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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화. 밤이 괴롭다 (58/145)


58화. 밤이 괴롭다
2022.08.20.


나타니엘은 힘겹게 이불을 목 끝까지 올려 주었다.

목이 타고 손이 떨렸다.

그는 침대 위에 오랫동안 앉아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번 불붙은 열기는 쉽게 가라앉을 것 같지 않았다.


‘안 되겠다.’

오늘은 도저히 여기서 잘 수 없을 것 같다.

그는 베개와 담요를 챙겨서 소파에 누웠다. 눈을 꾹 감았지만, 제이나의 숨소리마저 자극적이었다.


“하아…….”

잠이 오지 않는 긴 밤이었다.

밤새 뒤척거리던 나타니엘은 느지막이 눈을 떴다.


“왜 여기서 자고 있어요?”

“어?”

나타니엘은 눈앞에 가득히 들어온 제이나의 얼굴에 당황해서 뒤로 물러섰다.


“아니, 그냥 너무 잘 자길래. 깰까 봐.”

“제가 침대에서 잤나요?”

“어, 어.”

씻고 왔는지 싱그러운 장미 향과 물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나타니엘은 시선을 피해 저 먼 곳을 바라보았다. 제이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할 일이 잔뜩 남아 있기에 자리를 떴다.

그녀가 사라지는 걸 보고 나서야 나타니엘은 안도했다.

앞으로 제이나와 어떻게 지내야 할지 몰라 눈앞이 캄캄했다.


 

* * *

다이애나는 바짝 긴장했다.

연회 며칠 전, 평소처럼 내버려 두는 것처럼 보이던 황후가 갑자기 쳐들어왔다.

잔뜩 화가 난 그녀는 하녀들과 유명한 드레스 디자이너까지 데려왔다.


“최대한 제이나, 고것이랑 비슷한 느낌으로 꾸며. 그것보다 조금 야한 느낌으로. 아, 머리를 염색하는 것도 좋을 것 같군.”

순식간에 명령을 내린 황후는 소파에 앉았다. 하녀들이 당황해서 발버둥 치는 다이애나를 우악스럽게 끌고 가서 치장하기 시작했다.


“잠, 잠깐!”

의지를 무시당한 다이애나는 울먹거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밀리아는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황후 폐하, 여기 물을 가져왔습니다.”

하녀가 물을 가져다주었다.

그녀는 물을 삼키며 욕이 나오려는 것을 참았다.

오늘은 아침부터 재수가 없었다.

황제가 옆에서 말도 안 되는 개소리를 지껄일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그녀는 일 년 동안 치르는 수많은 행사 중 수확제를 제일 싫어했다.

그 이유는 하나였다.

나타니엘이 제사를 주관했기 때문이다.


‘가진 거라고는 힘이랑 용을 닮은 얼굴밖에 없는 주제에.’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생각했다.

나타니엘이 홀을 들어 올리고 그 끝에서 빛이 터져 나오는 순간 황후는 눈앞이 깜깜해졌다.

나타니엘은 지지 기반이 거의 없었다.

그의 특이한 성격도 한몫했지만, 무엇보다 죽은 전 황후 가문의 몰락이 큰 영향을 미쳤다.

나타니엘에게 힘을 몰아 줄 구심점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제이나와 결혼한 후, 윈터스 가문이 후처를 들이는 것에 반대한 가문에게만 특혜를 주면서 상황이 반전되었다.

그사이에 아버지는 권력에 찌들어 통찰력을 잃으면서 통제력까지 함께 잃었다.

그런 와중에 신성력의 발현이라니.

누가 보아도 나타니엘의 황태자 자리가 공고해지고 있었다.


‘제이나와 나타니엘 사이를 갈라놔야 해.’

일단 급하게라도 갖고 있는 패라도 써야 했다.

나타니엘의 취향이 제이나라면, 비슷하게 꾸미고 좀 더 성숙한 느낌으로 밀어붙이면 승산이 있을 것이다.


“폐하, 폐하!”

다이애나는 머리를 자르고 염색까지 하려 달려드는 하녀들을 밀어내고 황후의 밑에 납작 엎드렸다.

다이애나는 양손을 모아 쥐고 애원하며 소리쳤다.


“머, 머리 염색은 싫어요!”

“지금 네가 좋고 싫고를 따질 때가 아닐 텐데.”

“똑같아 보이면 분명 말이 나올 거예요.”

