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다치지 말아요
(76/145)
76화. 다치지 말아요
(76/145)
76화. 다치지 말아요
2022.10.22.
바닥에 축 늘어진 나타니엘을 보자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하지만 냉정해져야 했다. 까딱 잘못했다가는 우리 가문이 역모로 몰릴 수가 있으니까.
나타니엘을 둘러싼 기사들은 대여섯 정도 되어 보였다.
alt="">
‘붙어도 우리한테 충분히 승산이 있어.’
나는 일부러 크게 소리쳤다.
alt="">
“반역자, 다이애나 그로반은 당장 그 손을 치워라!”
alt="">
“반, 반역자…….”
그제야 자신의 처지를 깨달은 듯 다이애나가 주춤 뒤로 물러섰다.
주변에 있던 기사들도 황제를 인질로 잡고 있는 걸 들킨 것에 당혹스러운 기색이었다.
지금 당황해서 판단 능력이 흐려진 틈을 노려야 했다.
alt="">
“당장 반역자들을 처단하고 폐하를 보호해라!”
alt="">
“예!”
루나 경을 중심으로 기사들이 앞으로 튀어 나갔다. 제국에서 이름을 날리는 기사단답게 그들은 빠른 속도로 상대편 기사들을 진압했다.
alt="">
“큭!”
황제의 목에 칼을 겨누고 있던 다이애나는 주변을 살피다가 재빨리 도망쳤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제국의 황제에게 검을 들이밀었으니, 그로반 가문은 이미 끝났다.
alt="">
“나타니엘!”
나는 나타니엘에게 달려가 입고 있던 로브를 벗어 그의 몸을 감쌌다. 평소에도 체온이 낮았지만, 지금은 정말 시체처럼 차가웠다.
눈물이 나오려는 걸 꼭 참고 그를 품에 안아 들었다.
그 사이 반역자들을 모두 제압한 루나 경이 내게 다가와 물었다.
alt="">
“비 전하, 어떻게 할까요?”
alt="">
“기사단 인원 중 반은 폐하를 궁으로 모시고, 나머지는 여자를 추적한다.”
alt="">
“비 전하께서는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alt="">
“일단 궁으로 돌아가겠다.”
지금은 나타니엘의 안위가 먼저였다.
그를 품에 안은 채 마차에 오르자, 넋이 나간 황제가 앉아 있었다.
alt="">
“나타니엘……. 대체, 이게 어찌 된 일인지 설명해 주겠느냐.”
황제는 축 늘어진 나타니엘을 보고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고는 곧 날 책망하는 듯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alt="">
“이렇게 위험한데 대체 왜 보낸 게냐.”
당신이 여자에게 넋이 나가서 이렇게 된 건데…….
alt="">
“원래대로라면 제 모습으로 돌아와서 괜찮았을 거예요.”
울컥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지금 탓해 봤자 소용없는 일이었다. 나는 천천히 황제에게 그간 나타니엘의 생활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어렸을 때부터 용과 인간 사이를 왔다 갔다 했고, 혼란스러운 현실에서 도망치기 위한 수단으로 감정을 지워 갔다는 걸.
그리고 나와 만나게 된 이유도 그가 새끼 용이 된 모습을 들켰기 때문이라는 것까지.
alt="">
“하, 하하. 그럼 나타니엘이 점점 성격이 괴팍해지고 사람들을 피하던 이유가…… 괴로워서라고.”
alt="">
“제가 생각하기에는 그렇습니다, 폐하.”
나는 로브 안에 있는 나타니엘의 등을 살살 쓰다듬었다. 아까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던 몸에 조금씩 온기가 돌기 시작했다.
최대한 그를 품에 바짝 끌어안고 등을 토닥였다. 그러자 느릿하게, 붉은 눈이 살짝 뜨이더니 날 바라보았다.
alt="">
“제이나?”
alt="">
“괜찮아요? 어디 부러지거나 그런 건 아니죠?”
