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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화. 좀 더 닿고 싶어 (64/145)


64화. 좀 더 닿고 싶어
2022.09.10.



 
평소와 다르다는 걸 아나이스도 알아차렸는지 내게 다가와 물었다.


“두 분 싸우셨어요?”

“아니요…….”

요즘 들어 나타니엘의 감정 기복이 심해진 느낌이다.


‘왤까.’

감정의 기복이 거의 없는 그가 예민하게 구는 이유는 거의 나 때문일 확률이 높았다.


‘남의 연애는 쉬워 보였는데, 내 연애는 왜 이렇게 어렵냐.’

원작은 철저하게 테레사와 막시밀리안의 시점으로 전개되었고, 나타니엘의 내면에 대한 언급은 별로 없었으니 일일이 부딪쳐서 그에 대해 알아 가는 수밖에 없었다.


“어렵네.”

“무슨 말씀이세요?”

아나이스에게 말하기에는 미안한 감이 있어서 고개를 저었다.

다른 사람에게 조언을 구하는 건 그만할 때가 되었다.


‘우리 일은 우리가 알아서 해야지.’

아나이스를 돌려보내고, 나는 생각에 잠겼다. 창밖으로 여러 개의 빛 구슬을 만들어서 놀고 있는 헨리가 보였다.

그 옆에서 이것저것 진지한 얼굴로 가르치는 나타니엘의 모습에 괜히 웃음이 나왔다.

한참 창가에 기대서 그들의 모습을 보던 나는 졸음이 몰려와 눈을 감았다.


“음?”

눈을 뜨니 벌써 해가 지고 있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어깨에 걸쳐져 있던 담요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일어났나?”

“네, 네…….”

나타니엘은 소파에 앉아서 무심한 얼굴로 날 보고 있었다.

역시 화가 난 것이 맞았다.

나는 살짝 나타니엘의 옆자리에 앉았다.

아까 깜빡 잠이 들기 전에 생각났던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제가 좋아하는 사람은 전하인 거 알죠?”

내 말에 놀란 듯 나타니엘의 어깨가 크게 튀어 올랐다.


‘정답이네.’

지난번에 나디아를 감싸 주었을 때도, 오늘 마틴에 대해 말했을 때도 울컥한 이유가 이거였다.

나타니엘은 질투를 하고 있었다.


“뭐, 뭐야, 갑자기.”

“그냥요. 나타니엘 얼굴 보니까 생각나서요.”

살짝 손을 뻗어 그의 뺨에 손을 댔다. 아까까지 굳어 있던 얼굴이 살짝 흐트러졌다.

날 가만히 보던 나타니엘은 커다란 손으로 내 손을 감쌌다. 내 손이 폭 잡힐 정도로 컸다. 살짝 쥐어서 떼어 낸 그가 입술을 손바닥 안쪽에 묻었다.

부드러운 감촉이 예민한 부분에 닿자 소름이 오소소 올라왔다.


“더.”

“네?”

“더 말해 줘.”

응석을 부리듯 하는 말에 웃음이 나왔다.


“나타니엘, 좋아해요.”

작게 속삭이자 그가 만족한 듯 활짝 웃었다. 마치 꽃이 피는 것처럼 화사하게 웃는 모습에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어?’

심장 박동이 미친 듯이 빠르게 뛰었다. 이러다가 심장이 터지는 게 아닐지 걱정될 정도로.

손을 타고 올라온 열기가 어느새 온몸을 뒤덮었다.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 * *

헨리를 돌려보낸 나타니엘은 침실로 향했다. 조금 전, 괜히 기분이 상한 탓에 제이나에게 쌀쌀맞게 굴었다.


‘질투라.’

윈터스 소공작은 이 감정을 질투라고 불렀다. 자신을 특별하게 여기지 않는 것에 속상함을 느끼고 제가 아닌 타인에게 관심 주는 것에 불만을 느끼는 것이라고 했다.


‘먼저 좋아하는 사람이 손해 보는 거라고 그랬어.’

그는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감정들이 어색했다. 그리고 이 감정들이 제이나를 불편하게 만들 거라는 것도 알았다.

허나 감정을 제어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처음 느끼는 감정들은 나타니엘을 정신없이 흔들어 놨다.


‘그래도 싫지는 않아.’

아프고 고통스러울 때도 있었지만, 제이나와 함께 있으면 끊임없이 느껴 왔던 갈증을 채울 수 있었다.


“제이나?”

사과할 생각으로 문을 열고 들어갔는데 제이나가 보이지 않았다. 그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응접실로 향했다.

제이나가 창가에 기댄 채로 잠이 들어 있었다.

깨울까 했던 나타니엘은 근처에 접혀 있는 담요를 제이나의 어깨에 둘러 주었다.


“대체 왜 이런 데서…….”

