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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화. 남자의 질투 (52/145)


52화. 남자의 질투
2022.07.30.


못 보던 하녀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그 옆에 나타니엘이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금방이라도 사람을 죽일 것 같은 살기에 아무것도 모르는 나조차 얼어붙었다.


“지, 지금 뭐 하는 거예요!”

형형하게 빛나는 붉은 눈동자가 내 쪽을 향했다. 순간 움찔했지만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아무렇지 않게 걸어가서 나타니엘의 손을 잡았다.


“나타니엘.”

그의 시선이 하녀 쪽으로 떨어졌다. 덜덜 떨고 있는 여자는 황태자궁에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이었다.


‘옷차림이 뭔가 좀 이상한데?’

기본적으로 나눠 주는 유니폼이라고 하기엔 재질이 지나치게 좋았다.

게다가 팔찌나 목걸이까지.

대충 상황이 파악되었다.

어떤 미친 가문에서 기어코 나타니엘의 말을 무시하고 여자를 하녀로 둔갑시켜 들여보낸 것이다.


“제가 처리할게요.”

“그대가?”

“네. 황태자궁 내부의 일이니 제가 처리하는 게 맞죠.”

여자를 보던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다른 하녀에게 여자를 지하 감옥에 구금하라고 명했다.

그리고 나타니엘을 끌고 나와 침실 옆에 있는 작은 응접실로 데려갔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야기해 줄 수 있어요?”

“방을 치우려고 들어오는 줄 알더니 갑자기 옷을 벗으려 하더군.”

“오…….”

그의 말에 잠시 말을 잃었다.

그렇게 노골적으로 나왔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분명 그때 가만두지 않겠다고 했던 것 같은데, 다들 날 우습게 생각하나 봐.”

형형한 살기에 나도 모르게 목을 움츠렸다. 이러다가 큰일을 벌일까 봐 걱정이 들었다.

일단 그의 화를 가라앉히는 게 먼저였다.


“어떤 벌을 내리시기를 바라요?”

“그때 말한 그대로 해 주어야지. 여자는 사형, 가문은 대를 끊어 버리겠다.”

한 가문을 멸문시키겠다는 소리에 그의 손을 덥석 붙들었다.

원작에 의하면 그가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은 귀족파와 척을 지는 것이었다. 원작에서 그의 입지가 좁아지게 된 결정적인 원인이었으니까.


“그건 너무 과한 처사 같아요.”

“감히 황태자궁에 멋대로 침입하고 내가 직접 내린 명을 어겼는데 당연히 그 정도는 해야지.”

물론 그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하지만 너무 과한 처사라는 생각은 바뀌지 않았다.


“아까 이 일의 처리는 제게 맡기겠다고 하셨잖아요.”

“그대는 내가 말한 대로 처리하지 않을 거잖아.”

“맞아요. 그렇게 대단한 일도 아니고 전 적당한 선에서 처리할 거예요.”

갑자기 사위가 고요해졌다.

나타니엘 등 뒤, 창문으로 해가 넘어가면서 그의 얼굴 위로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졌다.

그래서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눈을 찡그리며 그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확인하려고 애를 썼다.


“마음대로 해.”

냉담한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몸이 굳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내 옆을 지나갔다.

순간 이대로 보내면 안 되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잠깐만요!”

반사적으로 그의 팔을 붙들었다.


“왜?”

“네?”

“마음대로 하라는데 왜 붙잡아.”

내려다보는 시선에 나도 모르게 뒤로 물러섰다. 나타니엘은 옷자락을 툭툭 털고 그대로 방을 나가 버렸다.


“뭐, 뭐지.”

살짝 마주친 시선에서 실망이 그대로 느껴졌다.


‘어째서?’

아까 살기로 가득했던 모습을 봤을 때보다 더 당황스러웠다. 이유를 알 수 없으니 더 그랬다.

나는 그 자리에서 한참이나 그 이유가 뭘지 고민했다.


 

* * *

다음 날 아침.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꾹꾹 누르며 아침 식사를 위해 테이블에 앉았다.

간단하게 먹을 생각으로 노릇하게 구워진 빵에 잼과 버터를 바르고 치즈를 올렸다.

한 입 베어 물면서 텅 빈 반대편 의자를 바라보았다.

어젯밤, 나타니엘은 잠을 자러 나타나기는 했다. 그리고 의무적으로 마법을 알려 주고 곱게 누워 잠을 청했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루틴이었지만, 평소와 달랐다.

표정이라든가 분위기 같은 것이.


“하아…….”

긴가민가했는데, 아침에 일어나면서 확신하게 되었다. 원래대로라면 나보다 늦게 일어났을 나타니엘이 이미 자리에 없었으니까.

나는 포크로 구운 소시지를 쿡 찌르며 어제의 일을 회상했다.


“내가 뭘 잘못한 거지?”

