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아니, 해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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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화. 아니, 해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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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화. 아니, 해야겠어요
2022.07.02.
언제나처럼 하녀들에게 한바탕 시달리고 침실로 들어가자, 평소와 다른 향기가 났다.
‘뭐지?’
적당히 상쾌하고 달콤한 과일 향이 방 안을 채웠다.
게다가 조명도 은은하게 바뀌어서 어딘지 모르게 분위기가 이상했다.
“어, 음. 나타니엘?”
나는 일단 문을 닫고 더 안쪽으로 들어갔다.
테라스 근처에 앉아 있던 나타니엘이 내 말에 고개를 돌렸다.
“거기서 뭐 해요?”
“그냥, 이게 누구의 짓일지 생각해 보고 있었다.”
나타니엘은 말을 하며 평소에 입던 가운을 가리켰다.
아니, 그건 평소에 그가 입던 도톰하고 부드러운 그 가운이 아니었다.
내가 입은 슈미즈와 별반 다르지 않은 두께의 하늘하늘하고 얇은 천으로 만든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옷 기능의 절반 정도만 충실한 것도 똑같아 보였다.
반투명한 천 아래로 근육질의 상체가 도드라졌다.
‘이게 보일 듯, 안 보일 듯…….’
문득 하녀들이 첫날밤 호들갑을 떨었던 말의 진면목을 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딜 보는 거지?”
“예?”
나타니엘은 눈을 가늘게 뜬 채로 내게 한 발짝 다가왔다.
“부인, 생각보다 밝히는군.”
“뭐, 뭐예요? 그런 거 아니거든요.”
“진짜?”
그의 손이 뺨에 닿았다.
서늘하고 부드러워서 느낌이 좋았다. 반사적으로 손바닥에 뺨을 비비자 그가 작게 웃었다.
“제이나.”
나타니엘이 내 이름을 부르며 허리를 낚아챘다.
바짝 닿은 숨결이 달콤하고 부드러웠다. 가까워지는 눈동자를 보며 난 눈을 질끈 감았다.
그래, 언젠가는 이런 일이 벌어질 거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아무것도 안 하고 평생 살 수는 없으니까.
나는 비장한 각오로 손에 힘을 주었다.
쪽, 하는 남사스러운 소리가 크게 들렸다.
그 뒤로 별일이 생기지 않아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정면을 바라보았다.
마주친 나타니엘의 얼굴에는 여전히 여유가 가득해 보였다.
왠지 얄미웠다.
“뭐예요, 장난이나 치고. 난 엄청 떨린단 말이에요.”
퉁명스러운 내 말투에 나타니엘은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생각해 보니 내가 내 무덤을 판 것 같았다.
나타니엘은 이제 익숙해져서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보였는데.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
나타니엘이 침대에 털썩 앉으며 웃었다.
유려한 선을 가진 팔이 내 손을 잡아끌었다.
부드럽지만 단호한 손길에 그가 앉은 침대 앞으로 끌려갔다.
나타니엘은 내 손바닥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나만 떨리는 줄 알았거든.”
사르륵 접히는 눈꼬리가 요망하게 빛났다.
“뭐, 무슨…….”
그의 입술이 닿았던 자리에서부터 열기가 화르륵 올라와 온몸으로 퍼졌다.
“너무 그렇게 긴장하지 마.”
나타니엘은 그대로 얼어붙은 나를 앞에 두고 큰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에게 놀림당했다는 사실에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하다 하다 용용이한테 당하다니!
“자꾸 그러면 나도 더 긴장되잖아.”
나타니엘은 침대에 길게 누워 내 쪽을 바라보았다.
마치 의도된 것처럼 벌어지는 가운 사이로 탄탄한 상체가 보였다.
“장난에 이제 안 속거든요.”
“장난 아닌데.”
나타니엘은 내 손을 휙 잡아 침대에 눕혔다.
그가 내 위에서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내가 이야기하지 않았나?”
부드럽고 달콤한 향기 때문에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아니, 날 빤히 보고 있는 눈 때문이었나?
그것도 아니면 저 부드러운 입술?
나타니엘은 내 손을 자신의 심장 위에 올렸다.
빠르고 뚜렷한 두근거림에 나는 멍하니 그의 얼굴을 보았다.
그가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나만 이런 거면 좀 화가 날 것 같았거든.”
“으, 으아아악!”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방의 구석으로 도망쳤다.
저건 나타니엘이 아니다.
내가 아는 용용이는 자기 멋대로에 애 같고, 짜증도 많은 데다가…….
