도 사랑스러워 보인다면 이미 콩깍지 씐 정도가 아니라 중병에 걸린 게 아닐까요?”

날 향한 황당하다는 표정도 사랑스럽다. 나는 몸을 일으켜 그의 귓가에 아까 하다 만 이야기를 속삭였다.

이제는 터질 것같이 붉어진 그의 얼굴에 소리를 내며 웃다가 혼이 나는 건 덤이었다.


 

* * *

드디어 아침 조례에 황제가 참석했다.

그간 황제의 인장이 없어 처리를 미뤄 두었던 서류들을 빠르게 처리하기 시작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결재를 위해 이른 아침부터 황성은 분주하게 돌아갔다.

나는 회의가 끝나고 나타니엘이 서재로 돌아오자마자 물었다.


“그로반 남작가는 어떻게 처리하기로 했나요?”

“가문의 직계는 모두 사형에 처하고, 방계는 작위를 박탈하기로 결정했다. 문제는 그로반 남작은 살해당한 채 발견되고, 다이애나는 도망쳤다는군.”

“거기서요?”

이해할 수 없었다.

나타니엘을 구하러 가기 직전, 미리 황성에 지원군을 요청해 두었다. 그 짧은 시간 사이에 평범한 아가씨가 흔적도 없이 도망치는 것은 어려웠다.


“아무래도 그들이 개입한 것 같군.”

“그게 아니라면 그 삼엄한 포위망에서 빠져나갈 수 있을 리가 없겠죠.”

이런 비상식적인 일이 벌어지니 어쩔 수 없이 디에스 기사단이 떠올랐다.


“일단 추적자들을 붙였지만, 흔적을 찾지 못했다. 내가 가서 보았는데도 완벽하게 숨었더군.”

“나타니엘이 살펴봤는데도 못 찾은 거면 어쩔 수 없죠.”

그가 찾을 수 없는 거라면 다른 방법이 없었다.


‘테레사가 공작저에 머물기로 한 건 잘한 일 같네.’

얼마 전, 오라버니가 은근히 도움을 요청했던 것을 떠올렸다.

테레사가 다이애나의 위협에서 안전하게 지낼 수 있는 건 환영이었지만 적극적으로 뭔가를 도와줄 생각은 없었다. 이제 그건 두 사람의 일이었다.

테레사는 선택을 했고, 그녀의 마음을 돌리는 건 막시밀리안의 몫이었다.

나는 내가 해결할 수 없는 일에 더는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괜히 불안해해 봐야 아무 소용없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타니엘 역시 별다른 고민 없이 다음 화제로 넘어갔다.


“그리고 아버지가 양심의 가책을 느꼈는지 신년제를 조금 미루자고 하시더군.”

“신년제를요?”

“그래. 토벌까지 시간을 번 셈이지.”

나와 나타니엘이 정신없이 바빠진 이유는 마물로 변한 인간들의 후속 처리 때문이기도 했다.

그들의 말을 듣고, 우리는 비밀리에 사람을 파견해 갑자기 사라진 마을을 찾도록 했다.

걱정했던 대로 쥐도 새로 모르게 사라진 아주 작은 마을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 주변에 마물이 늘어났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우리는 잠정적으로 그 마을 사람들이 마물로 변했다고 결론 내릴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이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는 방법은 찾았나요?”

“딱히 좋아지는지는 모르겠더군.”

“역시 그 사람들에겐 마력이 없어서일까요?”

“그렇겠지.”

나타니엘이 용과 사람의 모습을 오가는 방법을 알려 줘도 그들에겐 소용없었다.

애초에 몸 안에 있는 마력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나타니엘과 평범한 인간이 같을 리가 없었다.


“그것보다 급한 건, 그들을 숨길 장소야.”

원래 사람이었다지만 지금은 마물이 된 자들을 제 영지로 들일 영주는 없을 것이다.

나 역시 부모님께 함부로 부탁하기 어려운 구석이 있었다.


“일단 숨어 있을 장소는 찾았어요. 윈터스 공작령에서도 버려진 땅인데…….”

“공작가가 너무 큰 부담을 지는 것 같은데.”

언제 이성을 잃을지 모르는 마물을 품는다는 건 쉬운 선택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타니엘이 모르는 것이 있었다.


“그 땅은 원래 버려진 거나 다름없는 곳이에요. 가는 길이 워낙 험해서 잊혀진 땅이거든요. 설령 무슨 일이 생겨도 공작가에 책임 소재를 묻기도 어려운 위치고요.”

“그런 땅을 그대가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아버지께서 종종 오라버니를 벌준다고 그리로 보내 버렸거든요.”

“…….”

아주 가혹한 땅이어서 겨울에 가면 인생의 쓴맛을 느낄 수 있는 곳이었다.

문제는 그런데도 정신 못 차리고 살던 막시밀리안이 결국 테레사에게 뻥 차여 버렸다는 거지만.


