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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화. 부자 재회 (74/145)


74화. 부자 재회
2022.10.15.


막시밀리안은 혼란에 빠졌다.

테레사가 이런 요구를 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안 된다면 우리 이야기는 없던 거로…….”

“아, 아니야. 나는 괜찮아. 네가 원한다면 그렇게 하자.”

그 뒤로는 테레사가 원하는 계약서를 성실하게 작성했다.

준비되는 대로 공작저로 짐을 옮기로 한 뒤 헤어졌다.

몇 번이고 자신의 안부를 확인하고 돌아가는 막시밀리안의 뒷모습을 테레사는 한참을 바라보았다.


“정말 변했어.”

테레사는 막시밀리안의 태도를 믿을 수 없었다.


- 테레사, 만일을 위해 오라버니를 마음껏 이용해도 되어요. 지금까지 테레사가 오라버니에게 해 준 것을 생각하면 받아 갈 자격 충분히 되니까.

처음 테레사에게 약혼 계약서를 제안하면서 제이나가 했던 말이었다.

사실 그녀에게 이 계약서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테레사는 반신반의했다.

여태껏 막시밀리안은 테레사에게 단 한 번도 먼저 양보한 적이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막시밀리안이 인상을 쓰면, 테레사가 먼저 말을 바꿨다.


“기분이 이상해.”

기쁘기도 하고, 과거의 자신이 떠올라 서럽기도 했다.

테레사는 멍하니 자리에 서 있다가 몸을 돌렸다.

당장 준비해야 할 일이 많았다.


 

* * *

나와 나타니엘은 서로 마주 앉았다.

그는 약간 무기력한 상태였다.

그날 이후 우리는 변신에 성공하기 위해 맹연습에 돌입했다.

처음 시작한 것은 감정을 조절하는 것이었다.

나는 나타니엘에게 스트레스를 주기 위해 여러 가지로 노력했다.


“어때요?”

“글쎄.”

나타니엘은 미간을 구긴 채로 투덜거렸다. 언제나 쉽게 하던 일들이 쉽지 않으니 꽤 골치 아픈 듯 보였다.


“그럼 제일 슬펐던 기억을 떠올리는 거예요.”

그는 내 말에 잠시 생각에 잠겼다.


“별로 슬펐던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으음……. 그럼 제일 화났을 때는 어때요!”

“화?”

“짜증 나고 누구를 콱, 죽이고 싶고 그랬을 때 말이에요.”

내 말에 나타니엘의 얼굴이 서서히 구겨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펑 소리와 함께 용의 모습으로 변했다.


“이게…….”

나타니엘은 본인도 놀라서 커다란 눈을 깜빡거렸다. 침대 위에서 몇 바퀴 돌다가 자리에 털썩 앉아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렇게 쉽게 될 줄이야.”

“이유를 알았으니 그렇죠! 자, 이제 사람 모습으로 변하는 걸 해 봐야 해요.”

나는 그의 짧은 손을 잡고 방긋 웃었다. 그의 얼굴이 화르륵 붉어졌다.

조금 성장해서 그런가, 표정이 더 자연스럽고 풍부해 보였다.

나는 뚱한 표정을 하고 있는 그의 코를 꾹 눌렀다.


“자아, 이번에는 기분 좋았을 때를 떠올리는 거예요. 행복했던 순간을요.”

나타니엘은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익숙한 소리와 함께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온 그를 보며 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몇 번 더 연습하기로 해요.”

“하아, 정말 말도 안 되는군.”

나타니엘은 허망한 듯 중얼거렸다.

나는 그에게 마시멜로를 녹인 따뜻한 코코아가 담긴 잔을 쥐여 주며 어깨를 다독였다.


“다 제가 좋은 선생님이어서 그런 거예요.”

나타니엘은 내 말에 울컥한 듯했지만, 결국 아무 말도 못 했다.

그저 애꿎은 코코아만 홀짝거리며 미간을 구겼다.

한 잔을 다 마신 나타니엘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리고 이 목걸이 말고 다른 걸 준비해 줬으면 하는데.”

“이거 말고요? 어떤 거요?”

“만일 정말로 흑마법에 당한 거라면 그대의 친구가 가진 신성력을 담는 편이 훨씬 나을 거다.”

“신성력이요?”

나타니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바닥에 떨어진 셔츠를 주워 입으며 말을 이어 갔다.


“흑마법을 빠르고 안전하게 제거할 방법이 신성력이거든.”

“아…….”

