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7화. 졸음운전의 결과 (47/145)


47화. 졸음운전의 결과
2022.07.13.



“여깄다!”

“아가씨, 찾았습니다.”

매번 같은 자리에 숨어 있던 탓에 의심을 산 모양이었다.

그러나 막시밀리안이 아무리 검에 뛰어난 재능이 없다 해도, 아무것도 모르는 평민들보다는 나았다.

그는 가뿐하게 하인들의 손에서 도망쳤다.


“으악!”

아니, 도망쳤다고 생각했다.

뒤에서 날아온 포획 틀에 걸리기 전까지는.


“막스?”

꼴사납게 넘어진 막시밀리안은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툭툭 털며 말했다.


“오, 오랜만이야, 테레사.”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보는 눈빛에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대체 여기는 왜 온 거야.”

테레사는 막시밀리안을 감옥에 보내지 않았다.

막시밀리안은 작게 안심했다.


“그냥 잘 지내는지 확인하고 싶었는데 이렇게 되었네.”

“하…….”

테레사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이런 식으로 자꾸만 주변을 맴도는 막시밀리안이 부담스러웠다.

아무리 마음을 정리했다지만, 과거에 좋아했던 사람과 자주 마주치는 건 썩 좋은 경험은 아니었다.


“부담스러웠다면 미안.”

막시밀리안의 사과에 테레사는 그의 얼굴을 다시 보았다.


“앞으로 이럴 일은 없을 거야. 그냥 요즘 꿈자리가 좀 뒤숭숭해서 그런 거라.”

그렇게 말한 그는 꾸벅 인사를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테레사는 그런 막시밀리안이 낯설었다.

자신이 알고 있던 그는 이런 사람이 아니었다.

항상 자신이 먼저였던 사람이었다.

그녀는 멀어져 가는 막시밀리안의 뒷모습을 한참 바라봤다.

* * *


 
나타니엘은 요즘 기분이 좋았다.

무엇 때문인지 모르지만 아주 기분이 좋았다.

제이나와 함께하는 삶은 생각보다 편리했다.

누군가와 자신의 비밀을 나누어 갖는다는 건 정말 마음이 가벼워지는 일이었다.

그래서 방심했는지도 모른다.

황궁 바깥에서 용의 모습으로 변했다.

요즘 들어 변하는 횟수가 줄었다고 방심하고 시찰을 나간 것이 문제였다.

돌아가기 위해 부지런히 날갯짓을 했지만, 지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 혹시 밖에서 변하면, 무리하지 말고 쉬다가 와요.

지난번에 감기에 걸리고 나서 제이나가 했던 말을 떠올렸지만, 나타니엘은 가볍게 무시했다.

좀 멀긴 했지만 불가능한 거리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피곤하네.’

하지만 확실히 피곤했다.

육체적인 피곤은 졸음운전을 유발하는 가장 큰 문제라는 걸 그는 몰랐다.

반쯤 졸면서 날던 나타니엘은 그대로 나무에 부딪혔다.

작은 동물은 삐악 소리 한번 내지 못하고 바닥에 톡 떨어졌다.

시간이 지나 땅거미가 내려앉을 무렵.


“황자 전하, 황자 전하!”

헨리는 자신을 찾는 시녀들을 피해 정원의 깊은 곳으로 숨었다.

울창한 나무숲은 아직 작은 아이가 숨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사람을 피해 뛰어가던 헨리는 무언가에 걸려 넘어졌다.


“아야.”

넘어진 자리에서 일어난 헨리는 엎어져 있는 조그마한 검은색 동물을 발견했다.

조심스럽게 한쪽 다리를 들어 올리자 작은 강아지만 한 크기의 새끼 용이었다.


“용?”

헨리는 눈을 반짝이며 새끼 용을 번쩍 들어 올렸다.


‘내 소원을 들어주셨어!’

이건 자신을 위해 고대 용님께서 보내 주신 천사가 틀림없었다.


“황자 전하! 여기서 대체 뭐 하시는 거예요? 조금 있으면 황후 폐하께서 시험 성적 확인하러 오신다고 그러셨잖아요.”

“아…….”

헨리는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성적이 나쁘면 또 어머니께 혼이 날 게 뻔했다.

헨리는 입을 삐죽이며 중얼거렸다.


“가기 싫어.”

“아이참, 황후 폐하께서 다 황자님을 걱정하셔서 그러는 거예요. 어서 가…… 이건 뭐예요?”

“아, 이거.”

“인형이에요? 혹시 더러운 거일지도 모르니까 제가 빨아서 가져다드릴게요.”

