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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화. 원치 않은 상담 (53/145)


53화. 원치 않은 상담
2022.08.03.


절대 내가 만든 게 아니었다.

속으로 당황했지만, 모르는 척 웃으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다들 놀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내가 만든 빛 구슬만 보고 있었다.


“마석을 사용한 건가요?”

“아니요. 제 손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런 걸 보여 줄 거라 미리 언질을 주지 않은 탓에 테레사와 카시안도 놀란 표정이었다.


“그럼 이만 갈까요?”

그리고 그들을 데리고 어두워진 정원을 천천히 빠져나왔다.

이제 문제는 정확한 타이밍에 없어지게 만드는 거였다.


‘내가 만든 것도 아닌데…….’

가능할까 걱정스러웠다. 슬쩍 주변 눈치를 보다가 서서히 손을 오므리자 구슬 크기도 자연스럽게 줄어들었다.

구슬이 완전히 사라지자 나는 방긋 웃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럼 다들 돌아가도록 하세요.”

날 향한 시선들에 놀라움과 호기심이 섞여 있었다. 분명 오늘 본 것을 다들 이리저리 퍼뜨릴 것이다.


‘좋아. 계획대로야.’

오늘의 수확에 만족한 나는 가뿐한 발걸음으로 성으로 돌아갔다.

* * *

그들이 완전히 빠져나가고, 제이나가 손을 거둬들이는 걸 확인한 나타니엘이 빛 구슬을 사라지게 만들었다.

잔뜩 긴장해서 뻣뻣해진 등이 풀어졌다. 그녀는 다른 여자들에게 뭐라 뭐라 말하고는 콧노래를 부르며 궁으로 돌아갔다.

멀리 사라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던 나타니엘은 길게 한숨을 쉬었다.


“지금 내가 뭐 하는 건지.”

나타니엘은 자신의 마음을 알 수 없었다.

그녀를 보면 가슴이 답답하고 속이 쓰렸다. 특히 제 앞에서 황궁에 숨어들어 온 여자를 두둔할 때는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서 뭐라 말할 수도 없었다.


‘좋아하는 게 아닌가?’

원래 사람을 좋아하면, 같이 있기만 해도 좋고 무슨 말을 해도 예뻐 보인다고 들었는데.

종종 보고 있으면 화나고, 가슴이 미어질 정도로 따끔거리는 경우가 있었다.

감정을 책으로만 배운 나타니엘로서는 자신이 느끼는 것이 대체 어떤 감정인지 알 수 없었다.

친구도, 측근도 없는 그는 혼자 고민할 뿐이었다.

멀리 침실 불이 켜지는 것을 본 나타니엘은 길게 한숨을 쉬었다.

지금 같은 상황에 부부 사이가 안 좋다는 소문이 돌면 좋을 게 없다는 걸 알았다.


‘누군가 정답을 알려 준다면 좋을 텐데.’

속으로 투덜거리며 그는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천천히 길을 따라 빠져나오던 나타니엘은 낯선 인기척에 자리에 멈춰 섰다.


“누구냐.”

낮은 관목이 잠깐 흔들렸다.

조금 뒤에 나타난 사람은 다행히 나타니엘이 아는 이였다.


“윈터스 소공작?”

“오랜만에 뵙습니다, 황태자 전하.”

막시밀리안이 머쓱한 표정으로 뒷머리를 긁으며 앞으로 나왔다. 주변을 슥 살핀 그가 짧게 한숨을 쉬었다.


“여긴 무슨 일이지?”

“아. 폐하께서 부르셔서 궁에 왔다가 잠깐 들렀습니다.”

제이나는 오늘 종일 바빴으니 그녀를 만나러 온 것을 아닐 거다. 나타니엘은 찬찬히 그를 보다가 제이나의 옆에 있던 테레사를 떠올렸다.


“그 여자를 보러 왔군.”

“아.”

막시밀리안은 입술을 살짝 문 채로 고개를 돌렸다.

본인도 부끄러운 걸 아는 듯 보였다. 그러나 나타니엘은 모르는 척해 주기로 했다.

일전에 제이나가 한탄하듯 뒤늦게 감정을 깨달은 제 오라버니 걱정을 했던 것이 떠오른 것이다.


‘알면 또 걱정하겠지.’

인사를 했으니 방으로 돌아가려던 나타니엘을 막시밀리안이 붙들었다.


“이건 제이나에게 비밀로 해 주십시오.”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다.”

나타니엘은 가볍게 그의 손을 털고 가던 길을 가려 했다. 하지만 다시 한번 막시밀리안이 그를 붙들었다.