“지금까지는 다들 신성력이 이미 사라진 힘이라고 생각했는데, 얼마 전에 다시 나타났지.”

“오……. 그쪽은 아직 신성력이 있는지 모르잖아요. 이거 상대의 허를 찌르겠는데요.”

황제가 제정신을 차리면 모든 것이 돌아올 것이다.


‘그럼 탈출 계획을 세워야 할 텐데.’

살짝 확인만 하고 돌아오는 거로는 무리가 있다.


“만일 폐하께서 억류라도 되어 있다면 일이 더 복잡해질 수 있어요.”

“진짜 억류되어 있다면 그냥 그 자리에서 다 부수고 도망치는 게 나을지도.”

“으음…….”

나타니엘의 말도 맞았다. 하지만 가능하면 조용히 나와서 일당을 모두 잡아들이는 편이 나았다.


“정면으로 마주치는 거 아니면, 최대한 조용히 나오기로 해요.”

“응.”

영 마뜩잖은 표정이다.

재빨리 타운 하우스의 지도를 가져와 테이블에 펼쳤다.

저 표정을 보니 아무래도 확실한 계획이 필요할 것 같았다.


“저랑 같이 마차를 타고 이쪽에서 멈출 거예요.”

“그대랑?”

“당연하죠. 혼자서 여기까지 날아가실 생각이셨어요? 만약을 대비해서 황태자비인 제가 근처에 있는 게 좋죠.”

나타니엘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너무 위험해.”

“괜찮아요. 혼자 가지는 않을 테니까요.”

“그럼 누구랑 갈 생각이지?”

“아버지께 말씀드려서 호위 기사 몇 명을 보내 달라 할 거예요.”

“흐음…….”

여전히 의심스러운 표정이다.

나는 재빨리 말을 돌렸다.


“신성력은 어디에다가 담으면 돼요?”

“마석에 담으면 돼. 최대한 많이 담아 오면 더 좋고.”

나타니엘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의 기행으로 귀족들 사이에서 이미 말이 나오고 있었다.

게다가 콧대가 높아진 그로반 남작의 횡포에 돌려 까는 게 일상인 사교계에서조차 성토하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최대한 빨리 준비해 볼게요. 그사이에 나타니엘은 연습 열심히 하고요.”

결 좋은 머리카락을 토닥여 주자 나타니엘의 귀가 붉어졌다. 아까부터 부끄러워서 어쩔 줄 모르는 모습이 너무 귀여웠다.


“그렇게 부끄러웠어요?”

“부끄럽다니,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군.”

“그럼 왜 이렇게 귀가 빨갛고 열이 나는 걸까.”

나는 손을 뻗어 그의 귀를 붙들었다. 나타니엘이 움찔하며 뒤로 물러섰다.


“그건…….”

반박할 수 없는 이야기에 나타니엘의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나는 목덜미까지 붉어진 나타니엘을 와락 끌어안았다.


“당신 진짜 귀여운 거 알아요?”

“귀…….”

큰 소리를 내며 웃자 나타니엘의 얼굴이 험악해졌다.

그는 들고 있던 머그잔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나를 번쩍 안아 올렸다.


“으, 으악! 왜 이래요? 이거 안 내려놔요?”

“흥.”

내 말은 가볍게 무시한 나타니엘이 날 침대 위로 집어 던졌다.

다행히 푹신한 매트리스 덕에 아프지는 않았다.


“왜 이러는…….”

나타니엘은 상의 단추를 풀면서 침대 위로 올라왔다.

그의 눈에 담긴 욕망을 읽어 낸 나는 잠시 말을 잃었다.


“달콤하고 맛있는 걸 준다며.”

“아까 줬잖아요!”

“고작 그게 상이라고?”

낮게 깔린 목소리에 나는 입을 꾹 닫았다.

그의 부드러운 숨결이 뺨과 귀에 닿았다.


“난 이쪽이 상인 거 같은데.”

요즈음 들어 낯부끄러운 소리도 정말 잘하고 미친 사람, 아니 미친 용 같았다.


“이번만이에요.”

허락하자 그의 체향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넓은 망망대해에 떠 있는 것 같은 착각에 그의 등에 다급히 매달려야만 했다.

* * *

드디어 대망의 디데이가 찾아왔다.

나타니엘이 변신에 익숙해지자마자 급하게 떠나기로 했다.

적어도 신년제가 열리기 전에는 황제를 불러오기 위해서였다.

나는 두꺼운 망토와 목도리로 온몸을 둘둘 둘러싸고 바구니를 꺼냈다.


