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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화. 불안한 전조 (55/145)


55화. 불안한 전조
2022.08.10.


내게 붙들린 나타니엘이 뒤를 돌아보았다.

눈동자 가득 내 모습이 담겨 있다. 애정에 듬뿍 젖은 내 모습은 낯부끄러울 정도로 사랑스러웠다.


“제이나?”

가까이 다가온 그가 손을 올려 조심스럽게 내 이마에 올렸다.


“열은 없는데.”

원래 이런 남자가 아니었다. 냉정하고, 타인에게 관심도 없고, 그리고…….


‘원작에서는 국정에도 거의 관심 없었는데.’

꽤 의욕적으로 국정을 돌보고 있는 지금과 달리 원작에서 그는 나랏일을 멀리했다.

어디론가 훌쩍 사라지기도 했고, 인간에 대한 혐오도 점점 커졌다.

유일하게 친구라고 부를 수 있었던 테레사가 죽자 환멸을 느끼고 인간으로서의 자신을 버렸다.


“피곤하면 들어가서 쉬는 게…… 제이나?”

나타니엘은 여전히 걱정되는지 이리저리 날 꼼꼼히 살폈다. 팔을 이리저리 움직이던 그가 양손으로 내 뺨을 감싸 쥐었다.


“열이 나나? 얼굴이 좀 빨간 거 같기도 하고.”

“아니요. 난…….”

날 위해 변한 것이다.

누구에게도 얽매이지 않던 그가, 원작에선 인간이 아닌 반신이 되어 자유로워졌던 나타니엘이.

가볍게만 여겼던 그의 마음이 무겁게 느껴졌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괜찮으니 더 걸어요.”

어쩌면 내가 그를 억지로 이 세계에 묶어 두고 싶어 하는 건 아닐까?

불안에 빠진 나를 모르는 나타니엘은 천천히 산책로를 따라 걸었다. 나는 그에게서 한 발짝 떨어져 뒤를 따랐다.

조금 깊숙한 곳에 다다르자 동그랗고 작은 공터가 나왔다.


“여기에는 왜요?”

나타니엘은 내 손을 잡고 그 가운데에 세웠다. 그리고 쭈그리고 앉아서 나뭇가지를 주워 내 발밑에 글자와 도형을 그리기 시작했다.


“오늘 헨리를 가르치고 나니까 알겠더군. 그대는 마법에 재능이 없어.”

“예…….”

너무 맞는 말이라 할 말이 없었다.

하긴 그 ‘쇼’를 하고 나서 꽤 노력했지만 내 빛 구슬의 크기는 조금도 커지지 않았다.

아까 슬쩍 봤을 때, 헨리 황자가 만든 빛 구슬의 크기가 내가 만든 것의 두 배쯤은 되어 보였다.


“한 십 년쯤 노력하면 헨리를 따라갈 수 있을지도.”

“그렇게 적나라하게 알려 주시니 참 감사하네요.”

그의 입으로 확인 사살을 당하니 꽤 속이 쓰렸다.

나타니엘은 재능이 없는 사람의 고통을 평생 모르겠지.

나는 불만을 속으로 삼키며 뚱한 얼굴로 투덜거렸다.


“이렇게 팩폭을 하는 이유가 뭐예요?”

“팩, 뭐?”

그가 모르는 단어를 함부로 썼다. 당황한 나는 재빨리 말을 돌렸다.


“그, 그래서 여기 온 이유가 뭐냐고요.”

“아! 마력이 거의 없는 그대를 위해 내가 생각한 게 있어.”

그렇게 말한 나타니엘이 내 양손을 마주 잡고 가슴 근처로 들어 올렸다.


“어.”

익숙한 기운이 내 몸을 휘감았다. 부드럽고 독특한 나타니엘의 마력이었다.

이제는 그 따끔거리는 감각에 익숙해져서 그렇게 아프지 않았다.


“뭐, 뭐 하는 거예요?”

“쉿.”

나타니엘은 눈을 감고 계속 내게로 마력을 흘려보냈다.

텅 비어 있던 몸을 채우는 것처럼 발끝에서부터 머리끝까지 서서히 그의 마력이 차올랐다.

처음 느껴지는 충만감이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마력을 공급해 주는 거야. 아무래도 그대가 갖고 있는 마력은 너무 적어서 제대로 된 마법은 사용 못 할 것 같거든.”

“비, 빛 구슬을 만들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런 거 말고. 정말 위험할 때 당신 몸을 지킬 수 있는 마법 말이야.”

