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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화. 술이 원수 (61/145)


61화. 술이 원수
2022.08.31.


나타니엘은 내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마물에게 지능이 있다는 이야기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나타니엘은 그걸 어떻게 안 거예요?”

“서로 지켜 준다고 내 앞에 서던데.”

뚱한 표정으로 말하는 모습이 꽤 귀여웠다. 나는 속으로 웃다가 손을 뻗어 그의 뺨에 댔다. 찹쌀떡같이 말랑한 느낌에 웃음이 나왔다.

가만히 내 눈을 들여다보던 나타니엘이 갑자기 몸을 경직시키더니 뒤로 물러났다.


“아.”

뻗었던 손이 허공을 쥐었다.

민망해진 나는 슬쩍 손을 뺐다. 그런 나를 힐끔 본 나타니엘은 뺨을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다가 서류로 시선을 돌렸다.


‘뭐지?’

이때만 해도 몰랐다.

이 상황이 계속될 거라고는.


 

* * *

나와 테레사, 카시안은 겨울이 가까워지면서 황실에서 세운 빈민 구제 시설 예산을 확인하고 있었다.

서류를 묵묵히 보던 나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비 전하, 요즘 무슨 일 있으세요?”

“응?”

맞은편에서 계산 값을 확인하던 카시안이 물었다. 마치 내 마음을 읽은 것 같은 예리한 그녀의 질문에 놀라서 움찔했다.


“아, 아니.”

“그럼 왜 말을 더듬으세요?”

“내가 언제 말을 더듬었다고 그래!”

“눈동자가 흔들려요, 비 전하.”

테레사까지 가세하자 나는 입을 꾹 닫았다. 테레사가 눈을 가늘게 뜨고 내 눈을 똑바로 보았다.


“혹시 황태자 전하랑 싸우셨어요?”

“싸우다니요, 아니에요!”

싸우고 말고 할 것도 없이 이쪽이 일방적으로 무시당하고 있는데.

억울해서 얼굴에 열이 다 올랐다.


“그럼 무슨 일이신데요?”

카시안이 기회를 잡았다는 듯 재빨리 옆구리를 찌르며 물었다.

이런 걸 말해도 될까, 싶던 나는 결국 사실을 털어놓기로 했다.


“사실…….”

요 며칠 나와 거리를 두는 듯한 나타니엘 때문에 스트레스가 쌓였다. 밤에 바쁘다는 핑계로 늦게 들어오거나 새벽같이 일어나서 나가는 일이 잦았다.

심지어 어젯밤에 자꾸 날 피하는 것 같아서 화를 냈더니 그런 적 없다며 내 옆에 눕는 걸 보고 잠이 들었다.


“그런데 새벽에 물 마시려고 눈 떴더니 소파 위에서 자고 있는 거 있죠.”

처음에는 호기심이 가득했던 눈빛들이 말을 할수록 점점 묘하게 변해 갔다.


“진짜 싸우신 거 아니에요?”

“아니라니까.”

“서로 볼 거다 본 사이 아니에요? 그런데 왜 갑자기 낯을 가리시지?”

헉.

나는 들고 있던 서류를 떨어뜨렸다.

잊고 있었다.

우리가 그런 사이가 아니라는 걸. 지금껏 어색함 없이 한 침대에 누울 수 있었던 건 서로를 이성으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오, 세상에.’

매일같이 붙어 지내서 친구나 가족, 혹은 귀여운 애완동물 정도로만 생각했던 것이다.


“황태자비 전하?”

얼굴에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드디어 나타니엘이 왜 그렇게 밤에만 피하는지 깨달았다.

그리고…….


‘당장 오늘 밤에 나타니엘이랑 어떻게 자지?’

눈앞이 아찔하다.

밤에 그를 맞이할 생각을 하니 괜히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비 전하!”

카시안의 목소리에 나는 상념을 깨고 현실로 돌아왔다. 카시안과 테레사가 의심이 가득한 얼굴로 날 보고 있었다.


“왜, 왜?”

“저희한테 뭐 숨기시는 거 있죠?”

“숨기다니, 뭘! 난 결백해!”

버럭 소리를 지르자 테레사의 눈이 더 가늘게 변했다.


“비 전하는 거짓말을 하실 땐, 흥분해서 더 소리를 지르시는 거 잘 알아요.”

나도 모르게 흠칫했다. 시선을 피하자 카시안이 불쑥 시야 안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악!”

도망치려는 내 손을 카시안이 꽉 잡으며 씨익 웃었다.