다이애나가 아무리 사교계를 몰라도, 다른 사람과 똑같이 꾸미고 다니는 건 자존심을 버리는 일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게다가 그 대상이 제이나라니.


“네가 제이나와 똑같아 보일 거라고 생각하니? 아무리 꾸며도 걔의 반도 못 따라갈 테니 걱정하지 말렴.”

밀리아의 독설에 다이애나는 입을 닫았다.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말할 것까진 없지 않은가.

하녀들은 황후의 눈치를 보고 눈물을 뚝뚝 흘리는 다이애나를 일으켜서 욕실로 데려갔다.

대체 무엇을 믿고 황후가 내민 손을 덥석 잡았는가.

황후 정도 되는 사람이 순수한 의도로 자신을 도와줄 리가 없는데. 너무 순진했다.

하녀들은 묵묵히 제 할 일을 했다.

구불구불했던 머리를 길게 펴고 탈색을 반복해서 은발에 가까운 백금발로 바꾸어 주었다.


“드레스는 이게 좋겠구나.”

황후는 마음에 안 든다는 얼굴로 다이애나를 위아래로 훑으며 붉은색 드레스를 골랐다.

제이나가 절대 선택하지 않을 색이었다.

디자인도 과감했다.

하지만 황후는 황실에서 주최하는 연회 자리인 만큼 절대 말이 나올 만한 디자인을 고르지는 않았다.

적당한 노출과 화려한 색감, 게다가 흔치 않은 백금발까지 어우러지자 밋밋했던 다이애나의 인상이 확 바뀌었다.


“이 정도면 그래도 비벼 볼 정도는 되겠구나.”

다이애나는 조금 전까지 울고불고 난리를 쳤던 것이 민망할 정도로 넋이 나갔다.

스스로 놀랄 정도로 아름다워졌다.


‘이게 나라고?’

다이애나는 손으로 제 얼굴을 더듬으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황후는 거울에 달라붙어서 자신의 모습에 취한 다이애나를 보다가 몸을 돌렸다.

* * *

드디어 연회의 시작이었다.

날짜를 맞출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나타니엘이 마법으로 순식간에 내부를 정리하자 생각보다 수월하게 준비가 마무리되었다.

너무 빠르게 해결되어서 같이 일하던 하인들이 허탈해할 지경이었다.

그래도 일을 더 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다들 기뻐했다.

덕분에 정교함을 더할 시간이 확보되었다.

트집 잡을 생각으로 나타난 황후의 표정 변화를 구경하는 건 덤이었다.


“기분 좋아 보이네?”

“아까 황후 폐하 얼굴 못 봤어요?”

황후는 날 잔뜩 욕할 생각에 들뜬 얼굴로 연회장에 입장했다. 하지만 흠잡을 데 없는 내부의 모습을 보자 바로 굳어졌다.

생각한 것보다 훨씬 잘했다며 칭찬하는 황제의 뒤에서 인상을 팍팍 쓰는 모습이라니.

웃음이 절로 나왔다.

나는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가끔 몸 이곳저곳이 쑤셔서 쉬어야 하긴 했지만, 대체로 나쁘지 않은 연회였다.


“그러고 보니 그 영애가 없네요.”

부채로 입을 가린 채 눈을 곱게 접은 프란 백작 부인이 운을 뗐다.

나는 누구를 말하는지 몰라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그로반 남작 영애 말이에요. 이런 자리에는 빠지지 않고 나왔거든요.”

“열심인가 보네요.”

이 세계에서 늦은 나이까지 결혼하지 못한 여자는 짐이나 다름없었다.

여자들의 사회생활이 보편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로반 남작의 추문으로 사실상 집안의 도움을 받기 어려운 다이애나로서는 최선을 다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런 의미가 아니라요.”

프란 백작 부인은 주변을 살피더니 부채를 접고 귀를 톡톡 두들겼다.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하고 싶을 때 쓰는 제스처여서, 나는 그녀와 함께 벽 쪽에 붙었다.


“사실은 윈터스 소공작님을 찾아다니는 것 같더라고요.”

“오…… 소공작을요?”

막시밀리안을? 그녀와 접점이 있던가?

어안이 벙벙한 나에게 백작 부인은 더 가까이 몸을 숙여 속삭였다.


“첫눈에 반했다나 뭐라나. 그러면서 어디서 만날 수 있는지 매번 묻더라니까요?”

