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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화. 꿈속의 그들은 (46/145)


46화. 꿈속의 그들은
2022.07.09.


후작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나는 그의 반응을 신경 쓰지 않고 소리를 쳤다.


“후작이 돌아가실 터이니, 기사들을 불러 밖에까지 모셔다드려라.”

내가 소리치자, 기다렸다는 듯이 기사들이 들어와 후작의 양팔을 들어 올렸다.


“제게 이러실 수는 없습니다, 전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라서 목에 핏대까지 세운 그를 보며 나는 낮은 목소리로 협박했다.


“이대로 나가지 않는다면, 아버지께서 아예 채굴을 그만두실 수도 있어. 그리고 대놓고 성명을 발표하실지도 모르지. 이게 전부 트레비아 후작과 황후가 자신들의 꼭두각시를 후처로 들이려 하기 때문이라고.”

“난 그런 생각을 한 적 없소!”

“하지만 후작.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네처럼 생각하지 않을 텐데?”

후작은 입을 꾹 닫았다.


“그 더러운 제안은 잘 들었지만, 난 거절하도록 하지. 모시고 나가거라.”

내 명에 기사들은 후작을 질질 끌고 나갔다.

그들 역시 후작이 황태자 부부에게 어떤 제안을 했는지 신문을 통해 알고 있었기에 태도가 거칠었다.

나는 그 뒷모습을 보다가 멀뚱히 서 있던 리나를 발견했다.


“가서 소금이나 좀 가져와서 방에 뿌리렴.”

“소금이요?”

“그래. 나쁜 기운을 쫓아내 주거든.”

그렇게 말하고 나는 후원으로 나왔다.

혼자서 산책로를 걸으면서 화를 가라앉히려 노력했다.


“하. 진짜 미친 거 아니야?”

어째서 나타니엘이 기를 쓰고 변신한 모습을 숨기려고 하는지 이제야 알겠다.

평민뿐만 아니라 귀족들마저도 그의 힘에 미쳐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사람을 저런 식으로 볼 수 있단 말인가?

내가 다 분해서 온몸이 떨렸다.


“제이나?”

나와 후작이 만난 이야기를 들은 건지, 나타니엘의 얼굴이 조금 상기되어 있었다.

그의 얼굴을 보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뭐, 뭐야? 왜 그래. 왜 갑자기 우는 건데?”

“우…… 흐윽. 몰라요, 다 나쁜 놈들뿐이야.”

창피해서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가까이 다가오는 달콤한 체향에 뒤로 물러서려는데, 나타니엘이 더 빨랐다.


“나 좀 봐 봐.”

“윽. 싫어요.”

지금 분명 엄청 못생겨 보일 텐데.


“왜? 못생겨 보일까 봐 걱정돼?”

“…….”

“제이나.”

차분한 목소리에 나는 가리고 있던 손을 내렸다.

나타니엘의 손이 얼굴을 들어 올렸다.

뺨에 닿은 서늘한 촉감에 기분이 좋아졌다.


“왜 이렇게 화가 나셨을까, 내 비께서.”

“장난치지 말란 말이에요.”

손바닥에 기대서 열기를 식히던 나는 그를 노려보았다.

재밌다는 듯이 웃으며 나타니엘이 말했다.


“그렇게 노려봐도 웃기기만 한 거 알지?”

“아, 진짜! 하지 말라니까요.”

진짜 얄밉기 짝이 없다.

가끔 저런 식으로 속을 긁을 때면 약이 바짝 올랐다.

그는 내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더니 미소 띤 얼굴로 물었다.


“후작이 와서 뭐라고 했지?”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더러운 이야기를 굳이 당사자인 나타니엘에게 전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내 핏줄을 널리 퍼뜨려 제국을 이롭게 해야 한다는 괴상한 논리를 펼친 거 아냐?”

그의 말에 가라앉았던 화가 울컥 올라왔다.


“그게 말이나 된다고 생각해요? 그 아저씨, 완전히 미친 사람이야. 그렇게 널리 이롭게 하고 싶으면 여자 좋아하는 폐하께나 그리하라고 하면 되잖아요.”

이 상황이 너무 이상하고 기괴하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소리를 할 줄 알았어요?”

“어렸을 때도 내 앞에서 그런 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니까.”

“노망난 인간들인가. 애 앞에서 못 하는 말이 없어.”

나는 참았던 욕설을 전부 쏟아 냈다.

중간에서 관망만 하던 황제, 대체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는 황후, 게다가 미친 짓을 종용하는 후작까지.

