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귀엽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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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화. 귀엽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2022.07.20.
나는 느지막이 일어나 저녁을 먹으며 그간 있었던 일에 대해서 들었다.
나타니엘은 영 마뜩잖은 얼굴로 헨리 황자의 생활에 대해 말해 주었다.
[헨리는 아나이스보다는 대우가 나아 보였지만, 그래도 어린아이에게 꽤 가혹하게 대하더군.]
나타니엘은 자신이 보았던 헨리의 일정을 설명했다.
아침에 그 누구보다 일찍 일어나서 연무장에 끌려가 오전 내내 검술 수업을 받아야 했다.
그리고 오후에는 수많은 수업을 듣고 새벽까지 과제와 복습에 시달렸다.
원래는 주말에 쉬었지만, 지난 시험에서 점수를 낮게 받아 온종일 시험공부를 했다.
거기에 취미나 놀이 같은 건 철저하게 배제된 채로 지내고 있다고 했다.
“헨리 황자님이 몇 살이시죠?”
[올해 아홉 살인가 된 것 같은데.]
“세상에.”
아직 나이도 어린데 일주일 내내 공부라니.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하지만 눈에 보여서 혐의가 명백한 아나이스에 대한 육체적 학대와는 궤가 달랐다.
황제는 그렇게 아낀다는 아나이스 황녀에 대한 학대에 대해 크게 신경 쓰지 않는 기색이었다.
그 장면을 목격하고 내린 벌이 고작 근신 정도였으니까.
“황후 폐하께서는 학대라고 생각하시지 않을 테니 도와드릴 방법이 많이 없겠네요.”
[우리 말고 다른 사람이 도와줄 수 있을 것 같다.]
“네?”
[헨리는 아나이스를 보고 싶어 하더군.]
그러고 보니 이전에는 둘이 지내는 시간이 많았지.
나와 나타니엘은 헨리를 도와줄 방법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 * *
막시밀리안은 제이나의 제안으로 사제를 만나기 위해 황궁에 들렀다. 사제 덕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막시밀리안은 꿈이 구체적이고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제이나의 말대로 테레사의 죽음 이후에도 무언가가 있었다.
너무 고통스러운 무언가가.
죽음 이후 오랜 시간 동안 폐인처럼 지내는 그 시간과 끊임없이 되살아나는 죄책감, 자신에 대한 혐오감이 그의 정신력을 갉아 먹었다.
잠을 안 잘 수도 없으니 피할 방법도 없었다.
“하아…….”
막시밀리안은 사제가 숙면을 위해 권한 산책을 하기 위해 황태자궁 근처를 돌았다.
뜨거웠던 여름이 지나고, 이제는 아침저녁으로는 시원한 바람이 불어서 걸을 만했다.
그는 신선한 공기를 가득 마시며 산책을 시작했다.
천천히 깊은 곳을 걷던 막시밀리안은 누군가가 자신의 뒤를 쫓아오는 것을 알아차렸다.
처음 느껴 보는 기척인 데다가, 매일 악몽에 시달려 예민해진 탓에 날카롭게 반응했다.
“누구냐!”
부스럭하는 소리와 함께 나무 뒤에 숨어 있던 여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막시밀리안은 처음 보는 그녀를 보며 인상을 썼다.
화려한 옷차림인 걸 보니 궁에서 일하는 사람은 아닌듯싶었다.
막시밀리안은 길을 잃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길을 잃으셨습니까?”
“예? 아, 아니요. 그런 게 아니라…….”
다이애나는 막시밀리안이 자신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다.
자신은 그를 만났던 기억이 어제의 일처럼 생생했는데.
오랜 시간 상상만 하던 재회는 어느새 다이애나의 머릿속에서 거대한 망상이 되어 버렸다.
다이애나는 자신이 그랬듯, 그 또한 자신에게 깊은 감명을 받았을 거로 생각했다.
“저를 기억하지 못하시는군요.”
“아. 이런……. 죄송합니다. 제가 요즘 정신이 없어서.”
막시밀리안은 상대가 눈물을 글썽거리자 당황했다.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봐도 얼굴을 아는 여자가 아니었는데, 상대는 자신을 아는 눈치였다.
늘 유명세에 시달렸던 그는 이런 일이 잦았기 때문에 쉽게 넘어갈 방법을 체득했다.
“이번에 알려 주신다면 다시는 잊지 않겠습니다, 영애. 부디 이름을 알려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최대한 상냥한 표정을 지으며 이름을 물었다.
그러나 다이애나는 얼굴을 굳혔다.
