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신통치 않아 보이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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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화. 신통치 않아 보이는 방법
2022.07.27.
“마법?”
“네!”
나타니엘의 고백 이후, 우리는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잘 지내고 있었다. 그는 고백한 사람치고는 별다른 생각이 없어 보이기도 했다.
‘뭐, 나야 고맙긴 하지만.’
그러면서도 이상하게 괘씸한 마음이 들었지만 모르는 척하기로 했다.
“흐음.”
집요한 나타니엘의 시선에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를 숨기기 위해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나타니엘이 직접 마법을 가르쳐 준다고 하면 분명 황후 폐하가 혹하실걸요. 그럼 그 시간만큼은 좀 더 편하게 보낼 수 있을 거고요.”
어떻게 하면 황자를 빼 올 수 있을까 고민하던 끝에 생각해 낸 방법이었다.
무려 황후가 뒷배이니 헨리 황자에게 부족할 것이 있겠는가.
그렇다면 황자가 배우지 못할 것 중에 가장 매력적인 것을 보여 주어야 했다.
“그러니까 마법을 가르쳐 준다면서 숨통이 트일 시간을 주겠다라.”
나타니엘은 눈을 가늘게 뜬 채로 날 내려다보았다.
“네. 믿어 주세요…….”
누가 봐도 불신이 가득한 눈빛이었다.
그는 길게 한숨을 쉬더니 따뜻하게 데운 코코아를 홀짝거리며 말을 이었다.
“나쁜 생각은 아니지만, 마법은 가르친다고 배울 수 있는 게 아니야.”
“어쨌거나 황자 전하도 용의 핏줄을 이은 건 맞잖아요. 아주 작은 마법이라도 사용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 세계는 신의 힘이 거의 사라져 가고 있었다. 마법도 성력도 모두 신의 힘을 기반으로 끌어내는 것이다. 그렇기에 신의 힘이 약해질수록 당연히 마법사도 희귀해지고 있었다.
게다가 마석의 도움 없이 마법을 사용하는 마법사는 사실상 나타니엘밖에 남지 않았다.
황후가 아무리 그를 싫어한다 해도, 이렇게 뛰어나고 황자의 잠재력을 일깨울 가능성이 있는 스승은 전 세계를 뒤져도 없을 것이다.
“헨리에게 마법을 가르칠 만한 사람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
“그렇지만 그들 중에 나타니엘보다 더 훌륭한 마법사는 없죠.”
나는 양손을 맞잡고 나타니엘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미간을 구기더니 곧 길게 한숨을 쉬었다.
“뭐라고 말할 생각인데.”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호호호호.”
어째 나타니엘의 표정은 영 좋아 보이지 않았다.
“일단 나타니엘이 아나이스 황녀님께 마법을 가르쳐 주는 거예요.”
“안 돼.”
“왜요!”
나타니엘의 단호한 거절에 나는 당황해서 그의 손을 덥석 붙들었다. 마음에 안 드는지 얼굴이 굳었지만 일단 모르는 척했다.
어떻게든 어르고 달래서 목적을 달성해야 하니까.
“어떻게 좀 안 될까요?”
나타니엘은 슬쩍 손을 빼며 시선을 돌렸다.
“아나이스는 몸에 마력 회로가 전혀 없어서 안 돼.”
“그런 게 있어요?”
“응.”
마법에 대한 이해도가 전혀 없으니 알 도리가 없었다.
“헨리 황자님도 없어요?”
“아주 없지는 않지만……. 그렇게 발달되지는 않아서 강력한 마법은 쓰지 못할 거다.”
“강력한 마법이면 어느 정도인데요?”
“성 하나 날릴 정도?”
“…….”
대체 저 사람 머릿속에는 뭐가 들어가 있는 걸까.
“아마 방 하나 정도는 날릴 수 있을 것 같군.”
“그,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요.”
“그래?”
나타니엘은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숨 쉬듯 파괴를 일삼았던 그이니 그 정도는 당연하다고 생각할지도 몰랐다.
“그냥 빛이 나는 마법? 이런 거만 알려 주어도 충분할 것 같은데요.”
“그 정도라면 그대도 할 수 있을 텐데.”
어라?
나타니엘의 말에 살짝 혹했다.
“진짜 가능할까요?”
“재능은 없지만 가능성이 없는 건 또 아니라서.”
아니 말을 참 예쁘게 하네.
하지만 마법을 배울 수 있다는 사실에 웃음이 나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싱글벙글한 내 표정을 보던 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게 그렇게 좋은 건가?”
“그럼요. 나타니엘은 어렸을 때부터 마법을 숨 쉬듯 사용해서 모르겠지만, 저 같은 사람한테는 진짜 신기한 경험이라고요.”
누구나 한 번쯤은 마법에 대한 환상을 가지지 않나?
