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황태자의 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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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화. 황태자의 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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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화. 황태자의 의무
2022.07.06.
나타니엘의 말에 아무도 반박하지 못했다.
모두 그가 정말로 한다면 하는 성격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죽이겠다는 것도 아니고, 생식 능력을 없애 버리겠다니.
이보다 더 무서운 것은 없었다.
심지어 그 트레비아 후작마저 조용했다.
황제는 보란 듯이 그를 보며 웃었다. 드디어 저 도도한 후작의 콧대를 밟아 주었다는 생각에 웃음이 사라지지 않았다.
“다른 의견은 없는가? 그럼 이번 회의는 여기서 끝내도록 하지.”
황제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드디어 자신의 아들이 정계에 전면으로 나섰다.
* * *
회의가 끝나고, 귀족들은 트레비아 후작을 중심으로 급하게 모였다.
“이 일에 황태자 전하께서 말을 얹었으니 이제 끝 아닙니까?”
발터 백작은 불안한 듯 양손을 비볐다.
일이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더 복잡하고 어렵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들을 향한 시선도 점점 곱지 않았다.
용에 대한 신앙만큼은 투철한 제국민이었으나, 도덕적 거부감과 뜨거운 날씨를 이길 수는 없었다.
“황제 폐하의 자식인데 어찌 저렇게 여자에 무관심할 수 있습니까?”
다른 귀족 하나가 투덜거렸다.
트레비아 후작은 잠시 고민하더니 입을 열었다.
“황태자 전하를 설득 못 한다면, 다른 사람을 설득하면 됩니다.”
“다른 사람을요?”
“예. 전하를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은 사람은 지금 단 한 명이지 않습니까.”
“설마, 비 전하를요?”
발터 백작의 말에 후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지만, 후작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너무 무리한 요구 아니겠습니까?”
“이건 모두 제국을 위한 일입니다.”
몇 번이고 후작은 황태자비를 직접 설득시켜야 한다며 사람들을 선동했다.
하지만 반응이 영 시원치 않았다.
‘후작도 슬슬 은퇴할 때가 되었군.’
그도 그럴 것이, 황태자비가 그런 제안을 받아들일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 바닥에서 너무 오래 버티면, 자기가 신이라고 믿게 된다.
당연한 일이었다.
주변에는 그에게서 떨어지는 콩고물을 주워 먹으려는 사람들이 그득하니, 그가 말만 하면 대부분이 이루어졌다.
심지어 후작은 황제의 스승이었기에 황제도 그의 의견을 마냥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 누구도 트레비아 후작의 말에 반대하지 않았다.
후작을 제외한 다른 귀족들은 조용히 눈빛을 교환했다.
노장의 은퇴 시기가 다가온 것이다.
* * *
카시안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비장한 목소리로 외쳤다.
“부인은 제이나 하나뿐이다. 본인 목숨이 아니라고 내게 여자를 들이밀면, 그 가문의 대를 끊어 주지, 라고 말하셨대요.”
“으아아악! 그만 좀 해요, 카시안.”
내 반응에 카시안은 깔깔거리며 웃었다.
테레사는 그런 카시안의 등을 가볍게 치며 흘겨보았다.
“그만 놀려, 카시안.”
“하, 하하하. 그 황태자 전하께서 그런 말을 할 줄 누가 알았겠어.”
나는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물론 나타니엘이 날 위해 나서 준 건 정말 기뻤다.
그가 정면에 나서 준 덕에 말도 안 되는 요구가 많이 줄어들었다.
기세등등했던 트레비아 후작파가 한풀 꺾이면서, 그간 그들이 막아 왔던 사업도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아무리 봐도 황제 폐하가 손해를 제일 적게 보신 것 같아요.”
내 투덜거림에 테레사와 카시안은 어색하게 웃었다.
황제가 본 손해라고는 귀족파와 윈터스 공작가 사이에서 약간 곤란해진 것밖에 없었다.
공작가는 나와 내 자리를 지키기 위해 어마어마한 손해를 감수하고 마석 생산량을 줄이고, 귀족파의 정반대에 섰다.
“뭐, 여태껏 폐하께서 해 온 정치가 그랬으니까요.”
자신의 손은 더럽히지 않고, 약간의 비굴함만을 통해 온전한 이득을 얻는 것.
그것이 황제가 잡음을 적게 하며 제국을 운영하는 방식이었다.
어쩐지 황제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난 기분이 들어 기분이 가라앉았다.
“하지만, 폐하께서 아무것도 잃지 않은 것은 아니에요.”
내 얼굴을 본 테레사는 조용히 말했다.