다이애나는 짧은 사교계 생활을 통해 배운 것이 있었다.
사람들은 절대 그로반 남작가에 호감을 느끼고 있지 않았다.
다들 자신의 앞에서는 알랑거렸지만, 돌아서면 가문을 헐뜯고 흉을 보았다.
그녀의 자랑스러웠던 오라버니는 이곳에서 변태에 불과했고, 그녀의 가문은 그런 변태를 가주로 모시는 한심한 가문이었다.
다이애나의 긍지는 산산이 조각나고 짓밟혔다.
그런데 어떻게 자신이 짝사랑하는 상대에게 이름을 말할 수 있단 말인가.
다이애나는 자신의 처지가 너무 어이없고 처량하여서 입을 꾹 닫고만 있었다.
“저, 영애?”
막시밀리안은 막상 이름을 묻자 자신을 무시하는 그녀에게 크게 당황했다.
이런 적은 처음이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랐다.
“잠깐만……!”
붙잡기도 전에 다이애나는 몸을 돌려 도망치기 시작했다.
입은 죽어도 떨어지지 않았고, 그는 자신을 기억조차 못 하니 참으로 처량한 신세라고 생각했다.
황후궁으로 도망치듯 달리던 다이애나는 앞을 보지 못하고 누군가와 부딪혔다.
“아!”
“이런, 괜찮나?”
황후궁으로 향하던 황제였다.
그는 넘어져서 나동그라진 다이애나에게 친절하게 손을 뻗었다.
“황후가 돌봐 주고 있는 그로반 영애로군. 내가 나이가 들어 날래지 못해 그만 큰 실수를 했구먼.”
그럴듯한 웃음을 지으며 필립스는 그녀를 위로했다.
그런데, 가만 보니 얼굴에 눈물 자국까지 있었다.
“그렇게 아팠나? 이것 참, 내가 미안하게 되었군.”
다이애나는 그제야 자신이 울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뺨을 닦아 내던 그녀의 앞에 불쑥 손수건이 들이밀어졌다.
“아, 감사합니다.”
필립스는 은근하게 다이애나를 훑었다.
처음 만났을 때보다 훨씬 어여뻐진 모습이었다.
게다가 사교계에서 밑바닥까지 구른 수도의 귀족 여성들과는 다른 어리숙한 모습이 꽤 귀여워 보였다.
평소 보지 못한 풋풋한 여인의 모습에 필립스는 몸과 마음이 회복되는 느낌이었다.
‘하아, 요즘 정말 피곤했지.’
필립스는 지난 몇 달간 황후의 잔소리에 시달렸다.
생각해 보면 아나이스의 결혼식이 시작이었다.
윈터스 가문의 소공자와 결혼시키고 싶다고 난리를 피우더니, 파경에 이르자 역적의 가문으로 처리해야 한다 난리였다.
그녀의 아버지인 트레비 후작까지 가세하여 윈터스 가문으로부터 권력을 빼앗아야 한다며 그를 몇 달을 괴롭혔다.
다행히 나타니엘과 제이나가 결혼하면서 그 문제가 해결되나 싶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나타니엘이 후처를 들여야 한다며 온갖 소동을 부리는 탓에 한동안 잊고 있던 편두통이 왔다.
‘그러고 보니 제이나가 복덩이군.’
손 하나 대지 않고 트레비 후작의 세력을 꺾어 버리고, 그를 견제할 강력한 우군, 윈터스 공작가까지 얻게 해 주었으니.
‘이제 좀 쉴 때도 되었지.’
황제는 먹이를 앞에 둔 매처럼 다이애나를 보았다.
이런 시골 처녀를 꼬여 내는 건 아주 간단한 일이었다.
“허허허. 내가 울게 한 것인데 책임을 져야지. 정말 어디 다친 데가 없는 게야?”
“네…….”
“그렇다면 참으로 다행이구나. 하지만 혹시 모르니 의사를 보내 주마.”
다이애나는 자신을 향한 황제의 시선에 무언가 다른 것이 섞여 있다는 걸 느꼈다.
‘설마.’
다이애나는 아나이스 황녀와 비슷한 나이였다.
그러니 그런 눈으로 자신을 볼 리가 없다고 다이애나는 생각했다.
“괜찮습니다, 폐하.”
“아니다. 사양하지 말아라. 그리 큰일도 아니니 말이다.”
“예.”
어딘지 모르게 껄끄러웠다.
하지만 거절할 만한 명분도 없었다.
다이애나는 결국 황제의 호의를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 * *
“헨리가요?”