이상한 곳에서 잔다고 투덜거리려던 그는 창으로 자신과 헨리가 있는 곳을 내려다볼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아…….”

입꼬리가 참을 수 없이 올라간다. 심장 근처가 간질간질했다.

그는 손바닥으로 심장 근처를 꾸욱 누르고 소파에 앉아서 제이나가 눈을 뜨기만을 기다렸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움찔한 제이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천천히 뒤를 돌아보는 모습이 아직 잠에 취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일어났나?”

“네, 네…….”

웃어 주려고 했던 나타니엘은 표정 관리에 실패했다.

제이나는 그런 나타니엘의 반응에 쭈뼛쭈뼛하며 그의 곁으로 와서 옆자리에 앉았다.


“제가 좋아하는 사람은 전하인 거 알죠?”

기습적인 고백에 저도 모르게 몸이 튀었다. 나타니엘은 혹시 제 심장 박동 소리가 제이나에게 들리는 건 아닌지 걱정해야 할 판이었다.


“뭐, 뭐야, 갑자기.”

“그냥요. 나타니엘 얼굴 보니까 생각나서요.”

그녀의 손이 뺨에 닿았다. 따뜻한 열기가 그 어느 때보다 나타니엘의 마음을 녹였다.

타인과의 접촉이 거의 없던 그에게 제이나는 유일한 온기에 가까웠다.


‘좀 더 닿고 싶어.’

나타니엘은 손을 들어 그녀의 손 위에 올렸다. 이제는 손바닥 전체로 전이되는 온도에 웃음이 슬그머니 나왔다.

그는 지극히 충동적으로 입술을 손바닥 안쪽에 묻었다. 미지근해진 제이나의 손과 달리 나타니엘의 입술은 뜨거웠다.


“더.”

“네?”

나타니엘은 동그랗게 뜬 그녀의 눈을 보며 속삭였다.


“더 말해 줘.”

몇 번이고 확인받고 싶다. 늘 행복한 와중에 혹시 그녀가 자신을 미워하게 될까 봐 무섭기도 했다.

이제껏 자신에게 이 정도로 애정을 쥐여 준 사람은 제이나가 처음이었다.


“나타니엘, 좋아해요.”

부끄러운 듯 뱉어 낸 말에 숨이 멎을 만큼 행복했다. 나타니엘은 활짝 웃으며 그녀를 보았다.


 

* * *

마틴은 감격에 찬 눈으로 자신의 자리를 보았다.

종합 보좌관실의 구석진 곳과 어울리지 않는 마호가니 책상이 자리 잡고 있었다.


“크흑.”

그 위에 빛나는 황태자 수석 보좌관 명패를 본 마틴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황태자 전하께서 내린 것이라는 이야기에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묘했지만 둔한 마틴은 알 길이 없었다.


‘목숨을 다해 일하겠습니다, 전하!’

의욕에 불타오른 그는 앉아서 나타니엘의 일정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가 담당해서 살피고 있는 사업부터 외교적인 부분까지 확인했다.


‘이거, 혼자서 할 수 있는 일 맞나?’

정리하면 할수록 그가 떠맡은 엄청난 양의 일에 식은땀이 흘렀다.

게다가 최근에는 황제가 맡고 있던 일까지 넘겨받으면서 그 양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이봐.”

“아, 예예.”

불과 얼마 전까지 마틴의 직속 상사였던 유리였다.

하지만 의도치 않게 마틴이 초고속 승진을 하게 되어 이제는 마틴의 직위가 더 높았다.

유리는 마뜩잖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프리체 공국 사절단이 사과의 뜻을 전해 왔다. 황태자 부부와 식사 자리를 마련해 달라고 하더군.”

“어, 예. 전하께 여쭤보겠습니다.”

유리는 마틴의 명패를 보고는 얼굴을 팍 구긴 채로 밖으로 나갔다.

마틴은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나타니엘에게 소식을 전하러 떠났다.

* * *

어제, 마틴을 통해 사절단이 나타니엘에게 사과의 뜻을 전해 왔다.

그냥 인사만 하고 끝낼 줄 알았는데, 회동 자리를 마련하고 싶다는 요청까지 이어졌다.

나타니엘은 거절하고 싶어 하는 티가 역력했지만, 중간에서 마틴이 열정적으로 추진한 탓에 자리가 마련되어 버렸다.

나는 검은색 레이스가 달린 진한 자줏빛 벨벳 드레스를 입고 머리를 틀어 올려 흑진주와 리본으로 장식한 핀을 달았다.

평소에 내가 입던 스타일과는 많이 다른 선택이었다.


‘원래 이런 자리에는 황제와 황후가 나서야 하는데.’

요즘 황제가 다이애나에게 푹 빠져서 타운 하우스 밖으로는 한 발짝도 나오지 않는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진짜 미친 거 아니냐고.’