시녀가 손을 뻗어 용을 만지려 하자 헨리는 몸을 돌려 숨겼다.


“만지지 마!”

아이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시녀가 움찔하며 물러섰다.

헨리는 시녀가 얼마 전, 자신이 아끼던 인형을 나이가 들었다며 억지로 버렸던 걸 기억하고 있었다.


“만약에 이것도 버리면 진짜 가만 안 둘 거야!”

헨리는 그녀를 노려보며 엄포를 놓았지만, 시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웃으며 그를 달랬다.

헨리가 나타니엘을 끌어안고 노려보자, 결국 하녀는 뒤로 물러서기로 했다.


“네, 네. 일단 어서 들어가요.”

그녀는 헨리를 달래며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 * *


 
나타니엘은 천천히 눈을 떴다.

분명 어딘가에 부딪혀서 떨어졌는데…….

눈앞에 호화찬란한 내부의 모습이 보였다.


‘여기가 어디지?’

아래를 내려다보자 푹신한 회색 이불이 눈에 들어왔다.

그가 알고 있는 황태자궁 어디에도 이런 우중충한 침대는 없었다.


“황자, 이런 것도 못 해서야 용의 후예라 할 수 있겠습니까!”

카랑카랑한 목소리는 분명 황후의 것이었다.

나타니엘은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주변을 살폈다.

넓은 방은 화려하지만 황량하기 짝이 없었다.

아이의 취향이 완벽하게 배제된 어른의 취향만으로 꾸며진 방.

그 한가운데에서 헨리가 고개를 푹 숙인 채로 혼이 나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어찌 앞으로 제국을 이끌어 나가겠습니까!”

“하지만 전 그냥…….”

헨리는 변명을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불과 얼마 전에 시험이 너무 어려웠다고 변명했다가, 방에 있던 장난감이 모두 버려지는 걸 보아야 했기 때문이다.


“다음 주에 다시 시험을 보도록 하지요. 그때까지 외출 금지입니다, 황자.”

“네에…….”

아이의 목소리에 울음기가 섞여 있었다.

황후는 조용히 몸을 숙여서 헨리를 끌어안고 등을 토닥이며 속삭였다.


“이게 다 황자 전하를 위한 일이에요. 어미의 마음 알지요?”

“네, 어머니.”

“그래요. 우리 황자가 잘할 것이라 믿습니다.”

밀리아는 헨리를 토닥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다음 주에 오도록 하겠습니다.”

“네, 어머니.”

헨리는 축 처져서 중얼거렸다.

문이 닫히자 헨리는 도도도 뛰어서 침대에 엎어졌다.

훌쩍거리는 소리가 잠깐 났다가 가라앉았다.

나타니엘은 가만히 헨리를 지켜보았다.


“용 님!”

그러다가 고개를 든 헨리와 눈이 마주쳤다.

인형인 척 눈을 감으려고 했지만 이미 늦었다.


“역시 절 위해 용 님께서 와 주신 거 맞죠?”

파란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나타니엘은 일단 헨리의 장단에 맞춰 주기로 했다.


[맞다, 네 소원을 들어주러 특별히 왔다.]

“와아! 진짜 제 소원을 들어주시다니.”

헨리는 폴짝폴짝 뛰면서 좋아했다.

나타니엘은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조용히 헨리에게 물었다.


[그래, 네 소원이 무엇이냐.]

“제 소원은 어마마마와 아나이스 누님이 화해하는 거예요!”

나타니엘은 순간 말을 잃었다.


“원래 저랑 누님이랑 어마마마랑 많이 놀았는데, 요즘은 누님 얼굴 보기도 힘들고…….”

시무룩한 얼굴로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는 헨리를 보며 나타니엘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통통한 앞발로 헨리의 손을 토닥여 주었다.

맑은 푸른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넓은 황궁에서 제 마음을 알아주던 사람은 아나이스 누님뿐이었다.

아나이스와 어머니 사이의 일을 아무것도 모르는 헨리로서는 둘이 싸웠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제 소원을 들어주실 수 있나요?”

[그런 소원은 들어줄 수 없다.]

나타니엘의 대답에 헨리는 눈에 띄게 실망했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을 보며 나타니엘은 재빨리 말했다.


[대신 아나이스가 널 보러 오게 해 줄 수는 있다.]

“어, 누님을요?”

[그래. 둘이 화해하게 만들 수는 없지만, 너와 놀 수 있게는 해 줄 수 있지.]

그러자 헨리의 얼굴이 펴졌다.

헨리는 그 정도면 충분했는지 씩씩하게 눈물을 닦아 내고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용 님.”