하여튼 저런 달콤한 말을 할 줄 아는 남자는 절대 아니었다.
“뭐야, 왜 도망치는 건데?”
나타니엘은 갑자기 자신을 밀치고 구석으로 도망쳐 버린 나를 보며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오, 오늘은 따로 잘래요.”
“뭐?”
“내가 안 되겠어요. 제가 소파에서 잘 테니까, 나타니엘은 침대에서 편하게 자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나타니엘은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두 눈을 번뜩였다.
어둠 속에서도 선명하게 빛나는 눈빛에 등골이 서늘했다.
나는 바닥에 굴러다니는 담요를 주워서 몸에 돌돌 말고 소파에 길게 누운 뒤 눈을 감았다.
침대에서 내려온 나타니엘이 성큼성큼 걸어와서 날 번쩍 안아 들었다.
“으악, 으아악!”
그리고 침대에 휙 집어 던졌다.
나는 데굴데굴 굴러서 침대에서 나와 나타니엘에게서 멀어졌다.
“피, 필요에 의한 잠자리이니 적당히 흉내만 내면 되잖아요.”
내 말에 나타니엘의 미간이 콱 구겨졌다.
오랫동안 죽어 있던 촉이 말하고 있었다.
저건 진짜 화가 난 거다.
아니, 대체 왜?
“한심한 소리 하지 말고 당장 들어와, 제이나.”
“네에…….”
힘없는 사람답게 나는 재빨리 나타니엘의 말에 따랐다.
침대에 얌전히 눕자 나타니엘이 날 품에 끌어안았다.
등을 토닥이는 손길에 싱숭생숭했던 마음이 조금 가라앉았다.
“부담스러운가?”
“아니요.”
나는 그의 시선을 피해 등을 돌렸다.
“솔직히 말해 봐. 갑자기 이러는 이유가 뭔데?”
뭐라 말하기 힘들었다.
친했던 친구가 갑자기 어른이 되어 버린 느낌이었다.
“제이나.”
“저도 잘 모르겠어요.”
나는 작은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뭘?”
목 뒤가 화르륵 뜨거워지는 게 느껴졌다.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내 몸을 돌린 나타니엘이 손을 뻗어 턱을 들어 올렸다.
“나타니엘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요.”
차마 시선을 맞출 수 없었다.
그가 좋긴 좋았다.
절대 싫은 건 아니었다.
남에게 빼앗기는 것도 싫었고, 그의 비밀을 남과 공유하고 싶지도 않았다.
일종의 소유욕을 느꼈는데, 그게 진짜 애정 때문인지 아니면 나타니엘을 애완동물로 생각해서 그런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날 어떻게 생각하는데?”
“귀, 귀엽다고…….”
괜히 내 무덤을 파는 것 같아서 나는 입을 다물었다.
나타니엘은 예상외의 대답에 당황한 얼굴이었다.
목덜미도 붉고, 귀 끝도 빨갛게 변했다.
“귀엽다니, 대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야.”
부끄러우면 얼굴색은 멀쩡하고 다른 곳이 붉어지는구나.
낭패감 어린 그의 얼굴은 처음이어서 나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부드러운 뺨을 지나 그답지 않게 열이 올라 붉어진 귀를 손끝으로 매만졌다.
“읏, 하지 마.”
간지러운지 미간을 구기며 뒤로 물러서려는 나타니엘을 붙들었다.
더 자세히 보고 싶었다.
조금만 더 가까이서 보면, 내가 그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제이나, 얼굴이 너무 가깝다.”
“키스해 봐도 돼요?”
“뭐?”
나타니엘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생각해 보니 내 주도로 제대로 된 스킨십은 해 본 적 없었다.
늘 어린애 장난하듯 가벼운 입맞춤만 했지.
“키스해 보면 이게 어떤 감정인지 알 것 같아요.”
“잠, 잠깐만.”
“아니, 해야겠어요.”
“잠, 으읍!”
나는 나타니엘의 양 볼을 꼭 잡고 그대로 입술을 부딪쳤다.
슬쩍슬쩍 닿았을 때 느꼈던 것보다 더 부드러웠다.
그의 다른 곳과 달리 체온이 높아서 그런지 묘하게 현실감이 없었다.
살짝 닿았다가 떨어지자 입술 사이로 뜨거운 열기가 밀려들어 왔다.
등골이 오싹할 정도의 쾌감이 전신을 훑었다. 나를 바라보는 붉은 눈이 열기로 일렁거렸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나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고 그의 목에 손을 둘렀다.
