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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화. 경고 (72/145)


72화. 경고
2022.10.08.


다이애나는 생각보다 침착했다.

어쩌면 생각한 것보다 자신에게 관심 없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그녀는 여기까지 와서 물러설 생각은 없었다.

이미 황후에게 목숨을 위협받고 있는 상황.

이제 다이애나에게 남은 것은 악밖에 없었다.


“제 말을 들으시는 게 좋을 거예요. 전 이제 눈에 보이는 게 없거든요.”

막시밀리안의 표정이 더욱 차갑게 변했다.

그는 권력의 정점에 있는 공작가의 후계자였다.

고작 황제의 정부가 하는 말에 위협을 느낄 리가 없었다.

막시밀리안은 우아한 몸짓으로 다이애나에게 한 발짝 다가갔다.

그러나 마주한 두 눈은 포식자의 눈을 하고 있었다.

언제든 너 같은 건 짓밟을 수 있다는 자신이 보였다.


“충고 하나만 하지, 영애.”

다이애나는 늘 요정 같던 막시밀리안의 태도가 변하는 것에 약한 공포를 느꼈다.


“윈터스 공작가를 멋대로 휘두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고작 황제 폐하의 정부가 되었다고?”

“제가 노리는 게 고…… 공작가가 아니라 메니실 백작 영애라면요?”

테레사의 이름이 나오자 막시밀리안의 표정이 변했다.

막시밀리안의 두 눈에 담긴 지독한 감정에 다이애나는 몸을 떨었다.

명백한 살의.

다리가 떨렸다.

다이애나는 결국 바닥에 주저앉았다. 허리를 숙인 그가 다이애나의 멱살을 잡고 작게 속삭였다.


“입을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한 번만 더 그런 소리를 했다가는 그 멍청한 머리가 제자리에 붙어 있지 않을 테니까.”

그 자리에 주저앉은 다이애나를 두고 막시밀리안은 몸을 돌렸다.


 

* * *

제이나는 오랜만에 황후와의 티타임을 위한 준비를 마쳤다.

얼마 전, 황후가 겨울이 오기 전에 차나 한잔하자는 제안을 보내온 것이다.

처음에는 거절할까 했지만, 제이나는 곧 생각을 바꾸었다.

그 난리가 났는데 쥐 죽은 듯이 지내던 황후가 너무 이상했기 때문이다.


“저 혼자 가도 되는데요.”

“언제까지 어머니를 피할 수는 없는 일이니까요.”

혼자 만나러 가도 되는데도, 아나이스가 굳이 함께하겠다는 통에 어쩔 수 없이 함께 가기로 했다.

황후는 아나이스가 나타난 것에 놀란 듯 멈칫했다.


“어서 와요, 제이나. 그리고 아나이스.”

하지만 곧 표정을 갈무리하고 둘을 티 파티 장소로 안내했다.

제이나와 아나이스, 그리고 황후는 색색이 단풍이 물든 연못가의 그늘막에 자리를 잡았다.


“그사이에 좀 수척해지신 것 같습니다, 황후 폐하.”

황후는 살짝 웃으며 찻잔을 들어 올렸다.

처연한 모습은 누가 보아도 가련한 피해자의 모습이었다.

제이나와 아나이스는 눈을 데굴 굴리며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소문은 들어서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해요.”

밀리아는 우수에 찬 얼굴로 연못 위에 둥둥 떠다니는 백조 가족을 보며 중얼거렸다.

제이나와 아나이스는 서로 눈치만 보며 입을 다물었다.


“사랑은 참 부질없는 감정이에요. 한때는 내가 아니면 안 될 것처럼 굴더니, 어쩜 이렇게 쉽게 다른 여자를 품에 안는지.”

겉으로 보이는 것만큼 실제로 밀리아는 다이애나에게 질투를 느끼지 않았다.

그녀 자신도 놀라울 정도였다.

뜨겁게 불타올랐던 사랑은 이제는 바닥에 눌어붙은 찌꺼기처럼 더러운 감정으로 변해 있었다.

밀리아에게 남은 것은 원망과 증오, 분노와 같은 불행한 감정들뿐이었다.


“후후후, 두 사람은 제 말이 우스울 수도 있겠군요.”

희미하게 웃는 황후에게서 으스스한 기운이 느껴졌다.

제이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황후에게 물었다.


“요즘 황제 폐하께서는 어디서 머무시는 건가요? 나타니엘이 업무 때문에 찾아뵈려 하는데 어디 계신지 안 보인다 하길래요.”

“그 여자가 사는 타운 하우스에 있겠죠.”

물어본 것이 무색할 정도로 민망한 대답에 제이나는 입을 꾹 닫았다.

