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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화. 오늘 밤이야말로 (66/145)


66화. 오늘 밤이야말로
2022.09.17.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뜬 그를 향해 나는 준비한 대사를 날렸다.


“오…… 오셨어요.”

나타니엘은 들고 온 꽃다발을 떨어뜨릴 정도로 크게 놀랐다.

동그란 눈을 좌우로 굴리며 방 안 구석구석을 확인한 그는 더듬더듬 떨어진 꽃다발을 다시 주웠다.


“이거…… 사, 사과의 의미로.”

표정이 굳은 채로 그가 딱딱하게 말했다.

뭐 때문에 사과하지 싶었던 나는 오늘 아침, 쌀쌀맞았던 내 태도를 떠올렸다.


‘설마 그거 때문에?’

그에게 사과받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나는 침대 위에서 내려와 그에게 달려갔다.

나타니엘은 허겁지겁 꽃다발을 내 품에 안겨 주었다.


“고마워요.”

품에 안겨 준 꽃다발에서 좋은 향기가 났다.

날 내려다보던 나타니엘이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일 있었어?”

“아뇨.”

그의 목덜미가 붉다. 나는 슬쩍 웃으며 나타니엘의 손을 잡았다.

어색하다.

전에 없이 어색했다.

방 안에는 침묵이 흘렀다.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헛기침하던 나타니엘은 내 양어깨에 손을 올리고 물었다.


“혹시 요즘 유행하는 잠옷 스타일이 이건가? 유행도 좋지만, 내…… 생각도 좀 해 줬으면 좋겠는데.”

내 몸을 위아래로 훑은 나타니엘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려 버렸다.

갑자기 민망함이 훅 올라왔다.

나는 그의 가슴팍을 손으로 힘껏 내리쳤다.

찰싹, 찰진 소리에 그가 몸을 움츠렸다.


“무슨 소리예요, 그게!”

“이렇게 화낼 필요는 없잖아.”

나타니엘은 몸을 웅크리며 투덜거렸다.

진짜 부끄러운 쪽은 남사스러운 옷을 입고 있는 이쪽인데.

괜히 약이 올라서 몸을 휙 돌렸다.


“됐어요. 분위기도 파악 못 하는 파충류 주제에.”

나는 침대 안으로 들어가서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창피해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나타니엘이 침대에 앉았는지 무게 중심이 뒤로 쏠렸다.

스르륵 허리를 감싸는 서늘한 손길에 오감이 집중되었다.


“뭐예요, 인제 와서.”

“미안, 화 많이 났어?”

나타니엘은 순순히 사과하며 내 등을 토닥였다.


“화낸 적 없거든요.”

뾰로통한 말투는 내가 들어도 화가 난 기색이 역력했다.

귀 끝과 목덜미도 붉어서 부끄러워하는 티가 다 날 텐데도 나는 모르는 척하기로 했다.


“기다린 거야? 기쁜데.”

귓가에 속삭이는 상냥한 목소리에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끌어안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가고 등에 그의 단단한 가슴팍이 닿았다.

얇은 슈미즈는 그 본래의 기능에 충실하게 존재감이 전혀 없었다.


“제이나, 나 안 볼 거야?”

나타니엘의 서늘한 체온과 빠르게 뛰는 심장 소리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부드러운 촉감이 닿는 곳이 저릿할 정도 예민해졌다.

결국 나는 뒤를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탁한 붉은 눈동자가 다시금 열망으로 뜨겁게 끓어오르고 있었다.

그의 섬세한 손끝이 뺨과 코끝, 입술을 지나 턱을 들어 올렸다.


“그대가 선택한 거야.”

그는 마치 선언하듯 단언했다.

지난 몇 번의 헛발질을 생각해 보면 그럴 법도 했기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바라던 바입니다, 전하.”

나는 손으로 냉큼 그의 옷자락을 잡아당겨 입을 맞추었다.

놀란 듯 움찔 튀어 오르는 나타니엘의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그 역시 즐거운 듯 키득거렸다.


“이번에는 떨지 않았으니 높은 점수를 드리지요, 부인.”

그렇게 말한 나타니엘은 입술을 다시금 부딪쳐 왔다.

마치 자신의 영역인 것처럼 파고들어 온다.

서늘한 체온이 내 열기와 뒤섞여서 평소보다 더 뜨겁고 달게 느껴졌다.

나는 손을 뻗어 그의 목 뒤로 둘렀다.

크고 단단한 손이 어깨를 지나 얇고 부드러운 슈미즈 위를 움직였다.


“으…… 기분 이상해요.”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어 보인 나타니엘이 조심스럽게 물어 왔다.


“괜찮겠어?”

“일단 계속해 봐요.”

“꼭 일하는 것처럼 말하네.”

