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탈출하는 두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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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화. 탈출하는 두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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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화. 탈출하는 두 사람
2022.10.19.
필립스는 복슬복슬한 털옷을 입고 있는 나타니엘을 내려다보았다.
항상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던 아들이 이런 귀여운 생명체라는 사실에 어안이 벙벙했다.
“세상에, 그래. 정말 네가…….”
황제는 조심스럽게 나타니엘을 들어 올렸다.
순한 강아지처럼 가만히 앉아 있는 아들이 신기하기도 했다.
“대체 여기는 어떻게 들어온 게야?”
“못 올 곳을 온 것도 아니지요.”
나타니엘은 뾰로통한 목소리로 말하며 침대 위에 안착했다.
이곳에 오는 동안 곳곳에 중무장을 한 기사들이 보였다. 설마 권력에 대한 집착이 강한 아버지가 기사들을 제어하지 못할 거라고는 생각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건 나타니엘의 착각이었다.
기사들은 모든 보고를 다이애나와 그로반 남작에게 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그렇게 무능력한 자는 아닌데.’
나타니엘은 자신의 아버지를 빤히 바라보았다.
어딘지 모르게 우울한 기색이 얼굴에 가득했다.
“허허허. 너처럼 자존심 강한 녀석이 이런 모습으로 나타나다니.”
황제는 조심히 손을 뻗어 나타니엘의 작은 머리를 토닥였다.
화를 낼 줄 알았지만, 그냥 가만히 내버려 두는 모습이 정말 제 아들이 맞는지 의심스러웠다.
“정말 나타니엘이 맞는 거냐?”
“저 말고 이런 모습으로 변할 수 있는 자가 또 있다는 이야기는 못 들었습니다.”
필립스는 황제인 자신에게도 툭툭대는 모습을 보고서야 나타니엘임을 확신했다.
“하도 이 타운 하우스에 콕 처박혀서 나오시지 않아 찾으러 왔습니다.”
“으응? 아니 왜? 여기도 편하고 좋은데.”
“편한 게 문제가 아닙니다. 대체 저들에게 무엇을 허락하고 계신 겁니까?”
나타니엘은 눈을 가늘게 뜨고 황제의 몸을 살폈다.
마력의 기운을 찬찬히 살피는데 무언가가 이상했다.
‘뭐지?’
생각했던 것보다 흑마법의 기운은 미약했다.
고작 해 봐야 갖고 있는 감정을 증폭시키는 정도밖에 되어 보이지 않았다.
그 말은 즉 아버지는 진짜 다이애나에게 감정이 있다는 뜻이었다.
자신의 아버지가 여자라면 사족을 못 쓴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답이 없을 줄은 몰랐다.
“그냥 적당히 해먹겠지.”
필립스는 태연하게 앉아서 침대 옆 테이블 위에 놓인 얼음 잔에 술을 담았다.
술잔을 가볍게 흔드는 모습에는 인생에 대한 걱정이라고는 하나도 없어 보였다.
나타니엘은 뭐라 하려다가 그만두기로 했다.
“이 돌이나 받으십시오.”
“이게 뭐냐?”
“제이나가 보내는 선물입니다.”
적당히 둘러대며 나타니엘은 목에 걸린 돌을 떼어 내려 했다.
하지만 짧고 동글동글한 손으로는 쉽지 않았다. 나타니엘은 짜증을 내다가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어차피 들어왔으니 상관없을 테니까.
‘응?’
눈을 감고 집중하던 나타니엘은 당황했다.
아까 여기 오기 전까지는 멀쩡했던 기운이 전혀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무슨 일이라도 있느냐?”
필립스는 늘 무표정하던 나타니엘 얼굴이 다이나믹하게 변하는 것을 보며 신기해했다.
그는 손을 뻗어 나타니엘의 목에 대롱대롱 달려 있던 마석에 손을 댔다.
따스하고 청량한 기운이 손끝에서부터 서서히 퍼졌다.
필립스는 느리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으음?”
황제는 머리가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무거웠던 팔과 다리에 생기가 돌고, 눈앞이 또렷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아니, 기분이 아니었다.
황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중얼거렸다.
“이, 이게 대체 무슨?”
나타니엘은 그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파악했으나 설명할 시간이 없었다.
문밖에서 사람의 인기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설명할 시간이 부족합니다. 일단 이쪽으로 오시죠.”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없는 데다가 마법까지 사용하지 못하자 나타니엘은 사실상 해츨링에 불과했다.
