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9화. 윈터스 공작가 사람들 (69/145)


69화. 윈터스 공작가 사람들
2022.09.28.


한때 제국을 주름잡았던 노기사의 살기는 엄청났다.

아닉스는 저도 모르게 몸이 덜덜 떨렸다.


“이 윈터스 공작 앞에서 그따위 망언을 하고도 걸어 나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느냐?”

“나…… 나는 그로반 남작이다! 내게 이러면 내 여동생이……!”

남작의 하찮은 으름장에도 공작은 인정사정없이 검을 휘둘렀다.

아닉스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기절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지린내까지 나자 다혈질인 공작은 소리를 질렀다.


“어휴. 집사! 와서 저치랑 의자를 같이 묶어서 그 타운 하우스인가 뭣에다가 가서 버리고 와라. 황제 폐하께 청구서도 보내고!”

집사는 기절한 아닉스를 보며 혀를 찼다.


‘이 집안사람들이 얼마나 다혈질인데 시비를 걸다니.’

그래도 황제가 총애하는 정부의 가족이라고 공작이 봐주어서 다행이다.


“아, 잠깐. 거기서 저놈 머리 잘 잡고 있어 보게.”

“예?”

집사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지만 시키는 대로 아닉스의 머리를 잘 붙잡았다.


“움직이면 안 된다.”

그렇게 말한 윈터스 공작은 작은 단검에 검기를 불어 넣었다. 검신이 푸르스름한 빛을 머금자 공작의 손이 재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후, 되었다.”

아닉스의 풍성한 머리칼이 옆통수에만 남아 있었다.


“공작님, 이게 대체…….”

“그 자식 던져 주면서 말해. 내 특별히 검기로 모공을 막아 주었다고.”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나한테 와서 싹싹 빌지 않는 이상 평생 거기서 머리카락 한 가닥도 나지 않을 거란 소리다.”

공작의 말에 집사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는 소중한 것을 털린 아닉스를 연민 어린 눈으로 바라봤다.

자신은 절대 이 집안사람들에게 시비를 걸지 않으리라 생각하며.


 

* * *

신년제가 코앞까지 찾아왔다. 원래대로라면 황제와 황후가 준비해야 할 행사였지만, 황제가 일을 나타니엘에게 미뤄 버렸다.

그 덕에 가뜩이나 바쁜 나타니엘의 일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 그대가 마틴을 뽑자고 해서 다행이다.

아무리 나타니엘이 인간의 한계를 아득히 초월한 업무 처리 능력을 가졌다지만,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양이었다.


- 눈치는 좀 없지만, 나름 일은 잘하는 것 같아서 다행이야.

처음에는 맡기지 못하고 자신이 전부 다시 확인하던 나타니엘은 마틴에 대한 신뢰가 꽤 커진 듯 보였다.


‘지금 남 걱정할 때가 아니지…….’

눈앞에 가득 쌓인 서류의 산을 보며 나는 조용히 눈을 감고 생각했다.


‘결혼해서 제사 드리는 기분이야.’

봄에 결혼해서 여름에는 사냥 대회를 준비해야 했고, 가을에는 수확제를 준비해야 했으며, 겨울에는 신년제 준비를 해야 했다.

그 중간중간 연회도 열고, 티 파티도 열어야 했다.


“인간적으로 일이 많아도 너무 많다.”

이번 신년제는 중간 다리 역을 해 주었던 황제와 황후가 빠지면서 더욱 골치가 아팠다.

사제들이 나타니엘을 너무 싫어했기 때문이다.

최고 사제들도 싫어해서 그런지 그 밑에 있는 사람들도 비슷했다.

그 덕에 일이 너무 더디게 진행되었다.


“하아……. 잠깐 쉬자.”

오전 내내 매달려 있던 예산 작업이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되자 휴식이 간절했다.

시간을 확인하니 곧 헨리가 찾아올 시간이었다.


‘오늘은 나타니엘이 시간을 낼 수 있어야 할 텐데.’

요즘 헨리는 늘 함께 지내던 아나이스보다 나타니엘을 더 따랐다.

아나이스가 아쉬워할 정도였다. 하지만 요즈음 나타니엘의 일과가 늘어나면서 헨리와 함께하는 시간이 크게 줄었다.


‘좋아.’

오늘은 산책을 좀 하다가 아나이스와 헨리를 만나서 나타니엘의 집무실을 가야겠다는 야심 찬 계획을 세웠다.

천 사이에 털을 채워 넣은 망토를 두르고 장갑을 끼고 목도리까지 두른 뒤 밖으로 나왔다.

다행히 해가 좋아서 많이 춥지는 않았다.