“네, 아나이스 황녀님과 황후 폐하가 싸웠다고 생각하더라고요.”
내 말에 아나이스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저도 헨리가 걱정되긴 했어요. 그래도 어머니는 헨리를 정말 아껴서 단 한 번도 때리거나 그러지는 않았거든요.”
“얼마 전에는 뺨을 때리셨다고 들었어요. 게다가 황자 전하를 전보다 심하게 몰아세우시는 것 같고요.”
그런 식으로 굴다가 폭력이 습관이 되는 것을 아나이스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녀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다보았다.
“황후 폐하께서 황자 전하를 보는 거까지 막지는 않으시잖아요, 그렇죠?”
“네. 하지만 예전만큼 만나지는 못해요. 아무래도 눈치도 보이고…….”
“흐음.”
무언가 다른 방법이 필요했다.
하지만 황자의 교육은 오롯이 황후의 몫이었으니 우리가 함부로 나설 수 없었다.
답답하지만 당장 해 줄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것이 우리를 옥죄었다.
“일단 제가 자주 만나도록 노력할게요.”
“네, 황녀님이 좀 잘 봐주세요.”
그렇게 말한 아나이스가 지금 당장 보러 가야겠다며 자리를 떴다.
나는 그녀를 배웅하고 침실로 올라왔다.
이른 저녁 시간이었지만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침대 위에서 몸을 동그랗게 말고 자고 있는 나타니엘이 보였다.
“아직도 이 모습이네.”
나는 서늘한 비늘을 찬찬히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나타니엘이 이 모습으로 지낸 지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이번에 돌아오지 않는 이유가 따로 있나?’
그와 결혼한 지 반년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다.
그동안 이렇게 오랫동안 원래 모습으로 돌아오지 않은 적은 없었다.
나타니엘 역시 이런 적은 처음이라고 했다.
“흠.”
귀엽고 사랑스러웠지만,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않은 게 문제였다.
게다가 수확제가 다가오는데 업무가 밀리기 시작하면 치명적이었다.
“아, 일어났어요?”
[응.]
나타니엘은 눈을 비비며 일어나서 길게 하품을 하더니 자리에 바로 앉았다.
나타니엘은 용의 모습일 때는 아기여서 그런지 하루에 대부분을 자는 데 사용한다.
[아직도 이 모습이군.]
나타니엘은 한숨을 푹 쉬며 중얼거렸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 역시 초조해 보였다. 나는 그런 그의 옆에 앉으며 물었다.
“그러고 보니, 황실 서고에 고대 용에 대한 미공개 사료가 있다고 들었는데. 진짜인가요?”
[아아, 맞아. 딱히 미공개는 아니고, 그냥 너무 오래되어서 다들 관심이 없는 거지.]
그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제국민들은 그 누구보다 고대 용 전설에 진심이었다.
귀족들이 그 심리를 이용해 나타니엘의 핏줄을 많이 만들어야 한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일 정도로.
[너무 환상을 깨는 게 많아서 그런 거 같던데.]
그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신전에 있는 거대한 용 석상만 봐도 현실과 설화의 괴리를 알 수 있었다.
“거기 들어가는 데에 자격이 필요해요?”
[아니, 왜? 가 보게?]
“네. 뭐라도 도움이 되는 게 있는지 확인해 봐야죠.”
이대로 그냥 앉아서 기다리는 건 딱 질색이다.
나타니엘은 마음대로 하라 말하고 기지개를 쭈욱 폈다.
“저녁 먹어야죠. 앉아 계세요. 식사를 들이라고 할게요.”
그렇게 말하고 밖으로 나가 내가 직접 트레이를 끌고 들어왔다.
신선한 샐러드와 적당히 구워진 스테이크에서 맛있는 냄새가 났다.
나는 도망치려는 나타니엘을 붙잡아서 자리에 앉혔다.
[으, 샐러드는 싫다.]
“지금은 어리니까 이런 것도 잘 먹어야 한다고요.”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다 큰 어른이 샐러드 먹기 싫다고 투정 부리는 것도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몇 번 다그치자 겨우 샐러드를 먹기 시작했다.
애 키우는 것도 아니고 대체 이게 뭐람.
[눈빛이 불순하군.]
“그럴 리가요. 귀엽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생긋 웃어 주며 말하자 후식으로 먹고 있던 사과를 툭 떨군다.
부끄러운지 얼굴을 양손으로 가리고 등을 돌려 버렸다.
‘놀리면 반응이 얼마나 즉각적인지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니까.’
나는 몇 번이고 나타니엘을 놀리며 시간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