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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화. 감정의 행방 (71/145)


71화. 감정의 행방
2022.10.05.



 


“어……. 네. 무슨 문제라도……?”

내 대답에 나타니엘은 성큼성큼 걸어오더니 내 손에서 복사본을 가져가 눈으로 살폈다.


“진짜 이걸 읽었단 말인가?”

“네.”

대체 왜 저러는지 모르겠다.


“아, 혹시 당신의 기원이 좀 다르다고 제가 싫어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 아니죠?”

“그것도 그렇지만……. 언제부터 고대어를 읽을 수 있게 된 거지?”

“네?”

고대어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나타니엘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는 내 앞에 오더니 복사본의 한 페이지를 펼쳤다.


“여길 읽어 봐.”

“음……. 드래곤은 어둠의 대리인으로서 세계의 혼란을 정리하기 위해 강력한 힘을 갖고 있다.”

“진짜로 읽을 줄 아는군.”

허탈하게 웃은 그가 내 옆에 앉았다. 나는 여전히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았다.

이 글자를 읽는 게 왜 이상하다는 거지?

다시 한번 꼼꼼히 살펴보자 평소에 읽던 문자와 다르게 생겼다는 걸 깨달았다.

너무 오랜만에 봐서 잊고 있던 익숙한 문자였다.


‘한글이잖아!’

나타니엘이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 그답지 않게 눈을 반짝이며 내 손을 덥석 잡아 들고는 물었다.


“누구에게 고대어를 배운 거지?”

“어, 음…….”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그에게 거짓말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니 사실대로 말하기로 했다.


“그냥 읽히던데요?”

“…….”

나는 당황하는 나타니엘을 보며 물었다.


“나타니엘도 읽을 줄 아는 거 아니에요?”

“너처럼 그렇게 쉽게 읽는 건 아니야. 전체 분량의 반절 정도밖에 해석하지 못했고, 앞뒤 문장을 보고 내용을 추측한 부분도 많지.”

조금 씁쓸한 표정이다. 나는 손을 뻗어 그의 뺨을 살짝 건드렸다.


“제가 해석해 볼까요?”

“그래 줄 건가?”

“그럼요. 고대어로 쓰인 책 중에서 정말 필요했던 책을 가져다주시면 제가 해석해 드릴게요.”

나타니엘은 정말 신이 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귀여운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물론 그가 책을 얼마나 가져올지 모르고 한 말이었다.

* * *

며칠 후.

쿵, 소리와 함께 책상 위에 열 권은 넘어 보이는 책이 올라왔다.

산처럼 쌓인 책 너머로 나타니엘의 머리카락이 살짝 보였다.

나는 멍청한 얼굴로 그것들을 훑어보다가 물었다.


“이게 다 뭐예요?”

“그간 내가 제대로 해석하지 못한 책들이다.”

나타니엘은 드물게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거절하기 미안할 정도여서 조용히 책을 펼쳤다.


“노력해 볼게요.”

마지못해 손을 뻗어 제일 위에 있는 책을 꺼냈다.

『마법의 정석 1』

제목만 봐도 어렵고 딱딱해 보였다. 여전히 옆에는 과할 정도로 기대에 찬 나타니엘이 서 있었다. 결국 난 심호흡을 한 뒤 책을 펼쳤다.


‘어렵잖아!’

글자를 읽을 줄 아는 것과 내용을 이해하는 것은 완전히 달랐다.

온갖 수식과 설명이 복잡하게 쓰인 책은 전생에서 보았던 유사 서적보다 훨씬 어려워 보였다.


“이거 그냥 해석만 해 주면 되는 거죠?”

“응, 그러면 돼. 너무 급하게 하지 않아도 되고.”

그렇게 말한 나타니엘이 뺨에 입을 맞추었다.


“수고해.”

귓가에 듣기 좋은 목소리로 속삭인 그는 부끄러운 듯 빠르게 방을 빠져나갔다.

난 뺨을 문지르며 나타니엘이 사라진 문을 보다가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디 보자…….”

어제 나타니엘이 선물한 펜을 빈 종이 위에 올렸다. 그리고 마력을 살짝 불어 넣었다.

내가 읽는 대로 자동으로 기록하는 펜이라고 했다.

힘들지 말라고 준 선물이어서 보는 것만으로도 웃음이 나왔다.

나는 펼쳐진 책을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읽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조금 지루하긴 했지만, 그래도 나타니엘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니 힘이 났다.


“후, 잠깐 쉴까.”

