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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화. 신경 쓰지 마 (57/145)


57화. 신경 쓰지 마
2022.08.17.


나는 슬쩍 뒤로 빠져서 나타니엘이 있을 준비실로 향했다.

문을 열자 옷을 느슨하게 풀어 헤친 그가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눈을 감고 햇빛을 받고 있는 나타니엘의 모습에 나는 잠시 말을 잃었다.

하얀 옷을 입은 그의 모습이 성화에 나오는 고대 용의 모습과 정말 똑같아 보였다.


“제이나?”

나를 돌아본 그가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끄러지듯 내게 다가오더니 날 품에 안았다.

아직도 심장이 두근거렸다.

이대로 그가 하늘로 돌아가 버릴 것 같아 그의 옷을 꽉 쥐었다.


‘기분이 이상해.’

신이 테레사뿐 아니라 나타니엘의 운명도 바꾸길 원하는 걸까?

밑도 끝도 없는 공포가 턱끝까지 차올랐다.


“제이나? 괜찮나?”

나타니엘은 당황했는지 횡설수설하며 어쩔 줄 몰라 했다.

나는 말없이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그는 주변을 살피더니 조용히 내 등을 토닥였다.


“괜찮아. 내가 옆에 있잖아.”

그의 위로에도 나는 한참을 끌어안고 있었다.


 

* * *

수확제의 첫날 행사는 신의 존재에 대한 열띤 토론으로 변질되면서 끝이 났다.

나와 나타니엘은 우리를 붙잡으려는 사제들에게서 도망쳐 황성으로 향했다.


“나타니엘, 혹시 아까 이상한 말소리 못 들었어요?”

“말소리?”

“못 들었어요?”

고개를 끄덕이는 나타니엘을 보고 나니 내가 환청을 들은 걸까, 싶었다.


“왜? 무슨 소리를 들었는데 그래.”

“아, 별……거 아니에요. 그냥 제가 잘못 들었나 봐요.”

어째 내 말을 믿지 않는 것 같았지만, 나타니엘은 더 묻지 않았다.

괜히 양심에 찔린 나는 그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진짜 별거 아니었어요. 아무도 들은 사람도 없어서 환청을 들은 거 같다니까요.”

“그래도 궁금하다면 이상한 건가?”

나타니엘의 눈이 정직하게 이쪽을 응시해 왔다.

마치 내 감정이 전염된 것처럼 붉은 눈이 흔들렸다.

아무리 강대한 힘을 가졌더라도 불안이 깃드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불과 몇 시간 전에도 내 주변을 경계하던 사람인데…….

불안 탓인지 창백하게 질린 그의 뺨에 손을 올렸다.

나타니엘은 마치 강아지처럼 손 안쪽에 뺨을 비비고 입을 맞추었다.

그의 애교에 결국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운명을 바꾸라고…….”

“운명?”

나타니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거봐요, 진짜 별거 아니라고 그랬잖아요.”

“별거 아니라 해도 알고 싶었다.”

원작에서는 단 한 번도 신성력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


‘좋은 일일지도 몰라.’

나는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도달하는 과정이 다를 뿐 원작과 거의 비슷한 결과가 나온다고 실망하지 않았던가.

원작에도 언급되지 않았던 힘, 게다가 치유의 힘인 신성력이라면 분명 도움이 될 것이다.


“걱정하지 말아요. 분명 나쁜 일이 있진 않을 거 같아요.”

“어떻게 자신하는 거지?”

나타니엘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나는 그의 부드러운 입술에 입을 맞추고 속삭였다.


“당신과 함께라면 뭐든 할 수 있을 거 같거든요.”

나타니엘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부끄러운지 고개를 돌려 버린 그를 보며 소리를 내어 웃었다.

덕분에 우리를 괴롭히던 초조함은 알코올처럼 휘발되었다.

* * *

첫날 행사가 마무리되고, 화제는 황성의 플래티넘 홀로 넘어갔다.

특별한 사유가 없다면 오픈하지 않는 플래티넘 홀을 황제가 연회장으로 개방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망할 놈.’

나는 분주하게 하인과 하녀들을 부리며 속으로 황제를 욕했다.

뭐?

신성력이 발현된 기념으로 연회를 다른 홀에서 했으면 좋겠다고?

일은 본인이 안 한다 이거지.

심지어 황제의 뒤에서 기뻐하는 얼굴을 숨기지 않는 황후를 보자 더 화가 났다.


