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숲에 사는 마물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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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화. 숲에 사는 마물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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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화. 숲에 사는 마물의 비밀
2022.09.24.
자신을 빌이라고 소개한 마물은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우리는 그 뒤를 쫓으며 점점 깊은 숲속으로 들어갔다.
사람의 손을 타지 않아 울창한 숲은 진짜로 무서웠다.
나는 나타니엘의 옆에 찰싹 붙었다.
날 내려다보는 나타니엘은 머릿속이 복잡한 듯 보였지만 나는 최대한 모르는 척하기로 했다.
- 여기다.
도착한 장소에는 그럴듯한 나무집이 있었다.
크지 않지만 아담한 집 앞에는 겨울을 나기 위함인지 나무 장작이 쌓여 있었다.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오는 창문으로 누군가가 왔다 갔다 하는 것이 보였다.
곧 누군가가 문을 열고 나왔다.
- 여보!
한 손에 몽둥이를 들고나온 그녀는 금방이라도 우릴 때릴 기세였다.
함께 온 빌은 그녀를 말리고 우리에 관해 설명하며 설득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멀찌감치 서서 둘의 대화가 끝나길 기다렸다.
“부인인가 봐요.”
“지난번에도 보았다. 새끼도 있더군.”
대화가 끝난 듯 빌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그의 부인으로 추정되는 마물은 여전히 경계심을 풀지 않고 있었다.
- 나의 부인, 마리다.
“부인인 마리래요.”
마물에게도 이름이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나는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지만 깔끔하게 무시당했다.
빌은 미안하다는 듯 고개를 까딱하고 우리를 집 안으로 이끌었다.
오두막 내부는 정말 놀라울 정도로 인간의 집과 똑같았다.
방으로 들어가는 문이 있고 식탁과 의자, 주방까지 있었다.
“완전 사람 집이랑 똑같은데요?”
나타니엘도 조금 놀란 눈치였다.
우리는 조악한 식탁에 앉았다.
빌은 마리의 눈치를 보면서 말하기를 주저했다. 그래서 내가 먼저 묻기로 했다.
“저희가 뭘 어떻게 도와주면 되나요?”
마리는 잠시 나를 노려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빌이 입을 열었다.
- 이제 여기서 살 수 없다는 걸 안다. 우리를 다른 곳으로 옮겨다오.
“다른 곳이라면, 다른 마물들이 사는 곳을 말하는 건가요?”
- 아니다. 우리는…… 우리는 원래 사람이었다.
“예?!”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자 마리가 눈치를 줬다.
그러고는 문을 확인했다.
다행히 아이들은 깨지 않은 것 같았다.
나는 미안하다는 의미의 제스처를 취하고 나타니엘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사람이 마물이 된다는 이야기는 처음 들어 보는군.”
그는 미간을 좁히며 잠시 생각에 빠졌다.
일단 전후 사정을 듣기 위해 그들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 처음에는 나 혼자뿐이었다. 서서히 감정이 무뎌지고, 기억력이 나빠졌다. 그리고 어느 날 몸까지 이런 모습으로 변했다.
“다른 가족들은요?”
- 마리는 내가 마물로 변하고 날 돌봐 주면서 비슷하게 변해 갔다. 아이들은 우리 둘 다 마물이 되고 나서 생겼다.
둘은 이 숲에서 십여 년을 숨어 살았다고 했다.
중간중간 이성을 잃지 않도록 서로의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고.
“그럼 다른 마물들과도 대화가 되는 건가요?”
- 지난번에 너희들이 잡은 그 마물과는 대화가 통하지 않았다. 우리와 같은 인간형 마물은 모르겠지만…….
그 말은 이들과 같이 인간에서 마물이 된 자들이 더 있을지도 모른다는 뜻이었다. 근래 마물의 수가 늘어난다는 보고서까지 떠올리자 섬뜩함이 느껴졌다.
나는 지금까지 들은 이야기를 나타니엘에게 모두 설명해 주었다.
그는 길게 한숨을 쉬더니 입을 열었다.
“어차피 이 숲은 지난번에 내가 잡은 마물 때문에 곧 대대적인 소탕 작업이 들어갈 거다. 그러니 살고 싶다면 여길 비우는 것이 낫지.”
- 이 모습으로는 숲 밖으로 나갈 수 없다.
맞는 말이었다.
이 숲은 수도 가까이에 붙어 있었다.
주변에는 숲을 관광하러 온 사람들을 위한 상업 지구가 발달해 있었다.
어느 방향으로 나가든 저 모습은 단연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나타니엘은 침울해진 둘을 보다가 물었다.
“원래 모습으로 돌아갈 방법이 있다면 어떻게 할 거지?”
나타니엘의 말에 조금 전까지 침울했던 둘의 표정이 바뀌었다.
