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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화. 아나이스의 걱정 (70/145)


70화. 아나이스의 걱정
2022.10.01.


아버지는 나타니엘과 상의해서 제발 그 잡것들에게 연락이 오지 않게 해 달라 말하고 돌아가셨다.


“흐음.”

그로반 가문이 생각보다 적극적이었다.

게다가 이 일에 황제가 별말이 없는 것이 이상했다.


‘너구리 같은 아저씨가 또 우리가 뭘 어떻게 하길 바라는 건 아니겠지.’

나는 빌 가족을 도와주러 간 나타니엘이 돌아오면 이 일에 대해 진지하게 이야기해 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 * *

며칠 뒤.

그사이 그로반 남작이 윈터스 공작에게 동생과 소공작의 혼인을 요청했다가 큰 화를 입었다는 소문이 사교계에 퍼졌다.

그들이 보낸 선물도 모조리 돌려보냈다는 이야기까지 돌면서 어디를 가든 윈터스 공작가 이야기로 뜨거웠다.

나는 불만스러운 얼굴로 열정적인 뜨개질을 하며 나타니엘에게 투덜거렸다.


“황제 폐하께서 정신에 문제가 있는 게 틀림없어요. 아니, 어떻게 자기 정부를 저희 집안에 들이밀 수가 있어요.”

“그렇지 않아도 그로반 남작을 불러들인 일 때문에 아버지를 만나려고 했는데, 어쩐지 얼굴 뵙기가 쉽지 않군.”

주요 업무는 나타니엘과 적당히 나눠서 처리해 왔기에 업무가 밀리지는 않았다.

문제는 그로반 남작가의 편의를 봐주는 듯한 명이 내려온 것이었다.

황제가 정부와 바람이 난 것은 처음이 아니었다.

그들 대부분은 한미한 가문 출신이었지만, 이렇게 편애를 하는 경우는 처음이었다.


“그리고 이상한 게 있어요.”

나는 뜨개질을 멈추고 나타니엘을 보며 말했다.


“황후 폐하께서 조용해도 너무 조용해요.”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상상하며 수군거렸던 것이 무색할 정도로 황후는 반응이 없었다.

마치 무언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양쪽 다 너무 수상해요.”

“일단 폐하를 만나는 게 먼저이긴 한데…… 전부터 궁금했는데 대체 그건 뭐지?”

나타니엘은 분홍색 털실로 뜨고 있는 망토를 가리켰다.


“자수도 아니고 뜨개질을 하는 귀족은 처음이군.”

“아, 이거요?”

나는 뜨끔해져서 시선을 피했다.

사실대로 말하면 분명 화를 낼 거 같은데…….

절대 안 입는다고 할 것 같았다.

나타니엘은 얼굴을 구기며 재차 입을 열었다.


“대답.”

“그…… 용으로 변하면 추울까 봐요.”

“…….”

“평범한 검은색 스웨터도 만들었어요!”

나는 재빨리 변명을 덧붙였다. 하지만 나타니엘의 표정은 쉽게 변하지 않았다.


“절대 안 입어.”

단호한 선언에 나는 그를 달래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파충류는 원래 겨울에 힘들잖아요. 따뜻하게 입고 있으면 좋을 거 같아서요.”

나는 스웨터의 장점을 피력하게 시작했다.

체온 유지에 대해서는 수긍하는 듯 보였으나 고전적인 디자인이라는 점은 인정하지 않는 눈치였다.


“그대의 미적 감각이 의심스럽군.”

“제 정성이라고 생각하세요.”

나타니엘은 길게 한숨을 쉬었다.

이겼다는 생각에 슬그머니 웃음이 나왔다.

보송보송한 스웨터를 입고 앉아 있는 나타니엘을 상상하니 뜨개질을 하는 손이 더 빨라졌다.

* * *

아나이스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요 며칠 잔뜩 들떠 있던 헨리가 신경 쓰인 탓이다.


- 누님, 프리체 공국은 어떤 곳일까요?

꿈꾸듯 공상하는 헨리를 보면서 아나이스는 죄책감에 시달렸다.

그들의 어머니가 절대 헨리를 순순히 놓아주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확실하지 않지만, 다른 꿍꿍이가 있다는 것도.

지금이야 헨리가 어리고, 사이가 좋으니 이렇게 지낼 수 있지만 만일 걱정하는 일이 생긴다면…….