“아마 이번 일로 많은 귀족이 비 전하와 똑같이 생각했을 테니까요. 일을 하는 것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건 서로 간의 신뢰 아니겠어요?”
“정치에 신뢰가 필요할지 모르겠어.”
회의적인 내 태도에 테레사는 방긋 웃으며 말했다.
“아무리 이성적으로 행동하려 해도, 결국 사람은 감정의 동물이죠. 언젠가 이 일이 어떠한 형태로 돌아올 거예요.”
“와, 방금 엄청 위험한 발언이었어, 테레사.”
카시안의 말에 부끄러운 듯, 테레사는 찻잔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우리는 그런 그녀를 보며 장난을 치면서 웃었다.
“그나저나, 비 전하는 황태자 전하의 어떤 부분에 반하신 거예요?”
“응?”
카시안의 질문에 나는 눈을 데굴 굴렸다.
어떤 부분에 반했다고 하기에는 어려웠다. 지난밤, 몇 번의 입맞춤을 하고 나자 얼굴만 보면 두근거리던 것이 많이 가라앉았다.
나타니엘의 표정도 묘했는데, 우리는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조용히 등을 돌리고 잠이 들었다.
‘그냥 스킨십이 좋았던 건가?’
연애를 해 본 적 없는 나로서는 기분이 좋은 것과 상대를 좋아하는 것을 구분하기 어려웠다. 그렇다고 내 감정을 급하게 정하고 싶지도 않았다.
‘이게 바로 우정 이상, 사랑 미만. 그런 건가?’
나타니엘 역시, 우리의 미묘한 관계를 인정하듯 아침에 조용히 나가 버렸다.
“비 전하?”
카시안의 목소리에 상념에서 깨어난 나는 하녀가 방문을 두들기는 소리를 들었다.
“들어와.”
문을 열고 들어온 하녀는 허리를 숙이며 말을 전했다.
“비 전하, 트레비아 후작님께서 뵙기를 청하십니다.”
“후작께서?”
갑작스러운 일정이었지만, 그가 언젠가 찾아올 것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금방 내려가겠다고 전하고 응접실로 안내하렴.”
“네.”
난 하녀를 물린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시안과 테레사가 날 걱정스러운 눈으로 보았다.
“진짜 괜찮으시겠어요?”
그들 역시 트레비아 후작의 악명은 잘 알고 있었다.
권력을 위해 자신의 딸을 지옥 불에 집어 던진 남자.
황후가 저렇게 미쳐서 날뛰는 데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황제와 그 아버지가 있었다.
“뭐, 일단 만나 보게요. 오늘은 먼저들 들어가요.”
불안한 표정의 그들을 돌려보내고 나는 응접실로 내려갔다.
문을 열자 눈을 감은 채로 열기로 식히고 있던 후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황태자비 전하.”
“처음 보는군요, 트레비아 후작. 이쪽으로 앉도록 해요.”
그는 시원한 이곳이 마음에 드는 눈치였다.
다른 곳은 마석이 부족하겠지만, 적어도 내가 있는 궁은 아니었다.
아버지께서는 항상 차고 넘칠 정도로 보내 주셨으니까.
“이 늙은이를 환대해 주셔서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비 전하.”
“누가 오더라도 그리하였을 겁니다.”
이 말은 트레비아 후작을 특별히 생각하지 않는다는 의미였다.
후작의 미소 띤 입가가 꿈틀하는 것 보며 나는 뿌듯함을 느꼈다.
우리 앞에 은은한 향의 홍차가 놓였다.
나는 차를 마시며 그가 말을 꺼내기를 기다렸다.
“제가 왜 이곳에 왔는지 아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비 전하.”
“죄송하지만, 저희 가문은 정치에 그리 관심이 없어서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오셨는지 도저히 모르겠는걸요?”
또 뻔한 수작질이었다.
자기 입으로 천박한 이야기를 말하고 싶어하지 않아 돌려 말하는 건 딱 질색이다.
“나타니엘 전하께서 얼마나 위대한 힘을 가지고 태어났는지 알고 계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잠시 망설이던 후작은 그럴듯한 말로 포문을 열었다.
“물론이죠. 황실에서는 아주 오랜만에 태어난 고대 용의 핏줄인걸요.”
그것도 아주 아주 귀여운 핏줄이지.
나는 가슴을 쭉 펴고 후작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 핏줄이 몇 년 만에 나오신 줄 아십니까?”
그럴 리가.
애초에 그런 것에 관심이 그리 많지 않았다.
내가 말이 없자, 후작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역시 아무 생각이 없으시군요. 이백 년 만입니다. 약 다섯 세대 만에 태어나신 분이죠.”
