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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화. 계약관계의 시작 (73/145)


73화. 계약관계의 시작
2022.10.12.


뜻밖의 소식을 들은 나는 잠시 말을 잃었다.


“오라버니가 청혼을요?”

“네.”

테레사의 대답에 카시안 역시 놀랐는지 입만 벙긋거렸다.

나는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무슨 말을 해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 카시안이 먼저 끼어들었다.


“그 녀석,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야? 갑자기 웬 청혼이야…….”

“그로반 남작이 어떤 계략을 꾸미고 있는지 들었나 봐. 날 지켜 주겠다고 하더라고. 상대가 마법사까지 고용하고 있다던데?”

“마법사라니? 남작가가 무슨 돈이 있다고…….”

카시안은 곧 입을 다물었다. 자금 출처가 어딘지 뻔했기 때문이다.


‘이제 잡은 물고기라서 필요 없다는 거야, 뭐야.’

황제의 생각을 따라가기 힘들었다. 아무리 총애하는 정부라지만, 이쪽은 아주 오래전부터 제국을 지탱한 공작가였다.

세가 약한 것도 아닌데 그런 억지를 부리다니, 제정신이 아니었다.


“대체 폐하께서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어요.”

카시안의 투덜거림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지만.

하지만 황후가 나서서 경고할 정도라면 그냥 잠자코 있을 수 없었다.


“전 공작가에 머무는 건 찬성이에요. 윈터스 공작저는 모든 곳에서 마력 감지 장치가 작동하거든요.”

마력 감지 장치는 황성에서도 마석의 높은 가격 때문에 황제의 방에만 설치하는 특별한 장치였다.

그러나 윈터스 공작가는 마석을 무제한으로 사용할 수 있는 덕에 호화로운 것을 좋아하던 어머니가 저택 전체에 마력 감지 장치를 도입했다.

불행히도 어머니는 그 마력 감지 장치 때문에 피임 마법을 사용한 것이 들통나게 되었지만.


“나중에 파혼해도 된다고 하지만, 괜히 피해 주는 것도 별로고…….”

테레사는 어두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같은 사람 상대로 두 번이나 파혼한다면 테레사도 막시밀리안도 뒷말이 나올 것이 뻔했다.

특히 테레사의 경우 정말 결혼이 어려울지도 몰랐다.


“함부로 결정할 일은 아니긴 하죠.”

테레사가 길게 한숨을 쉬었다.

걱정과 피곤함이 묻어나는 표정을 보며 나는 머리를 굴렸다.


‘폐하를 만나야 해.’

그동안 살펴본 황제는 권력에 대한 집착이 굉장히 강했다. 황태자인 나타니엘에게도 권력이 나눠지는 것을 경계했다.


‘그런데 남작가에 이렇게 힘을 실어 주다니, 사람이 하루아침에 바뀐다는 게 말이 돼?’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게다가 남작가에선 만나기 힘든 마법사들을 어떻게 제 편으로 끌고 갔을까.


‘혹시 킬리언이 아는 사람이지 않을까?’

그는 마법사들의 수장이니 이번 일에 대해 알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나타니엘과 이야기해 보자.’

괜히 따로 둘이 만났다가 나타니엘이 질투라도 하면 큰일이니까.


“일단 제가 다이애나 쪽이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지 더 알아보고 연락할게요.”

나는 테레사와 카시안을 다독이고 돌려보냈다.


 

* * *

나타니엘은 내 요청을 킬리언에게 전했다. 그는 황실에 저지른 잘못이 너무 많았던 탓에 순순히 정보를 얻어다 주겠다고 했다.

며칠 뒤 나타니엘이 보고서를 가져다주었다.


“기왕이면 본인이 가져다주고 싶다고 했는데 바쁜가 보더군.”

“킬리언 경이요?”

“일이 엄청 많은가 보던데.”

“어머, 그래요?”

일주일에 두세 번은 헨리와 아나이스를 만나길래 한가한 줄 알았더니.