신성력으로 잠시 건강해진 아버지의 체력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나타니엘은 황제의 옷자락을 잡아끌어서 창가로 끌고 갔다.
“일단 여기서 나가야 합니다.”
“창문으로?”
“그냥은 안 내보낼 테니까요.”
“허허, 나타니엘. 이 몸은 제국의 황제다. 위험하게 창문으로 나갈 생각은 없다.”
나타니엘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자신의 아버지가 이렇게 생각이 부족한 남자였나.
일과 정치에 관해서는 놀라울 정도로 높은 지능을 가졌으나 상식이 한참 모자라 보였다.
“예전에 황후 폐하를 몰래 만나다가 어머니께 들켰을 땐 창문으로 도망가시지 않았습니까?”
과거의 일까지 콕 집어 말하자 황제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 그때는 워낙 급해서……. 알지 않느냐? 네 어머니가 얼마나 무서웠는지.”
“지금도 급합니다. 다이애나 영애는 아마 순순히 폐하를 놓아주지 않을 겁니다.”
“어허. 걱정하지 말래도! 네 녀석, 작아지니까 간도 콩알만 해졌구나.”
필립스는 호탕하게 웃고서는 몸을 돌려 문으로 향했다.
놀란 나타니엘이 그의 옷자락을 물고 잡아끌었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직진했다.
문을 벌컥 열자 놀랍게도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보아라, 아무 일도 없지 않느냐?”
대범한 건지, 아니면 미친 건지.
나타니엘은 속으로 자신의 아버지를 욕하며 그 뒤를 따랐다.
“너무 뒤처지는구나. 이리 올라오거라.”
짧은 다리로 성인 남성의 걸음을 쫓아가려니 꽤나 힘에 부쳤다.
필립스는 몸을 숙여서 나타니엘을 안아 올렸다.
나타니엘은 그의 어깨에 대롱대롱 매달려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사람이 옵니다.”
황제는 느긋한 표정이었다.
나타니엘은 마법으로 문을 열고, 황제의 머리카락을 물고 방 안으로 밀어 넣었다.
빈방이어서 다행이었지, 아니었다면 고대로 꼼짝 못 하고 붙잡힐 뻔했다.
나타니엘은 두근거리는 심장을 가라앉히며 문밖으로 사람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인기척이 멀어지자 그제야 아버지의 어깨를 두들겼다.
“그만 나…….”
그러나 둘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눈앞에 펼쳐진 끔찍한 광경 때문이었다.
어두침침한 내부에는 기괴하고 징그러운 재료들이 유리병에 담겨 진열되어 있었다.
게다가 피 냄새도 났다.
“설마 이 제국에서 흑마법을 연구 중인 사람이 있을 줄이야.”
“아버지께서 당하신 것도 흑마법의 일종이었습니다. 이것에 비하면 그리 강한 것 같지는 않았지만.”
“정말 믿을 수 없군.”
황제는 몸을 부르르 떨며 방 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한쪽에 있던 노트에는 그날 했던 실험과 재료들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읽는 것만으로도 구역질이 나는 재료들도 있었다.
“미쳤군. 설마 이걸 다이애나, 그 아이가 했단 말이야?”
“이제 그만 여기서 나가야 합니다. 밖에 사람이…….”
나타니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주변이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폐하께서 안 보이신다!”
“폐하께 무슨 일이 생기면 우린 끝이다. 당장 찾아!”
기사들의 고함에는 황제에 대한 경의는 보이지 않았다.
황제의 머릿속에 다이애나에게 충성하는 기사들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그가 넋을 놓고 있던 시절의 일이었다.
필립스는 그제야 상황의 급박함을 깨달았다.
그는 품에 노트를 숨기고 재빨리 창문으로 향했다.
다행히 한 층 내려온 덕에 뛰어내려도 안전한 이 층이었다.
그는 작은 창문을 열고 뛰어내릴 준비를 했다.
“하, 근데 그때는 아직 쌩쌩한 30대였…… 으악!”
나타니엘은 더는 참지 못하고 그 짧은 발로 황제의 등을 걷어찼다.
생각보다 그 힘이 강했는지 필립스는 그대로 창밖으로 떨어졌다.
나타니엘 역시 그 뒤를 따라 내려갔다.
“괜찮으십니까?”
“그, 그래.”
하나도 미안해 보이지 않는 아들을 보며 필립스는 작게 꿍얼거렸다.
둘은 몸을 바짝 낮추고 정원을 가로질렀다.
“마법으로 좀 움직이면 안 되는 거냐?”
“이 몸으로는 마력을 컨트롤하기 어렵습니다.”
