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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화. 부하를 얻었다 (62/145)


62화. 부하를 얻었다
2022.09.03.


문을 닫고 밖으로 나온 나타니엘은 제이나의 입술이 닿았던 자리를 손끝으로 만지작거렸다.

잠깐 닿았던 것뿐인데 촉감과 향이 아직도 남아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전하, 공국의 사절단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황제의 보좌관이 초조한 얼굴로 나타니엘을 다그쳤다.

마틴은 올해 임관된 보좌관이다. 프리체 공국에서 10년간 유학 생활하다가 돌아온 그는 나타니엘의 흉포함에 대해 몰랐다.


- 마틴 경, 경에게 아주 중요한 일을 맡기겠네.

평범한 신입이었던 마틴을 부른 그의 상관이 비장한 얼굴로 말했다.


- 황제 폐하께서 여색…… 아니, 다른 일로 바쁘셔서 프리체 공국의 사절을 맞이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렇게 말하며 잠시 황태자 전하를 부탁한다고 하고는 부리나케 도망쳤다. 황태자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마틴은 자신의 인생길이 활짝 폈다고 생각했다.


“전하?”

나타니엘은 희멀건 얼굴로 자신을 재촉하는 마틴에게서 익숙한 느낌을 받았다.


‘뭐지?’

지긋이 자신을 내려다보는 나타니엘의 시선을 모르는지 마틴은 발을 동동거리며 그를 재촉했다.


“벌써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어서요.”

결국 나타니엘은 생각하던 것을 멈추고 발걸음을 옮겼다.

괜히 늦었다가는 황후가 그를 귀찮게 굴 게 뻔했다.

접견실에 도착한 나타니엘은 그를 기다리고 있는 사절단에게로 향했다.

중년 남성 둘과 그의 또래로 보이는 남자 한 명으로 구성된 사절단은 나타니엘에게 몸을 숙였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황태자 전하.”

의외로 사절단의 대표는 젊은 남자인 듯했다. 타오르는 듯한 붉은 머리카락에 황금색 눈을 가진 남자는 전형적인 미남은 아니었지만, 독특한 매력을 가진 남자였다.


“저는 서쪽의 마탑주, 킬리언이라고 합니다. 저와 함께 오신 분은…….”

킬리언이라고 하는 남자가 미소를 띤 채로 다른 사절들을 소개했다.

나타니엘은 참을성 있게 그들의 인사를 듣고,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이리 보게 되어 기쁘군. 먼 길 오느라 수고했을 터이니 어서 들어가서 쉬도록…….”

쉬라는 말고 함께 돌아가려던 나타니엘은 사절단 뒤에서 고개를 흔들며 자신을 말리는 보좌관을 발견했다.

티타임을 가져야 한다고 손짓을 보내는 그를 보며 나타니엘은 얼굴을 구겼다.


“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아닐세. 자리에 앉지. 보좌관이 아주 좋은 차를 준비했는지 신이 났군.”

대놓고 마틴을 비꼬는 말이었지만 그는 일을 완수했다는 사실에 기뻐할 뿐이었다.

곧 그들 앞에 간단한 다과가 차려졌다. 색색의 쿠키와 오렌지 향이 가미된 홍차가 꽤 잘 어울렸다.

그러나 나타니엘은 말없이 차만 홀짝거렸다. 무거운 침묵 속에서 마틴은 사색이 되어 뭐라도 말을 해 보라며 손짓했지만, 나타니엘은 그런 마틴을 무시했다.

그때 킬리언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전하께서는 용의 힘을 이어받으셨다 들었습니다.”

“그렇네.”

“혹 그 힘을 보여 주실 수 있으십니까?”

“난 광대가 아니네.”

나타니엘의 말에 방 안의 분위기는 더운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제 말이 예의에 어긋났나 봅니다. 죄송합니다.”

“사과는 받아들이지.”

나타니엘은 차를 홀짝이며 말하는 상대를 보지도 않았다.

명백한 무시였다. 하지만 반대편에 앉은 킬리언은 여전히 미소 띤 얼굴로 말을 이어 갔다.


“저는 늘 마석 없이 마법을 발동하는 것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부디 기회가 되신다면…….”

“내가 보여 주면 그걸 따라 할 수는 있고?”

마틴의 입이 바짝 말라 왔다.

어째서 선배들이 그를 안타까운 눈으로 봤는지 알 것 같았다.

황태자는 시한폭탄이었다.

프리체 공국은 제국의 오랜 우방국이었다.

비록 크기는 작았지만, 대륙에 존재하는 유일한 마탑을 소유한 국가여서 마도학이 엄청나게 발전한 국가였다.

그런 국가의 무려 마탑주에게 저런 말을 하다니.


“하, 하하하. 물론 그런 것은…….”