나타니엘은 나를 바로 눕히고 내 위로 올라왔다.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은 터라 셔츠에 바지 차림이었다.

붉은 빛 아래에 드러난 나타니엘의 얼굴은 묘하게 우아했다.

하루 이틀 본 얼굴도 아닌데, 새삼 그의 아름다움이 뇌리에 박혔다.

하얗고 부드러워 보이는 피부, 그 아래에 숨겨진 단단하고 잘 짜인 근육들.

영화에서나 볼 것 같은, 완벽하게 조형된 상체가 나타니엘이 단추를 푸는 것을 따라 모습을 드러냈다.

나도 모르게 꿀꺽, 침이 삼켜졌다.


‘어떻게 저런 남자 옆에서 아무 생각 없이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거지?’

결혼을 시작했을 때만 해도 내 꿈은 아주 작고 소박했다.

안하무인인 그의 옆에 붙어서 듣기 좋은 말만 해 주며 편안한 간신배의 삶을 살려고 했는데.


“눈빛이 불순해, 부인.”

“부…… 불순하다니요. 어차피 부부끼리인데. 그렇게 말하는 나타니엘도 만만치 않거든요.”

“내가?”

“으……. 아마도요.”

나타니엘의 물음에 자신감이 사라졌다.

객관적으로 보아도 나타니엘의 조각 같은 몸에 비하면 이쪽은 평범보다 조금 나은 정도 같았다.

올려다본 나타니엘의 얼굴에는 장난기가 가득했다.

하지만 뺨에 닿는 손길은 부드러웠다.

말하지 않아도, 그의 눈빛과 행동에서 감정이 넘쳐흘렀다.


“부인 말이 맞아. 나도 이렇게 여자한테 관심이 생길 줄은 꿈에도 몰랐으니까.”

“다른 여자는 그런 눈으로 보면 안 돼요.”

“약속하지.”

가까이 다가오는 나타니엘의 얼굴에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다정한 손길이 몸 구석구석에 닿았다.

끓어오르는 열기를 참지 못하고 그를 힘껏 끌어안았다.

온전히 둘만의 세계에서 체온을 나누고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애정을 속삭이는 것뿐인데, 이상하게 눈물이 차올랐다.

잡다하게 머릿속을 차지하던 걱정들은 깡그리 날아갔다.

열락에 흠뻑 젖어서 오직 그의 이름을 부르며 애처롭게 매달리는 것이 다였다.

누르고 있던 서로를 온전히 소유하고 싶은 욕망이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나와 방 안을 가득 메웠다.

가을밤, 우리는 정신없이 서로를 원하고 매달렸다.


 

* * *

끝없는 초원이 펼쳐져 있었다.

나는 초원 위에 서서 가만히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곧 거대한 검은 용이 새파란 하늘을 유영하듯 날아가고 있었다.

어쩐지 그것의 붉은 눈과 마주친 기분이 들었다.


“막시밀리안, 보세요.”

언덕 위에 서 있던 여인이 작게 중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옆에 있던 남자도 조그맣게 속살거렸다.


‘뭐라고 말하는 거야. 크게 좀 말해 봐.’

나는 소리치려 했지만, 말이 소리가 되어 나오지 않았다. 여자가 다시 한번 말했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일지도 몰라요. 정말 괜찮겠어요?”

그녀의 말에 막시밀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언덕을 내려가 용을 쫓았다.

나는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평화로워 보이는 초원과 달리 내 뒤는 지옥과도 같았다.

생명의 기운이라고는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번에는 반드시 성공시켜.”

‘그녀’는 나를 보며 말했다.

* * *



“헉.”

아침 새소리에 눈을 번쩍 떴다.

뭔가 중요한 꿈을 꾼 것 같은데…….

하지만 그 생각은 곧 구석구석 쑤시는 몸 덕분에 완전히 사라졌다.


“으…… 으.”

“일어났어?”

나와는 달리 상쾌하기까지 해 보이는 나타니엘을 보자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왜 그렇게 멀쩡해요?”

“글쎄, 기초 체력 차이?”

나타니엘은 친절하게 대답하고는 침대에 앉았다.


“아침 먹을래?”

“여기서 먹을래요. 꼼짝도 못 하겠어요.”

나는 침대에 다시 벌러덩 누우며 중얼거렸다.

나타니엘은 잠시 날 내려다보더니 이불을 목 끝까지 고이 덮어 주었다.


“뭐예요, 갑자기?”

그는 잠시 말이 없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사 준비하라고 시킬게.”

그러고는 종종걸음으로 방에서 나가 버렸다.

나는 홀로 침대에 누워서 그가 돌아오길 기다렸다.

얼마 뒤 나타니엘이 트레이를 들고 나타났다.