그렇게 말하는 나타니엘의 얼굴이 꽤 진지했다.


“왜 갑자기 그런 말을 해요?”

“오늘 헨리가 지나가면서 조금 신경 쓰이는 이야기를 해서.”

“뭔데요?”

그는 잠시 턱을 쓸다가 마지못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황후가 사병을 키우고 있는 거 같더군.”

“사, 사병이요?”

“그래.”

헨리 황자의 말에 의하면 가끔 황후의 손을 잡고 놀러 가는 곳에 꽤 많은 숫자의 기사가 모여 있다고 했다.


“수도에서 멀지 않은 곳이더군.”

“하지만, 수도 근방에서는 그 어떤 사병을 키우는 것은 금지일 터인데…….”

말을 하고 나서야 나는 황후가 무슨 생각으로 사병을 키우고 있는지 깨달았다.

어쩌면 반역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 * *

늦은 오후의 햇살이 그녀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오렌지색으로 물든 머리카락이 작은 움직임에도 찰랑거리며 시선을 빼앗았다.

평소 같았으면 옆에 붙어서 머리카락을 가지고 장난쳤을지도 모르지만, 나타니엘은 얌전히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는 요즘 의기소침했다. 분명 윈터스 소공작이 시킨 대로 했는데 제이나가 자꾸 멀어지는 느낌이다.


‘착각인가?’

그의 집요한 시선이 제이나의 움직임을 좇았다. 제이나는 얼마 뒤에 있을 수확제의 식순을 살피며 필요한 것들을 확인하고 있었다.

쉴 새 없이 움직이는 작은 손을 따라 펜이 지휘하듯 우아한 선을 그렸다.

제이나는 집중했는지 살짝 입술을 물고 있었다.

그러다가 고개를 들어 나타니엘과 눈을 마주쳤다.

나타니엘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민망할 정도로 빤히 제이나의 얼굴을 보았다.

이미 지나가 버린 계절을 떠올리게 하는 짙은 녹색 눈동자에 두려움이 비쳤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나타니엘이 타인의 감정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그 누구보다도 동물적인 감각으로 상대가 느끼는 가장 말초적인 감정에는 예민하게 반응했다.

악의, 선의, 분노, 슬픔, 고통, 두려움과 같은 부정적인 감정들은 잘 알아차렸다.

평생을 최상위 포식자로 살아왔기에 신경 쓰지 않았을 뿐.


“제이나.”

“네?”

화들짝 놀라서 뒤로 물러서는 모습은 포식자 앞에 선 토끼 같았다.

귀엽긴 했지만 좋아하는 사람이 겁에 질린 모습은 나타니엘의 기를 꺾기에 충분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소공작의 의견대로 더 많이 표현하고, 얌전히 제이나의 말을 들어 주었던 거 같은데.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곰곰이 고민하던 그는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누군가에게 마음을 얻는다는 게 이렇게 어려운 일이라는 걸 나타니엘은 처음 알았다.

감정의 무게가 점점 커지고, 그것이 나타니엘을 짓눌렀다.


‘또 아파.’

소공작은 나타니엘에게 이 아픔도 사랑이라 말했다.

상대가 자신과 같은 마음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고통스러운 것이라고.


“무슨 일 있어요?”

가까이 다가온 제이나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나타니엘은 힐끔 그녀를 보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별거 아니야.”

제이나는 나타니엘의 옆에 앉아 그의 뺨에 손을 올렸다. 맞닿아 오는 조금 높은 체온과 부드러운 향기에 슬그머니 기분이 좋아졌다.

나타니엘은 고개를 숙여 그녀의 어깨에 이마를 댔다.


“역시 몸이 안 좋은 거 맞죠?”

아픈 건 아니지만 나타니엘은 가만히 있기로 했다.

지금처럼 걱정해 주는 제이나가 좋았다. 그는 조금 더 어리광을 부리듯 그녀의 품을 파고들었다.

제이나는 살짝 놀란 듯 몸이 굳었다. 하지만 곧 부드럽게 등을 토닥거렸다.

이 정도라면 충분하다고 생각했지만, 조금 욕심이 났다. 나타니엘은 고개를 들어 제이나의 뺨에 손을 올렸다.


“아.”

이전에도 닿아 본 적 있던 입술에 시선이 붙잡혔다.

닿고 싶다.

나타니엘은 살짝 몸을 일으켰다. 뺨을 만지던 손을 뒤로 돌려 제이나를 아래로 당겼다.