“그렇다면 황태자인 내게 마법으로 쇼를 하라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한두 번 겪어 본 일이 아니었기에 나타니엘은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딱히 할 말이 없다면 이만 일어나 보도록 하지.”

마음이 상한 그는 더 이상 자리에 앉아 있을 가치를 느끼지 못했다.

결국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문밖으로 나가 버렸다. 사색이 된 마틴이 사절단에게 꾸벅 몸을 숙이고 급하게 나타니엘을 쫓아갔다.


“저, 전하. 그렇게 가 버리시면……!”

안 된다고 말하려던 순간 나타니엘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살기를 그대로 받아 낸 마틴은 자리에 주저앉았다.

무례를 저지르는 모습을 보고서도 상대에게 굽신대다니…… 이는 황태자를 무시하는 것과도 같았다.


 

* * *

숙취로 침대 위에서 뒹굴던 나는 문을 쾅 열고 들어오는 나타니엘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잔뜩 기분이 상했는지 표정이 좋지 않았다.


“무슨 일 있었어요?”

나는 침대에서 내려와 나타니엘에게 걸어갔다. 살짝 얼굴이 붉어 보이고, 주먹 쥔 손을 파르르 떨고 있었다.

꽉 다물린 입가가 꽤 고집스러워 보였다.


“나타니엘.”

“별거 아냐.”

작게 웅얼거리며 시선을 피하는 모습이 별일이 있었던 거 같아 보였다.

나는 그를 끌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공국 사람들이 별로였어요?”

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나타니엘은 타인을 정치적으로 대하는 것이 쉽지 않아 보였다.

좋으면 좋다, 싫으면 싫다고 극단적인 반응뿐이었다.

어린 시절 방치되면서 인간적인 교류를 제대로 하지 못한 탓이었다.


“그들이 뭐라고 했나요?”

“내게 마법을 보여 달라고 하더군.”

“그게 싫으셨어요?”

나타니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왜 싫으셨나요? 저나 헨리에게 종종 보여 주셨을 땐 불편해하지 않았던 거 같은데.”

“부모님은 어린 시절, 나를 불러다 놓고 마법을 쓰라 강요했어. 난 유희 거리처럼 날 보는 사람들의 눈이 싫었다. 그런데 나가기 싫다고 버티면 어머니가 화를 내셨으니까.”

“이런. 속상할 만해요.”

나타니엘은 사회성이 좋은 편도 아니니 그런 자리가 더욱 불편했을 것이다.

나는 손을 뻗어 그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조금 안정되었는지 나타니엘의 표정이 풀렸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힘이 되어 줄 수 있다는 사실에 순수하게 기뻤다.


“이제 좀 괜찮아요?”

“응.”

나타니엘의 붉은 눈이 나를 빤히 보았다.

그러더니 손으로 내 입술을 살짝 건드렸다. 손끝이라 그런지 유달리 차갑게 느껴졌다.

입술을 톡톡 건드리던 손이 뺨에서 귀를 지나 목을 만지작거렸다.

서늘했던 손이 어느새 열기를 머금어 내 체온과 비슷할 정도로 미지근해졌다.

날 내려다보는 붉은 눈에 애정과 탐욕이 들끓었다.

두 욕망이 기묘하게 어우러진 눈에 홀릴 것 같았다.


“입 맞춰도 돼?”

조금 달뜬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타니엘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긴장 속에서 눈을 감자 그의 숨결이 입술을 간지럽혔다.

부드러운 감촉이 스치듯 살짝 닿았다가 떨어졌다. 그것뿐인데 숨이 막힐 정도로 두근거렸다.

벌써 몇 번이고 해 본 입맞춤인데도 가슴이 뛰었다.

그의 옷자락을 꽉 쥐며 떨자 나타니엘이 흠칫했다.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짙은 열망이 턱끝까지 차올랐다.

침대 위로 쓰러지듯 눕는데도 우리는 서로를 놓지 않았다.


“나타니엘, 좀 더…….”

그때였다.

누군가가 문을 살짝 두들기는 소리가 들렸다.

나와 나타니엘은 움찔하며 입술을 떼어 냈다. 밖이 다시 조용해졌다.

나는 급하게 손을 뻗어 나타니엘의 셔츠에 달린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긴장한 탓인지, 그것도 아니면 마음이 급한 탓인지 자꾸만 손이 미끄러졌다.


“전하.”

다시 누군가가 문을 두들겼다.

이쯤 되자 나조차 짜증이 났다. 대체 어떤 미친놈이 허락도 없이 황태자 부부의 방문을 두들기냔 말이다.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대체 뭐 하시는 겁니까!”

문을 두들기는 남자를 막으러 사람들이 몰려왔는지 밖이 시끄러웠다.