나타니엘은 도리도리 고개를 젓고는 온기를 찾듯 품으로 파고들었다. 나는 그를 꼭 끌어안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속으론 궁금했다. 왜 사람의 모습으로 변하지 않은 건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요 작은 몸으로 상대에게 맞선 건지도.
alt="">
“이제 곧 집으로 갈 거예요. 조금만 참아요.”
성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특별한 방법이 있는 건 아니었다.
용을 치료할 줄 아는 사람도 없었고, 작은 새끼 용의 몸으로 사람의 약을 먹어도 되는지 의문이었다.
답답한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나타니엘은 느릿하게 눈을 깜빡거리다가 다시 잠이 들었다.
alt="">
“나타니엘과 사이가 좋구나.”
alt="">
“네. 저희는 부부니까요.”
alt="">
“하, 하하. 그렇지. 결혼한 지 벌써 반년이 넘어가니 그게 맞지.”
어쩐지 그렇게 말하는 황제의 얼굴에 씁쓸함이 엿보였다.
alt="">
“이 녀석. 위험하면 그냥 도망쳤으면 될 것을 끝까지 버텨 가지고는.”
스스로를 자책하는 듯한 황제의 말에, 나는 나타니엘을 안은 손에 힘을 주었다. 아까 그의 뒤로 기사 서넛이 쓰러져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성장했다지만 이 몸으로 기사 몇을 상대하는 건 무리였다.
alt="">
“나타니엘은 폐하를 가족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러니 목숨을 걸어서라도 지키려고 한 것이고요.”
다들 그에 대해 잘못 알고 있다.
나타니엘은 누구에게도 정을 주지 않고, 타인에게 관심이 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제게 소중한 사람들에게는 늘 최선을 다하고, 그들이 사라지면 상처받았다.
원작에서도 그랬고, 지금 내가 아는 나타니엘도 그랬다.
alt="">
“내가 무엇을 해야 하지?”
alt="">
“폐하께서는 다이애나의 흑마법에 걸려 계셨어요. 이후 어찌하실지는 모두 폐하의 뜻에 달려 있습니다.”
alt="">
“으음. 내 이 일은 철저하게 처리하도록 하지.”
alt="">
“감사합니다.”
어느새 마차는 황성의 정문을 통과해 본궁에 도착했다. 미리 폐하를 모시고 오겠다 연통을 넣어 둔 덕에, 시종장이 입이 무거운 몇몇과 함께 마중을 나와 있었다.
황제는 마차에서 내리려다가 나를 돌아보았다.
alt="">
“필요한 것이 있다면 바로 알려 다오.”
alt="">
“예, 폐하.”
아마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나타니엘이 잠에서 깨어나기를 기다리는 것뿐이겠지.
그렇지만 나는 애써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alt="">
“나타니엘을 잘 부탁한다, 아가.”
황제는 씁쓸하게 웃으며 마차에서 내렸다.
마차는 내가 인사할 틈도 없이 출발했다.
나는 나타니엘을 살짝 안아 들며 중얼거렸다.
alt="">
“분명 폐하께서도 나타니엘을 받아들이신 걸 거예요.”
어느새 황태자궁에 도착했다.
그가 깨어나면 이 기쁜 소식을 들려주겠다 생각하며, 나는 마차에서 내렸다.
alt="">
* * *
다이애나는 타운 하우스에 있는 연구실로 향했다. 밖에서 기사들의 기합 소리와 쇠붙이들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방문을 열고 서랍장을 뒤지기 시작했다.
alt="">
“없어, 없어! 어디 간 거야!”
있어야 할 책이 없다. 실험을 기록해 둔 노트도 없어졌다. 다이애나는 오싹한 기분이 들어 바닥에 주저앉았다.
alt="">
“분명, 그 주술은 아무도 깰 수 없다고 그랬는데.”