- 그래도 준비할 시간이 필요하지 않으시겠어요? 이렇게 된 거 수확제의 마지막 날에 연회를 여는 건 어떨까요, 폐하?

우아하게 손으로 입가를 가리며 황후는 그럴듯한 대안을 내어놓았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그렇게 시간을 주고도 본인 성에 차지 않으면 얼마나 괴롭힐지.


“아악!”

나는 들고 있던 테이블 배치도를 바닥에 집어 던져 버렸다.

매일 밤을 새워도 불가능에 가까운 일정이었다.

사람을 갈아 넣는다고 해도 한계가 있었다.

인력은 한정되어 있고, 해야 할 일은 너무 많았다.


“진정하세요, 비 전하.”

지친 얼굴의 카시안이 비틀거리며 내 어깨를 토닥였다.

나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나타니엘이 있었다면 좀 더 편했을 텐데.’

그는 신성력이 나타난 이후로 매일같이 신전에 불려 갔다.

무슨 테스트를 받아야 한다나 뭐라나.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갑자기 모습이 변할까 봐 걱정되었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면 안 되는데.

나타니엘의 정신 건강을 위해 저녁에 특별한 케이크를 준비시켜야겠다.


“저, 비 전하.”

“황녀님, 무슨 일인가요?”

아나이스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내게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그게, 메니실 영애가 몸이 안 좋아 보여서요.”

“테레사가요?”

그녀의 말에 나는 멀리서 업무를 지시하는 테레사를 보았다.

내 눈에는 평소와 다를 바 없어 보였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일단 물어보기로 했다.


“테레사, 혹시 몸이 좀 안 좋아요?”

가까이 다가가 묻자 테레사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그녀는 짧게 한숨을 쉬더니 변명하듯 속삭였다.


“열이 조금 있을 뿐이에요. 아마 오늘 집에 가서 쉬면 나을 거예요.”

“열이 있다고요? 그럼 당장 쉬어야죠.”

“일이 이렇게나 많은걸요.”

테레사는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녀의 말대로 해야 할 일이 많기는 했다.

하지만 아픈 사람을 붙잡고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이 정도 일은 저희가 알아서 할게요. 테레사는 좀 가서 쉬는 게 어때요?”

“괜찮아요. 그 정도로 아프지 않아요.”

꽤 완고한 테레사의 말에 나는 한숨을 삼켰다.

테레사도 한고집 해서, 본인이 바르다고 생각하는 일에서는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병은 초기에 잡아야 해요. 오늘 무리했다가 쓰러지면 어떻게 해요.”

보다 못한 아나이스까지 나서서 말리자 테레사에게서 고민하는 기색이 비쳤다.

나는 재빨리 테레사를 문 쪽으로 밀어냈다.


“푹 쉬고 내일 와요. 안 그러면 제가 화낼 거예요!”

 

* * *

결국 홀에서 쫓겨난 테레사는 가문의 마차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향했다.

선선한 가을이었지만, 아직 한낮의 햇볕은 뜨거웠다.

멀지 않은 거리였지만 생각보다 아주 아픈지 금방 지친 기색이었다.

테레사는 순간 눈앞이 핑 도는 것을 느꼈다.

이대로 넘어지는가 싶은 순간, 테레사는 눈을 질끈 감았다.


“아…….”

그녀의 몸을 누군가가 다급하게 붙들었다.


 
테레사는 눈을 뜨지 않아도 자신을 잡아 준 사람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한때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사랑했던 남자.

그리고, 모든 걸 알고 있다고 착각했던 남자.


“윈터스 소공작님.”

감았던 눈을 슬며시 뜨자 눈이 시리도록 반짝이는 결 좋은 은발이 눈에 들어왔다.

잔잔한 호수처럼 맑고 청아한 푸른 눈.

그리고 고집스럽게 다물린 입술과 예전보다 수척해진 뺨.


“불쾌했다면 미안.”

막시밀리안은 그녀를 부축해서 길가에 있는 벤치에 앉혀 주었다.

손에 닿았던 테레사의 몸이 평소보다 훨씬 뜨거웠다.

어디 아픈 건 아닐지 걱정되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들어 본 적 없는 딱딱한 어조.

게다가 시선조차 피하는 테레사의 모습에 막시밀리안은 목이 멨다.


“마차로 돌아가는 길이었어?”

“네.”