마침내 온기를 붙들었다.


 

* * *



“무슨 일 있어요?”

나타니엘은 시선을 돌리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 일도 없다는 뜻이었지만, 어쩐지 아닌 것 같았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옆에 앉았다.


“별거 아니야.”

아무래도 거짓말을 하는 것 같았다. 나는 손을 뻗어 그의 뺨에 올렸다.

평소보다 나타니엘의 체온이 높았다. 감기에 걸렸을 때보다는 낮았지만, 원래 체온이 낮았던 걸 생각하면 꽤 높은 편이었다.


“역시 몸이 안 좋은 거 맞죠?”

그러자 그가 몸을 숙여 내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놀라서 순간 몸이 굳었다.

하지만 곧 평정을 되찾고 그의 등을 토닥였다. 나타니엘은 짧게 앓는 소리를 내더니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몸을 숙인 채로 내 품에 안겨 있는 그의 모습에 묘한 만족감이 느껴졌다.

맹수를 길들인 듯한 고양감이 전신으로 퍼졌다.


“아.”

어느새 고개를 든 나타니엘이 손을 뻗어 온다. 뺨에 닿은 체온은 그의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뜨겁다. 뺨에서 목을 훑어 뒤로 넘어간 손이 상체를 눌렀다.

그와 숨결이 얽히는 순간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를 붙들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언제나 고요하고 침착한 나타니엘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격정적이다.

몇 번이고 입술이 붙었다가 떨어졌다.


“제이나.”

붉은 눈에 가득한 진득한 욕망에 숨이 막혔다. 이래도 괜찮은 걸까.


‘혹시 내가 그의 미래를 망가뜨리는 건 아닐까.’

이제는 정말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난 나타니엘이 가족으로든 연인으로든 내 곁에 남길 바랐다.

자유롭고 고고한 용의 후예를 내 곁에 두고 싶었다.


“당신의 끝이 어땠는지 알았다면 이렇게 고민하지 않아도 될 텐데.”

테레사의 운명을 바꾼 것은 그녀의 삶이 불행하게 끝이 날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타니엘은 달랐다. 어쩌면 이 시끄러운 세계를 떠나 버리는 게 훨씬 행복한 건 아닐까?

홀로 유유히 날아갈 나타니엘을 떠올리니 기분이 가라앉았다.


“무슨 소리야?”

“나타니엘은 날 선택하는 걸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어요?”

자신이 없었다.

완벽했다고 생각했던 계획은 거하게 틀어져 버렸고, 테레사는 여전히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다.

만일 내 욕심으로 나타니엘의 삶까지 위태로워진다면 그건 싫었다.

나는 그가 행복해졌으면 좋겠으니까.


“후회를 왜 하지?”

“그야 당신은 억지로 결혼한 거고…….”

내 이야기를 듣는 나타니엘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래, 내가 생각해도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후회할 거면 벌써 하고도 남았겠지.


“혹시 내가 좋아한다고 해서 부담되나?”

“네? 아니요. 그런 건 아니에요.”

부담된 적은 없었다.


‘오히려 좋으면 좋았지.’

무서울 것 없던 그가 가늘게 떨고 있었다. 나타니엘 역시 감정을 가진 사람이었고, 거절당하는 걸 두려워하고 있었다.

나는 그제야 내가 그에게 몹쓸 짓을 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나타니엘, 저는…….”

“말했잖아. 기다린다고.”

나타니엘은 내 말을 잘랐다. 아닌 척하고 있었지만, 어쩐지 아까보다 더 불안해 보였다.

마치 내 불안이 전염된 것처럼.


“바, 바쁠 테니 난 이만 가 볼게.”

나타니엘은 벌떡 일어나서 자리를 피하려 했다. 나는 재빨리 그를 붙들었다.

이렇게 그를 방치했다가는 큰일이 벌어질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나타니엘.”

붙잡힌 그가 어쩔 줄 몰라 하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겁에 질린 눈과 마주치는 순간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내가 무섭다고 날 지지해 주고 사랑해 주는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고야 말았다.


“난 괜찮아.”

“나타니엘.”

“그러니까 굳이 이야기하지 않아도…….”

그는 더듬더듬 말을 흐리며 자꾸만 뒤로 물러서려고 했다.

나는 도망치듯 뒷걸음치는 그의 손을 꽉 잡았다.

더는 내 감정을 모르는 척하면서 그를 상처 입히고 싶지 않았다.


“나도 나타니엘을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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