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건드리지 말았어야 할 마법
(50/145)
50화. 건드리지 말았어야 할 마법
(50/145)
50화. 건드리지 말았어야 할 마법
2022.07.23.
황실 서고는 후미진 곳에 있었지만, 외관은 꽤 화려했다.
서고를 담당하는 관리는 갑자기 발생한 황태자비 방문 이벤트에 잠시 넋이 나갔다.
“뵈,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비 전하.”
“그렇게 떨 필요 없네. 궁금한 것이 있어서 구경하러 온 것뿐이니. 혹 오늘 나 말고 다른 방문자가 있던가?”
“아, 그로반 영애가 오전부터 와 있습니다.”
뜻밖의 이름에 나는 당황했다.
그녀는 황후가 나와 나타니엘을 약 올릴 작정으로 부른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당연히 지금쯤이면 고향으로 내려갔을 줄 알았는데.
“그렇군. 고맙네.”
내가 왔다고 다이애나를 쫓아낼 수도 없으니 나는 그냥 모르는 척하기로 했다.
나는 고대 용 설화를 연구한 논문이 있는 서고로 향했다.
“생각보다 많이 없네.”
사실 워낙 비현실적이고 오래된 전설인 게 문제였다.
아마 나도 나타니엘이 변신한 모습을 보지 않았다면 절대 믿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제목과 서문을 읽고 괜찮은 책 몇 권을 골라서 중앙에 있는 책상으로 향했다.
그리고 책 하나하나를 신중하게 읽기 시작했다.
“하아.”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금방 집중력이 떨어졌다.
가져온 책들의 내용이 대부분 굉장히 원론적인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용은 실존하지 않는다든가, 황실의 정당성을 위해 만들어진 설화에 가깝다는 내용이었다.
가끔 나타나는 위대한 힘을 가진 자들은 그들이 잘난 거지, 결코 용의 축복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별로 도움이 안 되네.”
손가락으로 책을 휘리릭 넘기면서 보던 내 눈에 이상한 것이 보였다.
“어라?”
나는 책을 가까이 가져와서 자세히 살펴보았다.
많이 낡아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희미한 글자가 눈에 띄었다.
“N35 뒤로 세 걸음?”
앞에 있는 숫자는 책장 번호인 것 같았다.
나는 책을 들고 적혀 있는 책장이 있는 방으로 향했다.
“어디 보자. N34, N35. 이거다!”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책장이었다.
나는 거기서 세 걸음 떨어진 벽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꼭 추리 영화 같아서 살짝 들뜨기도 했다.
벽을 통통 치면서 살피는데, 안쪽이 비어 있는 소리가 나는 곳을 찾았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 근처를 손끝으로 만지며 무언가 장치가 있는지 확인했다.
‘딸칵.’
작은 소리와 함께 벽이 스르륵 사라졌다.
안쪽에는 좁은 계단이 있었다.
안으로 발을 딛자 벽에 있던 마석들이 자연히 빛을 발하며 길을 밝혀 주었다.
“와, 설마 갇히는 건 아니겠지.”
살짝 걱정하던 나는 마음을 굳게 먹고 계단을 따라 내려가기 시작했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계단을 타고 내려가자 을씨년스러운 장소가 나타났다.
여기저기 거미줄도 있는 게 방치된 지 꽤 오래된 것처럼 보였다.
“뭐야, 이 마왕 소환하는 장소같이 생긴 곳은.”
바닥에는 짧은 양초들이 놓여 있었고, 처음 보는 글씨들이 쓰여 있었다.
한참을 들여다보았지만 무어라 쓰여 있는지 알 수 없어서 포기하기로 했다.
그리고 안쪽에 있는 책장과 책상으로 향했다.
무언가 연구를 한 것 같은 흔적이었다.
연구 노트가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입구도 생각보다 허술했던 것처럼, 연구 노트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다행히 이건 알아볼 수 있는 글씨로 쓰여 있네.”
한 장씩 천천히 페이지를 넘기며 내용을 확인했다.
“이건…….”
나타니엘의 어머니가 쓴 것이었다.
일종의 육아 일기였는데, 내용이 소름 끼칠 정도로 냉정했다.
나타니엘이 언제 용의 모습으로 변하는지, 그리고 용으로 변했을 때 어떤 행동 양상을 보이는지를 아주 자세히 기록해 두었다.