“어서 사실대로 말하세요. 저희한테 뭘 숨기시는지.”

도움을 요청하려 테레사를 보았다. 하지만 이번엔 그녀조차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카시안을 말려 주긴 했다.

카시안은 마지못한 얼굴로 물러섰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비 전하. 제게 좋아하는 사람과는 제대로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하시지 않았나요?”

“으, 으응.”

“그러니 너무 부끄러워하지 마세요.”

그렇게 말하고는 테레사는 서류에 집중에 했다.

어쩐지 온도가 한 10도쯤 낮아진 느낌이 들었다.

* * *

그날 밤, 나는 비장한 얼굴로 침대에 앉아서 나타니엘을 기다렸다.

그에겐 살짝 미안한 맘이 들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몇 날 며칠을 짜증만 냈으니, 그로서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예전 같았으면 분명 먼저 화를 내고 자리를 피했겠지만…….”

나타니엘은 그답지 않게 인내심을 갖고 대해 주었다.

그래서 몰랐다.

그냥 예전처럼 삐진 줄로만 알고 화를 냈다.

미안해진 나는 이불만 쥐어뜯었다.


‘어쨌거나 나타니엘과 제대로 이야기해야 해.’

하지만 자정이 지나도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목말라.”

긴장한 채로 그를 기다리니 입이 바짝바짝 말랐다.

제정신으로 버티기가 어려워서 나는 그와 마시려고 준비해 둔 와인을 비웠다.

한 모금만 마셔야지, 했던 것이 한 잔, 두 잔 늘어나더니 어느새 혼자서 한 병을 다 비웠다.


“어지러워.”

잘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혼자서 다 비웠더니 눈앞이 핑핑 돌았다.

비틀거리며 겨우 침대에 누운 나는 기다렸던 것이 무색하게 깜빡 잠이 들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그리고 주섬주섬 베개를 챙기는 나타니엘과 눈을 마주쳤다.


“지금 왔어요?”

종일 기다리던 사람이 나타나서 그런가 괜히 웃음이 나왔다.


“으응.”

나는 손을 뻗어 차갑게 식은 나타니엘의 손을 잡았다. 살짝 뒤로 물러서려는 것을 꼭 쥐어서 잡아당겼다.


“자, 잠깐!”

힘없는 내가 잡아당긴다고 당겨질 사람이 아닌데, 나타니엘은 쉽게 침대 위로 쓰러지듯 넘어졌다.


“혹시 술 마셨어?”

“네에…….”

나타니엘의 품은 시원해서 기분이 좋았다. 그의 가슴에 찰싹 붙어서 뺨을 비비자 나타니엘의 표정이 굳었다.


“제이나, 잠깐 기다려!”

“왜요?”

“뭐?”

“왜 기다려야 해요?”

늘 날카롭게 벼려져 있던 눈이 오늘따라 멍청해 보였다.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못 알아듣는 그가 조금 한심하게 느껴졌다. 나는 팔을 들어 그의 목에 걸고 가까이 끌어당겼다.


“이렇게 해도 모르겠어요?”

“아, 으…….”

늘 창백하리만치 하얬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그가 이렇게 동요하는 것이 내 탓이라고 생각하니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그의 입가에 살짝 입을 맞추자 나타니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나타니…….”

훅, 그의 숨결이 가까워졌다. 달콤하면서 청량한 향기가 입 안 가득 퍼졌다.

열띤 손으로 그의 등을 꽉 잡은 채로 눈을 꼭 감았다.

그의 숨결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가 빠져나갈 때마다 애가 달았다.

있는지조차 몰랐던 욕망에 불이 붙자 무서운 기세로 번져 나가기 시작했다.

몇 번이고 거듭되는 입맞춤 끝에 멀어진 나타니엘이 천천히 상의를 벗었다.

마석이 발하는 은은한 빛 탓인지 그의 상체가 더욱 강렬하게 다가왔다.


“어지러워.”

“뭐?”

술을 너무 많이 마신 걸까.

아니면 그의 상체가 내 생각보다 더 훌륭해서 시각이 적응하지 못한 걸까.


“으……. 나타니엘, 나 속이 안 좋아요.”

아니다. 술을 너무 많이 마신 거다.

한숨을 쉰 나타니엘이 날 덜렁 안아서 욕실로 향했다.


 

* * *

다음 날 아침.

잘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마셔서 그런 걸까.

아니면 어젯밤 내내 숙취와 싸우다가 새벽이 되어서야 지쳐 잠이 든 탓일까.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나는 손을 휘적거리며 설렁줄을 당기려고 했지만 쉽게 잡히지 않았다.