바짝 다가온 서늘한 체온과 허리를 단단히 감싸 안는 손길에 정신이 마비가 되는 것 같았다.
우리는 원래의 목적도 잊어버린 채로 오랫동안 입을 맞췄다.
* * *
아침부터 귀족 회의가 열렸다.
그토록 회의가 열리길 원했음에도 집결한 모두의 얼굴은 어두웠다.
몇몇은 체통에 맞지 않게 상의를 벗고 셔츠 소맷자락을 걷은 채 의자에 늘어져 있었다.
회의장은 모여 있는 사람들의 열기로 후끈 달아올라 있었다.
“황제 폐하께서 입장하십니다.”
시종의 우렁찬 호명에 귀족들은 정신을 차리고 자리에 일어났다.
다들 정계에서 내로라하는 인물들이었으나 오늘은 평소의 패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후우, 오늘은 정말 덥군. 그나저나 윈터스 소공작은 참석 안 하나?”
“소공작은 아침에 공작의 상태를 봐야 할 것 같아 불참할 것이라고 전령을 보냈습니다.”
“그렇군.”
황제는 이마를 구기며 자리에 앉았다.
적당한 온도를 유지하는 데 이용되던 마석의 공급 부족으로 평소보다 회의장 안의 온도가 높은 탓이었다.
“오늘 안건은 자네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짖, 아니 부르짖어 댄 나타니엘의 후처에 관한 일이네.”
귀족들은 황제의 말에 기쁜 표정을 숨기려 애를 썼다.
이렇게 더운 날씨에 여기까지 온 보람이 있었다.
그래도 누가 먼저 이야기를 꺼낼지 눈치를 보았다.
그 일 때문에 분위기가 영 좋지 못했기 때문이다.
황제는 주변을 훑고 예상대로 누구 하나 말을 꺼내지 못하는 현실에 흡족하게 웃으며 폭탄을 던졌다.
“아무래도 우리끼리 멋대로 정할 일은 아닌 거 같아서 말이야. 내 직접 나타니엘을 불러왔네.”
황제의 말에 귀족들의 눈은 터질 것처럼 커졌다.
그들의 얼굴 위로 식은땀이 줄줄 흐르기 시작했다.
뚜벅뚜벅, 발소리에 맞춰 한기가 밀려왔다.
회의장 안에 있던 대부분의 귀족은 몸을 떨기 시작했다.
본능적인 공포 때문이었다.
나타니엘은 황제의 옆에 섰다.
그리고 좌중을 훑었다.
“오랜만이군, 몇몇은 처음인가?”
누구 하나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회의장은 더위에 지쳐 가빠진 숨소리만 가득했다.
나타니엘은 이전에 몇 번 회의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
그때 그의 심기를 거스른 귀족들은 아직도 정계에 복귀하지 못하고 있었다.
절대적인 존재에게서 느껴지는 압도적인 위압감.
그것으로 거의 정신이 나가 버렸기 때문이다.
“내게 할 말이 있다고 들었는데, 아니면 그만 돌아가도록 하지.”
전체 귀족 회의에 올라온 안건은 반드시 그 회차에 결론을 내려야 했다.
이 자리에서도 결론이 나지 않으면 이 안건은 끝이었다.
그 순간, 트레비아 후작이 다시 한번 나섰다.
“이렇게 전하께서 모두의 앞에 나서셨으니 다행입니다. 한 번 더 설득하지 않아도 되니 말입니다!”
그러나 후작은 말을 더 할 수 없었다.
나타니엘이 마법으로 그의 입을 막아 버린 탓이었다.
당황한 후작이 입만 벙긋거리는 것을 본 그는 비웃으며 황제 옆에 섰다.
“저, 전하, 이번 사안에 대해서 좀 더 진지하게…….”
발터 백작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나타니엘은 무심하게 휙 손을 휘둘렀다.
귀족들이 둘러앉아 있던 거대한 대리석 탁자가 반으로 쪼개졌다.
겨우 입을 열었던 귀족들은 다시 꿀 먹은 벙어리가 된 것처럼 말이 없었다.
그들을 둘러본 나타니엘이 비웃음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부인은 제이나 하나뿐이다. 본인 목숨이 아니라고 내게 여자를 들이밀면, 그 가문의 대를 끊어 주지.”
그로반 남작가의 일을 떠올린 귀족들은 모두 입을 꼭 닫았다.
좌중을 살펴본 나타니엘은 그대로 몸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