또한 그가 투정을 부릴 때 얼마나 공격적으로 변하는지도 상세히 적어 두었다.
[나는 내 아들을 믿을 수 없다. 저건 사람이 아니라 괴물이다. 그 아이가 손을 들 때면 공포심이 먼저 든다. 어쩌면 이 멍청한 황제가 이끄는 제국의 종말을 위해 내린 악마일지도 모르겠다.]
“이렇게까지 싫어할 필요는 없잖아.”
나는 일기를 보면 볼수록 나타니엘이 어째서 그렇게 감정을 잘 모르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는 나타니엘을 철저히 외면하는 것으로 사태를 해결하려 들었다.
그러면서도 그를 관찰하는 것은 게을리하지 않았다.
나타니엘이 용의 모습으로 변하는 이유는 모두 감정이었다.
감정이 격해지는 순간 용의 모습으로 변해 버린다.
그 감정은 주로 분노, 슬픔, 고통과 같은 부정적인 것들이었다.
“돌아오는 방법은…….”
놀랍게도 그녀는 돌아오는 방법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적지 않았다.
나타니엘이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오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진짜 너무한 거 아니야?”
나는 그런 그녀의 태도에 화가 났다.
아무리 그의 모습이 충격적이라지만, 자신의 아이가 아니던가.
차라리 무관심한 것이 나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혐오와 공포가 일기장 전반에 가득했다.
“하아.”
나는 기분 나쁜 일기장을 깊은 곳에 밀어 넣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문을 닫았다.
아주 소득이 없는 건 아니었다.
나타니엘의 감정이 변신의 원인이라는 건 알았으니까.
“흐음.”
그렇다면 이번엔 내가 그를 의심해서 변한 걸까?
나름 귀여운 것 같기도 하고.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삐져나왔다.
그럼 방법은 가서 달래 주는 수밖에 없구나, 싶었다.
그리고 오늘 본 그 일기장은 죽을 때까지 모르는 척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절대 나타니엘에게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방으로 돌아가자 나타니엘이 낑낑거리며 서류를 보고 있었다.
나는 손으로 그를 번쩍 안아 들어서 의자에 앉았다.
[왔으면 왔다고 이야기를 해야 할 거 아냐.]
“우리 용용이가 또 뭐 때문에 이렇게 화가 나셨을까?”
[뭐, 뭐?]
내 장난스러운 말투에 나타니엘은 잠시 말을 잃었다.
그리고 곧 얼굴이 화르륵 타올랐다.
조그맣고 통통한 팔로 내 손을 탁탁 치며 빠져나가려는 모습에 나는 큰 소리를 내며 웃었다.
“본인도 본인이 귀여운 거 알죠?”
[하나도 안 귀여워! 이거 놔!]
바둥바둥해 봤자 내 손바닥 안이었다.
나는 싱긋 웃으며 그를 꼬옥 품에 안았다.
“내가 엄청, 엄청 좋아하는 거 알죠?”
놓으라고 난리를 치던 나타니엘이 곧 조용해졌다.
품 안에서 고개를 끄덕이는 그의 모습을 보며 슬쩍 웃었다.
아까 전 황후의 일기를 읽고 나서부터 그에게 꼭 해 주고 싶었던 말이었다.
[응.]
나타니엘의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살살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품에서 꾸물거리다가 빤히 올려다보는 그에게 다시 한번 말해 주었다.
“진짜로요. 세상 모든 사람이 당신을 손가락질해도 전 영원히 당신 편이 되어 줄게요.”
처음 만났을 때는 나도 다른 사람들과 다르지 않았다. 나타니엘을 무서워하고 그를 인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함께 지낼수록 그 역시 서투를 뿐, 감정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다.
“어!”
그 순간, 펑 소리와 함께 나타니엘이 드디어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옷은 어디 갔는지 나체였지만, 어쨌거나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부드러운 눈으로 날 보며 미소를 지었다.
“나 역시 좋아하고 있다, 제이나.”
말의 무게가 내가 했던 것과는 전혀 달랐다.
심장이 쿵,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 * *
황후는 황태자궁의 하녀, 리나를 불러 둘의 근황을 물었다.
“사이가 좋다고?”
“네.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을 정도입니다. 게다가 후처를 들이자는 청이 올라온 이후로 황태자님께서 경계를 더욱 심하게 하시는 바람에 식사도 비 전하와 단둘이서만 하십니다.”