새삼 원래는 사람이었다고 하니 그들의 표정이 더욱 생생하게 보였다.
- 그…… 그런 방법이 있나?
여태껏 아무 말도 없던 마리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통역해 주자 나타니엘은 조심스럽게 가능성을 이야기했다.
“아직은 확신할 수 없어. 일단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어서 확인해 봐야 해.”
나타니엘의 말에 마리는 실망했지만, 빌은 조금 달랐다.
그는 나타니엘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애원했다.
- 인간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당연히 돌아가고 싶다. 제발 도와다오.
통역을 해 주지 않아도 분위기와 표정만으로도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최선을 다해 보도록 하지. 대신 얌전히 숨어 있도록 해. 만일을 대비해서 몸을 숨길 공간도 만들어 두고.”
나타니엘은 그렇게 말하며 황실의 계획을 설명했다.
지난번 사냥제에서의 소동으로 이 숲에 마물이 있다는 소문이 퍼졌다.
숲 근처에서 장사하던 제국민들은 당연히 마물을 소탕해 주길 청원했고, 이곳을 관리하는 황실이 군대를 파견하기로 했다.
“아마 두 달 후가 될 거다.”
작전의 지휘관이 나타니엘인 점이 천만다행이었다.
계획을 미리 알 수 있으니까.
- 정말 고맙다.
그들은 몇 번이고 감사하다며 허리를 숙였다.
우리는 둘의 배웅을 받으며 황성으로 돌아왔다. 잠시 침실 의자에 앉아 고민하는 나타니엘의 얼굴에 처음 보는 감정이 일렁였다.
나는 그의 반대편에 앉아 물었다.
“어떤 생각 해요?”
“내가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 못 해봤어.”
“나타니엘이 모든 걸 해 줄 수는 없지만, 많은 걸 해 줄 순 있죠.”
그는 새삼 자신이 앉아 있는 황태자라는 자리의 무게를 느낀 것처럼 보였다.
나는 조용히 그의 손을 잡았다.
“지금 당장 걱정할 필요는 없어요. 아직 시간은 많으니까.”
나타니엘의 표정이 풀리며 피식 웃음소리를 냈다.
“그래.”
그가 작게 속삭였다.
* * *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피곤함에 씻고 자리에 누웠다.
나는 침대에 누워서 천장을 보다가 나타니엘에게 물었다.
“진짜 사람으로 되돌릴 수 있어요?”
“인간에서 마물로 변하는 당사자가 나잖아.”
나타니엘의 말에 잠이 확 달아났다.
놀라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어쭙잖게 변명을 늘어놓았다.
“요…… 용은 마물이 아니에요.”
“마물보다는 좀 더 고등 생물체이긴 하지. 어쨌거나, 난 이 체질을 고치고 싶어서 꽤 오래 연구했거든.”
당황한 내 모습이 우습다는 듯 피식 웃으며 나타니엘은 말을 이었다.
“그때 본 책 중에 금서의 일부를 가져온 책이 있었는데, 거기에 인간형 마물과 인간의 기원은 같다는 이야기가 있었어.”
전혀 믿기지 않았다.
내가 믿지 않는 눈치이자 나타니엘은 팔을 휙 잡아당겨 날 끌어안았다.
“확실한 건 그 금서를 찾아보면 돼.”
“그 금서가 어딨는데요?”
나타니엘은 잠시 말이 없었다.
황태자인 그가 이 제국에서 들어갈 수 없는 곳은 거의 없었다.
“신전이 관리하고 있군요.”
“그래.”
“저나 저희 가문 사람도 들어가기 힘들 거예요.”
누구를 보내야 할지 고민하던 내게 나타니엘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나이스가 어떨까 생각했는데.”
“황녀님이요?”
“그래. 트레비아 후작가와 신전은 꽤 친한 사이거든. 뭐, 날 견제하기 위해서겠지만.”
“흐음.”
하지만 아나이스 황녀를 그런 위기에 빠뜨리고 싶지는 않았다.
“책의 사본을 만들 수 있을 정도면 꼭 황족이 아니어도 볼 수 있다는 거죠?”
“황족 중에서도 정확히는 내가 못 보는 거지. 아마 그 분야에 관심 많은 고위직이라면 그냥 볼 수 있을 거다.”
다른 괜찮은 사람이 없을까 고민하던 나는 킬리언을 떠올렸다.
“마탑주는 어때요?”
“마탑주?”
“그는 제국 사람도 아니고, 마탑주이니 그런 금서에 호기심이 있을 만하죠. 가장 의심 안 받을…….”
나타니엘의 표정이 굳었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 그의 눈치를 보았다.
“별……로예요?”
내 입에서 다른 남자의 이름이 나오는 걸 그는 좋아하지 않았다.
나라도 기분 나쁘겠지만, 그래도 꼭 필요한 것이니 나타니엘이 이해해 주었으면 싶었다.