그녀가 누굴 만나건 상관없었지만, 그 대상이 오라버니가 되는 건 곤란했다.

내 표정이 굳어 버린 걸 확인한 프란 백작 부인은 몸을 뒤로 물렸다.

그때였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그로반 영애의 입장을 알리는 시종의 목소리가 들렸다.

문이 열리고 들어오는 다이애나를 보며 나는 내 눈이 잘못된 줄 알았다.


“세상에…….”

옆에 있던 프란 백작 부인 역시 내 눈치를 살폈다.

사교계에서 금발을 가진 여자들은 많았지만, 나처럼 은발에 가까운 금발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

그 희귀함 때문에 많은 사람이 부러워하기는 했다.

하지만 내 머리카락 색을 그대로 따라 하는 영애는 없었다.

바로 조금 전까지는.


“설마 저거, 염색한 거예요?”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다이애나에게서 내게로 향했다.

나라면 절대 입지 않았을 파격적인 스타일의 드레스를 입은 다이애나의 시선 역시.


‘하지만 오라버니를 좋아한다면서 왜 날 따라 하는 거지?’

나와 막시밀리안은 가족이었다.

얼마나 아름답고 잘생겼든 가족과 비슷한 외관을 한 이를 연애 대상으로 보는 사람이 몇이나 있겠는가?


‘역시 나타니엘을 노리는 건가?’

지난번 나디아의 일로 나는 그 말도 안 되는 법이 나타니엘의 겁박으로 끝날 일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나타니엘이 저런 방법에 넘어가지 않을 거라는 건 알고 있지만, 그래도 기분이 나쁘다.

확실하게 막으려면 다른 방법이 필요하긴 했다.


‘어떻게 하지.’

나는 다이애나를 눈을 가늘게 뜬 채로 노려보며 생각에 잠겼다.


 

* * *

다이애나는 어이없다는 표정의 제이나를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머리 색을 바꾸면 안 된다는 법이 있는 것도 아니고.’

황후의 안목은 굉장했다.

제이나의 머리보다 조금 더 금발에 가까운 덕에 다이애나의 피부색에 훨씬 잘 어울렸다.

게다가 화장이나 드레스 모두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시도해 보지 않은 파격적인 스타일이었으나 정말 잘 어울렸다.

시선을 못 뗄 만큼.

아름다워진 만큼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도 덤으로 올랐다.


‘일단 오늘을 넘기는 데 집중하자.’

다이애나는 주변의 시선에 자신감이 생겼다. 이대로라면 계획대로 황태자를 유혹해 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녀는 드레스 안쪽에 숨겨서 들고 들어온 약병을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사람들의 시선을 고스란히 느끼며 샴페인을 단숨에 들이마셨다.

아무리 마음을 먹었다지만, 맨정신으로 유부남을 꾄다는 건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후우.”

다이애나는 놓여 있는 샴페인 잔 중 하나에 약을 떨어뜨렸다.

샴페인은 순간 보라색으로 변했다가 원래의 색으로 돌아왔다.

다이애나는 잔을 든 채로 타이밍을 노렸다.

나타니엘과 붙어 있던 제이나는 무슨 이야기를 듣고 놀라서 어디론가 뛰어갔다.

혼자 남은 나타니엘은 자신에게 달라붙는 귀족들을 귀찮다는 시선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무슨 말을 했는지 주위에 있던 모두가 물러났다.

다이애나는 한 박자 늦게 잔을 들었다.

그리고 천천히 나타니엘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황태자 전하.”

그간 필사적으로 공부했던 예법을 기억해 내며 최대한 예의를 갖췄다.

무기질적인 붉은 눈이 다이애나를 향했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았지만, 생사가 달린 문제였다.


“이런 멋진 연회를 열어 주신 것에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은데, 아무리 찾아도 비 전하가 안 보이셔서 왔어요.”

일단 경계를 풀게 하는 것이 먼저였다.

제이나의 이야기를 꺼내자 나타니엘의 기세가 조금 가라앉았다.

다이애나는 곤란하다는 듯이 잔을 흔들었다.


“잔이 남는데……. 드려도 될까요?”

다이애나는 은근하게 몸을 숙였다가 눈을 살짝 치켜떴다.

나타니엘은 그런 다이애나를 가만히 내려다보더니 잔을 받아 들었다.


‘됐어!’

속으로 쾌재를 부른 다이애나는 건배하기 위해 잔을 들어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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