여러 가지를 생각해 봤을 때 킬리언과 친분을 쌓아 두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비 전하, 혹시 킬리언 경과 약속을 잡아 주실 수 있을까요?”

“킬리언 경과요? 그때 불편해하지 않았나요?”

제이나는 뜻밖의 제안에 당황했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아나이스를 바라보았다.

아나이스는 손을 내저으며 변명하듯 말했다.


“헨리가 관심이 많아 보여서요.”

“아…….”

제이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 고민하던 그녀가 물었다.


“제가 너무 바빠서 같이 참석 못 할 텐데……. 괜찮겠어요?”

“네. 저렇게 신이 나 보이는 건 처음 봤어요. 매일매일 유학만 꿈꾸는 것 같아요.”

제이나는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아나이스를 바라보았다. 아나이스는 그런 그녀의 시선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러세요?”

“예전보다 훨씬 좋아 보여서요.”

“그런가요? 평소랑 다를 바 없는 거 같은데…….”

“예전에는 바라는 걸 말하는 것도 망설이셨잖아요.”

“아…….”

아나이스의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자신을 도와주려던 제이나를 밀어냈던 것을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늘 비 전하께는 고맙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제가 뭘 했다고요.”

“아니에요. 비 전하가 와서 저도, 헨리도…… 그리고 오라버니도 많이 변했는걸요.”

아나이스의 칭찬에 제이나는 멋쩍게 웃으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처음 만났을 때는 까탈스러운 귀족 아가씨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전혀 달랐다.

화려하고 냉엄한 지옥 같은 황성에서 각자의 궁에 고립되어 있던 가족들을 구원해 주었다.


“하하하, 갑자기 띄워 주니까 부끄러운걸요?”

아나이스는 옅게 웃었다.

언젠가 자신도 그녀에게 도움이 될 수 있길.

* * *

며칠 뒤, 제이나는 아나이스의 바람대로 킬리언과의 약속을 잡아 주었다.

아나이스는 헨리의 손을 잡고 장미가 흐드러지게 핀 황태자궁의 유리 정원에 앉아 상대를 기다렸다.


“누님, 정말 그때 그분이랑 만날 수 있는 겁니까?”

헨리가 높은 의자에 앉아 발을 달랑거리는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아나이스는 곱슬곱슬한 동생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맑은 헨리의 웃음소리가 온실을 가득 채웠다.

그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나이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붉은 머리카락을 검은색 리본으로 묶은 남자는 경직된 웃음을 짓고 있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는 우아하게 허리를 숙였다. 아나이스는 살짝 긴장한 채로 인사를 받았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킬리언 경. 이쪽으로 와서 앉으세요.”

킬리언은 남아 있는 자리에 앉았다. 두 눈을 반짝이며 주변을 살피는 모습이 꼭 어린아이처럼 보였다.


“절 불러주셔서 아주 기뻤답니다. 다시는 두 분에게 사과를 못 할 줄 알았습니다.”

“하, 하하…….”

킬리언은 침을 꿀꺽 삼켰다. 마법과 관련된 사안이라면 상대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달려드는 버릇 탓에 곤경에 처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는 머리를 긁적이며 무릎을 꿇고 앉아 헨리와 눈을 마주쳤다.


“황자 전하, 정말 죄송합니다. 혹시 그날 많이 놀라셨습니까?”

“우웅, 괜찮습니다.”

고개를 도리도리 저은 헨리는 말과 달리 아나이스의 치마 뒤에 살짝 몸을 숨겼다. 여전히 무서워하는 헨리의 모습을 보자 킬리언은 양심에 쿡 찔렸다.


“제가 드래곤의 후손에게 정말 관심이 많습니다. 사실 얼마 전에도 황태자 전하께 그래서 혼이 났거든요.”

“아아…….”

헨리의 몸이 살짝 이완되었다. 킬리언은 방긋 웃으며 손에서 꽃을 만들어 냈다.


“사과의 의미로 이걸 드리겠습니다.”

헨리는 눈만 깜빡깜빡하더니 조심스럽게 꽃을 받아 갔다.


“감사합니다, 마탑주님.”

킬리언은 오해가 풀려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테이블에 앉았다. 아나이스는 여전히 그가 의심스러웠지만 티를 내지 않았다.


“이건 제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차예요. 그리고 이건 남부에서 유명한 자몽을 올린 타르트예요.”

“오, 자몽은 처음 봅니다. 이렇게 생긴 과일이군요.”