“장소를 알려 주면 내가 도와줄게. 부축 정도는 괜찮지?”

“제가 알아서 할게요.”

막시밀리안은 입술까지 파랗게 질린 테레사를 보았다.

저렇게 아픈데도 도움을 거절할 정도로 자신을 싫어한다는 사실에 숨이 막혔다.


“그럼 잠시만 기다려. 가서 사람을 불러오지.”

막시밀리안은 테레사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테레사는 멀리 사라지는 막시밀리안의 뒷모습을 보고 고개를 떨구었다.

테레사는 막시밀리안과 엮이기 싫었다.

이건 그에게 감정이 더 남아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한때 그녀의 삶의 중심이었던 남자와 같이 있는 것이 거북했다.

언제고 자신이 과거의 그때로 돌아갈 것 같아서.

다시 그에게 관심을 원하고, 사랑을 갈구하며 하루하루 타들어 가던 시절로.


‘다시는 그렇게 살지 않을 거야.’

누군가에게 맹목적으로 매달리지 않을 것이다.

상처받는 것도, 그 상처를 이겨 내는 것도 모두 지긋지긋했다.

멀리서 보았을 때는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평온했던 일상에 그가 돌을 던진 것 같아서 기분이 나빴다.


“테레사!”

급하게 뛰어오는 카시안을 보며 테레사는 애써 밝은 표정을 지었다.


‘더는 생각하지 말자.’

이제 그 사람과 자신은 아무 사이도 아니다.

어차피 다 정리된 사이였다.

이제 설렘도, 눈부심도 더 이상 없는.

카시안은 멍한 눈을 한 테레사의 뺨에 손을 대고 열이 없는 걸 확인했다.


“아파서 쓰러질 뻔했다며! 안 아프다니.”

화를 내는 카시안을 보곤 테레사가 살짝 웃으며 뺨을 붉혔다.


“미안. 여기까지 오게 해서.”

“미안하기는. 오늘은 진짜 푹 쉬어야 해. 비 전하께서 걱정하시더라.”

“그러게.”

몸이 아파서 마음이 약해진 거라고 생각하며 테레사는 카시안과 함께 자리를 떴다.

* * *

신전에서 돌아온 나타니엘은 짜증이 폭발하기 직전이었다.

제발 한 번만 와 달라고 매일같이 황제를 들볶아서 어쩔 수 없이 갔더니, 온갖 성물을 들고 종일 서 있게 하는 것이 다였다.

자신에게는 신력이 없다고 그렇게 말했는데도.

그는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황태자궁으로 돌아왔다.

새벽에 가까운 시간이라 제이나는 이미 잠이 들어 있을 것이 뻔했다.


‘오늘은 얼굴도 제대로 못 봤는데.’

그는 서둘러 침실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은은한 불빛이 방 안을 밝히고 있었다.

혹시나 그녀가 잠에서 깰까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기던 그의 눈에, 테이블에 뺨을 댄 채로 자고 있는 제이나의 모습이 들어왔다.


“제이나?”

저 불편한 자세로도 잘도 잔다. 나타니엘이 그녀의 뽀얀 뺨을 톡톡 건드리자 느리게 눈을 떴다.


“여기서 자면 입 돌아간다.”

제이나는 반쯤 잠에 취해 눈만 깜빡거렸다. 나타니엘은 손을 뻗어 그녀를 안아 올렸다.

제이나가 가슴팍에 뺨을 비벼 오자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왜 이렇게 늦게 왔어요.”

웅얼거리는 작은 목소리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아까까지만 해도 모든 걸 버리고 도망치고 싶었던 마음이 눈 녹듯 사라졌다.

제이나는 배시시 웃고는 작게 하품을 했다.


“하암, 맛있는 거 주려고 했더니 너무 늦어서 안 되겠네.”

“맛있는 거?”

“네에. 아까 주방장에게 부탁했거든요.”

나타니엘은 다시 졸기 시작한 제이나를 침대 위에 내려 두고 욕실로 향했다.

가볍게 씻고 나오자 제이나는 완전히 잠이 들어 있었다.

나타니엘은 그녀의 옆에 앉아서 이불을 올려 덮어 주었다.


“우웅.”

그 순간, 제이나가 휙 몸을 움직이며 여며져 있던 앞섶이 벌어졌다. 나타니엘은 움찔하며 뒤로 물러섰다.

지금껏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는 당혹스러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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