그녀는 손톱을 까득까득 깨물며 불안한 얼굴로 연구실의 모든 곳을 뒤졌다.
alt="">
“다이애나! 왜 이렇게 밖이 시끄러운…….”
그때 눈치도 없이 아닉스가 소리를 지르며 연구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방 안에 벌어진 처참한 모습을 보고 말을 잃었다.
alt="">
“다, 다이애나. 너 대체 무슨 짓을.”
alt="">
“별것 아니에요. 오라버니께서 신경 쓰실 필요 없어요.”
마치 자신을 무시하는 듯한 말에 아닉스는 발끈했다.
윈터스 공작에게 시원하게 머리카락을 밀리고 나서부터, 아니 그 전, 황태자에게 생식 기능을 잃고 난 뒤부터 그의 열등감이 팽배해져 있었다.
아닉스는 다짜고짜 다이애나의 뺨을 때렸다.
alt="">
“네가 날 무시해!”
그리고 바닥에 쓰러진 그녀를 향해 욕설을 내뱉으며 화풀이를 했다.
alt="">
“감히, 너 따위가! 그 시골에서 썩어 갈 뻔한 널 내가 얼마나 도와주었는데, 고작 폐하의 정부밖에 못 된 것이, 나를!”
한번 터진 분노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그리고 그 분노는 가장 가까이에 있는 약한 상대에게 향했다.
다이애나는 몸을 잔뜩 웅크렸다.
alt="">
‘대체 내가 왜?’
자신은 곧 윈터스 공작 부인이 될, 황제와 함께 정세를 주무르던 여자였다.
게다가 전설 속의 기사단까지 나타나 해법을 주지 않았던가!
엎드려 있던 다이애나는 손을 뻗어 아닉스의 다리를 확, 잡아당겼다.
alt="">
“으악!”
우당탕 소리를 내며 비대한 몸이 나무 바닥 위에 떨어졌다.
alt="">
“이게 미쳤나! 어디서 감히…….”
큰소리를 치던 아닉스는 입술을 꾹 닫았다.
다이애나의 눈이 붉은빛을 띠며 광기로 번들거렸다.
alt="">
“제가 오라버니보다 못한 게 뭐죠?”
alt="">
“뭐, 뭐? 감히 나에게 그런 것을 물어!”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아닉스의 몸은 덜덜 떨리고 있었다. 갑자기 제 여동생이 꼭 악마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는 침을 꿀꺽 삼키고 다이애나를 달래기 위해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alt="">
“네가 폐하를 가까이서 모시면서 너무 오만방자해졌구나. 정부 자리가 다 무엇이더냐. 당장 나와 고향으로 내려가자. 내 제대로 된 남자와 연을 맺을 수 있도록…….”
그로반 남작이 했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정상적인 말들이었다.
그러나 변한 것은 다이애나였다. 이미 수도의 사교계에서 화려함을 맛본 그녀는 시골에서 오라버니를 모시고 살던 그 다이애나가 아니었다.
alt="">
“그로반 남작령으로요? 그 시골에 제가 왜요?”
그녀의 입술이 비틀렸다. 그래, 이렇게 한심한 오라버니도 쓸모가 있는 날이 있구나.
alt="">
“다, 다이애나?”
아닉스는 불길한 느낌에 주춤주춤 뒤로 기어갔다. 손발에 힘이 풀려서 도저히 제대로 몸을 일으킬 수가 없었다.
그런 아닉스를 비웃으며 다이애나는 책상으로 가서 날카로운 단검을 꺼냈다.
alt="">
“그동안 사람을 해치는 방법을 꺼렸는데.”
흑마법의 핵심은 영혼을 바치는 것이었다.
방법은 알고 있었지만 다이애나에게 남아 있던 양심이 여태껏 그것을 망설이게 했다.
그러나 일이 어그러지고, 궁지에 몰리자 다이애나는 스스로 속죄하는 어려운 길 대신 누군가를 희생하여 제 욕망을 이루는 편한 길을 선택하기로 했다.
alt="">
“오라버니는 절 사랑하니까 이해하실 거예요. 그렇죠?”
