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3화. 질투의 화신 (63/145)


63화. 질투의 화신
2022.09.07.


나타니엘의 대답은 당연히 거절이었다.

하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나타니엘이 이곳에 남아 황제가 되려면 일을 믿고 맡길 부하가 필요했다.


“매번 혼자서 모든 일을 처리할 수는 없다는 거 알고 있죠?”

특히 요즈음 황제가 이유 없이 제 일을 나타니엘에게 넘기면서 그는 정신없이 바빴다.

이미 혼자서 처리할 수 있는 수준을 아득히 넘어섰는데도 그는 고집스럽게 혼자서 일하는 걸 유지했다.


“알겠다.”

나타니엘은 마뜩잖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부디 내가 사람을 제대로 보았길 바라며 나타니엘을 위로해 주었다.


“혹시 알아요? 평생 부려 먹을 신하를 얻게 될지?”

지나가듯 내뱉은 말에 나타니엘의 눈이 반짝 빛났다.


 

* * *

황태자비가 되어 귀찮은 일도 많았지만, 그나마 즐거운 건 티 파티였다.

물론 준비하는 과정은 재미없지만, 발 빠르게 소문을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의 주제는 수확제 이후 요동치는 사교계의 연애 사업에 관한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 소문 들으셨어요?”

“무슨 소문이요?”

살짝 주변을 살핀 티리안 후작 부인이 조용히 말했다.


“그로반 영애 말이에요. 황제 폐하의 정부가 되었다는 소문이 있더라고요.”

“예에?”

나는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녀를 보았다.

티리안 후작 부인은 목소리를 가다듬고 속삭였다.


“그 타운 하우스에 제 발로 들어갔대요.”

“무슨 타운 하우스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타운 하우스면 타운 하우스지, ‘그 타운 하우스’는 또 뭐야.

내 질문에 초대된 부인들은 잠깐 곤란한 표정을 짓더니 조용히 입을 벌렸다.


“황후 폐하께서 황후가 되시기 전에 숨어 살던 곳이에요. 황제 폐하께서 선황후의 눈을 피해서 사 두신 곳인데…….”

밀리아가 황후가 된 이후로 빈 건물에는 주기적으로 황제의 정부가 들어갔다고 한다.


“오, 그것참…….”

차마 황제에게 쓰레기라고 말할 수 없어서 나는 말을 더듬었다.

다이애나의 의중은 더욱 오리무중이었다.

언제는 막시밀리안이 좋다며 쫓아다니더니, 내 흉내를 내지 않나.

이제는 황제의 정부가 되었다고?


“이런 말 하면 안 되지만, 그로반 영애도 참 안되긴 했어요.”

“맞아요. 좋다고 들어갔을 텐데…….”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싶었다.

부인들은 다들 눈치만 보다가 조용히 말했다.


“거기에 들어가서 멀쩡히 나온 여자가 없어요. 황후 폐하가 얼마나 견제하는데요.”

“아마 지금쯤이면 잘못 생각했다며 울고 있을지도 모르죠.”

부인들은 과거에 그 타운 하우스에 들어갔던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멸문을 당한 사람도, 더는 고개를 들 수 없을 정도로 큰 상처를 입을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황후는 지독해서 절대 죽이지는 않았다.

그저 서서히 당사자의 숨통을 조였다.

결국 제 발로 걸어 나와 죽여 달라 울며 매달리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그분이 어떻게 그 자리에 올라가셨는데요. 아마 한 달도 못 버틸걸요?”

소름 끼치는 행보에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황후가 무서운 사람이라고는 생각했지만, 이 정도의 실행력을 갖춘 사람인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걸 황제 폐하께서는 그냥 두시는 거예요?”

“그냥 두시다니요, 가끔 그걸 이용하기도 하시는걸요.”

상대에게 질리면 황제는 황후의 손을 빌려 처리하기까지 한단다.

꼴에 양심은 있는지 미안하다며 피해를 입은 여자의 가문에 배상금을 보내 마무리를 짓는다고 한다.

그리고 더러운 일을 처리한 황후에게 지극 정성으로 매달린다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멀쩡한 줄 알았더니 황제도 쓰레기였네.’

그런 아버지 밑에서 멀쩡한 자식들이 나왔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다.

다이애나가 안되긴 했지만, 그렇다고 내가 해 줄 수 있는 건 없었다.

그저 별일 없길 기도해 주는 것이 다였다.

* * *

나타니엘은 제 앞에서 바짝 긴장한 마틴의 얼굴을 빤히 보았다.