‘흐음, 뭐지.’

왠지 의심스러웠지만, 일단 보고서부터 확인하기로 했다.

담백한 필체로 쓰인 보고서에는 그들이 접촉한 마법사들이 마탑 소속이 아닌 것 같다고 쓰여 있었다.


“마탑 소속이 아니라면…….”

“소속 없이 자유로운 마법사들은 많지 않아. 게다가 귀족 가문의 보안을 뚫고 들어갈 수 있는 마법사는 더 적고.”

보고서에는 그 외에 가능성 있는 마법사들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내 옆에서 보고 있던 나타니엘은 미간을 구겼다.


“전부 엄청 유명한 사람들이군. 아마 돈만으로는 절대 움직이기 어려울 거다.”

“그럼 이 중에는 없다는 거네요.”

가만히 고민하던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혹시 디에스 기사단은 아닐까요?”

“기사단이?”

“지난번에도 테레사를 노렸잖아요.”

“아주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만…….”

남들에게는 도시 괴담에 가까운 내용이었으나 나나 나타니엘은 이미 한 번 겪어 보았다.

그러니 더욱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역시 직접 타운 하우스에 들어가 확인하는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하지만 방법이 없다. 기사단이 손을 쓴 거라면 쉽게 들어갈 수 없을 것 같은데.”

나타니엘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그가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감쪽같이 정체를 숨길 수 있는 상대니까.


“일단, 다른 생각하지 말아. 위험할 수 있으니까.”

나타니엘은 내 머리를 쓰다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아!”

아주 방법이 없는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나타니엘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 * *

오늘도 과중한 업무에 시달린 나타니엘이 느지막이 침실로 들어왔다.


“왔어요?”

종일 그를 기다리던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나타니엘의 곁으로 달려갔다.


“뭔데?”

나타니엘은 낌새가 이상하다고 느낀 건지 미간을 구기며 살짝 뒤로 물러섰다.

나는 그의 팔에 팔짱을 끼고 테이블 쪽으로 끌고 갔다. 테이블 위에는 고소한 향이 나는 디저트와 향긋한 차가 놓여 있었다.

처음 보는 디저트에 나타니엘의 눈이 반짝거렸다.


“맛있을 것 같죠?”

“이게…… 뭔데?”

도넛처럼 둥글고 안에 구멍이 있었지만, 도넛과는 달리 겹겹이 층이 있고 좀 더 두꺼워 보였다.

윗부분은 말린 코코넛으로 장식해서 예쁜 데다가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나타니엘은 처음 보는 디저트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게 뭐야?”

“크로넛이라는 거예요. 크루아상처럼 겹겹이 층이 있지만, 안에 도넛처럼 크림이 들어 있는 디저트예요.”

“도넛?”

아, 나타니엘은 도넛을 먹어 보지 못했나?

평민들이 주로 먹기는 하나, 워낙 널리 알려진 디저트라 모를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나는 종이로 크로넛을 통째로 들어서 나타니엘의 입에다가 가져다 댔다.


“먹어 봐요.”

“잘라 먹는 게 아니라?”

“네. 그냥 먹는 거예요.”

나타니엘은 잠시 망설이더니 입을 열고 한입 베어 먹었다. 의심이 가득했던 표정은 점점 놀란 표정으로 변했다.


“맛있어.”

“그렇죠? 자, 이거 다 먹어도 돼요.”

조금 전까지 경계했던 것은 잊고 나타니엘은 앉은 자리에서 크로넛 하나를 다 해치웠다.

뒤늦게 정신이 든 그는 얼굴을 붉히며 나에게 물었다.


“그대는 안 먹는 건가?”

“먹을 거예요.”

걸렸구나.

나는 방긋 웃으며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늘 늦은 시간에 나타나서 이렇게 마주 앉아서 음식을 먹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오랜만에 먹는 디저트가 마음에 드는지 나타니엘은 집중해서 열심히 먹었다.