속으로 투덜투덜하며 나타니엘의 손을 잡고 복도를 걸었다. 오랜만에 높은 굽의 구두를 신어서 그런가 벌써부터 피곤하다.


“몸 상태가 별로면 들어가서 쉬어도 된다.”

“음, 그건 아니에요.”

나는 곁눈질로 나타니엘의 모습을 살폈다. 적당히 편안하게 입고 다니던 평소와 달리 잘 차려입으니 인물이 훨씬 좋아 보였다.


‘잘생겼네.’

괜히 내가 다 뿌듯해서 어깨가 으쓱였다.

어느새 식당 문 앞에 도착해 문을 열자 붉은색과 흰색 작약으로 장식한 식탁이 보였다.

우리가 들어서자 식탁 반대편에 앉아 있던 사절단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중년의 남녀와 아주 젊어 보이는 남자였다.


‘대표가 저 사람이야?’

화려한 의상을 입고 있어 누가 봐도 대표 같은 이가 인사를 건넸다.


“오늘 이렇게 시간을 내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황태자 전하.”

그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나타니엘은 아무 말도 없었다. 킬리언은 부족했다고 생각했는지 한쪽 무릎을 굽혔다.


“그날 제가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전하께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일개 공국의 사절이지만 그는 마탑주였다. 이렇게 무릎까지 꿇는다는 건 꽤 자존심 상하는 일이기도 했다.

나는 여전히 반응이 없는 나타니엘의 옆구리를 툭 쳤다.


“아닐세.”

나타니엘이 겨우 대답하자 킬리언은 그제야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시선을 내 쪽으로 돌리더니 살짝 몸을 굽히며 손을 내밀었다.

나타니엘의 시선이 느껴져서 신경 쓰였지만, 나는 내 손을 그 위에 올렸다.


“이렇게 아름다운 분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비 전하. 프리체 공국에서 온 킬리언이라 합니다.”

킬리언의 입술이 손등에 살짝 닿았다가 떨어졌다.


‘장갑을 껴서 다행이다.’

거의 킬리언의 얼굴을 뚫어 버릴 것처럼 노려보는 나타니엘의 시선에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킬리언 경의 명성은 마법에 문외한인 저도 들어 보았답니다. 오늘 이렇게 만나서 영광입니다.”

그가 물러나자 킬리언의 뒤를 따라온 다른 사절들도 각각 인사를 해 왔다. 나는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맞이했다.

곧 음식이 차례차례 식탁에 올라왔다. 우리는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식사를 시작했다.


“음식이 입에 맞을지 모르겠네.”

“평소 제국 음식은 입에 잘 안 맞는다고 생각했는데, 오늘은 정말 맛있습니다.”

다행히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식사가 끝나고, 간단한 안주와 좋은 와인까지 대접했다.

도수가 낮아서 음료수처럼 마시다가는 쉽게 취할 수 있어 조심해야 했다.


‘어디선가 이상한 시선이 느껴지는데…….’

다른 사절과 이야기를 하는데 어디선가 집요한 시선이 느껴졌다. 처음에는 나타니엘의 시선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나는 살짝 눈만 굴려서 주변을 살폈다.


‘뭐야.’

날 꿰뚫을 것 같은 위협적인 시선의 주인은 킬리언이었다.

잠깐 눈이 마주치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나는 재빨리 고개를 돌려 버렸다.


“왜 그래?”

옆에 있던 나타니엘이 몸을 숙여 물었다.


“별거 아니에요.”

그렇게 말했지만, 오싹한 기분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그 순간, 나타니엘이 몸을 들어 킬리언과 눈을 마주쳤다.

으득, 이가 갈리는 소리에 나는 그의 손을 꽉 잡았다.


“화내지 말아요. 그냥 보는 것뿐이잖아요.”

“시선이 더러워.”

그의 단어 선택에 웃음이 나왔다.


“저는 먼저 나가도 되죠?”

“응.”

“절대 화난 거 티 내지 말고요.”

나타니엘은 가볍게 한숨을 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킬리언과 사절단에게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 * *

나타니엘은 싸늘한 눈으로 킬리언을 보았다. 방금 제이나가 신신당부했던 것을 떠올렸지만 짜증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하하하, 전하. 제게도 한 잔 주시지요.”

킬리언은 호시탐탐 나타니엘과 친해질 기회를 노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옆에 앉아 술잔을 들었다.


“자네는 많이 취한 것 같은데.”

“에이, 이 정도로는 술도 아닙니다.”

실제로 킬리언은 술에 강했다.


“그래?”

하지만 그 말이 나타니엘의 쓸데없는 호승심을 자극했다.

나타니엘은 그의 잔에 술을 가득 부어 주고 제 잔을 들었다.

맑은 소리를 내며 둘의 잔이 부딪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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