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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화. 자유로운 것 (54/145)


54화. 자유로운 것
2022.08.06.



 
그날 이후로 나타니엘은 사람이 달라진 것처럼 굴었다.

이렇게 상냥하고 다정할 수 있나 싶을 정도로.

나타니엘은 불쑥 포크에 찍힌 딸기를 눈앞에 들이밀었다.


“제, 제가 할게요.”

“먹기 싫은 건가?”

나타니엘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실망한 기색이 역력한 모습에 나는 크게 당황했다.

그리고 시선을 돌려 황후의 눈치를 살폈다.

그렇다.

나타니엘은 지금 날 엿 먹이고 싶은 건지 황후의 앞에서 이러고 있다.


‘부끄럽다.’

나는 재빨리 그의 포크를 뺏어서 딸기를 입에 넣었다.

그리고 방긋 웃으며 황후를 바라보았다. 떨떠름함이 고대로 느껴지는 황후의 눈빛에 등골이 오싹했다.


“오늘 이렇게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황후 폐하.”

나는 입꼬리를 끌어당기며 방긋 웃었다. 황후는 곧 표정을 바꾸며 찻잔을 들어 올렸다.


“곧 수확제고 하니 얼굴을 한번 봐야겠다고 생각했네.”

“저 역시 황태자비로 처음 참여하는 수확제이니 찾아뵈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 뒤로는 가벼운 이야기만 오갔다. 수확제에서 조심해야 할 일들이라든가, 식순 같은 것이 다였다.


‘말을 빙빙 돌리네.’

평소 같았다면 할 말만 끝내고 돌려보냈을 텐데, 오늘은 말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이쯤 되면 자존심 때문에 묻지 않는 것 같았다.


‘한 번쯤은 미끼를 먼저 물어도 되겠지.’

어차피 내가 짠 판이었으니 황후가 원하는 대로 흔들려 주기로 했다.


“그나저나 황후 폐하, 제가 작은 재주를 배워 왔는데 혹시 궁금하시지 않으신가요?”

잠깐이지만 밀리아 황후의 얼굴에 반가움이 스쳐 지나갔다.


“아. 그때 티 파티에서 마법을 부렸다면서. 나 역시 궁금하긴 하네만…….”

“제가 잠시 보여 드리겠습니다.”

나는 방긋 웃으며 손을 들어 올렸다. 그날 실패 이후 나름 필사적으로 연습해 두었다.


‘후.’

짧게 이미지를 상상하자 이번에는 어렵지 않게 빛 구슬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나타니엘이 도와주어서 만들었던 것보다는 작았지만, 그래도 완벽한 형태를 만들고 있었다.


“비록 이게 한계지만요.”

황후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녀의 표정에서 놀라움과 분노 같은 감정들이 엿보였다. 왠지 무서워져 손을 뻗어 나타니엘의 손을 슬쩍 잡았다.

그가 손을 꽉 맞잡아 주자 안도감이 들었다.


“대체, 그걸 어떻게…….”

“제가 가르쳤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나타니엘은 손깍지를 끼어 왔다. 어쩐지 뺨에 열이 올라왔다.


“그, 그렇군.”

황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부탁하자니 자존심이 상할 것이다. 일단은 차분히 기다리기로 했다.

굳은 표정의 그녀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혹시 헨리도 그런 걸 만들 수 있을까?”

“아마도요.”

나타니엘은 고민도 하지 않고 대답했다. 그러자 황후의 얼굴이 더 파리하게 질렸다.

자존심이냐, 아니면 아들의 미래냐.

분명 둘을 올려놓고 저울질하고 있을 것이다.

난 쐐기를 박기로 했다.


“저흰 약속이 있어서 물러나겠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나타니엘의 손을 잡아당겼다. 순순히 일어난 그가 지나치게 간격을 좁혀 찰싹 달라붙었다.

부담스럽지만 그렇다고 밀어낼 수도 없었기에 어색하게 웃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잠, 잠깐!”

물었다.

나는 신난 표정을 숨기며 뒤를 돌아보았다. 살짝 떨고 있는 밀리아가 힘겹게 입술을 열었다.


“혹시 시간이 된다면 헨리도 가르쳐 주었으면 하는데.”

“마법은 그렇게 단시간에 배울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매일같이 제게 배워야 하는데 괜찮겠습니까?”

한마디로 거의 매일 이쪽으로 헨리를 보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타니엘을 불신하는 황후가 과연 어떤 선택을 할지 궁금했다.


“그, 그 정도는 할 수 있네.”