“자, 안으로 들어가요.”

“…….”

어느새 용 모습으로 변한 나타니엘이 바구니를 빤히 보았다.


“어서요.”

“후우…….”

길게 한숨을 쉰 나타니엘이 바구니 안에 쏙 들어갔다. 나는 그 위에 두꺼운 천을 덮고 들어 올렸다.

팔에 바구니를 끼고 후드를 뒤집어쓴 뒤 밖으로 나왔다.

문 앞에서 검은색의 수수한 마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 익숙한 얼굴이 서 있었다. 나는 방긋 웃으며 그녀에게 인사를 했다.


“오랜만이에요. 루나 경.”

“다시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비 전하.”

그녀의 도움을 받아 마차에 오르고 문이 닫혔다. 마차가 너무 수수한 탓에 정문이 아닌 뒷문으로 나갔다.


“나타니엘?”

톡톡 바구니를 두들기자 나타니엘이 담요를 걷고 튀어나왔다.


“도착했나?”

“아직이요. 가는 중이에요.”

마차에 난 창밖으로는 해가 져서 이제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나는 나타니엘을 보며 비장한 표정으로 목걸이를 건넸다.


“이거요.”

목에 성력이 담긴 목걸이를 걸어 주자 그가 몸을 부르르 떨며 작은 날개로 파닥거렸다.


“차가워.”

“날 수 있겠어요?”

“이 정도는 상관없다.”

그는 초조한 표정으로 창밖을 내다보았다.


“아! 그리고 이거요.”

그동안 준비해 왔던 스웨터가 빛을 발할 때였다.

아무래도 몰래 들어가야 하니 검은색 털실로 만든 복슬복슬해 보이는 스웨터였다.


“밖이 추울 거예요.”

입고 있는 모습을 상상만 해도 귀여워서 나도 모르게 흥분했다.

나타니엘이 그런 내 모습을 보더니 기겁하면서 뒤로 물러섰다.


“싫다. 안 입을 거다!”

“왜요? 이제 초겨울이라고요. 밤에 맨몸으로 나가면 추워요.”

나는 도망치려는 그를 재빨리 낚아챘다.

날개를 파닥거리며 도망치려는 그를 꼭 잡고 스웨터를 입히려 노력했다.

하지만 사람도 아니고 무려 해츨링이니 쉽게 들어가지 않았다.


“싫어!”

틈을 노린 나타니엘이 내 손아귀에서 빠져나와 구석으로 물러섰다.


“절대 안 입을 거야.”

“이렇게 추운데 안 입으면 어쩌려고요.”

“보온 마법을 쓰면 돼!”

“그 안에서는 마법 사용 금지예요.”

그 사실을 뒤늦게 떠올린 듯, 나타니엘이 몸을 움찔거렸다.

나는 승리자의 미소를 지은 채로 그에게 다가갔다.


“얌전히 있으면 제가 다 알아서 할게요.”

나는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나타니엘을 내려다보았다.

나타니엘은 그런 내 모습에 눈을 질끈 감았다.

* * *

필립스는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이상하게 자꾸만 머릿속에서 사라지는 것 같았다.


‘귀찮다.’

그는 만사가 귀찮았다.

열정적이고 사랑에 목말라 하던 과거가 허망하게 느껴졌다.

놀랍게도 황제는 강제로 한 여자에게 정착하게 되면서 약한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에게 있어 사랑은 에너지의 근원이었다.

사람들은 그에게 바람둥이라 손가락질했지만, 그는 매 순간 그 수많은 여성을 진심으로 사랑했다.

물론 헤어질 때 여러 가지 일이 있었던 것은 슬펐다.

하지만 그건 자신이 한 일은 아니니까.


‘허망하네.’

자신에게 남아 있는 것이 하나도 없는 듯한 기분이 들어서 더욱 우울해졌다.

겨울이 다가오면서 앙상해진 나뭇가지가 바람에 흔들리며 타운 하우스의 창문에 세차게 부딪혔다.

똑똑.


“응?”

필립스는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

이건 무질서한 소리가 아니었다.

누군가가 유리창을 두들기는 소리였다.

이 타운 하우스에는 자신이 심어 놓은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을 텐데도.

황제는 침대에서 내려와 조심스럽게 창가로 향했다.

거기에는 강아지 크기 정도 되어 보이는 검은색 생명체가 붙어 있었다.

황제는 그가 누구인지 단숨에 알아차렸다.


“나타니엘?”

그의 말을 알아들은 것처럼 나타니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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