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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화. 가질 수 없는 것 (59/145)


59화. 가질 수 없는 것
2022.08.24.


다이애나는 잔을 기울이며 나타니엘의 모습을 관찰했다.

그는 휘이, 잔을 돌려 보고는 옆에 지나가던 하인을 불러 세웠다.

그리고 잔을 건넸다.

하인은 흔한 일인 것처럼 잔을 받아서 자리를 떴다.

다이애나는 무시당했다는 생각에 머릿속이 하얗게 날아갔다.

수도에 온 이후 다이애나를 무시하는 귀족들은 많았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자신을 얼굴 앞에서 없는 사람 취급하는 경우는 처음이었다.


“가져온 샴페인이 마음에 드시지 않으신가 봐요?”

상대는 황태자였다.

다이애나가 모욕을 당했다며 화를 낼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그녀는 최대한 말을 돌렸다.

이제 다이애나는 시골에서 막 올라온 한심한 촌뜨기가 아니니까.


“딱히.”

하지만 나타니엘은 그런 것과 전혀 상관없는 사람이었다.

상대의 의중을 살피는 것은 제이나가 다였다.


“다른 음료를 가져다드릴까요? 마음에 드시는 게 있다면요.”

“아니, 그대가 뭘 들고 와도 똑같을 거다. 난 남이 가져다주는 건 먹지 않거든.”

타인을 대하는 태도가 유해졌다고 하나 나타니엘의 뿌리 깊은 불신은 쉽게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제이나가 직접 가져오는 것이 아니면 여전히 음식을 거부했다.

어린 시절 독살당할 뻔한 경험은 그의 식습관을 기형적으로 바꾸었다.

하지만 이런 사실을 다이애나가 알 리가 없었다.

그리고 나타니엘 역시 알려 줄 생각도 없었다.

결국 다이애나는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채로 자리를 피했다.

덩그러니 홀로 남은 나타니엘은 마침내 주변이 조용해진 것에 만족하며 벽에 등을 기댔다.

* * *


 
어쩐지 좋은 일만 생긴다 했다.

나는 카시안과 함께 복도를 뛰어 휴게실로 향했다.

문을 벌컥 열자 긴 소파에 누워 있는 테레사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방에 사람이 들어온 걸 알아차리고 몸을 일으켰다.


“비 전하.”

“그냥 누워 있어도 돼요.”

나는 재빨리 테레사의 옆으로 갔다.

한눈에 보아도 아파 보였다.


“몸은 좀 괜찮아요? 그러게 무리해서 오지 말라니까.”

“하하, 좋아졌다고 생각했는데, 드레스가 얇아서 다시 열이 올라왔나 봐요.”

카시안은 테레사의 말에 어이없다는 말투로 말했다.


“긴팔에 가을용인데 뭐가 얇아.”

내가 보기에도 그랬다.

게다가 황성은 마석을 이용해 늘 따뜻한 온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때 아픈 게 다 낫지 않은 것 같은데.”

“저택에서 나오기 전까지는 정말 괜찮았는데……. 걱정시켜서 죄송해요.”

테레사는 어지러운지 잠시 말을 멈추었다.


“사람을 붙여 줄 테니 잠시만 기다려요. 저번처럼 또 쓰러지지 말고.”

괜히 나 때문에 무리해서 건강에 이상이 생긴 게 아닐까 싶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괜찮은데…….”

“안 돼. 오늘은 나도 파트너가 있어서 널 구해 주러 못 간다고.”

카시안까지 거들자 테레사는 결국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하녀를 불러 테레사의 배웅을 맡겼다.


“어서 전하께 돌아가셔야죠. 혼자 계시면 심심하실 것 아니에요.”

혼자 덩그러니 서 있을 나타니엘을 떠올리니 걱정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결국 나와 카시안은 먼저 연회장으로 돌아갔다.

나타니엘은 벽에 기댄 채로 조용히 눈을 감고 있었다.

그의 주변에는 어떻게든 말을 한번 걸어 보려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나는 그런 사람들을 헤치고 나타니엘에게 다가갔다.

고집스럽게 다물린 입가와 구겨진 미간이 그의 저조한 기분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나타니엘?”

내 목소리에 그의 표정이 봄볕에 눈이 녹듯 풀렸다.

나타니엘은 예쁘게 눈꼬리를 휘며 날 내려다보았다.


“친구는?”

“일단 돌려보내기로 했어요. 크게 아픈 건 아니라고 하는데…….”