리나의 말에 황후의 표정이 심각하게 변했다.
바람이 나려면 적어도 끼어들 틈이라도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게다가 필립스의 자식답지 않게 순정도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아……. 알겠다. 돌아가도록.”
리나를 돌려보내고 밀리아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이럴 때 아나이스가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새삼 발걸음을 뚝 끊어 버린 딸이 아쉬웠다.
그녀마저 없으니 이런 속 이야기를 할 사람이 없었다.
밀리아는 시녀장을 부를까 하다가 그만두기로 했다.
“황, 황후 폐하! 손님 방에 좀 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때 문을 벌컥 열고 시녀장이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로 달려왔다.
밀리아는 그녀의 말에 급하게 손님 방으로 향했다.
내부는 악마를 소환할 것처럼 어두웠다.
“이게 무슨……?”
황후는 반사적으로 코를 막았다.
은은하게 나는 악취에 얼굴이 절로 구겨졌다.
“이 방에 누가 머물고 있지?”
“그로반 영애가 머물고 있습니다.”
“다이애나가?”
황후가 들어가 보라는 듯 턱짓하자 하녀는 냄새나는 방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로반 영애, 안에 계신가요?”
조심스럽게 이름을 부르자 안에서 다이애나가 나왔다.
표정도 좋지 않았고, 낯빛도 어두워서 무슨 일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다이애나는 뒤늦게 황후가 오만상을 찡그리며 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제야 자신이 지난 며칠간 무엇을 했는지 깨달았다.
황후는 성큼성큼 걸어와 다이애나의 뺨을 힘껏 후려쳤다.
어찌나 세게 때렸는지 큰 키의 다이애나가 휘청하며 옆으로 쓰러졌다.
“지금 이 신성한 땅 위에서 뭐 하는 짓이야!”
태어나서 누군가에게 처음 맞아 본 다이애나는 충격에 빠졌다.
그녀는 뺨을 손으로 가리고 황후를 올려다보았다.
“만일 내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가 발견했다면 어쩔 뻔했어! 제국은 흑마법을 다루는 이들에게 사형을 내린다는 걸 모르느냐?”
황후는 열통이 터졌다.
목숨을 걸고 황태자에게 꼬리 치라 불렀더니, 이런 쓸데없는 짓이나 하고 있다니.
“모…… 몰랐습니다, 폐하.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황후의 말에 다이애나는 깜짝 놀라 몸을 숙였다.
흑마법이라니.
어린 시절 동화책에서나 볼 법한 내용이었다.
우연히 황태자비의 뒤를 쫓다가 비밀 서고를 발견했고, 거기에 있는 책 중 유용해 보이는 것을 한 권 집어 왔다.
‘그리고 그 책에 적혀 있는 것을 한번 따라 읽어 봤을 뿐인데…….’
그 책이 그렇게 위험한 것인 줄 알았다면, 처음부터 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당장 저 잡것을…….”
밀리아는 말을 하다가 멈췄다.
그녀의 눈은 다이애나가 보고 있던 페이지를 향하고 있었다.
[사람의 마음을 빼앗는 주술]
자신이 찾고 있던 것이었다.
“사람을 물리거라.”
그녀는 하녀를 돌려보내고 다이애나를 밀실로 불러냈다.
“이 내용이 진짜더냐?”
“한 번만, 한 번만 살려 주십시오, 폐하.”
“내 말에 대답이나 해.”
다이애나는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그, 그것은 저도 잘 모릅니다.”
책을 꼼꼼히 살펴보았지만, 그 안에 다른 쓸 만한 것은 없어 보였다.
얼마 전, 트레비아 후작이 디에스 기사단을 찾는 데 실패했다는 소식을 전해 왔다.
그래서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하나 걱정했는데 이렇게 제 발로 해법이 굴러 들어올 줄이야.
“잘 들어라.”
“예, 예.”
“넌 이걸 이번 수확제 연회 때 황태자에게 사용하거라.”
“예?”
다이애나는 눈을 크게 뜬 채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황후는 잔인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그와 동침을 하렴. 만일 실패한다면 너뿐만 아니라 그로반 가문 자체가 사라지게 될 것이다.”
밀리아는 그렇게 말하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가 버렸다.
다이애나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멀어져 가는 황후의 발소리만을 듣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