아무리 생각해도 잘못한 게 없는 것 같았다.


“하아…….”

일단 얼른 식사를 마치고 몰래 들어온 하녀를 만나 봐야겠다.

* * *

나는 식사를 끝내고 옷을 갈아입은 뒤 지하 감옥으로 내려갔다.

습기로 축축한 지하에 있는 취조실 문을 열자 어제 끌려온 하녀가 의자에 포박되어 있었다.

긴 금발에 녹색 눈을 가진 여자는 고개를 들어서 날 노려보았다.


‘뭐야. 나랑 비슷하게 생겼잖아.’

기사들이 우악스럽게 그녀의 얼굴을 탁자에 박으며 소리쳤다.


“어디서 감히 고개를 들어!”

“되었네. 자네들은 이만 나가 보게.”

“하지만!”

“어차피 상대는 묶여 있고 대단한 힘을 가진 것도 아니지 않나.”

마법을 쓸 줄 아는 것도 아니고, 날붙이를 갖고 있지도 않을 테니 평범한 여자와 다를 바 없었다.


“나가 보도록.”

“예.”

강권에 마지못해 기사들이 문밖으로 나갔다. 단둘이 남자 나는 그녀의 반대편에 앉았다.


“이름도 아직 안 밝혔다는데.”

“이름을 밝히면 전부 죽일 거 아닙니까?”

역시. 알고도 들어온 것이 맞았다.

아마 가문에서 가장 세가 약한 방계를 억지로 밀어 넣었겠지.


“난 죽일 생각까진 없어. 황태자 전하는 좀 다를지 모르지만.”

내 말에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제 그녀가 더 이상 갈등하지 않도록 쐐기를 박아야 했다.


“전하께서는 나처럼 당신을 상냥하게 대하지 않을 거야. 마법으로 정신을 망가뜨려서라도 원하는 것을 얻어 가려 할지도 모르지.”

이럴 땐 나타니엘의 악명이 도움이 되었다.

여자는 그가 그동안 저지른 일들을 떠올렸는지 덜덜 떨기 시작했다.


“내게 먼저 말하는 편이 좋을 거야. 그게 당신에게도, 당신이 지키려는 사람에게도 도움이 될 테니까.”

그녀는 입술을 짓씹으며 한참을 고민했다. 나는 차분히 기다려 주었다.


“정말, 절 지켜 주실 거죠?”

“물론이에요.”

결국, 그녀는 자신의 이름과 이곳까지 오게 된 경위를 상세하게 진술하기 시작했다.

여자의 이름은 나디아 프로스트.

프로스트 남작가는 귀족가라고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찢어지게 가난했다고 한다.

그런 나디아를 어느 날, 친척이 좋은 혼처가 있다며 수도로 초대했다고.


“막상 와 보니 황태자궁에 몰래 들어가라 했어요. 그러지 않으면 가족을 가만두지 않겠다고…….”

“흐음.”

결국 협박을 당해 황태자궁까지 들어왔다는 것이다.

나디아의 사연을 듣고 나니 상대가 꽤 철저하게 준비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진술 외에는 그 어떤 증거도 남기지 않았으니.


‘나타니엘이 죽이지 않아서 다행이야.’

그래도 예전보다 많이 유해진 것 같았다. 나와 처음 만났을 때는 정말 죽일 것처럼 굴었었는데.

왠지 뿌듯해져서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표정 관리하자.’

나는 심문을 마무리하기 위해,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단속하며 나디아에게 집중했다.

* * *

며칠 뒤, 드디어 기다리던 시간이 찾아왔다.

나타니엘에게 마지막으로 마법을 점검받고 싶었는데, 역시나 오늘도 그가 보이지 않았다.


‘맨날 서재에만 있던 사람이 요즘 왜 이렇게 안 보이는 거야.’

남들에게 첫선을 보이는 거라 그런지 불안했다.


“비 전하, 곧 티 파티 시간입니다.”

문을 두들기고 들어온 카시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일 있으세요?”

“아니. 별일 없는데. 왜?”

“표정이 안 좋으셔서요.”

그렇게 티가 나나?

나는 거울을 보면서 억지로 웃어 보였다. 지난 몇 년간 서비스업으로 다져진 영혼이 없지만 그럴듯한 미소가 얼굴에 떠올랐다.


“그래요, 그 표정이요. 비 전하는 기분이 안 좋으시면 늘 그런 표정을 지으시던걸요.”

“아, 기분이 안 좋다니. 그냥 긴장한 것뿐이야.”

카시안은 생각보다 예리했다. 나는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약속 장소로 향했다.

티 파티가 열리는 장소는 황태자궁에 있는 장미 정원이었다.

나타니엘이 황태자궁에 들어온 지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단 한 번도 공개되지 않은 장소였다.


‘선황후가 여기서 자주 티 파티를 열었다고 했었지.’