“이렇게 갑자기 잘해 주는 이유가 뭐지?”

“하, 하하하. 그게…….”

나는 나타니엘의 입가에 묻은 크림을 손가락으로 훔쳐 내며 말했다.


“부탁이 있어서요.”

“무슨 부탁인데 이런 것까지 준비해 오는 건데?”

나타니엘의 눈이 가늘어졌다.

나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마음의 준비를 했다.


“황제 폐하를 만나러 가 주었으면 좋겠어요.”

“폐하께서 어디에 계신지 모른다니까?”

“황후 폐하가 타운 하우스에 계실 거라고 했어요.”

“내가 간다고 만나 주지도 않을 거 같은데.”

“그러니까 몰래 만나야죠. 디에스 기사단이 연관된 거라면 흑마법에 걸리셨을지도 모르고요.”

흑마법이라는 말에 나타니엘의 얼굴이 구겨졌다.


“확실히 평소의 폐하라면 이런 행동을 하지 않으시지.”

“그렇죠?”

나타니엘은 귀찮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마법으로 다 잡아서 죽이면 되는 거 아닌가.”

“안 돼요! 중간에 일이 잘못되면 반역으로 몰릴 수가 있어요.”

언제나 만약을 걱정해야 한다. 일이 상당히 불리하게 돌아갈 수 있었다.

나타니엘은 턱을 쓸며 중얼거렸다.


“어차피 마력 감지 장치를 쓸 테니 마법으로 몰래 들어가는 것도 불가능할 텐데?”

“맞아요. 하지만 우리에겐 그들이 모르는 비장의 무기가 있죠.”

“비장의…… 무기?”

나는 주섬주섬 팔찌같이 생긴 통신 장치를 꺼냈다.


“그게 뭐지?”

“저희 아버지가 만든 건데, 녹화와 녹음 기능이 내장된 팔찌예요.”

“그런 걸 왜 만든 거지?”

“어머니의 불륜을 밝히려고요.”

“……그래서 이걸 끼고 만나서 어쩌자는 거지?”

나는 나타니엘에게 그걸 쓱 내밀며 말했다.


“나타니엘, 아직 한 번도 자발적으로 용용이 모습으로 변해 본 적 없죠?”

“용…… 아니, 없다.”

나타니엘은 입으로 꺼내기도 민망한 귀여운 호칭에 인상을 썼다.

나는 그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


“그때 번역한 책에서 감정을 조절하면 모습을 바꿀 수 있다고 했잖아요.”

나타니엘은 눈을 가늘게 뜨고 날 의심스러운 눈으로 보았다.

나는 일부러 방긋 웃으며 말했다.


“용으로 변신해서 이 목걸이를 하고 황제 폐하를 만나는 거예요. 그분의 상태를 확인하는 거죠.”

나타니엘은 내 기발한 아이디어에 입을 다물었다. 나는 그의 옆에 달라붙었다.


“한 번만 하자니까요?”

“싫다.”

“왜요?”

“그야…….”

“부끄러워서?”

“그런 것도 있지만.”

나타니엘은 잠시 말이 없었다.

나는 그가 입을 열기를 기다려 주었다.

한참 말이 없던 그가 작게 중얼거렸다.


“혹시 아버지까지 날 거부할까 봐.”

뜻밖의 대답이었다. 나타니엘은 이미 어머니에게 거부당한 기억이 있었다.

만일 아버지에게까지 거부당한다면 정말 큰 상처를 받을 것이다.

나는 손을 뻗어 그의 손을 잡았다.


“거기까지는 생각 못 했어요. 미안해요. 다른 방법을 찾아봐요, 우리.”

잠시 고민하더니 고개를 저은 나타니엘이 꽤 단호한 얼굴로 말했다.


“아니다. 결국 언젠가는 알려야 했을 문제니 이번 기회에 그렇게 해 보도록 하지.”