‘분위기 다 깼네.’

나와 나타니엘은 결국 한숨을 쉬고 서로에게서 물러났다.


‘어떤 놈인지 알면 가만 안 둬.’

나는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나타니엘의 단추까지 꼼꼼하게 잠가 주었다.

그도 어지간히 짜증 난 표정이었다.


“흐어어엉, 제가 잘못했습니다, 전하!”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당장 일어나세요.”

“전하, 저언하!”

대체 어떤 미친 X이 문 앞에서 대성통곡이야.

나타니엘은 고개를 젓더니 소리를 버럭 질렀다.


“대체 누구야!”

나타니엘이 짜증스럽게 문을 벌컥 열자, 문 앞엔 눈물, 콧물로 범벅이 된 보좌관이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 * *

훌쩍거리며 바닥에 꿇어앉아 있는 남자는 비스코티 남작가의 둘째, 마틴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흑, 제가 불충을 저질렀습니다, 전하.”

여전히 훌쩍거리는 마틴을 보며 나는 고개를 저었다.

다른 보좌관이었다면 이미 나타니엘의 태도에 익숙해져서 사과는커녕 공국 사람들의 기분을 푸는 것이 우선이었을 것이다.


‘괜찮은 사람 같은데.’

문을 열자 무릎을 꿇고 있던 마틴은 죽을죄를 지었다며 이마를 찧어 댔다. 아마 내가 질색을 하며 싫어하지 않았다면 나타니엘은 그냥 두었을지도 모를 정도로 무심한 얼굴이었다.


‘역시 감정을 다 배우지 못한 거야.’

원작에서 감정이 거의 없다고 묘사된 건 가짜였다.

나타니엘의 부모가 그에게 타인을 어떻게 대하고 소통하는지 아무도 알려 주지 않은 것이 문제였다.

사실상 정서적 방치였다.


‘지금 나타니엘이 배울 수 있는 감정에는 한계가 있어.’

그의 친구이자 연인인 나는 나타니엘에게 애정과 서로에 대한 믿음 같은 감정을 일깨워 주었고, 헨리와 아나이스는 그에게 부족했던 가족 간의 애정을 알려 주었다.


‘만일 나타니엘이 황태자가 아니었다면 이 정도로도 충분했겠지만.’

나타니엘은 장차 일국을 끌고 나가야 할 황제가 될 몸.

그에게는 군신 간의 의리와 믿음을 알려 줄 사람이 필요했다.


“마틴 경.”

“예, 예. 황태자비 전하.”

마틴은 긴장한 듯 얼굴을 닦고 몸을 숙였다.


“고개를 들어도 좋아요.”

그는 살짝 얼굴을 들었지만, 옆에서 노려보는 나타니엘 때문에 얼굴을 숙였다.

나는 그의 옆구리를 쿡 찔렀고 나타니엘은 칫, 소리를 내며 시선을 돌렸다.


“이번 일로 보좌관으로서의 위치가 위험할 거예요. 내 말이 틀렸나요?”

“예, 맞습니다.”

가벼운 거짓말로 넘어갈 수도 있었지만, 마틴은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 하지만 그것 때문에 사과드리러 온 것은 아닙니다. 그저 제가 전하에게 큰 무례를 저질렀다는 것을 알게 되어 이리 찾아뵈었을 뿐입니다.”

“왜 그런 무례를 저지르셨나요?”

“처, 처음 맡은 일이라 완벽하게 처리하고 싶어서 전하의 심기를 어지럽혔습니다.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닌데 가볍게 생각해 무례도 저질렀고요.”

그는 자신의 잘못을 주저리주저리 뱉으면서 단 한 번도 변명하지 않았다.

나는 시종장이 가져온 마틴의 이력서를 살폈다. 그는 프리체 공국에서 10년이 넘는 오랜 유학 생활을 했다.

이제 스무 살이 조금 넘었으니 사실상 정서적 배경은 공국의 것일 게 분명했다.


‘공국은 제국보다 신분에 있어 좀 더 자유롭지.’

차라리 그래서 나타니엘에게 더 잘 맞을지도 몰랐다.

게다가 솔직하고 변명하지 않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알겠으니 돌아가 봐.”

나타니엘의 말에도 마틴은 몇 번이고 사죄를 하고는 다리를 절며 방을 나갔다.

시끌벅적했던 방 안에 드디어 고요가 찾아왔다.

나타니엘은 의자 깊숙이 몸을 숨기며 이마를 짚었다.


“나타니엘.”

“왜.”

“혼자 일하기 벅차지 않아요?”

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마치 내가 무슨 말을 할 건지 알 것처럼.

나는 굴하지 않고 말을 이어 갔다.


“마틴 경을 보좌관으로 두시는 건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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