생각보다 더 적극적이어서 수업 시수와 시간도 금방 합의할 수 있었다.


“그럼 매일 열두 시에서 세 시까지 황태자궁으로 보내십시오.”

나타니엘은 그렇게 말하고는 미련 없다는 듯 궁을 빠져나왔다.

황태자궁에 반쯤 다다랐을 때쯤, 내가 아직 그의 손을 잡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잠깐만요, 나타니엘.”

“왜?”

뒤를 돌아본 그가 뭐가 문제냐는 듯이 나를 보았다.


“소, 손 좀…….”

“손이 왜?”

정말 아무렇지 않은 듯 보였다.

나는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고민했다.


“그러니까, 이런 건 단둘이 있을 때만 하는 거예요.”

“뭘?”

“아까처럼 손을 잡는다든가, 그런 거요.”

“손?”

“네.”

그는 잡고 있는 손을 들어 올려 휙휙 돌리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더 많이, 자주 표현하라고 했다.”

너무 맞는 말이라서 할 말이 없었다. 게다가 우리는 부부니까 잘못도 아니었다.


‘그렇지만 부끄럽다고!’

내가 어쩔 줄 몰라 하는 걸 알아차린 걸까.

나타니엘이 풀이 죽은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 이러는 게 싫은 건가?”

“아, 아니요! 전혀요. 싫은 게 아니라……. 그러니까…….”

“그럼?”

차분히 내가 하는 말을 기다리는 나타니엘이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예전 같았으면 당장 대답하라고 협박하고도 남았을 텐데.

덕분에 나는 차분히 내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남들한테 보여 주기 부끄러우니까 이런 건 저랑 단둘이 있을 때만 해요.”

“흐음.”

마음에 안 드는지 턱을 만지작거리던 나타니엘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가 원한다면.”

그러고는 잠시 놓았던 손을 다시 잡았다. 붉은 눈이 부드럽게 휘어지고 단정한 입술이 호선을 그리며 웃었다.

장난기 가득한, 가끔 보여 주는 웃음.


“지금은 단둘이니까 잡고 가도 되지?”

순수하게 기뻐하는 그의 모습에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심장 소리가 너무 크게 들리고 있는 것 같다.

* * *

며칠 뒤.

나와 나타니엘, 그리고 아나이스까지 응접실에 모였다.


“황자 전하께서 찾아왔습니다.”

“들어오라 해.”

나타니엘은 무심한 얼굴로 말했다. 곧 문이 열리고 천사처럼 귀여운 소년이 문틈 사이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누님!”

“헨리.”

아나이스를 발견한 헨리가 활짝 웃으며 달려와 그녀의 품에 안겼다.


“오랜만이에요, 누님.”

“그간 잘 지냈어?”

품에 안긴 채로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아나이스와 헨리는 매일같이 보던 사이였지만 황후와 아나이스의 사이가 나빠지면서 둘은 한 달에 한두 번 정도만 만날 수 있었다.

그러니 저렇게 애절할 수밖에.


“아, 안녕하세요, 형님, 비 전하.”

아나이스에게 마음껏 어리광을 피운 헨리가 꾸벅 인사를 했다.


“오랜만에 봬요, 황자 전하. 그간 잘 지내셨어요?”

“네. 걱정해 주신 덕분에요!”

생글생글 웃고 있는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꼭 껴안아 주고 싶을 정도다.

헨리는 고개를 돌려 나타니엘을 바라보았다. 아마 마법을 배우러 왔다고 생각할 터이니 벌써 준비를 하려는 것 같았다.


“점심은?”

“아, 아직이요.”

“그럼 점심부터 먹도록 하지.”

나타니엘이 딱딱하게 말하는 탓에 헨리가 조금 위축된 것이 보였다.

나는 슬쩍 그들 사이에 끼어들어 웃어 주었다.


“어서 가요.”

우리는 자리를 옮겨서 식당으로 향했다. 안에는 아나이스에게 조언을 받아 신경 쓴 요리가 가득했다.


“전부 좋아하는 것들이에요!”

눈을 반짝거리면서 식탁 위에 있는 요리를 쓱 훑어본 헨리는 재빨리 의자에 앉았다.

우리 역시 식탁에 앉아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여럿이서 함께하는 식탁은 시끌벅적했다.

주로 헨리가 신이 나서 방긋방긋 웃는 모습에 나와 아나이스가 반응하는 것뿐이었다. 그래도 이상하게 가슴 한쪽이 간질간질했다.


“잘 먹었습니다!”