이곳에서 마력을 쓰면 분명 위치를 들키게 될 것이다.
전투가 벌어진다면 승리 역시 장담할 수 없었다.
‘평소보다 움직일 수 있는 마력이 너무 적군.’
기껏해야 마법사 둘, 셋 정도를 상대할 수 있는 정도였다.
거기에 전투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 황제를 보호하면서 싸워야 하니.
“어쩔 수 없구나.”
둘은 엉금엉금 기어서 후문 앞에 도착했다.
두 사람이 경비를 서고 있었고, 주변에는 모두 황제를 찾으러 갔는지 아무도 없어 보였다.
“제가 주의를 끌겠습니다. 그사이에 빠져나가서 오른쪽 길로 쭈욱 가십시오. 거기에 제가 준비해 둔 마차가 있습니다.”
나타니엘의 말에 필립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숨을 크게 들이마신 나타니엘은 짧은 날개를 파닥거리며 경비병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어제 만난 티나 말이야. 아무리 생각해도 나한테 푹 빠진 것 같지 않냐?”
“네가 아니라 나 같은데?”
둘은 안쪽 상황을 모르는 듯 태연한 얼굴로 어제 만난 여자에 대해 떠들고 있었다.
“삐, 삐이!”
나타니엘은 그 둘의 관심을 끌기 위해 크게 울었다.
접시에 코를 박고 싶을 만큼 수치심이 일었지만 일단은 참기로 했다.
“어디서 이상한 소리 들리지 않아?”
“쥐가 있는 거 아니야?”
자신을 한심한 설치류 따위와 비교한다는 사실에 나타니엘은 알 수 없는 모욕감을 느꼈다.
제이나가 자신을 두고 파충류라고 뭐라 할 때보다 더.
“삐이!”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린 두 남자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용?”
“새끼 용?”
신화 속에서나 나오는 용의 모습에 둘은 무릎을 꿇었다.
“고대 용의 후손이시여.”
“용의 화신이시여.”
양손을 비비며 중얼중얼 소원과 자신들의 행운을 비는 남자들을 보며 나타니엘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자신의 모습을 본 사람들의 반응은 극명하게 나뉘었다.
제이나나 아버지처럼 그저 나타니엘로 받아들이거나, 어머니처럼 괴물이라고 생각하거나.
차라리 그 두 경우가 나았다.
지금 자신의 앞에 있는 두 남자처럼, 전혀 인간이 아닌 존재로 여기는 사람들에게서는 어딘지 모르게 거북함이 느껴졌다.
“부디 올해는 제가 결혼할 수 있게 해 주세요.”
“제가 이 녀석보다 먼저 결혼할 수 있게 해 주세요.”
게다가 저 한심한 소원이라니.
굽신거리는 둘 뒤로 황제가 조용히 문을 열고 빠져나가 마차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의 모습이 작아지자 나타니엘은 가만히 공중에 글씨를 썼다.
[둘 중 용기 있는 사람이 먼저 하게 될 것이다.]
아주 평범한 글귀였으나 둘은 눈물까지 펑펑 흘리며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나타니엘은 그때를 놓치지 않고 전속력으로 마차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어딜 함부로 나가려고요.”
“하, 하하하. 다이애나.”
그러나 마차에 도착하기도 전에, 날카로운 단검을 필립스의 목에 겨누고 있는 다이애나를 마주하고 말았다.
* * *
나는 불안한 얼굴로 다리를 흔들었다.
자정이 지나서, 달이 지고 있었다.
“너무 늦어.”
왔어도 벌써 돌아왔어야 할 시간이었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마차 밖으로 나왔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기사 넷이 내게 다가왔다.
“비 전하.”
“당장 무장을 하고 말에 타라. 일이 잘못된 건 아닌지 걱정되는구나.”
내 표정을 본 기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루나 경이 곧 말을 끌고 왔고, 나는 말 위에 올라탔다.
이럴 줄 알고 움직이기 편하게 머리도 묶고, 바지를 입고 있었다.
“가자.”
혹시 길이 엇갈리는 것을 대비해 한 명을 남기고 남은 기사들과 함께 타운 하우스 쪽으로 향했다.
거리상으로는 분명 멀지 않았지만, 심리적으로는 멀게 느껴졌다.
‘제발 별일 없어야 하는데.’
저 멀리에서 날붙이가 번뜩였다.
‘폐하?’
황제의 목에 검을 들이밀고 있는 여자의 뒷모습과…….
“나타니엘!”
바닥에 쓰러진 새끼 용의 모습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