내내 가시방석 위에 앉아 있는 듯해 제이나는 차가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듣자 하니, 다이애나 그 아이가 메니실 가문을 노린다더군요.”

“네?”

황제가 뒤에서 몰래 꾸미는 공작을 밀리아가 막 알아낸 참이었다. 그러니 아직 공작가의 정보망에도 걸리지 않았을 것이다.


“전 약혼녀의 가문을 몰락시키고, 그걸 빌미로 소공작에게 결혼을 요구할 계획이라던데…….”

충격받은 듯한 제이나의 얼굴에 황후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다이애나가 그들의 약점에 욕심을 냈으니 이제 더는 참아 줄 수 없을 것이다.


“폐하께선 정부의 일을 이런 식으로 봐주시는 경우가 꽤 많았습니다. 그러다 선을 넘으면 늘 제가 중간에서 쳐냈지만…….”

하지만 이번에는 그렇지 못했다. 해 줄 생각도 없었지만, 윈터스 공작가와 척을 지면서 황후의 귀족파 장악력이 약해진 탓이었다.


“이번에는 처리하기 어려울 것 같으니 이 일은 황태자 부부에게 맡기겠습니다.”

“좋은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황제가 뒤에 있는 이상, 아무리 공작가라도 뾰족한 수가 없을 것이다.


‘치정 싸움만큼 빠르게 인망을 잃는 방법도 없지.’

받아들여도, 거절해도 더러운 꼴만 보게 될 것이다.

밀리아는 윈터스의 이름이 진창에 구르기를 바라며 눈을 빛냈다.

* * *

메니실 백작은 근래에 영 잠자리가 뒤숭숭했다.

심지어 지난밤에는 홍수로 집이 떠내려가는 꿈까지 꾼 탓에 몸 여기저기가 쑤시기까지 했다.


“아버지, 얼굴이 별로 안 좋아 보여요.”

테레사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아버지의 얼굴을 보았다.

백작은 한숨을 참으며 웃었다.

청초한 외모의 테레사는 백작의 자랑이었다.

비록 남자 보는 눈이 바닥에 붙어 있었지만.


“어머, 테레사. 오늘은 그래도 건강해 보이는구나.”

뒤늦게 식당에 나타난 백작 부인이 자리에 앉으면서 식사가 시작되었다.

셋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아침을 먹었다.

그날 오후에 있을 폭풍은 예상치도 못한 채.

백작은 오후의 홍차를 즐기며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시간은 그에게 있어서 특별한 시간이었다.

그림 같은 정원을 바라보며 마시는 차 한 잔은 특별한 맛이었다.

그때, 평화로웠던 그의 오후를 와장창 깨는 소리가 밖에서 들렸다.

아니, 실제로 무언가가 와장창 깨지고 있었다.


“뭐야?”

백작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자, 잠깐만요.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소공작님!”

문이 벌컥 열리더니 도저히 이 집 안에서 볼 수 없는 남자가 나타났다.

백작은 반사적으로 들고 있던 찻잔을 움직여 남자의 얼굴에 찻물을 부었다.


“네놈이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들어와!”

그러나 막시밀리안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이미 메니실 백작의 냉대를 각오했다.

그는 백작에게 가까이 다가가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다.


“무례를 저질러 죄송합니다. 워낙 사안이 급하여 예의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도 억지를 부렸습니다.”

진지하고 뚜렷한 눈이 이전에 넋이 나갔던 때와 완전히 달랐다.

백작은 자세를 바로 했다.


“집사, 가서 수건을 가져오거라.”

그리고 당장이라도 막시밀리안을 끌고 나가기 위해 몰려든 하인들을 물렸다.

응접실에 단둘이 남게 되자 막시밀리안은 품에서 서류 뭉치를 꺼내 백작에게 보여 주었다.

서류를 받아 든 백작의 의문 어린 얼굴이 페이지를 넘길수록 심각해지기 시작했다.


“이…… 이게 대체?”

“몇 주 전부터 그로반 남작이 타인의 명의로 백작가의 어음을 사들이는 것이 포착되었습니다. 아직 위협적이지는 않지만, 제가 알기로는 이미 협상 중인 액수가 꽤 많다고 합니다.”

백작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빚을 갚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한창 황제의 세를 등에 업고 있는 그로반 남작가의 움직임을 알게 된 파트너들이 문제였다.

앞으로의 협력 관계를 철회하거나 당분간 보류할 수도 있었다.

메니실 백작가의 주요 사업 상대들은 귀족이 아닌 평민이나 젠트리 계층이었기에 권력 구도 변화에 더 예민할 수밖에 없었다.


“대체 그로반 남작이 저희 가문과 무슨 인연이 있다고 이러는 겁니까?”