그가 들고 올 줄 몰랐던 나는 놀라서 입만 벙긋거렸다.


“왜?”

“아니, 나타니엘이 가져올 줄은 몰랐어요.”

“그대도 내가 용의 모습일 땐 매번 들고 오지 않았나?”

“그야 그렇지만…….”

자리에서 힘겹게 일어나서 침대 밖으로 나왔다.

발을 바닥에 딛는 순간 힘이 탁 풀렸다.

그리고 그대로 좌절한 사람처럼 바닥에 털썩 엎어졌다.


“제이나, 괜찮아?”

후다닥 달려온 나타니엘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보았다.

결국 이 사태의 원인이 그 때문이란 걸 생각하면 가증스러울 지경이었다.


“다리에 힘이 안 들어가요.”

내 말에 나타니엘은 짧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는 나를 안아서 음식이 있는 테이블의 의자에 앉혀 주었다.


“먹을 수는 있겠지?”

“으…… 네.”

나타니엘은 가만히 나를 보다가 노릇하게 구워진 빵 위에 잼과 버터를 발라서 건네주었다.

그걸 받아 들자 이번에는 컵에 우유를 따라서 옆에 놓아주었다.


“왜 이렇게 잘해 줘요, 갑자기.”

나타니엘은 내 말에 미간을 구기며 말했다.


“어젯밤에 보니 잘못하면 부서질 것 같아서 걱정이 들더군.”

“예?”

평범한 체격과 체력을 가지고 있는데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오늘부터 잘 먹고, 운동도 시켜서 체력을 키워 줘야겠다는 생각을 했을 뿐이다.”

하지만 투지에 불타는 나타니엘의 얼굴에 대고 아니라고 말할 수 없었다.

나는 조용히 토스트를 씹으며 어떻게 하면 운동을 빼먹을 수 있을지 고민했다.

* * *

요즘처럼 걱정 없이 행복한 나날이 없었다.

테레사의 건강은 좋아 보이고, 나와 나타니엘의 사이도 최고였다.

막시밀리안의 상태도 조금씩이나마 좋아지고 있었다.


“흐음.”

아침 일찍 일어난 나는 창밖에 소복이 쌓인 눈을 보았다.

드디어 겨울이 온 것이다.

아무도 밟지 않은 하얀 눈밭을 보고 있자니 침대에 누워 있는 나타니엘을 깨워 산책을 가고 싶었다.


“나…….”

그의 이름을 부르려던 나는 이불을 휙 뒤집었다. 추운지 몸을 잔뜩 웅크린 새끼 용이 거기에 있었다.


‘어라. 그사이에 커졌잖아.’

전에는 소형견 크기 정도였다면, 이제는 중형견 정도 되어 보였다.


“나타니엘, 일어나 봐요.”

손을 뻗어 살짝 등에 손을 대자 서늘한 기운이 타고 올라왔다. 나는 굴하지 않고 그를 흔들어 깨웠다.

이마를 찡그리던 그가 슬쩍 눈을 떴다.


“뭐야.”

“어머, 말을 할 수 있잖아!”

“무슨 소리야?”

아직 자신이 변한 걸 인지하지 못했는지 나타니엘의 반응이 살짝 늦었다.


“평소와 달리 목소리가 엄청 귀여운걸요?”

“…….”

나타니엘은 몸을 일으켜 거울 앞에 섰다.


“전보다 커진 거 같죠? 예전에도 이랬어요?”

“아주 어렸을 때 이후로는 한 번도 이랬던 적이 없었는데.”

나타니엘은 실제로 열 살 이후로는 용으로서의 성장은 끝났다고 말하며, 평생 그 정도가 최대 크기인 줄 알았다고 말했다.

나타니엘은 제 손을 이리저리 돌려 보았다.


“크긴 크는군.”

“게다가 말도 할 수 있다고요. 마법으로 대화하는 게 얼마나 힘들었는데요.”

나는 재빨리 그를 번쩍 안아 들었다. 놀란 나타니엘이 바둥거렸지만 품에 안자 곧 얌전해졌다.


“오, 확실히 무거워졌어요.”

“내, 내려놓으라고.”

차마 때리지는 못했지만, 꼬리의 움직임은 불만에 가득 차 있었다.


“눈 보러 나가요, 우리.”

“눈?”

“그래요. 올해 첫눈이라고요.”

“추워서 별로인데.”

“아…….”

드래곤도 파충류의 일종이라서 추위에 약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깜빡했다.


“그럼 안에서 봐요.”

“응.”

그나저나 목소리가 너무 귀엽다. 소년기여서 그런가?

나는 그의 머리를 톡톡 건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꽃을 선물 받았으니 나도 무언가 선물을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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