펜에 넣어 둔 마력을 거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여러 권의 책이 쌓여 있었다.

남은 것 중 하나를 꺼내 파라락, 책장을 빠르게 넘겼다.


“어?”

제목이 적혀 있지 않은 책은 노트였다.

줄이 있는 빛바랜 낡은 종이에는 삐뚤빼뚤한 글씨가 적혀 있었다.


“나타니엘 글씨야.”

전에도 본 적 있는 어린 그의 글씨였다. 내용은 생각한 것보다 어려웠다. 기껏해야 열 살 정도밖에 안 되는 어린 소년이 쓴 것이라고 하기에는 놀라운 내용이었다.

마지막 장을 확인한 나는 숨을 멈췄다.

그건 일기에 가까운 투덜거림이었다.

[어서 마법을 익혀 완전히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매번 변신할 때마다 괴물로 변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별로다. 어제는 어머니가 접시를 집어 던져 이마를 맞았다.

아프지는 않았지만, 지긋지긋하다.

혼자서 조용히 살고 싶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차라리 버려졌다면 더 행복할 텐데.]

몇 장의 일기에는 차라리 어머니에게 버림받기를 바라는 어린 나타니엘의 심정이 건조하게 적혀 있었다.

매일 절망하고, 실망하는 어린 나타니엘이 생생하게 그려졌다.

마침내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자 나타니엘은 묘한 후련함까지 느꼈다고 쓰여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일기장의 마지막 장이었다.


“이건…….”

이렇게까지 심하게 대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방임하거나 무시하는 정도라도 생각했다.

하지만 이건 학대에 가까웠다.

일부러 불러다 놓고 없는 사람처럼 취급하거나 그가 감정을 내비치려 하면 경기를 일으키며 밀어냈다.

게다가 다른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이 아니면 단 한 번도 나타니엘을 이름으로 부르지도 않았다.

[이거, 너, 괴물.]

나타니엘의 일기장에 적힌 그를 부르는 말들.

일기장의 뒤로 갈수록 나타니엘의 감정은 점점 사라져 갔다.


“아!”

나는 급하게 책장으로 달려가 중간 위쪽에 있는 장식품을 건드렸다.

드르륵 소리와 함께 옆 칸에 꽂혀 있던 책의 제목이 바뀌었다.

손가락으로 하나하나 짚어 가며 제목을 훑던 나는 얼마 전에 킬리언이 가져다준 복사본을 찾았다.


“분명 감정과 관련된 부분이 있었어.”

중간에서 조금 뒷부분이었다.


“빛과 어둠은 서로 완전히 다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근원은 카오스이니 크게 본다면 결국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빛의 존재들이 어둠보다 아름다운 건 그 찬란한 감정들 덕분이고, 어둠의 존재들이 빛보다 우아한 건 카오스처럼 보이는 감정들 덕분이다.”

원작에서도 나타니엘에겐 감정이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에게 유일하게 특별했던 존재, 테레사가 죽자 어둠의 존재인 드래곤으로 완전히 변해 버렸다.


‘그리고 그때 만난 마물들도…….’

그들 역시 점점 감정이 무뎌져 가고 있다며 불안을 호소했다.

흩어져 있던 퍼즐들이 서서히 모여 하나의 그림을 완성해 나가고 있었다.


“감정을 갖게 되면 인간의 모습을 유지하는 거였어.”

어린 나타니엘은 어머니에게 상처받는 것에서 늘 도망치고 싶어 했다. 정확히는 그녀의 어머니가 주는 부정적인 ‘감정’에서.

그는 자신도 모르게 감정들을 지웠고, 그러자 드래곤의 모습으로 지내는 시간이 점점 더 길어져 갔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친구였던 테레사를 잃으면서 모든 감정에서 도망치고 싶었던 거야.’

처음으로 마음을 내준 사람의 죽음에 나타니엘은 자신의 감정을 완전히 지웠다.

그가 사용하는 마법은 자신의 생각을 강대한 마력으로 실체화하는 것.

그러니 절대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나는 그의 글씨를 손끝으로 천천히 훑었다.

어린 나타니엘을 지켜 주지 못한 것이 너무 분했다.


‘보고 싶어.’

나는 손등으로 눈물을 쓱 훑어 내고 서재 밖으로 나왔다.

아마 지금쯤이면 집무실에서 일에 시달리고 있을 것이다. 빠르게 아래층으로 내려간 나는 노크도 없이 집무실 문을 열었다.


“뭐야.”