“아, 좀 살 것 같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산책로를 한 바퀴 돌고 나자 좀 상쾌해졌다. 스트레칭을 하면서 아나이스와 헨리가 들어올 입구로 향했다.


“이거 놓으세요!”

“응?”

저 멀리 아나이스와 헨리가 누군가에게 붙잡혀 있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붉은 머리를 대충 묶은 남자.


‘킬리언 경이잖아.’

나는 거의 뛰다시피 걸어서 아나이스 옆에 섰다.


“아, 비 전하.”

날 먼저 발견한 킬리언의 얼굴에 안도감이 피어올랐다.

내 뒤로 아나이스가 헨리의 손을 잡고 재빨리 숨었다.

아나이스가 낯을 가리긴 했지만, 이렇게 상대를 싫어하는 것은 처음 보았다.


“오랜만이군, 킬리언 경.”

“마침 잘 오셨습니다, 비 전하. 제 억울함을 풀어 주십시오.”

“억울함이라니?”

“저 레이디께서 제가 아이에게 관심 많은 변태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아서요.”

“아이?”

나는 시선을 돌려 헨리를 내려다보았다. 아나이스가 내 귓가에 속삭였다.


“헨리를 보자마자 갑자기 자기랑 손 한 번만 잡아 달라면서 여기까지 쫓아왔어요.”

“…….”

변태로 몰려도 충분한 언행이었다.

분명 그가 마법에 지대한 관심이 있기에 나타니엘과 형제인 헨리에게 호기심을 보였을 것이다.


“당신은 정말 배운 게 없군요.”

“예?”

“이 둘이 누군지 알고 그런 망언을 했단 말이에요.”

킬리언은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듯 눈만 깜빡거렸다.

나는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아나이스 황녀님, 헨리 황자님. 이쪽은 프리체 공국의 사절 킬리언입니다.”

내 소개를 들은 킬리언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아나이스는 킬리언의 정체를 들었는데도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


“아, 죄…… 죄송합니다. 저는 그러니까…….”

벌써 황족에게 두 번이나 예를 지키지 못했으니 킬리언으로서도 죽을 맛일 것이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도록 해요.”

“예, 부디 다음번에 사과할 기회를 주신다면…….”

“되었으니 돌아가 주세요.”

킬리언은 싸늘한 아나이스의 말에 입을 다물었다.

어색한 공기가 흘렀다.


“프리체 공국이요?”

얼어붙은 분위기를 깬 건 헨리 황자의 귀여운 목소리였다.


“예, 맞습니다, 황자 전하.”

킬리언은 조금이라도 점수를 따고 싶은 건지 재빨리 헨리와 눈을 마주쳤다.


“혹시 저희 공국에 대해 궁금한 것이 있으신가요?”

헨리의 얼굴이 잠깐 흐려졌다. 그러고는 나와 아나이스의 눈치를 살폈다.

평소 원하는 것을 마음껏 말하지 못하고 황후의 눈치만 보던 것이 여기서 드러났다.

아나이스도 나와 같은 생각을 했는지 입술을 꼭 물었다.

나는 킬리언 옆에 쭈그리고 앉아서 헨리의 얼굴을 보았다.


“왜 그러세요, 황자님? 킬리언 경과 이야기를 해 보고 싶으신가요?”

“우, 우웅.”

헨리는 대답하지 않고 몸을 흔들며 살짝 아나이스의 뒤로 숨었다.


“킬리언 경.”

“네, 네!”

“조만간 황자님과 티타임이라도 갖죠. 황자님에게 프리체 공국에 대해 알려 주세요.”

“예, 그러도록 하겠습니다.”

킬리언은 단숨에 승낙했다. 힐끔 헨리의 얼굴을 보자 기쁜 티가 역력했다.

다시 한번 사과를 한 그가 재빨리 멀리 사라졌다.


“그럼 우리는 황태자 전하에게 갈까요?”

“네!”

오늘따라 헨리의 얼굴이 더욱 밝아 보였다.

* * *

이른 새벽, 조용했던 윈터스 공작가가 시끄러워졌다.

고성이 오가자 아침 훈련을 마치고 돌아온 공작이 현관으로 나갔다.


“대체 새벽부터 무슨 일…….”

공작은 정문을 막을 정도로 쌓여 있는 선물들을 보며 인상을 썼다.

그의 심기가 불편한 걸 알아차린 집사는 재빨리 공작의 눈치를 봤다.


“그게, 그로반 남작가에서 멋대로 선물을 보내서…….”

“다 돌려보내.”

공작은 인상을 팍팍 쓰며 돌아섰다.

운이 없게도 그 자리에 막시밀리안이 있었다.

공작은 그 얼굴을 보자마자 속이 터졌다.


“막스! 잠깐 따라오너라.”