마법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서도 그랬는데 실재하는 세계에서는 오죽하겠는가.
나타니엘의 눈에는 그저 빛을 일으키는 것이지만, 나에게는 기적을 일으키는 것과 같았다.
“그래서 내가 마법을 알려 주면 어떻게 할 생각인데?”
“그야 자랑해야죠.”
“자랑?”
“네. 황후 폐하 앞에서 제가 전하에게 마법을 배웠다고 자랑할 거예요. 그리고 헨리 황자님도 배워 보는 건 어떻겠냐고 물어보는 거죠.”
“그게 그렇게 쉽게 될 것 같지 않은데.”
“당연히 먹힐걸요.”
나타니엘은 잘 모르겠지만, 한국에서 교육열을 직접 보고 느낀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이건 되는 장사였다.
“아마 황제 폐하를 통해서라도 의견을 낼 거예요.”
나는 그를 보며 자신 있게 웃어 보였다.
* * *
그날 이후로 우리는 마법 훈련에 들어갔다.
밤에 잠들기 전에 한두 시간 정도 명상을 통해 공기 중에 있는 마력을 느끼는 것이 중요했다.
“마력 회로가 있는 거랑 재능이 있는 건 완전 다른 이야기로군.”
며칠째 마력의 마 자도 느끼지 못했다.
‘이럴 수가.’
세상에 쉬운 일 하나 없다더니…….
마력을 느끼는 게 이렇게 어려운 일이었다.
“남들은 그냥 자연스럽게 배운다던데…….”
나타니엘은 혀를 차더니 침대 위로 올라왔다. 그러고는 양 손바닥을 들어 보였다.
“올려.”
“뭐, 뭘요.”
“손.”
어쩐지 미심쩍었지만, 얌전히 올려 주었다.
그는 조용히 눈을 감고 내 손을 꼭 쥐었다. 손끝이 찌릿찌릿했다.
나도 모르게 뒤로 물러서자 그가 손목을 낚아챘다.
“도망치지 말고.”
“따가워요.”
“참아 봐.”
나타니엘은 손목을 단단히 붙들고 눈을 감았다. 따끔거리던 감각이 조금씩 사라졌다.
‘이렇게 자세히 얼굴을 본 건 처음인 것 같아.’
딱히 할 일도 없으니 나타니엘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둥근 이마와 높은 콧대, 그리고 폭신할 듯한 하얗고 매끈한 뺨이 보였다.
길고 풍성한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이렇게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으니 확실히 매력적인 얼굴이긴 했다.
‘평소에도 얌전히 있으면 참 좋을 텐데.’
얼굴만 계속 보고 있었더니 잡고 있는 손끝이 화끈거리는 것 같다.
바람 소리나 가끔 들리는 방 안에 단둘이 손을 잡고 있어서 더 신경 쓰였다.
그답지 않게 진지한 표정이라 그런가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이봐, 집중 안 해?”
“예?”
갑자기 말을 걸어 오는 통에 깜짝 놀라서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나타니엘의 표정이 더 험악해졌다.
“내가 지금 마력을 넣어 주고 있잖아. 어떤 느낌인지 집중해서 잘 느껴 보라고.”
투덜거리며 삐죽이는 입술에 나도 모르게 시선이 갔다.
부드럽고 폭신폭신해 보였다.
“제이나?”
“예, 예!”
“오늘은 여기까지 하지.”
“왜요?”
“몸이 안 좋은가 보군.”
“멀쩡한데요.”
“얼굴도 붉고, 심장도 빨리 뛰어.”
“아. 좀 더운가 봐요.”
“그래?”
그렇게 말하며 나타니엘이 시선을 내렸다. 두꺼운 카디건을 걸쳤지만, 잠옷이 얇은 탓에 속살이 조금 비쳤다.
“어, 어딜 내려다봐요!”
“왜 화를 내고 그래.”
나타니엘은 내 반응에 당황했는지 얼굴을 붉혔다. 한동안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일단 다시 해 봐요.”
“진짜 괜찮겠어?”
“네.”
차마 당신 얼굴 구경하다가 그리되었다고는 할 수 없으니 얼버무리는 것이 답이었다.
나타니엘과 손을 잡은 뒤, 그를 따라 눈을 감았다. 괜히 눈을 뜨고 있으면 심란할 것 같았다.
“힘 빼고.”
무형의 기운이 천천히 손끝에서부터 밀려들어 오기 시작했다.
몸속이 정전기가 오른 듯 따끔따끔하다가 곧 간질간질해졌다.
그리고 그 간질거림은 서서히 전신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뭐, 뭔가 이상해요.”
“안에서 움직이는 기운을 잘 느껴 봐.”
“으, 기분 이상해요.”
그래도 나타니엘이 말하는 마력이 무엇인지 확실히 느껴졌다.