집무실 가운데에 서 있던 나타니엘의 놀란 눈과 마주쳤다. 나는 단숨에 달려가서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제, 제이나?”

당황이 가득 담긴 목소리에도 나는 그의 목을 끌어당겼다.

* * *

막시밀리안은 질린 표정으로 사교 클럽에서 나왔다.

계약을 위해 온 자리였지만, 사람들이 관심을 두는 것은 따로 있었다.

어딜 가나 그로반 영애와의 사이를 묻는 통에 질릴 정도였다.


“누군지도 모르는 여자인데 정말 골치 아프군.”

시선을 피해 한적한 곳에 있는 찻집으로 도망친 그는 머리를 쓸어 올리며 중얼거렸다.

혹시 이 소문을 테레사가 들었을까.

괜히 자신과 그 여자의 사이를 의심할까 봐 걱정되었다.

그날 쓰러지고 나서 테레사는 대외 활동을 자제했다.

아무래도 성력에 익숙해지려면 시간이 더 필요한 것 같았다.


‘보고 싶어.’

한번 갈증을 알아차리자 목이 타들어 가는 것 같다.

쓰러지는 테레사의 모습을 떠올리자 몸의 피가 식었다.

꿈에서처럼 얼굴이 하얗게 질린 테레사는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았다.

확인하고 싶은 마음과 그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뒤섞여서 엉망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더는 악몽을 꾸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결국 치료제는 필요 없었던 걸까?’

신성력은 치유의 힘이었다.

그 힘 자체가 테레사에게 해를 끼칠 확률은 낮다는 것이 나타니엘의 설명이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치료제에 대해 알아 두는 편이 좋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어…….”

생각에 잠겨 있던 탓에 눈앞에 누군가가 있다는 걸 뒤늦게 알아차렸다.

고개를 들어 올리자 모르는 여자가 서 있었다.

우물쭈물하는 여자는 어딘지 낯이 익었다.


“저를 찾아오셨습니까?”

“네, 잠깐 앞에 앉아도 될까요?”

“아닙니다. 모르는 여성분과 동석할 정도로 한가하지 않습니다.”

막시밀리안은 지나친 친절함이 독이라는 사실을 이제는 알았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정리하고 테이블 위에 돈을 올렸다.

그리고 가게를 나와 마차로 향했다.


“잠깐만요!”

옷을 붙잡으며 매달리는 여자를 보며 막시밀리안은 얼굴을 찡그렸다.


‘이건 경우가 없어도 너무 없는 것이 아닌가.’

막시밀리안은 부드럽게 옷자락을 빼어내며 단호하게 말했다.


“영애, 누군지는 모르지만, 저에게 이렇게까지 매달릴 필요는 없습니다.”

“절 기억하지 못하시는군요.”

다이애나는 상황이 예상한 대로 흘러가자 한숨을 쉬었다.

자신은 이름을 밝히지도 않았으니 막시밀리안 정도 되는 작위를 가진 남자가 자신을 기억할 리가 없었다.

이제는 자신의 처지가 냉정하게 보였다.


“제 이름은 들어 보셨을 거예요. 저는 다이애나 그로반이라고 합니다, 소공작님.”

막시밀리안의 두 눈에 혐오라는 감정이 짙게 어렸다.

다이애나는 입술을 꾹 물었다.

좋아하는 사람이 자신을 저런 눈으로 보는 건 역시나 마음이 아팠다.

다이애나는 그 물약을 더 많이 만들지 못한 자신을 원망했다.

책도 빼앗겨서 다시 만들 수도 없는데.

그렇다면 방법을 달리해야 했다.

황제의 권위를 이용하는 방법이 가장 손쉬웠으나 윈터스 공작의 반발이 생각보다 컸다.


‘게다가 물약의 힘이 완벽하지 않아.’

황제의 마음이 변할까 봐 전전긍긍하다가 직접 막시밀리안에게 도움을 청하기로 했다.

자신의 처지를 듣는다면 분명 가엽게 여겨 도와주지 않을까.


“당신이…… 그로반 영애로군요.”

“네, 네! ”

막시밀리안은 사랑에 푹 빠진 듯 저를 보는 여자를 향해 한숨을 쉬었다.

다이애나와 같은 여자는 처음이 아니었다.

그 여자들은 그의 외모에 반해서 몰래 쫓아다니고, 물건을 훔치기까지 했다.


“제발 이런 짓은 그만두십시오.”

막시밀리안은 질린 표정으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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