집무실에 들어오자마자 공작은 비명을 지르듯 소리쳤다.


“이제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냐?”

막시밀리안 역시 얼굴도 모르는 그로반 영애가 자신에게 구애하는 지금 상황이 당황스러웠다.


“딱히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방법이 없긴 왜 없어! 내가 이미 들어온 혼담을 정리해서 보여 주지 않았느냐?!”

“아직 결혼 생각이 없습니다.”

태연한 막시밀리안의 말에 공작의 인내심이 뚝 끊어졌다.


“결혼 생각이 없으면 약혼이라도 하든가! 네 녀석, 설마 메니실 가문에서 널 받아 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알고 싶지 않은 진실을 콕 짚어 알려 주는 아버지의 모습에 막시밀리안은 작게 중얼거렸다.


“바란 적 없습니다.”

“그럼 평생 수절할 생각이냐?”

“사랑하지 않는 여자와 결혼하고 싶지 않습니다.”

“사랑은 얼어 죽을 사랑!”

공작은 분을 못 이기고 장식으로 놓여 있던 나무 조각상을 부쉈다.


“네놈의 그 사랑 타령 때문에 제이나가 무슨 꼴을 당했는데!”

아버지의 말에 막시밀리안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제이나에게는 정말 입이 열 개여도 할 말이 없었다.


“내가 널 너무 오냐오냐 키웠구나. 유예 기간은 끝났다. 누군가와 약혼을 하든, 결혼하든 올해 안에 정리해라.”

“아버지!”

“그렇게 절박하면 뭐라도 열심히 해 보든가! 이것도 흥, 저것도 흥 하면서 멀리서 눈치만 보며 지내는 주제에.”

윈터스 공작은 이번 기회에 모든 일을 바로잡기로 했다.

막시밀리안을 내보낸 그는 옷을 갈아입고 황성으로 향했다.

* * *

어쩐 일로 아버지께서 아침 일찍 찾아오셨다.

주변을 물리고 방에는 아버지와 나, 단둘만이 남았다.


“집에 무슨 일 있었어요?”

“후우…… 말도 말아라.”

아버지는 그때부터 기다렸다는 듯이 하소연을 하시기 시작했다.

얼마 전 찾아온 그로반 남작부터, 오늘 아침에 도작한 선물들까지.


“거절했는데도 그런단 말이에요?”

“그래. 폐하께서는 대체 무슨 생각이더냐? 지금 우리 가문을 욕보이다 못해 아주 무시하는 수준 아니냐.”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신의 정부를 나라의 기둥 중 하나인 윈터스 공작가의 부인 자리에 앉히려 하는 건 모욕적인 처사였다.


“마석 광산이 그렇게 탐이 나셨다면 차라리 너랑 황태자 전하를 결혼시키지 말고 뜯어 갈 것이지. 이제 와서 치졸하게.”

“아버지, 말조심하세요. 아무리 그래도 여기 황성이에요.”

나는 혹시 누가 들었을까 주의하라고 단단히 경고하였다.


“내가 가서 뒤집을까 하다가 그래도 너나 황태자 전하를 통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아서 왔다.”

“잘하셨어요.”

그 성격에 한 번 참으셨다는 것이 기적이었다.


“오라버니는 어떻게 할 생각이래요?”

“걔가 뭐 생각이나 있겠냐? 내가 올해 안에 누구라도 데려오라고 했다.”

아버지는 민망하신지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그가 말했다.


“늘 네게 미안하구나, 제이나.”

“갑자기 왜 그러세요?”

“막스가 그 난리만 치지 않았어도, 천천히 괜찮은 남자를 찾았을 수도 있었을 텐데.”

그렇게 말하며 아버지는 혀를 찼다. 아직도 나타니엘이 마음에 차지 않아 보이셨다.


“난 황태자 전하가 좀 그렇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시지는지도 잘 모르겠고, 뭐……. 황제 폐하나 황후 폐하가 믿을 만한 분들도 아니고.”

“하, 하하.”

아버지의 적나라한 평가에 나는 다시 한번 주변을 살폈다.

여기에 아무도 없어서 다행이다. 아니었으면 벌써 반역으로 잡혀가고도 남았을 것이다.


“내가 제이나, 네 가시밭길만 생각하면 눈물이 앞을 가리는구나.”

손수건을 꺼내 톡톡 눈물을 닦아내는 아버지의 모습에 입맛이 썼다.


“아니, 뭐…… 나타니엘도 좋은 남자예요.”

나는 어설프게 변명했다.

아버지는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눈가가 촉촉해졌다.


“무슨 일이 있으면 앞으로도 꼭 말하거라. 내 저번처럼 도와주마.”

나는 별일 없이 너무 잘 지내고 있어서 입을 다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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