한바탕 퍼붓고 나니까 조금 후련해졌다.

그런데 나타니엘은 싱글벙글했다.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듯한 표정에 나는 어이가 없었다.


“뭐가 좋다고 그렇게 웃어요?”

“응? 아아, 내 걱정을 해 주는 사람은 오랜만이라.”

나타니엘의 귀 끝까지 붉어졌다.

그 와중에도 정말 기쁜지 활짝 웃고 있었다.

어쩐지 민망해졌다. 나는 재빨리 말을 돌렸다.


“아직 식사 전이죠? 가서 맛있는 거나 먹어요.”

그의 부드러운 손을 잡고 궁으로 돌아갔다.


 

* * *

황태자궁에서 쫓겨난 후작은 이를 아득 갈았다.

제이나가 물 한 컵을 전부를 뿌린 탓에 머리부터 윗옷까지 전부 젖었다.

지나가는 사용인들이 힐끔거리자 후작은 얼굴이 달아올랐다.

분명 이대로 나가면 소문이 날 것이다.

그는 황후궁으로 향했다.

밀리아는 푹 젖은 아버지를 맞이했다.

그녀에게 후작은 여전히 껄끄러운 존재였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에요?”

“옷을 좀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이 꼴로는 도저히 돌아갈 수가 없을 것 같으니.”

수건으로 몸을 닦던 후작은 몸이 으슬으슬한 것을 느꼈다.

황후궁은 매우 시원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나쁘지 않은 정도의 온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래도 황후궁은 꽤 시원합니다.”

“윈터스 공작가에서 궁은 특별히 신경 써 준다고 하더군요. 황태자비가 그 가문 출신이니 더 그럴 테지만요.”

“그렇군요.”

말만 그렇게 한 것이지, 사실상 제국에서 공작가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 보여 주는 일이었다.

후작은 자신의 마음속에서 윈터스 공작에 대한 평가를 바꿨다.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곰 같은 우직함을 가진 자가 아니었다.

자신이 가진 무기를 아주 적당히 사용하고, 그것으로 국민의 마음을 휘두를 줄 아는 여우 같은 인간이었다.


“여기요. 어디서 물이라도 맞으셨어요?”

황후는 하인을 통해 받아 온 재킷을 후작에게 건넸다.

옷을 갈아입고 나자 추위가 몰려왔다.

밀리아는 따뜻하게 데운 술을 후작에게 내어주었다.

그는 단숨에 한 잔을 비우고 침통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하, 그 황태자비가 아주 당돌하더군요. 건방지게 감히 내 앞에서 새파랗게 눈을 뜨고 뭐라 했는지 아십니까?”

제이나의 이름이 나오자 황후는 슬쩍 미소를 지었다.


“그 애에게 다녀오신 거예요?”

“그래. 말이 통하는 아이일 줄 알았더니 전혀 아니더구나.”

“그 정도는 예상했답니다. 이제 다음 계획으로 넘어갈 차례네요.”

“다음 계획?”

“예.”

밀리아는 자신도 술잔을 기울이며 중얼거렸다.

앞으로의 계획을 위해 아직은 아버지가 필요했다.

그녀가 후작에게 아직 알려 주지 않은 것이 있었다.


“디에스 기사단이요.”

“폐하!”

후작은 화들짝 놀라며 주변을 살폈다.

그러고는 목소리를 낮추고 몸을 숙였다.


“그 이름을 함부로 꺼내면 안 된다고 제가 몇 번이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들의 힘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때처럼요.”

후작은 잠시 망설이다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들은 아무 때나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때는 저희와 이해관계가 맞아서 나타난 거고요.”

“그럼 이쪽에서 부를 방법이 아예 없다는 겁니까?”

“예.”

황후는 입술을 꾹 닫았다.

이렇게 되면 조금 곤란했다.

밀리아는 후작을 다그쳤다.


“그래도 그들의 힘이 필요합니다. 그 비슷한 자들의 힘이라도 필요해요.”

“일단 수소문을 해 보겠습니다만, 어려울지도 모릅니다.”

후작이 이 정도로 말하는 것이라면 정말로 어려울 수도 있었다.

황후는 다른 방법을 고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 * *

온몸이 물에 젖은 것처럼 무거웠다.

막시밀리안은 본능적으로 이것이 그 ‘꿈’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지난 반년 동안 지겹도록 꾸어 온 꿈.

처음에는 불안이 표현된 것이라 믿었다.

