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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화. 내가 모르는 능력 (67/145)


67화. 내가 모르는 능력
2022.09.21.


본인이 주최한 티 파티에 다녀온 밀리아는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방문을 쾅 닫은 밀리아는 거칠게 머리를 쓸어 올리며 시녀장에게 소리쳤다.


“당장 다이애나, 그 계집을 불러와!”

“네, 네!”

당황한 그녀가 재빨리 사라지자 밀리아는 소파에 앉아 물을 들이마셨다.

냉수를 전부 마셨는데도 화가 풀리지 않았다.


- 황후 폐하, 들으셨어요? 폐하께서 후원하던 아이가 황제 폐하의 타운 하우스에 들어갔다지 않습니까.

평소 자신과 썩 사이가 좋지 않은 후작 부인이 어쩐 일로 티 파티에 참석했다 싶었다.

그녀가 전해 준 소식에 밀리아는 욕이 턱 끝까지 치밀었다.


“뭐야, 왜 혼자 돌아와!”

“그, 그게…… 방에 없……습니다, 폐하.”

시녀장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로 어쩔 줄 몰라 했다. 황후는 들고 있던 유리잔을 그녀를 향해 던졌다.


“넌 걔 감시도 제대로 안 하고 대체 뭘 한 거야!”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황후 폐하.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바닥에 바짝 엎드린 시녀장은 입술을 꾹 물었다. 억울한 건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수확제 연회에 갔다가 돌아오지 않아 수소문을 했더니 황제의 타운 하우스에 들어갔다고 했다.

억지로 다이애나를 잡아 올 수도 없는 노릇이니 살아남으려면 황후에게 숨기는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그래서 지금 어디에 있는데?”

“황제 폐하의 타운 하우스에…….”

추수제에서 황제가 질척거리는 꼴을 보고 화가 나서 먼저 돌아온 게 실수였다.

시녀장은 눈을 질끈 감았다.


“꺄악!”

이번에는 테이블을 장식하고 있던 도자기 인형이 날아왔다.


“폐하께서는 정신이 있으신 거야? 내가 그 아이를 왜 데려왔는지 아시면서!”

이건 자신에 대한 모욕이었다.

후원하던 아가씨가 번듯한 남자와 결혼한 것도 아니고 정부가 되었다니.

그것도 남편의 정부가 되었다는 사실은 치욕에 가까웠다.


“명을 당기고 싶어서 돌았구나.”

“황후 폐하, 일단 심신을 안정시키시고 나서…….”

“너 같으면 안정되겠느냐?!”

황후는 전신을 부들부들 떨며 이를 악물었다.

지난 십여 년간 참아 온 모든 것이 단숨에 폭발하는 것 같았다.

황제를 꾀어낸 다이애나도, 자신과의 관계를 뻔히 알면서 넘어간 필립스도 용서할 수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머리끝까지 차올랐던 분노가 휘발되면서 머릿속이 맑아졌다.

시녀장은 황후의 표정이 변하는 것을 보고 몸을 움찔했다.

마치 손바닥 뒤집히듯 쉽게 변하는 모습이 무서웠기 때문이다.

황후는 자리에 앉아 의자 손잡이를 손톱으로 톡톡 치며 생각에 빠졌다.

평범한 사람에게 기회는 원래 많지 않다. 그러니 다이애나도 그 말도 안 되는 생각을 기회라고 여기며 발작을 했겠지.


“만난 지 두어 달도 안 된 처자를 제 후처로 들일 리는 없고…….”

후처로 들일 것이었다면 절대 타운 하우스에 먼저 들였을 리가 없다. 적법한 절차에 맞춰 결혼식을 했겠지.

계산이 끝나자 다이애나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머리가 지끈거렸다.

예전처럼 귀족 가문의 힘을 빌리자니 아버지의 영향력이 예전만 하지 못했다.


“지긋지긋해.”

열렬하게 필립스를 사랑하던 밀리아는 이제 사라지고 오로지 증오와 탐욕에 가득 찬 황후만이 남았다.

그녀는 황제도, 다이애나도, 꼴 보기 싫은 황태자 부부도 모두 죽여 버릴 것이다.

그녀는 이를 으득 갈며, 입술을 짓씹었다.


 

* * *

늦은 밤.

나는 가벼운 사냥복을 입고 털을 넣어 만든 두툼한 후드를 두른 채로 후원에서 나타니엘을 기다렸다.

늦은 시간까지 일한 나타니엘을 위해 그의 것도 손에 들고 있었다.


“으, 추워.”

첫눈이 내리자마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온도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숨을 호, 불자 공기 중으로 뽀얗게 입김이 퍼져 나갔다.