“그걸 모아서 손끝으로 밀어내. 그리고 둥근 빛의 구를 떠올려.”
그의 말에 따라 이미지를 구체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몸 안을 돌아다니는 기운을 바깥으로 밀어낸다 생각하며 집중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눈을 떠 봐.”
다정한 나타니엘의 목소리가 들려와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눈앞에 주먹보다 작은 빛의 구가 떠 있었다.
“헉, 성공했어요!”
“그래. 거의 반절은 내가 한 거지만.”
“세상에. 이게, 이게 된다니.”
영화나 소설에서 보던 것이 이렇게 이루어지다니 꼭 꿈만 같았다.
“그렇게 신기해?”
“그럼요. 나타니엘은 매번 쓰니까 잘 모르는 거라고요.”
“흐음.”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일단 내 도움 없이 만드는 것부터 연습하자.”
“도와줄 거죠?”
그는 잠시 말없이 내 얼굴을 보다가 다시 시선을 돌렸다.
침묵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그날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서 이런 불편한 순간이 종종 생겼다.
서로 눈치를 보며 어쩔 줄 몰라 하는…….
‘일단 자자.’
어느새 빛 구슬은 사라져 버렸다. 나는 나타니엘의 눈을 피하며 말했다.
“오늘은 늦었으니까 이만 자요, 우리.”
“으응.”
묘하게 열기를 띤 나타니엘의 시선이 따라붙었다.
일단 모르는 척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웠다.
* * *
자연스럽게 마법을 자랑할 순간을 어떻게 만들까.
아나이스와 나는 머리를 굴렸다.
“직접 보여 드리면 아마 자존심이 상하실지도 몰라요.”
직접 시연을 할까 하다가 아나이스 황녀의 말에 생각을 바꾸기로 했다.
황태자비가 된 이후 아직 제대로 된 사교 모임을 한 번도 열지 않았다.
그래서 이 기회에 두 개를 한 번에 처리하기로 했다.
카시안과 테레사를 불러서 초대장을 보낼 영애와 귀부인들을 골랐다.
중립 가문의 사람들과 귀족파, 황제파의 사람들까지 골고루 고른 목록을 만들었다.
“누구 빠진 사람 없는지 마지막으로 확인해 줘요.”
“없는 것 같아요. 이 정도면 완벽하죠.”
카시안의 말에도 나는 다시 한번 목록을 확인했다.
그때 목록을 살펴보던 테레사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로반 영애에게도 보내야 해요. 부르지 않으면 황후 폐하의 공격을 받을 수도 있으니까요.”
테레사가 일부러 빼 둔 이름을 언급하자 나는 놀라 잠시 말을 잃었다.
“절 생각해서 안 부르시는 거라면 그러지 않으셔도 되어요.”
“테레사, 그 자리를 피할 수 없을 텐데 괜찮겠어?”
난 조용히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그로반 남작이 더러운 짓을 했다는 사실은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그 피해자가 누군지는 철저하게 비밀에 부쳤다.
그 탓에 테레사가 그 자리에 나타나지 않으면 아마 황태자비와 사이가 틀어졌다는 내용의 소문이 돌게 될 것이다.
“네, 저는 괜찮아요.”
테레사의 표정은 단호했다.
이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어차피 언젠가는 마주쳐야 할 얼굴이었어요. 저는 정말 괜찮아요. 그로반 남작도 아니고 그냥 가족이잖아요.”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직접 초대장을 써서 내게 건네주었다.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싱긋 웃는 것도 잊지 않았다.
마치 그 일을 전부 잊은 것 같은 모습에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언젠가 만나야 했다는 건 알지만 이렇게 빨리 만나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알겠어요. 힘들면 언제든 말해요. 알았죠?”
“네. 걱정하지 마세요. 카시안도 있는걸요.”
다시 한번 단단히 다짐을 받고 초대장을 보내는 일을 마무리 지었다.
“그럼 이제 다과를 정해 볼까?”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차에 곁들일 케이크를 화두로 삼았다.
“처음 여는 티 파티니까 아주 강렬한 인상을 줄 디저트였으면 좋겠어요.”
카시안의 말에 테레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얼마 전 공국에서 돌아온 파티시에 이야기를 꺼냈다.
방금까지 무거웠던 분위기는 한결 가벼워졌다.
* * *
한참 상의를 하고 나서 그들을 돌려보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창밖을 보니 벌써 해가 지고 있었다.
“나타니엘과 저녁을 먹자고 할까.”
지금 시간이면 아직 서재에 있을 것이다. 나는 응접실에서 나와 서재로 향했다.
머지않아 도착한 나는 가볍게 노크를 하고 문을 열었다.
“나타니엘…….”
방 안에 펼쳐진 광경에 나는 말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