“하여튼 그들을 숨겨서 데려가는 게 문제겠군. 장거리 이동이 쉽지 않을 텐데.”

“그건 걱정하지 말아요. 제가 다 생각해 둔 게 있거든요!”

나는 방긋 웃으며 가슴을 탕탕 쳤다. 나타니엘의 표정이 아까보다 더 어두워진 느낌이 드는 건 착각일 것이다.

* * *

윈터스 공작은 제 앞에서 아들이 하는 말을 들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누구랑 약혼을 하겠다고?”

“테레사와 약혼하겠습니다.”

공작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지금 막시밀리안이 말하는 이름이 머리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제 아들이 아무리 여자에 미쳤어도 싫다는 테레사와 약혼하려 할 리가 없었다.


“내가 아는 그 테레사 말이냐?”

“예.”

“혹시 너 혼자 착각하는 건 아니고?”

“……아닙니다. 테레사와 이미 이야기를 끝냈습니다.”

공작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올렸다. 꼭 끔찍한 악몽을 반복해서 꾸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너희 둘이 말을 나눴다고 해도 난 허락할 수 없다. 약혼이 애들 장난도 아니고, 이게 무슨 짓이야!”

공작은 분노에 차서 말을 쏟아냈다. 둘의 파혼을 시작으로 윈터스 공작가는 많은 것을 잃었다.


“네 잘난 사랑놀음 탓에 제이나는 바라지도 않던 결혼을 하고, 공작가는 황실에 배상금까지 갖다 바쳤는데 이제 와서!”

결국 공작은 화를 참지 못하고 앞에 놓여 있던 탁자를 세게 내려쳤다. 우직, 하는 소리와 함께 탁자가 힘을 버티지 못하고 반으로 부서졌다.

절박한 마음에 막시밀리안은 자리에서 일어나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아버지께서 왜 반대하시는지 압니다. 하지만, 이번 한 번만 제 편을 들어 주십시오.”

막시밀리안의 말에 윈터스 공작은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 자존심 강한 놈이 사랑에 눈이 멀어서 무릎까지 꿇으며 매달리는 꼴이 한심하기만 했다.


“정신을 놓은 게냐? 네가 싫어서 파혼한 메니실 영애가 네가 뭐가 예쁘다고 다시 약혼을 한단 말이냐.”

“이미 저희끼리는 이야기 끝냈습니다.”

“그럼 너희 둘이 알아서 해! 더는 공작가를 끌어들이지 말고.”

공작의 말에 막시밀리안은 몸을 더 숙였다. 테레사를 설득하는 것도 어려웠지만, 아버지를 설득하는 것도 만만치 않을 것이라 예상했던 바다.


“제가, 테레사에게 얼마나 못난 약혼자였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도 실망시켰고요.”

막시밀리안은 제 잘못을 솔직하게 드러냈다. 누구에게도 틈을 주지 않고 오만하고 고고하게 굴었던 그였다.

그렇게 제 자존심을 지키고 남은 것은 사랑하는 사람들의 상처뿐이었다.


“제게 한 번만 만회할 기회를 주십시오.”

“그 기회가 누굴 위한 기회라고 생각하느냐?”

여전히 냉담한 얼굴의 아버지를 보며 막시밀리안은 입술을 물었다.


“오직 가문과 테레사를 위해서라고는 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이대로 아무것도 시도하지 못하고 그녀를 놓친다면 평생 후회할 것 같습니다.”

테레사의 마음을 잡는 건 부차적인 문제였다. 지금 막시밀리안의 목적은 하나였다.

그녀를 끝까지 살려내는 것.


“이렇게 부탁드리겠습니다.”

머리까지 조아리는 아들의 모습에 공작은 입을 닫았다.

그 자신만만하던 아들이 고작 사랑에 미쳐서 제게 무릎을 꿇고 애원한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공작에게 사랑은 알 수 없는 감정이었다. 공작 부인과의 정략결혼은 돌이킬 수 없는 비참한 결과만 남겼다.

공작은 이혼 도장을 찍으며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사랑을 불신했다.


‘그래서 아이들만큼은 정략결혼에 희생당하게 두고 싶지 않았건만…….’

결국, 가문을 위해 제이나가 희생되었을 때 공작은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을 맛봤다.


“하아…….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도 네놈을 가문에서 쫓아내고 싶지만.”

사랑하는 여자라고 무릎까지 꿇어 가며 애원하는 아들의 모습에 마음이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자식의 행복을 바라는 것은 어느 부모나 같은 마음이기에.

공작은 눈을 질끈 감고 입을 열었다.


“좋다.”

“가, 감사합니다!”

막시밀리안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아버지의 손을 덥석 잡았다.

언제나 무뚝뚝하고 거리를 유지하던 아들이 친근감을 표시하자, 공작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슬쩍 손을 빼고 고개를 돌린 그가 퉁명스럽게 말을 이었다.


“그 전에, 내가 테레사를 만나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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