죽은 나타니엘의 어머니는 티 파티를 좋아했었다. 그냥 사교계의 중심이 되고 싶어서 많이 열었나 싶었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초대장 작성을 위해 과거에 초대된 사람들의 명부를 살펴본 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 자리에 매번 지금의 황후인 밀리아가 초대되었기 때문이다.


‘그냥 괴롭히고 싶어서 부른 거였어.’

생각하면 할수록 무서운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쪽입니다, 전하.”

카시안과 나는 유리 온실에 도착했다.

장미 정원 한가운데에 자리한 이 온실은 규모는 작지만 구하기 어려운 귀한 품종의 장미로 가득했다.

사시사철 온갖 색의 장미가 펴서 황궁 내에서도 아름답기로 손꼽히는 장소다.

시종이 문을 열자 안에서 미리 기다리고 있던 손님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태자비 전하를 뵙습니다.”

나는 고개를 조아리는 사람들의 얼굴을 천천히 살폈다. 제일 구석진 자리에서 파리한 얼굴의 다이애나가 보였다.


“오늘 내 초대에 응해 주어 모두 고맙네. 자리에 앉지.”

가장 중앙의 자리에 앉자 양옆에 테레사와 카시안이 앉았다.

곧 시종들이 트롤리를 끌고 와 다과를 올렸다.


“어머, 차향이 독특해요.”

차에 일가견이 있는 린드 백작 부인이 감탄하며 중얼거렸다.


“바다 건너에 있는 제국에서 들여온 차일세. 우리 제국에서 구하기 어려운 열대 과일 향이 나서 꽤 특이하더군. 내가 처음 여는 티 파티이니 모두에게 대접하고 싶어 주문해 두었지.”

구하기 어려운 차인데 내가 너희들을 생각해서 특별히 푼다는 말을 고상하게 늘어놓았다.

하지만 아무래도 익숙하지 않은 맛과 향이라서 그런지 반응이 그렇게 좋지 않았다.

그때, 이 티 파티의 화룡점정이라 할 수 있는 디저트가 올라왔다.

링 모양으로 구운 슈 페이스트리 두 개 사이에 레몬 크림을 채우고, 그 위를 레몬 크림과 망고로 장식했다.


“파리 브레스트가 너무 예뻐요.”

“이 과일은 예전에 피서 갔을 때 먹은 적 있어요.”

다행히 반응은 좋았다.

나는 속으로 전생에 자주 갔던 디저트 카페의 사장님께 감사의 인사를 하며 활짝 웃었다.


“다들 좋아하니 다행이에요. 아버지께서 보내 주신 과일인데, 차와 잘 어울릴 것 같았어요. 어서 들어 봐요.”

나는 포크와 나이프를 들고 조심스럽게 디저트를 잘라서 입에 넣었다.

상큼한 레몬 크림과 바삭한 페이스트리의 식감이 섞이고, 곧 망고의 눅진한 단맛이 입 안에 가득 퍼졌다.

달콤한 것을 먹어 표정이 부드럽게 풀린 사람들은 입가심을 위해 홍차에 손을 뻗었다.


“세상에.”

“너무 잘 어울려요!”

“향이 너무 자극적일까 걱정했는데, 디저트와 정말 잘 어울리네요.”

다들 진심으로 즐거워하는 표정이 보여서 기분이 좋았다.


“그동안 황태자궁에서 오랫동안 티 파티가 열리지 않았죠. 아주 오랜만에 문을 열었으니 여러분에게 특별한 경험을 선사해 주고 싶었어요. 반응을 보니 성공한 것 같아서 기분이 좋군요.”

“정말 멋졌습니다, 전하.”

“저도 분발해야겠어요. 그간 관성적으로 티 파티를 준비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린드 부인까지 나서서 칭찬하자 입을 꾹 닫고 있던 귀족파 사람들도 말을 하기 시작했다.

곧 달콤한 디저트와 차에 대해 열띤 토론이 벌어졌다.


‘어딜 가나 달콤한 음식은 경계를 무너뜨린다니까.’

나 역시 그들의 이야기에 끼어들면서 온실 안은 화기애애한 웃음소리로 가득 찼다.

지루할 줄 알았던 시간은 금방 지나갔다. 자리에서 일어났을 땐 이미 뉘엿뉘엿 해가 넘어가고 있었다.


“너무 어두워진 건 아닌지 걱정이네요.”

카시안이 옆에서 중얼거렸다. 드디어 때가 온 것이다.

나는 뒤를 돌아보며 방긋 웃었다.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제가 황태자 전하께 작은 재주를 배웠거든요.”

그렇게 말하고는 천천히 마력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나타니엘이 도와주었을 때는 분명 금방 만들어졌는데.


‘실패인가.’

포기하려던 순간, 손바닥 위로 축구공 크기의 빛 구슬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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