재빨리 나이프와 포크를 든 킬리언이 전투적으로 타르트를 잘라서 입 안에 집어넣었다.


“세상에, 너무 맛있습니다.”

“입에 맞는다니 다행이네요.”

“새콤하면서 씁쓸한 맛이 묘하게 잘 어울리는군요. 이 옆에 있는 건 뭐라고요?”

수선을 떨며 파티셰를 찬양하는 킬리언의 모습에 아나이스는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마탑주라는 무거운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한없이 가벼운 행동이 기묘할 정도로 잘 어울렸다. 킬리언은 그런 아나이스의 태도에도 방긋 웃으며 둘을 대했다.

불편할 줄 알았던 티타임은 즐겁기만 했다.

헨리는 킬리언에게 공국의 아카데미에 대해 물었다.


“황자 전하께서는 아카데미에 가고 싶으신 거군요?”

“응? 아니요, 그냥 어떤지 궁금해서요.”

“좋은 곳입니다. 다들 자기 일에 열정적이지요. 특히 1년에 한 번, 모든 아카데미에서 하는 박람회는 전 대륙에서 구경하러 온답니다.”

“박람회…….”

킬리언은 씨익 웃더니 주머니에서 마석을 박은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그러자 빛무리가 아름다운 도시의 모습을 그렸다.


 


“네. 박람회요. 공국의 수도, 바르샤에서 열립니다. 박람회가 열리는 기간에는 일주일 동안 학회가 열리기도 하고, 전시회나 연주회가 열리기도 하지요.”

킬리언의 말에 따라 마법의 빛은 형형색색 그 모양을 바꾸며 그림을 그려 갔다.

헨리는 입을 벌린 채로 마법을 보았다.

아나이스는 조금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를 보다가 시간을 확인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네요. 저희는 일정이 있어서요.”

“아, 그러시군요. 오늘 이렇게 사과할 기회를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킬리언은 그들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그를 빤히 보던 헨리는 검은색 로브를 붙들었다.


“다, 다음에도 또 볼 수 있을까요?”

킬리언이 힐끔 아나이스의 눈치를 살폈다. 아나이스는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전하. 궁금하신 게 있으시다면 언제든지 저를 찾으시면 됩니다.”

그렇게 말을 마친 킬리언은 유리 정원 밖으로 나갔다.

아나이스는 남몰래 한숨을 쉬고 헨리의 손을 잡았다.


“이제 그만 돌아갈까?”

“어, 누님. 이것 보세요. 킬리언 경이 두고 갔나 봐요.”

그가 떠난 자리에는 서류 봉투 하나가 놓여 있었다. 헨리가 번쩍 들어 올리더니 봉투에 적힌 글씨를 확인했다.


“아. 형님한테 전해 달라고 쓰여 있는데요?”

“응? 그래? 왜 직접 전달하지 않고…….”

아나이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때, 마침 제이나가 온실 안으로 들어왔다.


“벌써 마탑주가 돌아갔나요?”

“아, 네.”

헨리가 짧은 다리를 움직여 제이나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불쑥 서류를 들이밀었다.


“이거요! 형님에게 줄 거였나 봐요.”

“어머, 고마워요, 황자님.”

제이나는 살짝 웃으며 서류를 받았다.

* * *

아나이스와 헨리를 돌려보낸 뒤, 나는 집무실로 향했다.

하지만, 외근을 나간 것인지 나타니엘과 마틴 둘 다 보이지 않았다.

결국 서재로 돌아온 나는 소파에 앉아 봉투에서 서류를 꺼냈다.


“흐음.”

첫 장에는 ‘드래곤과 세계의 역사’라 적혀 있었다.

제목 참 정직하게 지었다고 생각하며 다음 장으로 넘겼다.

안에 있는 내용은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태초의 기원은 빛과 어둠이었으며, 빛으로부터 다양한 변종이 만들어져 동식물에서부터 인간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진화론?’

전생에서는 정규 과정에도 들어 있는 당연한 내용이었다.


‘신이 존재하는 세계에서는 좀 충격적일 수도 있지.’

계속해서 읽자 조금 놀라운 내용이 나왔다.

[드래곤과 마물은 어둠으로 만들어진 생물이라.]

책에 의하면 둘의 기원 자체가 완전히 다른 것이다.


“흐음, 별 내용 없는 것 같은데…….”

“제이나?”

익숙한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들었다.

거기엔 당황한 표정의 나타니엘이 서 있었다.


“지금 그걸 읽은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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