“내가 봐 줄까?”

그 말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타니엘에게 치유 능력은 없잖아요.”

“치료할 줄은 몰라도 이유 정도는 알 수 있어.”

“진짜요?”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내 등을 톡톡 두들겼다.


“다음에도 아프면 부탁할게요. 그냥 감기일 수도 있으니까.”

“그래, 그럼.”

나타니엘은 다정히 웃으며 내 손을 잡았다.

그는 장난스럽게 날 끌어안고 속삭였다.


“그럼 이제 나한테 집중해 줄래?”

삐진 것 같은 말투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조금 전까지 어깨를 짓누르던 압박감이 그의 말 한마디에 날아가 버린 것 같았다.

나는 잡고 있던 손을 꽉 쥐었다.

우리는 사람들이 가득한 플로어로 향했다.

이제는 정말 즐길 시간이었다.

* * *

마차로 향하던 테레사의 눈앞이 핑 돌았다.

벽을 짚고 서자 하녀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달려왔다.


“괜찮으세요?”

“하아, 잠깐 앉아서 쉴게요.”

‘왜 이렇게 힘들지…….’

열 때문인지 얼굴에서 땀이 흘렀다.

테레사의 모습을 보던 하녀는 물을 떠 오겠다며 자리를 떴다.

난간에 앉아 후원을 보던 테레사는 인기척에 몸을 돌렸다.


“테레사?”

또 그다.

대체 무슨 악연인지.

요즘 들어 부쩍 자주 보는 것 같아서 기분이 더 언짢았다.

테레사는 그를 피하고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야박하게도 몸이 그녀를 따라 주지 않았다. 시야가 흐려지며 바닥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괜찮아?”

막시밀리안은 테레사 옆에 앉아서 그녀의 어깨를 감싸 쥐었다.

일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려 했던 것뿐이었지만, 테레사는 그것조차 싫었다.


“이거 놔!”

거칠게 자신을 밀쳐 내는 테레사 때문에 막시밀리안은 움찔하며 뒤로 물러났다.

힘겹게 숨을 몰아쉬는 탓에 더 이상 다가설 수도 없었다.


“대체 나한테 왜 이래?”

“테레사…… 난, 그냥.”

막시밀리안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테레사에게는 입이 열 개여도 변명할 수 없었다.

그녀가 자신에게서 관심을 거두고 나서야 알았다.

시선조차 주지 않는 상대에게 맹목적으로 매달리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 일인지.


“그냥…… 미안해서.”

그간 테레사가 자신의 행동들에 얼마나 상처를 받고 괴로웠을지 생각하니 목이 멨다.

막시밀리안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녀를 정면으로 볼 자신이 없었다.


“그런 말 해도 소용없어.”

테레사는 손끝이 차갑게 식는 것을 느꼈다.

반면 속에서는 불길이 치솟는 걸 느꼈다.

그녀는 피를 토하듯 그간 꾹꾹 눌러 담았던 것들을 터뜨렸다.


“이제 와서 갖지 못할 것 같으니까 아깝니?”

“아니야, 그런 거.”

“그럼 대체 뭔데, 미안하다고? 미안하면 나한테 그런 식으로 대하면 안 됐어!”

테레사는 막시밀리안을 쫓아다녔던 시간을 떠올렸다.

그녀가 멍청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척했던 것이 아니었다.


“네가 밖에서 누굴 만나고, 어떤 소문이 나도 나는 널 믿었어.”

막시밀리안을 따르는 영애들은 너무 많았다.

그녀들이 질투에 눈이 멀어서 온갖 소문을 낸다고 생각했다.


“내가 언제 단 한 번이라도 그런 일에 대해 아쉬운 소리 한 적 있어?”

막시밀리안은 고개를 저었다.

그때는 당연한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막시밀리안은 누군가를 완벽하게 신뢰하는 것이 어려운 일이란 걸 몰랐다.


“네가 전부 망친 거야, 막스. 우리 사이를 망친 건 네 오만과 불신이라고.”

비명과도 같은 울부짖음에 막시밀리안은 시선을 돌렸다.

한때는 완벽하다고 믿었던 관계였다.

하지만 그 관계는 모두 테레사의 눈물과 고통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녀의 희생으로 만들어진 관계는 결국 언젠가는 이렇게 산산이 부서져 버렸을 것이다.


“내가 테레사, 네게 얼마나 모질게 굴었는지 알아.”

과거로 시간을 돌릴 수 없었다.