“뭐야?”

타인의 접촉이 달갑지 않은 나타니엘은 단번에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막시밀리안은 움찔하며 놀랐지만 곧 그 기색을 지웠다.


“제 동생에게 잘 대해 주어서 감사합니다.”

“뭐, 내 부인이니 잘해 주는 것뿐이다.”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는 그의 태도에 막시밀리안은 눈을 가늘게 떴다.

무언가 이상했다.

둘의 접점이 많지는 않았지만, 막시밀리안 역시 나타니엘의 악명에 대해 못 들은 것은 아니다.

그가 얼마나 여자, 아니 인간에게 냉정한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제이나와 그런 관계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의심했다. 그가 정말로 진심인지.


‘이제 보니 진심인 거 같기도 하고.’

그래서 그런지 조금 마음이 놓였다. 설령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아닐지라도 위로하고 기댈 수 있는 관계라면 마음을 놓을 만하다고 생각했다.


“앞으로도 제이나를 잘 부탁합니다. 듣기 좋은 말을 하는 아이는 아니지만, 누굴 속이고 못된 짓을 하진 않습니다.”

나타니엘은 자신보다 제이나에 대해 더 잘 아는 것처럼 구는 막시밀리안이 영 마음에 안 들었다.


“그대에게는 어땠는지 모르지만, 내게는 잘해 준다.”

막시밀리안은 나타니엘의 대답에 그가 제이나에게 완전히 빠졌다고 확신했다.

자기가 말한 상황이 마음에 들었는지 나타니엘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


“그렇게 생각해 주시다니 감사할 뿐입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몇 번이고 부탁의 말을 남기며 허리를 숙인 뒤, 막시밀리안은 정원을 빠져나가려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나타니엘이 그를 붙잡았다.

나타니엘의 얼굴은 아까와 달리 꽤 진지했다.


“무슨…… 일이신지요.”

“소공작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다.”

막시밀리안은 긴장감에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마른침을 삼킨 그가 말했다.


“하문하시지요.”

“그대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어떻게 확신했지?”

그가 물어 온 것은 상상도 못 한 것이었다. 막시밀리안은 눈앞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꼈다.

아무리 동생의 일이라지만, 제이나의 남편과 연애에 관한 얘기를 하고 싶진 않았다.

일종의 심리적 거부감이었다.

하지만 이미 붙들렸으니 도망칠 방법도 없었다. 막시밀리안은 흩어지는 집중력을 끌어모아 겨우 입을 열었다.


“어떤 것 때문에 그리 말씀하시는 건지요?”

“제이나가 날 봐 줬으면 좋겠지만, 가끔 그녀가 하는 걸 보면 화가 난다. 특히 내 앞에서 다른 여자를 감쌀 땐 기분이 아주 나쁘더군.”

그때의 일이 떠오른 나타니엘의 얼굴이 험악하게 구겨졌다. 하지만 전후 사정을 잘 모르는 막시밀리안으로서는 난감할 뿐이었다.


“상황을 좀 더 정확히 알려 주시면 도움을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막시밀리안의 말에 나타니엘은 얼마 전 있었던 일을 알려 주었다.

후처 자리를 노리고 들어온 여자와 그녀를 처벌하려던 나타니엘을 막은 제이나까지.


‘이건 좀…….’

물론 제이나의 의도는 알 것 같았다.

나타니엘이 강경하게 두 번째 부인을 맞이하는 걸 거부한다는 걸 막시밀리안 역시 알고 있었다.

귀찮아서인 줄 알았더니 정말로 제이나를 좋아해서였다.

그런데 제이나가 자기 앞에서 질투조차 안 하고 다른 사람 편을 들었으니 그가 화가 날 만했다.


“그러니까, 내가 정말 그녀를 좋아하는 건지 확신이 없군.”

“아닙니다. 분명 좋아하고 계십니다.”

막시밀리안의 담백한 어조에 나타니엘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화가 났던 건, 어쩌면 제이나가 황태자님과 같은 마음이 아니라고 생각해서가 아닐지요.”

조심스러운 말이었지만 나타니엘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그는 단 한 번도 제이나가 자신과 다른 마음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두, 두 분은 부부 아닙니까. 서로 천천히 다가가면 됩니다.”

막시밀리안은 충격을 받았는지 얼굴이 창백해진 나타니엘을 보고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잠깐 안심하는 듯하던 나타니엘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어떻게 하면 되는 거지, 그건.”

막시밀리안은 어금니를 꽉 물며 영업용 미소를 띠었다. 매제의 연애 상담이라니.