“왜 이렇게 안 와.”

오면 혼내 줘야겠다고 생각하며 기다리던 그때, 어디선가 인기척이 들렸다.


“나타니엘?”

“아, 이런……. 죄송합니다.”

불행히도 기다리던 사람이 아니라 마탑주였다. 잔뜩 기대했던 나는 곧 밝은 표정을 지웠다.


“이런 자리에서 뵙게 되다니……. 영광입니다, 황태자비 전하.”

친근한 인사였지만, 나는 그가 의심스럽기 짝이 없었다.


“이곳은 사절단이 함부로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어서 돌아가세요.”

“아. 그것이…… 길을 잃어서요.”

뒤통수를 긁적이며 웃는 모습에 어이가 없었다. 마법사가 길을 잃다니.


“이 길을 따라 쭉 나가면 정문이 나올 겁니다. 거기 경비원에게 숙소까지 데려다 달라 하세요.”

“하, 하하하. 감사합니다, 비 전하.”

싱글벙글 웃으며 진심으로 기뻐하는 모습에 나는 짧게 한숨을 쉬었다.

금방 떠날 줄 알았던 킬리언은 쉽게 자리를 뜨지 않았다. 오히려 집요하게 내 얼굴을 보고 있었다.

지난 식사 때의 불쾌했던 시선을 떠올린 나는 짜증이 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빤히 보는 건, 프리체 공국에서는 예의 바른 행동인가 보군요.”

“아, 아닙니다, 전하. 그런 게 아니라…….”

잠시 망설이던 그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비 전하에게서 아주 특별한 기운이 느껴져서요.”

“…….”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마치 길거리에서 도를 아십니까, 하고 묻는 사이비나 할 법한 대사였다.

내 표정이 좋지 않자 킬리언이 당황했는지 손을 휘둘렀다.


“관심 없으니 그만 돌아가세요.”

“아, 아니, 제 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

지긋지긋하다. 난 싸늘한 눈으로 킬리언을 노려보았다.


“그만 돌아가라는 제 말이 우스운가요?”

“아닙니다, 비 전하. 그저 혹 나중에 문제가 생긴다면, 제가 이 세계에서 마법을 제일 잘 안다는 것만 기억해 주십시오. 아마 이론이라면 황태자 전하보다 제가 훨씬 잘 알고 있을 겁니다.”

“뭔 개소리야.”

킬리언이 움찔하더니 꾸벅 인사를 하고 몸을 돌려 사라졌다.


‘헉, 내가 방금 소리 내서 말했나?’

잠깐 고민했지만, 내 앞에서 이상한 말을 한 그의 탓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밤에 이불이나 발로 안 차길 기도하며.

나는 아직도 오지 않은 나타니엘을 욕하며 손바닥을 비볐다.


“뭐야, 그 도둑 같은 복장은.”

머지않아 불쑥 나타난 그는 내 복장을 위아래로 훑으며 투덜거렸다.

아까까지 화가 잔뜩 나 있었는데 막상 그의 얼굴을 보자 화가 사르륵 눈 녹듯 사라졌다.


“들키면 곤란해지니까 그렇죠.”

손짓으로 그의 몸을 낮추게 한 뒤 겉옷을 입혀 주었다.

후드까지 씌워 주자 완벽했다.


“솔직히 말해. 그냥 몰래 나가는 게 신나는 거 아니야?”

“아니거든요.”

백 퍼센트 아니라고 할 수는 없지만, 오리발을 내밀기로 했다.

나타니엘은 믿지 않는 눈치였다.

나는 모르는 척 그의 품에 안겨서 출발을 기다렸다.

그는 내 허리를 가볍게 끌어안고 마력을 움직였다.

결혼 직후, 불꽃놀이를 구경하러 시계탑에 올라갔을 때 이후 이렇게 함께 나는 건 처음이었다.

두둥실 몸이 떠올랐다.

나도 모르게 그를 붙든 손에 힘을 꽉 주었다.


“떨어지진 않으니까 그렇게 겁먹지 마.”

“전하께서는 익숙하니까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겠죠.”

“그럼 앞으로 익숙해질 때까지 매번 이렇게 다녀 보는 건 어때?”

장난스러운 말투에 괜히 화가 나서 그의 등을 때렸다.


“이쪽은 생명의 위험을 감수하고 가는 거예요.”

“내가 있는데 그런 걸 걱정하나?”

자신만만한 태도에 말문이 막혔다.

그는 유연하게 밤하늘을 가로질렀다.

반짝거리는 별이라든가, 발아래에 펼쳐진 도심의 모습은 색다르게 느껴졌다.

비행기를 탈 수 없는 이곳에서 이런 광경을 보게 될 줄이야.