그다음에는 자신이 예지몽을 꾼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꿈이 반복될수록, 막시밀리안은 이것이 단순한 꿈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아아…….”

막시밀리안은 바닥에 주저앉았다.

하얀 얼굴의 테레사는 이번에도 그 관 안에 누워 있었다.

그녀가 가장 사랑했던 백합에 둘러싸여 눈을 감고 있었다.


“전부 네 탓이야! 뻔뻔하게 어디서 기어들어 와!”

막시밀리안은 말이 나오지 않았다.

테레사가 불치병에 걸렸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관심을 받으려 거짓말을 하는 줄 알았다.

테레사가 자신의 방문을 거절했을 때도, 그의 보호자라며 황태자가 자신을 밀어낼 때도.


“어째서…….”

‘왜 테레사가 죽은 거지?’

막시밀리안은 비척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전히 살아 있을 때처럼 아름다운 그녀를 보자 현실이 믿기지 않았다.

창백한 뺨에 손을 얹었지만 부드럽고 따스했던 감촉이 더는 느껴지지 않았다.


“이럴 리가 없어. 이렇게…… 이렇게 죽었을 리가.”

막시밀리안은 테레사의 몸을 끌어안았다.

부드러운 음성도, 따뜻한 온기도 남아 있지 않은 것이 믿기지 않았다.


“저 미친 새끼 끌어내! 여기가 감히 어디라고!”

메니실 가문 사람들이 달려들어 막시밀리안을 테레사에게서 떼어 냈다.

막시밀리안은 혹여 테레사의 몸에 손상이 갈까 순순히 물러났다.

성당에서 쫓겨난 그는 계단에 주저앉았다.

몸은 막시밀리안의 의지와 상관없이 움직였다.

그리고 감정 역시 의지와 상관없이 밀어닥쳤다.

심장이 뜯겨 나간 듯한 상실감, 망망대해에 홀로 던져진 듯한 외로움.

자신을 믿어 준 든든한 버팀목이 무너지자 막시밀리안의 몸은 공허함에 가라앉았다.


- 넌 항상 네 생각만 하는구나.

언젠가 제이나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막시밀리안은 테레사가 죽은 지금도 홀로 남겨진 자신의 기분만을 살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대로 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

분명 다른 방법이 있을 것이다.

테레사는 이렇게 죽을 사람이 아니었다.

누구에게나 상냥하고, 누구에게나 사심 없이 다가갔던 테레사가 이렇게 죽을 리가 없었다.


“분명 뭔가가 잘못된 거야.”

막시밀리안은 그 길로 가문도, 이름도 버리고 정처 없이 떠돌기 시작했다.

어쩌면 스스로를 벌하기 위함이었을지도 모른다.

* * *


 


“허억!”

막시밀리안은 눈을 뜨자마자 몸을 일으켰다.

침대에서 내려와 머리맡에 있던 물을 단숨에 들이마셨다.


“하아…….”

이렇게 선명하게 처음부터 끝까지 기억이 나는 꿈은 처음이었다.

아직도 손에 닿았던 서늘한 감각이 생생하다.

꿈속에서의 막시밀리안은 소름이 끼칠 정도로 테레사에게 잔인하게 굴었다. 그녀의 의사를 무시하고 자신의 감정을 밀어붙일 때도 있었다.

그 끝이 잘못 없는 테레사의 죽음이라는 사실이 막시밀리안의 숨통을 조여 왔다.

전부 제 탓이다.

어스름 밝아 오는 창밖을 보던 막시밀리안은 외투를 챙겨 입고 급하게 밖으로 나왔다.

마침 수도에 있어서 다행이었다.

막시밀리안은 언제나처럼 메니실 가문의 저택이 보이는 자리에서 테레사가 나오길 기다렸다.


‘오늘은 좀 늦는데…….’

테레사가 시녀가 되어 궁에 출근하는 날이 많아졌다.

그 덕에 시간을 잘 맞추면 테레사의 모습을 멀리서나마 볼 수 있었다.

이런 자신의 모습이 징그럽다고 말해도 할 말이 없었다.

몇 달째 그 꿈에 시달리면서, 막시밀리안은 테레사의 안위가 걱정되어 참을 수가 없었다.

제이나가 돌봐 준다고는 했지만 지금은 자기 앞가림하기도 버거울 것이다.

그렇게 바쁜데 테레사를 꼼꼼히 봐줄 거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오늘은 좀 늦게 나가나 보네.’

막시밀리안은 초조한 표정으로 문을 다시 확인했다.

그때 누군가가 뒤로 훅 몸을 잡아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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