후식으로 나온 타르트까지 야무지게 챙겨 먹은 헨리가 입술을 우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곧바로 달콤한 꿀차를 마시고 있는 나타니엘의 다리에 매달렸다.


“어서 마법을 배우고 싶어요.”

“어머, 황자 전하. 마법이 너무 배우고 싶으신가 봐요?”

먼저 공부를 하고 싶어 하다니, 기특하기도 해라.

귀엽게 웃으며 대롱대롱 매달리는 헨리를 보며 흐뭇하게 웃고 있는데, 아이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이 튀어나왔다.


“그래야 어머니께서 기뻐하실 테니까요!”

순간 나와 나타니엘의 눈이 마주쳤다. 분명 헨리의 상태가 정상은 아니라는 건 알았지만, 지금 함부로 무어라 얘기할 수는 없었다.


“그래.”

나타니엘은 씁쓸한 표정으로 헨리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아이의 손을 잡고 정원으로 나갔다.


“잘하고 와요!”

그들을 배웅하고, 아나이스마저 돌려보낸 뒤 나는 서재로 올라갔다.

수확제가 다가오면서 나 역시 해야 할 일이 꽤 있었기 때문이다.

서류를 처리하고, 그날 동선을 정리하고 나자 어느새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으헤헤헤!”

창밖에서 들리는 유쾌한 웃음소리에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향했다.

내려다보이는 정원에서 헨리와 나타니엘이 마주 앉아서 책을 보고 있었다.

가끔 장난도 치면서 웃는 모습이 딱 그 나이 때의 아이처럼 느껴졌다.


‘형제는 형제구나.’

얼핏 보면 완전히 상극이지만, 웃는 모습이라든가 행동들이 묘하게 닮았다.

나는 흐뭇한 얼굴로 둘을 구경하다가 시간을 확인했다.


“아, 이런.”

보내기로 한 시간이 조금 지났다.

나는 허겁지겁 계단을 내려가 정원으로 향했다.

내가 가까이 다가가자 헨리의 얼굴이 눈에 띄게 시무룩해졌다.

아마도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듯했다.


“황자 전하, 즐거우셨나요?”

“네에…….”

아쉬운 듯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손을 꼼지락거리는 모습을 보자 괜히 미안해졌다.

나타니엘은 그런 헨리의 머리를 손으로 헝클어뜨렸다.


“오늘 배운 거 복습하고.”

“네, 네!”

“내일 보자.”

나타니엘은 어쩐지 악당처럼 웃고는 자리를 떴다. 멀리서 황자를 기다리고 있던 황후 측 시녀들이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감사합니다, 황태자비 전하.”

그들은 눈이 마주치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황자의 손을 잡고 재빨리 빠져나갔다.


“안 가나?”

“아, 가…… 가요!”

정신을 차린 나는 나타니엘의 곁으로 달려갔다.

그의 손이 가볍게 허리를 감쌌다.

얼마 전의 나였다면 놀라서 호들갑을 떨었겠지만, 적응의 동물답게 이제는 괜찮았다.


“잠깐 산책이라도 할까?”

“안 바빠요?”

“거의 다 끝냈어.”

결혼하고 나서 깨달은 건, 나타니엘은 의욕은 없지만 일은 열심히 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처리 속도도 빨라서 남들보다 몇 배는 많은 일을 처리했다.


“불공평해요.”

“뭐가?”

“전 몇 시간씩 걸려서 처리하는 일을 나타니엘은 간단히 처리하잖아요.”

내가 가볍게 투덜거리자 나타니엘이 작게 키득거렸다.


“도와줄까?”

“아뇨, 제 일이니까 제가 할게요…….”

훅 가까워진 그의 얼굴에 심장이 툭 떨어지는 줄 알았다. 나는 손으로 조금 뜨거워진 뺨을 만지며 그와 함께 걸었다.

산책로의 초입.

청량한 바람이 그의 머리칼을 흐트러뜨렸다. 단풍이 들어 형형색색인 숲을 배경으로, 나타니엘의 존재감이 두드러졌다.

먹물처럼 까만 머리카락이 마치 자유를 원하듯 휘날렸다.

입고 있는 얇은 셔츠가 바람에 따라 이리저리 모양을 달리했다.


‘아.’

그때 깨달았다.

어째서 나타니엘을 보며 내가 불안해하는지.

그는 자유가 어울렸다.

그리고 자유로울 때 더 아름다웠다.

나타니엘은 등을 돌려 숲 사이로 들어갔다. 이대로 영원히 사라질 것 같아 불안감이 온몸을 지배했다.

나는 손을 뻗어 그의 옷을 붙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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