“그쪽 가문에서 테레사를 인질로 저와 남작 영애의 결혼을 진행하려는 것 같습니다.”

“뭐…… 뭐요?”

백작은 기가 차서 소리를 지르려다 참았다.

막시밀리안은 냅다 무릎을 꿇고 앉아 고개를 숙였다.


“아니, 소공작님, 왜 이러십니까? 지금 저에게 사과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닙니다.”

“사과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막시밀리안의 선언에 백작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소공작께서 어떻게 책임을 진다는 겁니까?”

“테레사를 제게 보내 주십시오.”

“그 이야기는 다 끝난 거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미 테레사는 소공작께 관심이 없지 않습니까?”

“제가 어떻게 해서든 설득해 보겠습니다.”

막시밀리안은 확신했다.

그 미친 남매의 끝이 이게 아닐 것이다.

동생인 다이애나는 자신에게 미쳐 있었고, 그로반 남작은 테레사에게 원한이 있었다.


“되었습니다. 그만 돌아가세요. 저희 가문 내에서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일입니다!”

“상대는 황제 폐하의 총애를 등에 업고 있습니다. 윈터스 공작가에도 안하무인 격으로 대하는데, 감당하실 수 있겠습니까?”

백작 역시 그 소문에 대해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그 다혈질인 공작이 남작이 평생 가발을 쓰게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그때는 그냥 자신과 먼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제 딸은 안 됩니다. 소공작께서 무슨 짓을 했는지 잊으셨습니까? 오늘 제안은 못 들은 거로 하겠습니다.”

그때 문을 열고 테레사가 들어왔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의 그녀가 아버지와 막시밀리안을 번갈아 보았다.

백작은 앞으로 나서서 말했다.


“테레사, 네가 신경 쓸 일은 없다.”

그녀는 막시밀리안을 잠시 내려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잠깐 나랑 이야기 좀 해.”

“테레사!”

“괜찮아요, 아버지. 제 결혼이니 제가 결정할게요.”

테레사는 단호한 얼굴로 선을 그었다.

그녀의 종용에 막시밀리안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둘은 테레사의 침실 옆에 달린 작은 응접실로 자리를 옮겼다.

막시밀리안은 긴장된 얼굴로 테레사의 말을 기다렸다.

원래대로라면 백작을 설득하고 나서 테레사를 설득하려 했다.

그녀와 얼굴을 마주하는 것이 두려웠던 것도 있었으니까.


“그로반 남작이 우리 가문을 노린다는 거, 사실이야?”

“응.”

“복수하려고?”

막시밀리안은 고개를 저었다.


“그냥 그로반 영애가 미쳐서 그런 거야. 너와 백작님께는 내가 면목이 없어. 앞으로도 절대 손해 보는 일 없이 할게.”

테레사는 혀를 차며 물었다.


“그럼 왜 나랑 결혼해야 하는데?”

“그건…….”

제이나에게 소식을 듣고 나서, 막시밀리안은 급하게 이름 높은 정보 길드에 의뢰했다.

거기서 얻은 보고서에 의하면 아닉스는 술집을 돌아다니면서 테레사를 자신의 첩으로 들이겠다고 공언했다고 한다.

그가 한 음담패설을 떠올린 막시밀리안은 입술을 꽉 물었다.

그녀를 손에 넣기 위해 마법사를 고용한다는 이야기까지 나오자 도저히 자리에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정확히 말해 줘. 아무것도 모른 채로 멍청하게 당하고 싶지 않으니까.”

막시밀리안은 테레사가 많이 바뀌었다는 생각을 했다.

언제나 소심하고 제 눈치를 보던 그녀가 이제는 당당하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모습이 눈부셨다.


“네 말도 맞아. 그로반 남작이 네게 원한을 갖고 복수하고 싶어 해. 마법사를 고용한다는 이야기도 들려.”

이야기를 들은 테레사는 잠시 말이 없었다.


“우리 가문이 공작가보다 세력이 약하긴 하지만, 아무것도 없는 건 아냐. 네가 걱정하지 않아도 돼.”

냉정한 테레사의 말에 막시밀리안은 무릎을 꿇었다.


“매일 욕하고 날 때려도 좋아. 날 사랑하지 않고 증오해도 괜찮아.”

막시밀리안은 간절했다.

눈앞에서 테레사를 잃는 건 꿈에서도 충분했다.

더는 시간이 없었다.


“날 봐 달라고 귀찮게 매달리지도 않을게.”

그는 온 힘을 다해 테레사의 마음 한 귀퉁이라도 얻어야만 했다.

그 이유는 다시 그녀와 행복해지기 위해서도, 사랑을 얻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그냥 널 지킬 수만 있게 해 줘.”

막시밀리안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자신의 마음이 그녀에게 전달되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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