우리는 도심을 건너 수도의 가장자리에 있는 숲의 초입에 도착했다.

얼마 전 내렸던 눈이 녹아서 땅이 젖었는지 흙내음이 가득 풍겼다.


“어쩐지 을씨년스러운데요.”

“원래 밤의 숲은 그렇지.”

이전과 달리 기댈 것이라고는 달빛 정도밖에 없어서 분위기가 으스스했다.

나무들 사이에서 도끼를 든 가면 살인마가 튀어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분위기였다.

나는 나타니엘의 손을 꼭 붙잡고 그의 옆에 찰싹 달라붙었다.

나를 내려다보는 나타니엘의 눈빛에 걱정이 가득했다.

나는 일부러 허리를 펴고 당당한 표정을 지었다.


“별로 무섭지는 않거든요.”

“그러니까 내가 그냥 성에 있으라고 그랬잖아.”

“혼자 갔다가 용으로 변해서 잡아먹히면 어떻게 해요!”

“그대가 있다고 마물을 잡을 수 있는 것도 아니지.”

그렇게 말하니 할 말이 없었다.

나타니엘은 한숨을 쉬고는 마법으로 광원을 만들어 냈다.

조그마한 빛의 구슬은 우리와 우리 주변을 환히 밝혔다.


“이 정도면 되었나?”

“네.”

주변이 환하니 그나마 나았다.

우리는 숲 안쪽으로 들어갔다.


 
나타니엘은 마력을 넓게 펼쳐서 그때 보았던 마물 가족들을 찾으려 노력했다.


“꽤 깊은 곳에 숨은 것 같은데.”

아무래도 나타니엘에게 정체를 들킨 이후 더 철저하게 몸을 숨긴 것 같았다.


“그런데 뭐 하러 몸을 숨길까요? 마물이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다는 이야기는 처음 들어 봤어요.”

마물은 기본적으로 짐승에 가까웠다.

아주 멍청하진 않지만, 자신보다 약한 인간들에게서 몸을 숨기며 살 정도로 지능이 발달하지도 않았다.


“내가 말하지 않았던가? 자식을 위해 부모로 보이던 마물이 자기 몸을 희생하려고 하더군.”

“말도 안 돼요. 그게…….”

내가 알고 있는 마물과 전혀 달랐다.

나타니엘은 착잡한 표정으로 숲의 깊은 곳으로 향했다.

그들을 만난다고 해도 뭔가 뚜렷한 해결 방안이 있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잠깐.”

언덕의 중간쯤까지 올라오자 나타니엘이 갑자기 멈춰 섰다.

그는 몸을 숙여 나무와 나무 사이를 이어 놓은 가느다란 실을 손가락으로 살짝 건드렸다.

짤그락거리는 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왔다.

일종의 알림 장치인 것 같았다.


“이건…… 마물이 만든 것 같지 않아요?”

“그런 것 같은데.”

점점 이 마물들이 평범한 마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와 나타니엘은 조심스럽게 함정들을 피해서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드디어.


“키에에엑!”

키가 이 미터는 거뜬히 넘어 보이는 괴물이 반달 칼을 들고 우리 앞에 나타났다.

놀랍게도 어설프지만, 옷까지 챙겨 입어서 정말 인간에 가까워 보였다.

나타니엘은 침착하게 앞으로 나서면서 후드를 벗어 얼굴을 드러냈다.


“날 기억할지 모르겠는데.”

그는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마물이 진정하길 기다렸다.

그러나 상대는 바짝 긴장한 상태로 살기를 쉽게 거두지 않았다.


“흠, 역시 기억을 못 하는 건가.”

- 인간, 저리 꺼져라!

처음에는 환청이 들리는 줄 알았다.


- 우린 조용히 여기서 살고 싶다. 인간들에게 해를 끼칠 생각도 없다.

하지만 곧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타니엘은 마물의 말소리가 들리지 않는지 그냥 자리에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나는 조용히 손을 들어 그의 후드를 잡아당겼다.


“나타니엘, 저 마물이 하는 말 안 들려요?”

“뭐?”

나는 말도 안 된다는 듯이 날 바라보고 있는 나타니엘을 보고서야 확신했다.

이 목소리가 나한테만 들린다는 걸.


“어…… 아무래도 제가 저 마물들을 도와줄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마물은 우리가 하는 대화를 알아들었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내 쪽을 바라보았다.


- 인간, 우리를 도와줄 수 있나?

“일단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으니까, 도와줄 수 있을 것 같긴 한데요.”

마물은 내 말에 갑자기 들고 있던 칼을 떨어뜨렸다.

그리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 우리 가족을 도와다오. 부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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