할 수만 있다면 그녀가 상처를 입지 않았던 순간으로 되돌리고 싶었다.

순수하고 행복하기만 했던 시절로.


“그리고 네가 얼마나 상처받았는지도.”

“알면서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맑은 눈에서 눈물이 툭툭 떨어져 뺨과 드레스를 적셨다.

막시밀리안은 그것을 닦아 주고 싶었지만, 함부로 손을 댈 수 없었다.

더는 그럴 수 있는 관계가 아니었으니까.


“테레사, 제발. 울지 마.”

“날 더 혼란스럽게 하지 마. 이제야 평화를 찾았다고 생각했는데, 대체 왜 이러는 건데!”

막시밀리안은 입술을 짓씹으며 작게 말했다.


“난 아직 널 사랑해.”

짧은 고백이었다.

하지만 지난 긴 시간 동안 테레사가 단 한 번도 듣지 못한 고백이었다.


“하, 사랑.”

“믿지 않아도 좋아, 받아 주지 않아도 돼. 그냥, 그냥 곁에 있게만 해 줘, 제발.”

“이제 와서 이런다고……!”

테레사의 몸이 크게 휘청였다.

열이 나는 와중에 울고 악을 쓰며 소리치는 바람에 눈앞이 까맣게 물들었다.


“테레사!”

막시밀리안은 반사적으로 쓰러지는 테레사를 안아 들었다.

몸이 불덩어리처럼 뜨거웠다.


“이거…….”

테레사는 막시밀리안을 밀어내려다가 손을 덜덜 떠는 그를 보고 말을 멈추었다.

열 때문에 눈앞이 가물가물했지만, 그의 얼굴이 공포로 창백하게 질려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거, 거기 누구 없느냐!”

막시밀리안의 호통에 멀리서 둘의 대화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던 하녀가 달려왔다.


“마차는, 의사라도!”

황태자궁에서 오래 일한 하녀는 제이나가 테레사를 얼마나 아끼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빠르게 상황을 판단하고 최선책을 내놓았다.


“일단 황태자궁의 손님방으로 가시지요. 제가 비 전하께 말씀드려 의사를 부르겠습니다.”

“내가 손님방 위치를 알고 있으니 당장 비 전하께 고하고 오거라.”

잠시 망설이던 하녀는 고개를 끄덕이고 연회장으로 뛰어갔다.

막시밀리안은 품 안에서 바르작거리는 테레사를 내려다보며 작게 속삭였다.


“싫어도 잠깐만 참아, 테레사.”

반항할 기운도 없었던 테레사는 그냥 가만히 있는 것을 선택했다.

복도에는 빠르게 달리는 한 사람의 발소리만이 남았다.

* * *

기둥 뒤에서 숨죽이고 있던 다이애나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 난 아직 널 사랑해.

막시밀리안의 절절한 고백이 귓가에 맴돌았다.

그녀는 살면서 그렇게 아름다운 사람은 처음 봤다.

다정한 목소리, 아름다운 외모, 여타 다른 남자들과 달리 제게 지켜 준 예의까지.

마치 동화 속에서나 나올 법한 왕자님의 마음엔 자신처럼 평범한 여자는 들어가지도 못했다.


“하…….”

아니 평범, 그 이하였다.

황후에게 협박당하며, 유부남을 유혹하는 여자니까.

게다가 유혹에 실패했으니 이제는 정말 목숨이 간당간당했다.

다이애나는 수도 사교계에 들어오고 나서 그로반 남작가가 고위 귀족에겐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절절히 깨달았다.


‘이대로 가면 결국 죽게 될 거야.’

누구라도 붙잡아야만 했다.

하지만 머릿속은 막시밀리안의 이야기로 꽉 차서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었다.

멀리서 보아도 그가 얼마나 그 여자를 사랑하는지 눈에 보였다.

추악한 질투심이 스멀스멀 기어올라 왔다.

갖지 못한 남자에 대한 욕망과 그런 남자의 사랑을 거부하는 여자에 대한 분노가 뒤섞였다.

거대한 감정의 파도는 그나마 남아 있던 얄팍한 이성을 날려 버렸다.

다이애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황후도, 황태자도 필요 없었다.

그 둘을 발밑에 두는 남자가 따로 있지 않은가?

그녀는 혹시 몰라 반 정도 남긴 약병을 내려다보았다.

책에서는 한 병을 다 털어 넣어야 효과가 있다고 했지만, 반병이라도 어느 정도 효과가 있을 것이다.

다이애나는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연회장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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