그녀는 단검을 높이 들어 올렸다.
* * *
방으로 돌아온 나는 깨어난 나타니엘을 찬찬히 살폈다. 다행히 큰 상처는 없는 것 같았고, 비늘이 살짝 까진 정도였다.
alt="">
“많이 아파요?”
도리도리, 새끼 용이 고개를 젓고는 축 늘어진다.
조심스럽게 그를 데리고 욕실로 향하니, 이미 욕조에 적당한 온도의 물이 채워져 있었다.
손끝으로 온도를 확인한 나는 손으로 물을 퍼서 나타니엘의 몸에 끼얹었다.
alt="">
“으으…….”
alt="">
“뜨거워요?”
다시 고개를 젓는다.
alt="">
“몸이 저릿저릿해.”
alt="">
“얼었던 몸이 풀려서 그런가 봐요. 조금만 참아 봐요.”
물을 끼얹을 때마다 꼬리가 움찔거렸다. 몸이 살짝 따뜻해지자 나는 그를 욕조에 넣어 주었다.
여전히 늘어진 채, 꾸벅꾸벅 조는 그가 물에 빠지지 않도록 붙들고 있었다.
30분 정도 시간이 지나자 나는 새끼 용의 몸을 수건으로 가볍게 닦아 냈다.
그리고 욕실을 나와 그를 이불 안에 넣어 주는 것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끝냈다.
이불 안에 미리 부드러운 천으로 감싼 탕파를 넣어 두었으니 무척 따뜻할 것이다.
마음에 드는지 골골거리는 소리와 함께 이불이 일정한 속도로 오르내렸다.
한숨 돌린 뒤 내 차림새를 보니 엉망이었다.
욕실에서 후다닥 씻고 잠옷으로 갈아입고 나오자 낑낑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alt="">
“나타니엘?”
놀라서 침대로 달려가 이불을 들어 올리자 새끼 용이 잔뜩 몸을 웅크린 채로 서럽게 울고 있었다.
alt="">
“왜 그래요? 어디가 아파요?”
alt="">
“삐이―.”
나타니엘은 말도 하지 않고 덜덜 떨고만 있었다. 작은 손으로 이불을 꼭 쥐고 눈물까지 뚝뚝 흘리고 있었다.
alt="">
‘악몽이라도 꾼 건가.’
길게 생각할 시간도 없이 그를 끌어안고 등을 토닥였다. 나타니엘은 꾸물거리며 내 품으로 파고들었다.
alt="">
“울지 마요.”
훌쩍거리며 내 잠옷에 뺨을 비비는 나타니엘을 보며 속삭였다.
마치 대답하듯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에 살짝 웃음이 나왔다. 이제 막 깬 듯 보였지만, 창피해서 이러는 게 틀림없었다.
나는 일부러 모르는 척해 주기로 했다.
불을 끄고, 같이 침대에 누워 볼록 튀어나온 이불 위를 토닥거리며 중얼거렸다.
alt="">
“내가 없는 데서 다치지도 말고, 아프지도 말아요.”
하나하나 앞으로 그가 지켜야 할 것들을 늘어놓았다.
alt="">
“위험한 데 먼저 나서도 안 되고, 다른 그 무엇보다 나타니엘을 최우선으로 생각해야 해요. 알았죠?”
대답 대신 꼬리가 살랑거리기만 했다. 나는 살짝 웃으며 그에게 속삭였다.
alt="">
“나타니엘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제가 엄청 슬퍼서 아플 거란 말이에요.”
alt="">
“그대가? 어째서?”
이불에 묻혀서 조금 뭉개진 목소리가 평소보다 더 귀여웠다.
나는 웃으며 그에게 말했다.
alt="">
“그야 제가 당신을…….”
alt="">
al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