마틴은 재빨리 허리를 숙여서 황태자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절 불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별로. 부르고 싶어서 부른 건 아니라서.”

“그래도 감사드립니다.”

사실 마틴은 실직의 위기에 빠졌었다.

어제, 나타니엘이 자리를 뜨고 나서 프리체 공국의 사절들은 노골적으로 불편한 기색을 비쳤다.

마틴은 사절들의 기분을 풀어 줄 생각은 하지 못했다.

아무 생각 없이 그들을 방으로 돌려보내고, 뒤늦게 그들의 실언을 방치한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다.

신입인 그로서는 처음 맡은 중차대한 일을 망쳤다는 사실보다 황족의 심기를 거슬렀다는 사실이 큰 충격이었다.

당장 달려가서 황태자에게 잘못을 싹싹 빌고 보좌관실로 돌아왔더니 자신을 맞이한 건 싸늘한 상사의 얼굴이었다.


“대체 사절단을 어찌 맞이했길래 나한테 불편하다고 연락을 해!”

그는 마틴에게 폭언을 쏟아 냈다. 하지만 마틴은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이 모시는 사람들은 제국의 황족이지 공국 사람들이 아니지 않은가.

마틴은 눈치가 없었고 성내의 관료들이 황태자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전혀 몰랐다.


“오히려 사절단이 황태자 전하께 사과해야 할 일 아닌가요?”

그리고 당당히 이미 사절단에 공식 사과를 부탁한다는 전언을 넣었다는 이야기도 전했다.


“이, 미친 녀석을 다 봤나! 네가 뭔데 그런 걸 멋대로 결정해!”

노발대발하던 그는 아직 수습 보좌관인 마틴에게 다음 주부터 나오지 말라는 통보를 했다.

갑작스럽게 직장을 잃은 마틴이 눈물을 흘리며 짐을 싸던 그때.


“황태자 전하께서 널 찾으신다.”

자기 뜻대로 되지 않아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그의 상사가 말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틴은 황태자 직속 보좌관으로 임명되었다.


‘잘리지도 않았고, 전하의 심기만 거스르지 않으면 내 인생은 탄탄대로야.’

마틴은 없던 충성심마저 생긴 것처럼 활활 불타올랐다.


“그럼 앞으로 일정 관리와…….”

“아니, 일정 관리는 내가 할 거다.”

“예?”

당황한 마틴을 내버려 두고 나타니엘은 단호한 얼굴로 일어섰다.


“자네는 단순히 서류 분리와 자료 정리만…….”

그때 문이 벌컥 열리고, 제이나가 들어왔다.

* * *

불길한 예감이 맞았다.

황궁에서 외교 관리 보좌관으로 임관되었으면 분명 엘리트일 텐데 저런 단순 직무를 맡기면 좋아할 리가!

나는 더 참지 못하고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갔다.


“잠깐!”

날 돌아본 마틴이 눈물까지 글썽거리고 있었다.

괜히 양심의 가책이 느껴졌다.


‘나타니엘이 까다롭긴 하지.’

나는 재빨리 나타니엘과 팔짱을 끼고 방 밖으로 끌고 나갔다.

복도 끝으로 가서 주변에 사람이 없는 걸 살피고 조용히 속삭였다.


“아니 그런 일을 보좌관한테 시키면 어떻게 해요.”

“그럼 무슨 일을 시켜야 하는데?”

“서류 분류는 처음 올라올 때부터 해서 보내는 거잖아요.”

“…….”

나타니엘은 시선을 돌렸다. 나는 그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물었다.


“제대로 일 시켜 보라니까요. 들어 보니까 일도 꽤 잘하나 보더라고요.”

내 말에 나타니엘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뭐지. 내가 뭐 말실수한 거 있나?’

그는 입술을 삐죽이며 말했다.


“왜 그렇게 신경 써?”

“네?”

“그 자식 말이야. 뭔데 그렇게 신경 쓰냐고.”

“그, 그야 나타니엘의 첫 직속 보좌관이니까 사이가 좋은 게 좋잖아요.”

나타니엘의 표정이 여전히 좋지 않았다. 나는 그의 눈치를 보며 눈만 데굴데굴 굴려야만 했다.


“알았다. 그대가 원하는 대로 하지.”

나타니엘은 그렇게 답하고는 문을 쾅 닫고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문에 찰싹 붙어서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들으려고 애를 썼다.


“뭐야. 왜 이렇게 작게 말해.”

귀를 기울였지만, 기뻐하는 마틴의 목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별일 아니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응접실로 향했다.


“비 전하.”