“으, 으으……. 물…….”

“여기.”

손에 닿은 차가운 물 잔을 누워 있는 채로 입에 대려다가 옷과 얼굴에 쏟았다.


“읏, 차가워…….”

“하아…….”

긴 한숨이 머리 위에서 뱉어졌다가 사라졌다. 눈을 겨우 뜨자 나타니엘이 한심하다는 듯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타니엘은 수건을 가져와 입가와 상체를 닦아 주면서 미간을 구겼다.


“헤헤.”

민망함에 애써 웃자 그가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다시는 술 마시지 마.”

“저 나름 술 센데요.”

허세 넘치는 내 말에 나타니엘의 미간이 구겨졌다. 내 생각에도 좀 너무했다 싶어서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마실 거면 내가 있을 때만 마셔.”

나는 냉랭한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죄를 지은 것이 있으니 어쩔 수 없기는 했다.

대충 물을 닦고 나자 나타니엘은 내 상체를 일으켜 직접 물을 마시게 도와주었다.

그러고는 하녀를 불러서 옷을 갈아입게 해 주고, 이것저것 숙취에 좋은 것을 준비해 오라 시켰다.


“이게 뭐예요.”

“토마토주스.”

나타니엘은 그렇게 말했지만 내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토마토주스의 색이 아니었다.


‘녹색 건더기가 둥둥 떠다니고 있는데?’

녹즙기 판매 알바를 할 때 이런 건강 주스를 수십 번 마셔 본 나로선 이게 얼마나 끔찍한 맛일지 알 것 같았다.


“나, 나중에요.”

“마셔.”

냉정한 그의 목소리에 결국 코를 막고 주스를 마셨다. 알싸하게 올라오는 풀 내음이 비리고 역했다.


“맛없어요.”

“자, 사탕.”

그는 동그란 레몬 사탕을 내 입에 넣었다.

어쩐지 꽤 즐거워 보이는 나타니엘이 얄미워서 눈을 흘겼다.


“왜 그렇게 봐?”

“지금 재밌나 보죠?”

결국 참지 못하고 나타니엘이 소리를 내며 웃기 시작했다.


“처음엔 그대가 왜 그렇게 날 신경 써 주는 걸까 했는데, 이거 생각보다 재밌네.”

“전 아파 죽겠는데 재밌다니요.”

나타니엘은 하녀가 가져온 수프를 트레이째로 내 앞에 놓으며 말했다.


“내 말을 잘 듣는 게 귀여워서 재밌어.”

그는 크게 한 스푼 떠서 내 입술 앞에 들이밀었다. 스푼 가득 알 수 없는 색의 수프가 담겨 있었다.

나는 울상을 지으며 나타니엘을 바라보았다.


“이건 또 뭐예요?”

“별로 알고 싶지 않을걸?”

나타니엘의 말에 나는 재료를 묻지 않기로 했다.

다시는 과음을 하지 않으리라.

그렇게 다짐하면서 나타니엘이 주는 대로 음식을 받아먹었다.

그렇게 겨우 한 그릇을 다 비우자 나타니엘은 나갈 채비를 했다.

침대 위에 축 늘어진 나는 평소보다 제대로 차려입은 그의 모습을 훔쳐보았다.


“오늘은 어디 가요?”

“아버지께서 대신 프리체 공국의 사절을 맞아 달라고 해서.”

“사절을요? 급한 일이 있으신가 봐요?”

“글쎄.”

나타니엘의 얼굴이 흐려졌다.

그런 자리에는 바쁜 일이 있는 게 아니라면 황제가 참석하는 것이 도리였다.

그 일을 나타니엘에게 맡길 정도로 급한 일이 있었다면 나 역시 알았을 텐데.

그렇게 생각한 순간, 준비를 마친 그가 방을 나가려 했다.


“나타니엘.”

나는 손을 흔들어 그를 불렀다.

고개를 갸웃거리던 나타니엘이 침대 근처로 왔다.

나는 베개를 등에 대고 상체를 일으킨 채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잠깐 몸 좀 숙여 봐요.”

“왜 그러는데.”

나타니엘이 허리를 숙이자 나는 재빨리 그의 얼굴을 끌어당겨 입을 맞췄다.

쪽, 하는 낯부끄러운 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무, 무슨 짓을!”

당황한 그가 뒷걸음질을 쳤다. 얼굴이 꼭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붉어졌다.

복수다, 이놈아.

나는 씨익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잘 다녀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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