“알겠다. 내가 한번 이야기해 보지.”
“나타니엘이요? 킬리언 경이랑 친해요?”
“본인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더군.”
‘난 아니지만.’이라는 뒷말이 들리는 것 같았다.
* * *
나타니엘은 요즘 얼굴을 보기 힘들 정도로 바빴다.
빌의 가족이 도망갈 장소를 찾으면서, 그들이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올 방법도 연구 중이었다.
그 뒤로 바쁜 만큼 시간은 착실히 흘렀다.
마치 폭풍 전야처럼 이상하게 주변이 고요했다.
그리고 내가 용용이가 입을 스웨터를 완성했을 때쯤, 마침내 사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전하, 비 전하!”
“응?”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카시안이 평소와 달리 다급하게 뛰어왔다.
그녀는 내 앞에 있는 소파에 앉아 주변에 있던 하녀들을 물렸다.
“그 이야기 들으셨어요?”
“뭘?”
“그로반 영애 말이에요.”
“아아, 황제 폐하의 정부가 되었다면서?”
“맞아요!”
카시안은 주변을 살피더니 조용히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세상에, 폐하께서 그로반 영애에게 단단히 빠지셨는지, 그로반 남작을 수도로 부른다지 뭐예요?”
“뭐, 뭐?”
갑자기 등장한 낯익은 이름에 나는 들고 있던 스웨터를 떨어뜨렸다.
“그로반 남작을 왜?”
“그로반 영애가 오라버니가 걱정된다는 둥 어쩌면서 입을 털었나 보더라고요.”
“그걸 그렇게 쉽게 받아 주었다고?”
테레사에게 범죄를 저지르려다 잡힌 그로반 남작은 나타니엘에게 즉결 심판을 받고 영지로 내려갔다.
그런 자를 수도로 불러들인다면 그건 황태자인 나타니엘의 권위를 위협하는 일이었다.
황제가 그 정도로 사리 분별을 못하지는 않을 텐데.
“그리고 더 엄청난 이야기가 있어요.”
“뭐, 뭔데?”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다.
카시안은 고민하더니 침을 꿀꺽 삼키고 입을 열었다.
“결혼한 적이 없는 아가씨는 폐하의 정부로 인정받을 수 없으니까, 형식적으로나마 다른 남자랑 결혼을 해야 되잖아요.”
“그렇지.”
대체로 그런 여성들은 나중을 위해 막대한 지참금을 주고 나이 많은 고위 귀족과 결혼하는 편이었다.
“윈터스 소공작님과 하고 싶다고 그랬대요.”
너무 놀란 나는 들고 있던 잔을 떨어뜨렸다.
* * *
윈터스 공작은 자신 앞에서 고개를 뻣뻣이 세우고 있는 남자를 보았다.
저자에게는 위아래가 없는 걸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윈터스 공작 전하.”
“그래, 이름도 모를 작은 영지를 가진 남작. 날 찾아온 이유가 뭔가?”
공작은 처음 본 사이에 자기소개도 하지 않는 그로반 남작이 고까웠다.
그래서 이미 손님이 누군지 알고 있는데도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로반 남작은 그 말에 숨겨진 뜻을 모를 만큼 너무 단순했다.
“아, 제 소개를 깜빡했군요. 저는 그로반 남작령의 주인, 아닉스 그로반입니다.”
대단한 사람을 소개하듯 과장된 몸짓이었다.
그러나 공작은 저런 사람일수록 실속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코웃음을 치며 공작은 다음 말을 기다렸다.
“제가 이곳에 온 이유는 제 여동생의 짝을 찾아 주기 위함입니다.”
“여동생?”
공작은 어렵지 않게 요즘 사교계에서 시끄러운 그로반 영애를 떠올렸다.
결혼하겠다고 상경해서 황후가 후원을 해 줬더니, 그 남편을 가로챈 희대의 악녀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
윈터스 공작은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그 이야기는 못 들은 거로 하지.”
“저희 가문과 손을 잡지 않으시면 후회하실 겁니다.”
그로반 남작은 기고만장하게 말했다.
이제 황제가 제 여동생의 치마폭에서 놀고 있으니 이 제국에서 그에게 큰소리를 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후회는 무슨 얼어 죽을 후회. 내 아들을 그런 추저분한 소문을 지닌 영애와 결혼시킬 정도로 윈터스 공작가가 급하지 않네. 이만 돌아가게.”
공작은 그를 공작저에 들인 것을 후회했다.
말도 안 되는 야욕을 가진 사람과 얼굴을 맞대고 있는 것만으로도 피곤했기 때문이다.
“분명 후회하실 겁니다. 나중에 자식들의 목이 성벽에 걸려……!”
입만 산 아닉스는 목에 들이밀어진 검에 입을 다물었다.
“이런 미친놈을 다 보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