나타니엘은 작은 몸을 일으켜 날개를 파닥거렸다.

몸이 쉽게 돌아오지 않았다.

원래 이쯤 되면 돌아올 만도 했는데.

제이나가 걱정하고 있을 것 같아서 돌아갈까 하다가 마음을 고쳐먹었다.


[오늘 밤은 신세를 좀 져도 괜찮을까?]

“앗! 그럼요. 대신 시녀가 오면 자는 척하셔야 해요.”

나타니엘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피곤한 몸을 둥글게 말고 잠이 들었다.

* * *

금방 돌아가려 했던 나타니엘의 계획은 보기 좋게 실패했다.

몰래 나가려 하면 어떻게 알았는지 헨리가 눈을 뜨고 자신을 찾으며 울었기 때문이다.

하녀들이 오기 전에 그를 달래서 잠을 재우기를 반복했다.


‘피곤해.’

애 보기가 이렇게 힘든 거였구나.

나타니엘은 침대에 누운 채로 정면을 바라보았다.


“으음, 이건 이거랑 이걸 더해서…….”

헨리는 커다란 침대 위에 엎어져서 어른이 보기에도 어려워 보이는 두꺼운 책으로 공부하고 있었다.

열심히 이것저것 노트에 적어 보던 헨리는 곧 책 위로 쓰러졌다.


“우웅……. 어려워.”

[그건 그렇게 하는 게 아니다.]

결국 나타니엘이 마법으로 천천히 수식을 알려 주었다.

공중에서 화려하게 써 내려져 가는 수식을 헨리가 두 눈을 반짝이며 보았다.


“굉장해요.”

[별거 아니다.]

나타니엘은 앞발로 헨리의 손등을 톡톡 두들겼다.

그의 말뜻을 알아들은 헨리가 공책에 그가 알려 준 수식을 적어 내려갔다.

이걸 또 금방 이해하는 헨리는 평범한 축은 아니었다.

분명 천재라는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황성에는 인간의 상식을 아득히 넘어서는 나타니엘이 있었다.

누군가 알려 주지 않아도 모든 것을 스스로 깨우친.


“다 했다! 감사합니다, 용 님.”

[그럼 이제 놀아도 되는 건가?]

“내일 있을 음악 수업을 위해 복습을 해야 해요.”

그렇게 말한 헨리는 피아노 앞으로 향했다.

음악과는 거리가 멀었던 나타니엘은 호기심에 피아노 위에 앉았다.

헨리가 피아노를 배운다는 이야기는 들어 본 적 없었다.

애초에 황족들은 음악을 감상하지, 연주하는 사람들은 아니었으니까.


“용 님, 제 피아노 연주 들어 보실래요? 헤헤헤.”

나타니엘이 고개를 끄덕이자 헨리가 작은 손을 건반 위에서 움직였다.

처음에는 단순했던 음률이 점점 빨라지고 화려해지기 시작했다.

한껏 풍부해진 소리가 방 안을 가득 울렸다.

음 하나하나가 별처럼 반짝거리고 아름다웠다.

나타니엘은 음악에 대해 잘 몰랐지만, 헨리의 재능이 평범한 것이 아니라는 건 알 수 있었다.


“황자!”

갑자기 나타난 황후의 등장에 나타니엘은 재빨리 피아노 뒤로 몸을 숨겼다.

잔뜩 화가 난 그녀가 성큼성큼 걸어 들어와서 헨리의 어깨를 세게 쥐고 마구 흔들었다.


“이런 걸 연습할 시간에 한 자라도 공부를 더 하란 말입니다!”

“죄, 죄송해요, 어머니.”

조금 전에는 반짝거렸던 헨리가 순식간에 빛을 잃었다.

나타니엘은 하마터면 한숨을 내쉴 뻔했다.

황후의 잔소리는 한참 동안 계속되었다.


“이렇게 해서는 절대 황태자를 이길 수 없단 말입니다!”

“전, 형님을 이기고 싶지…….”

“황자!”

황후는 잔뜩 화가 나서 헨리의 뺨을 쳤다.

방 안에는 숨이 막힐 듯한 정적이 흘렀다.

곧 헨리가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렸다.


“흐, 으으……. 으아아아아앙!”

“화, 황자, 미안해요. 이 어미가 잘못했습니다. 울지 말아요. 때리려던 게 아니라…….”

당황한 황후가 헨리를 끌어안고 어떻게 해서든 울음을 멈추게 하려 애를 썼다.

하지만 그간의 설움이 복받친 헨리는 울음을 쉽게 멈추지 않았다.

나타니엘은 그 우울한 광경을 그저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