후작의 눈이 광기를 닮은 열망으로 번뜩였다.
어쩐지 기분이 나빠졌다.
꼭 미친놈을 마주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 제국은 용의 도움으로 새워진 신성한 제국입니다. 건국 초기에는 많은 황제가 용의 힘을 타고났지요.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힘을 가진 자들이 태어나는 주기가 점점 길어졌습니다.”
후작은 목소리를 낮춰 내게 속삭였다.
“그리고, 어쩌면 나타니엘 전하께서 마지막 용의 후손일지도 모릅니다.”
“그래서요?”
“아직도 모르시겠습니까? 황태자 전하께서 용의 핏줄을 이어받은 후손을 만들 의무가 있다, 이 말입니다.”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개소리지?
나는 너무 어이가 없어서 후작의 얼굴을 빤히 보았다.
내 경멸 어린 눈빛을 모르는 듯, 후작은 자신만의 사상에 취해 연극하듯 말을 늘어놓았다.
“비 전하께서는 그 힘을 못 보셔서 그러신 겁니다. 모든 생명을 짓밟을 수 있는 압도적이고 아름다운 그 힘을.”
나타니엘은 그 힘을 주로 나 몰래 단걸 훔쳐 먹는 데 쓴다.
요즘 너무 많이 먹어서 이가 썩을까 봐 걱정인데…….
“그러나 그 힘이 다음 대에 발현될 확률은 아주 적습니다. 황제 폐하를 보십시오, 그렇게 많은 씨앗을 뿌려댔는데 얻은 진짜는 나타니엘 전하 하나뿐이지 않습니까.”
“진짜…… 라고요?”
단어 선택 하나하나가 저급하기 짝이 없었다.
“네. 그러니 최대한 많은 여자에게 씨를 뿌려 그 힘을 가진 아이가 태어나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나타니엘 전하의 탄생만으로 주변국들이 제국의 눈치를 얼마나 보는지 보십시오!”
“제국은 원래부터 강대국이었네만.”
“아닙니다, 달라요. 만일 나타니엘 전하 같은 힘을 가진 사람에 제국에 넷이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제국은 이 대륙을 지배하고도 남을 겁니다.”
내게 나타니엘의 자식이 가질지 모를 힘에 대해 예찬하는 후작의 표정은 열정적이고 꿈으로 가득해 보였다.
하지만 내 얼굴은 점점 차갑게 식어 갔다.
“자네, 지금 내게 후처의 필요성을 설명하러 온 겐가?”
더 이상의 존대는 없었다.
내 날카로운 음성에 후작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트레비아 후작가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겠습니다. 만일 비 전하께서 황태자 전하의 후처를 받아들이신다면, 지금의 자리는 물론이고 황후의 자리까지 보장해 드리겠습니다.”
“그 말은 언제고 반역을 할 수 있다는 뜻인가?”
트레비아 후작은 내가 강하게 나올 줄 몰랐는지 살짝 놀란 눈치였다.
놀란 쪽은 오히려 이쪽인데.
“그런 말이 아닌 걸 아시지 않습니까? 비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이 노신의 말을 그리 곡해해서…….”
“곡해라……. 내 귀에는 그저 고귀한 용의 힘을 노리고, 황태자를 종마처럼 여기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데?”
“종, 종마라니요!”
“그럼 황태자가 명확하게 의사를 밝혔는데 어찌하여 다른 여자를 들여야 한다고 주장한단 말인가? 나는 전하께서 나 외에는 필요 없다 하셨다고 들었네만.”
나는 트레비아 후작이 매우 논리적이고, 제국을 위해 목숨을 내어놓을 인물이라 들었다.
하지만 막상 말을 해 보니 그저 자신의 이상을 위해 남을 멋대로 휘두르려 하는 안하무인 그 자체였다. 나라면 절대 옆에 두지 않을 타입의 사람이었다.
“후작은 생각했던 것보다 편협하고 한심한 사내로군. 이만 나가 보도록 하게.”
“지금 무엇이라 하였습니까! 제국을 위한 제 충심을……!”
“그렇게 용의 힘이 탐나거든 전하를 만든 황제 폐하께 새로운 여자를 붙이면 되는 거 아닌가?”
내 말에 후작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아마도 화를 참지 못해 저러는 것이리라.
“위대한 힘을 지닌 자는 그 힘을 널리 퍼뜨려야 할 의무……!”
나는 내 앞에 있던 컵을 들어 그의 얼굴에 물을 뿌렸다.
더는 저런 저질스러운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당장 나가게. 그 입에서 나오는 추저분한 이야기를 더 들으면 내 귀가 더럽혀질 것 같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