나타니엘은 손을 뻗어 팔찌를 쥐었다.

그래도 불안한지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나는 그의 손을 잡아 입을 맞췄다.


“걱정하지 말아요. 다른 건 몰라도 나타니엘에 대한 그분의 사랑은 진짜니까요.”

황제가 나타니엘을 대하는 태도는 분명 애정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

이기적인 남자였지만, 한편으론 좋아하는 인간에게라면 사랑이 넘쳤다. 아들인 나타니엘이 2순위여서 그렇지, 다른 귀족들처럼 수단으로만 생각하지는 않았다.

게다가 황제는 생각 이상으로 개방적인 사고를 하는 편이라 분명 쉽게 받아들일 것 같았다.

내 위로에 나타니엘은 작게 웃으며 말했다.


“일단 연습부터 해야겠군.”

“좋아요!”

나는 그의 손을 꼭 잡았다.

설령 누군가에게 배신당한다 해도 내가 옆에 있다는 걸 잊지 않길 바라며.


 

* * *

막시밀리안은 초조한 얼굴로 테레사를 기다렸다.

생각할 시간을 달라 한 그녀가 보낸 편지를 받았을 때부터 긴장감이 사라지지 않았다.

늘 아늑하다고 느꼈던 메니실 백작가의 응접실이 오늘따라 가시방석처럼 느껴졌다.

곧 문이 열리고 간단한 외출복을 입은 테레사가 들어왔다.


“와 줘서 고마워요, 막스.”

“아니야. 나야말로 불러 줘서 고맙지.”

테레사는 막시밀리안에게 자리를 권하고 반대편에 앉았다.

그녀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처음에는 그가 너무 과민반응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그녀의 착각이었다.

요 며칠 테레사의 주변에는 이상한 일이 계속해서 생겼다. 머리 위에서 무언가가 떨어지기도 했고, 길이 무너지기도 했다.

어제는 가족들과 함께 탄 마차의 말이 갑자기 날뛰어서 일가족이 죽을 뻔하기도 했다. 만일 막시밀리안에게 들은 것이 없었다면 그냥 운이 나빴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 희미하지만 마력의 기운이 남아 있군.

자신을 걱정한 제이나가 데려온 황태자의 말에 테레사는 밤잠을 설쳤다. 자신만 다치는 것은 무섭지 않았다.

하지만 잘못해서 가족에게 문제가 생기는 건 무서웠다.


“그때 했던 말, 고민 좀 했어요. 내가 위험할 수도 있다는 거.”

“아, 으응.”

막시밀리안은 테레사가 자신의 말을 믿어 주지 않을까 봐 걱정했다.

자신도 처음 그 사실을 들었을 때,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으니까.


“전 윈터스 공작저에서 머물게요.”

“그럼 나와……!”

“결혼은 아니에요. 그건 너무 멀리 나갔어요.”

테레사는 재빨리 막시밀리안의 말을 막았다.

그와 결혼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하지만 이곳에 머물다가 자신의 가족들까지 해를 입는다면 그것만큼 무서운 것도 없었다.

조금 비겁하지만, 안전한 장소에 숨고 싶었다.


“그럼……?”

“다시 약혼부터 시작해요. 식은 필요 없어요.”

막시밀리안은 뭐든 좋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를 가까이서 돌볼 수만 있다면 어떠한 관계여도 상관없었다.


“그리고 조건이 있어요.”

“뭔데? 뭐든 말해. 다 들어줄 수 있으니까.”

테레사는 주먹을 꼭 쥐고 그에게 말했다.


“약혼 계약서를 썼으면 좋겠어요.”

“뭐?”

막시밀리안은 크게 당황했다.

혼전 계약서도 아니고 약혼 계약서라니.

테레사는 당황해서 아무 말도 못 하는 막시밀리안을 냉정한 눈으로 응시하며 말했다.


“계약 기간은 1년. 그 뒤에는 서로 깨끗이 헤어지는 거로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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