아나이스와 함께 간식을 먹고 있던 헨리가 소파에서 폴짝 뛰어내려 내 앞에서 꾸벅 인사를 했다.


“어서 와요, 황자님.”

곱슬곱슬한 금발 머리를 쓰다듬자 헨리는 눈을 반짝 빛냈다. 헨리는 이곳에서 우리와 점심을 먹고 간식까지 야무지게 챙겨 먹었다.

그 뒤에는 나타니엘과 함께 뛰어놀았다.

나타니엘의 말로는 마력을 느끼는 수업이라고는 했지만 남이 보면 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형님은요?”

“아마 곧 올 거예요. 황자님은 여기 앉아서 저희랑 놀까요?”

“그, 그래도 될까요?”

“그럼요.”

나타니엘과의 첫 수업 이후 헨리는 잠깐의 쉬는 시간에도 공부하기 위해 책을 들고 왔다.

그 와중에 과제도 하고 있었다.


- 황후 폐하, 헨리 황자가 너무 무리하는 것 같아 걱정입니다. 어제는 수업을 듣다가 비틀거리더라고요. 마법 수업에서 체력을 많이 사용하는데 이러다가 몸이 상할까 걱정입니다.

나는 황자를 직접 데려다주며 일부러 걱정스럽게 말했다. 다행히 황후는 마법 교육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는지 헨리가 듣는 수업을 대폭 줄였다.

그래서인지 요즘은 헨리의 낯빛이 아주 좋아 보였다.


“이것 좀 드셔 보세요.”

얼마 전에 수확한 호두로 만든 파이를 잘라서 그의 앞에 놔주었다.

포크로 조금씩 잘라서 야금야금 먹는 모습이 귀여워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응?’

헨리의 시선이 자꾸만 어딘가를 향했다. 아이의 시선을 따라가자 장식처럼 가져다 놓은 그랜드 피아노가 있었다.


“피아노 치고 싶으세요?”

“아, 아니요!”

헨리는 깜짝 놀라며 시선을 거뒀다. 옆에 있던 아나이스가 손뼉을 치며 말했다.


“아, 헨리가 피아노를 잘 쳐요. 오랜만에 연주 듣고 싶은데, 안 될까?”

아나이스의 말에 우물쭈물하던 헨리는 양 볼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헨리는 피아노 의자 위에 앉아서 작은 손으로 조심스럽게 건반을 만졌다.

디링―.

가볍게 건반을 누르자 맑은 피아노 소리가 울렸다.

헨리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떠올랐다.

그리고 작은 손이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와.”

음악에 조예가 깊지 않은 나도 알 수 있을 정도로 개성이 선명한 음색.

게다가 저 작은 손으로 어떻게 저렇게 풍부한 소리를 내는 건지 꼭 마법 같았다.

길지 않은 곡을 연주한 헨리가 뺨을 붉히며 뒤를 돌았다.

나와 아나이스는 열렬하게 박수를 쳤다.


“굉장해요, 전하. 어쩜, 너무 대단해요.”

“헤헤…….”

부끄러운지 뺨이 발갛게 달아오른 헨리가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의자에서 내려왔다.


“나중에 좀 더 크시면 유학도 가실 수 있을 것 같아요!”

“유학이요?”

헨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요. 저희 제국과 달리 프리체 공국에는 음악, 미술을 전문적으로 배우는 아카데미가 있다고 들었거든요.”

내 말에 헨리의 눈이 반짝거렸다.

누가 보아도 기대감에 가득 찬 얼굴이다. 프리체 공국의 음악 아카데미는 입학시험이 까다롭다고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나도 감동하게 한 재능을 그들이 못 알아볼 리가 없었다.


“그러니까 이제 식사도 잘하시고, 밤에 잠도 꼬박꼬박 주무셔야 해요.”

“응.”

헨리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귀여운 모습에 머리를 쓰다듬자 기분 좋게 웃어 보였다.

방긋 웃던 헨리가 손을 번쩍 들고 문가를 보며 흔들었다.


“아, 형님!”

언제 도착했는지 나타니엘이 와 있었다.

헨리가 도도도 달려가서 그의 긴 다리에 매달리자 나타니엘은 익숙하게 헨리를 번쩍 안아 들었다.


“벌써 수업 시간이네요. 그럼 황자 전하, 잘 다녀오세요. 나타니엘도요.”

“다음에 봬요, 비 전하!”

헨리는 단풍잎 같은 작은 손을 흔들었다.

반면 나타니엘은 휭 몸을 돌려 나가 버렸다. 늘 다녀오겠다며 뺨에 입맞춤을 하곤 했는데.


‘어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