하지만 이미 빠져나가기에는 틀렸다.


 

* * *

얼마 지나지 않아 대어가 미끼를 물었다는 소식이 들렸다.


“황후가 갑자기 점심 식사 자리에 초대하던데.”

나타니엘이 꺼림칙한 표정으로 내뱉는 말에 나는 웃음이 나왔다. 역시 이 방법이 통할 줄 알았다.


“제가 말했죠? 분명 연락 올 거라고.”

“그러게.”

나타니엘은 여전히 얼떨떨해 보였다. 몇 번 서류를 뒤척이다가 무언가 곰곰이 고민하는 표정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때 날 도와준 건 나타니엘이었겠지?’

그 후로 다시 바빠서 깜빡하고 있었다.


“그날 저 도와준 거 나타니엘 맞죠?”

내 질문에 어깨가 미세하게 움찔하는 것이 보였다.

벌써 몇 달은 부딪치며 살다 보니 작은 변화에도 그의 생각을 예상할 정도는 되었다.


“맞죠?”

내 질문에 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 세상에.

말 안 듣던 강아지가 처음으로 ‘앉아!’에 답한 기분이다.


“고마워요. 도와줘서.”

사실 서먹서먹해서 나타니엘이 도와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부끄러운지 고개를 돌리는 모습도 귀엽다. 나는 그가 앉아 있는 소파로 향했다.


“요즘 왜 이렇게 잘해 줘요? 뭐 먹고 싶은 게 있나?”

나는 슥슥, 나타니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생각보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손가락 사이를 간지럽혔다.


“먹는 걸 위해 그런 거 아니다.”

화가 났는지 뺨과 귀가 살짝 붉어졌다. 꽤 귀여워서 자꾸 더 괴롭히고 싶어졌다.


“왜요? 부끄러워서 그래요?”

“자, 장난치지 마.”

그가 손목을 덥석 쥐었다. 은근히 강한 힘에 나도 모르게 얼굴을 찡그렸다.


“아, 미안.”

나타니엘은 깜짝 놀라서는 손을 거둬들이고 조심스럽게 내 팔을 살펴보았다.

마치 유리 공예품을 다루듯 조심스러운 손길이 간질간질했다.


“어디 다치진 않았어?”

“괘, 괜찮아요.”

괜히 부끄러워서 손을 뒤로 숨기고 시선을 돌렸다. 그날 입을 맞추고 난 뒤로 이런 미묘한 분위기가 잡히는 일이 늘어났다.

비록 우리가 부부긴 하지만, 분명 적당히 거리를 둔 채 결혼 생활을 유지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감정이 깊어져 가는 느낌이 들었다.


“아.”

힐끔 그의 얼굴을 보았다가 눈이 마주치는 바람에 나도 모르게 작게 소리가 새어 나왔다. 나타니엘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내가 싫은 건가?”

“네?”

나타니엘의 질문에 반사적으로 말이 튀어 나갔다.

여전히 굳은 얼굴의 그가 우물거리다가 천천히 말을 이어 나갔다.


“난 그대가 좋다고 했던 것 같은데, 대답이 없어서.”

“헉.”

나타니엘이 잊고 있던 이야기를 꺼낸 탓에 머릿속이 하얗게 질렸다.

그가 먼저 그 일에 관한 얘기를 꺼낼 줄은 꿈에도 몰랐다.


“어, 음…….”

사실대로 말하자면 제대로 고민해 본 적이 거의 없다.

여러 가지 일도 있었고, 무의식적으로 회피하고 있었다.


“생각해 본 적 없나 보군.”

“미, 미안해요.”

“사과받으려고 물은 것 아니니 그렇게 굳을 필요 없다.”

그렇게 말하면서 일어나는 나타니엘의 얼굴에서는 옅은 실망감이 보였다. 하지만 곧 표정을 지운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가만히 내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어차피 시간은 많으니까.”

작게 중얼거리며 내 머리카락을 귀 뒤로 쓸어 넘겼다.

잠깐 닿았다 떨어진 것뿐인데, 귀가 뜨거울 정도로 화끈거렸다.

내려다보는 눈에 내가 모르는 감정이 일렁거리고 있었다.


“우린 부부니까.”

나타니엘이 사르륵 미소를 지었다. 눈을 반으로 곱게 접으며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었다.

나는 멍하니 나타니엘의 얼굴을 보았다. 설마, 설마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메아리를 쳤다.

그럴 리가 없다.

우리는 그냥 평범한 정략결혼을 한 사이니까…….


“기다려 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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