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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화. 뜨거운 나날 (43/145)


43화. 뜨거운 나날
2022.06.29.



“드, 들어와요.”

목소리가 새끼 염소처럼 나왔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나타니엘은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차림새였다.

비장할 정도로 준비를 한 나와 비교돼서 괜히 짜증이 났다.


“뭐야, 왜 그러는 건데?”

“묻지 마요.”

나타니엘은 침대에 앉아서 내 얼굴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대체 왜 이렇게 떨고 있는 거야.”

“떠…… 떨긴 누가 떨었다고 그래요.”

망할. 또 목소리가 새끼 염소처럼 나왔다.

혼자서 목소리를 가다듬는데 달짝지근한 냄새가 훅 가까워졌다.


“이제 와서 긴장되나 보지?”

“아닌데요.”

“흐음.”

나타니엘은 내 뺨에 입을 맞추었다.

평소에도 하던 스킨십이었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닌 게 아닌 거 같은데.”

“장난치지 말아요.”

도저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나타니엘은 작게 웃으며 날 뒤로 밀었다.

등 뒤로 푹신한 감촉이 닿았다.

침대에 누운 내 위로 그가 올라왔다.


“처, 척만 하는 거예요.”

“알고 있어.”

우리의 계획은 이랬다.

침실의 경계를 일부러 느슨하게 풀고, 황후의 끄나풀일 수도 있는 리나에게 밤을 보냈다는 증거를 보여 주는 것이다.

매우 원초적인 방법이었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나타니엘은 내 위에서 천천히 상의를 벗었다.

몇 번이고 보았던 몸인데도 오늘은 좀 달라 보였다.

탄탄해 보이는 근육과 부드럽고 매끄러운 피부가 달빛을 받아 하얗게 빛났다.

굴곡에 따라 깊이 드리워진 음영 덕에 그의 상체가 훨씬 도드라져 보였다.

나는 천천히 그의 목울대에서 상체, 그리고 그 아래로 시선을 옮겼다.


 


“제이나, 어딜 보는 거야.”

“아뇨, 안 봤는데요.”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

첫날밤에도 이랬던 거 같은데.


‘그때는 나타니엘이 먼저 물러나 줬지.’

하지만 지금은 물러나 줄 수 없었다.

나는 눈을 꼭 감았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그를 밀어 버릴 것 같았다.

이게 이렇게 떨리는 건 줄은 꿈에도 몰랐다.

소설 속에서 빨리빨리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며 욕했던 과거의 나를 반성했다.

앞으로는 절대 안 그럴게요, 작가님.


“제이나.”

“왜, 왜 그러세요. 빠…… 빨리 해요.”

“눈 좀 떠 봐.”

나타니엘이 답지 않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

분명 놀리려고 부르는 게 틀림없었다.


“제이나, 진짜 눈 안 뜰 거야?”

몇 번의 호명에 결국 그의 말대로 눈을 떴다.

그의 눈동자가 시야 한가득 들어왔다.

나를 향한 욕망이 선명히 드러나는 붉은 눈동자에 내 심장이 쿵, 바닥으로 떨어졌다.


“너무 긴장하지 마.”

서늘한 나타니엘의 손길이 귓바퀴를 어루만졌다.

움찔하며 놀라자 작게 웃으며 이마와 콧잔등, 뺨에 차례대로 입을 맞추었다.


“그대 말대로 딱, 척만 하면 되니까.”

평소에 알고 있던 나타니엘의 체온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뜨거운 감촉이 입술에 닿았다.

부드럽게 파고드는 체온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의 섬세한 손이 몸 이곳저곳에 닿았다.

간지러운 건지, 아니면 다른 감각인지 알 수 없는 느낌에 허덕였다.

나는 손을 뻗어 그의 목에 매달렸다.


“윽, 갑자기 매달리지 마.”

“간지럽단 말이에요.”

“그렇다고 함부로 만지면……!”

부끄러워서 도저히 뭘 붙잡지 않고는 버틸 수가 없었다.

나는 허둥지둥하며 몸을 뒤로 물리려는 나타니엘에게 매달렸다.


“그러니까, 빨리빨리 하라니까요.”

내 말에 나타니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가 한쪽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말했다.


“그 말, 후회하지 마.”

무언가 잘못한 느낌이다.

다음 날 아침.

나는 멍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힐끗 내려다본 몸에는 다행히 입으나 마나 한 슈미즈가 입혀져 있었다.


“으…… 으으.”

온몸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지난밤에 어찌나 날 농락했는지 이가 갈릴 지경이었다.


“아주 신났지.”

내가 이렇게 간지러움에 약한지 몰랐다.

나타니엘이 손만 대도 기절할 것 같았는데, 그 와중에 소리를 내지 않으려니 아주 죽을 맛이었다.

결국 참지 못하고 미친 듯이 웃어 대는 통에 나타니엘이 소리를 차단하는 마법을 걸어 두어야 했다.

새벽까지 날 괴롭히던 나타니엘은 내가 잘못했다고 빌자 그제야 놓아주었다.

그러고 나서는 완전히 기절했다.


“어휴. 내 팔자야.”

침대에서 어기적거리며 내려와서 거울 앞에 섰다.

몸 여기저기 얼룩덜룩 자국이 남아서 누가 봐도 불타는 밤을 보낸 모양새다.

침대는 깔끔한 성격인 나타니엘이 치워 버렸다고 둘러대면 되었으니 완벽했다.


“비 전하, 들어가도 될까요?”

문을 두들기는 소리에 나는 재빨리 침대에 다시 누웠다.


“들어와.”

어젯밤에 얼마나 웃어 댔는지 목이 다 쉬었다.

문을 살짝 열고 들어온 하녀들의 눈이 내 몸 이곳저곳을 스캔했다.

자, 보아라.

지난밤의 성과를.


“오늘은 피곤하니까 방에만 있을래. 아침은 이쪽으로 가져다줄래?”

“네, 네! 그럼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하녀들은 후다닥 밖으로 사라졌다.

그 와중에 리나의 시선이 내게 유독 오래 남아 있는 것이 느껴졌다.

곧 다른 하녀들이 트롤리에 간단한 식사를 싣고 올라왔다. 고소한 버터 냄새와 커피 향이 나자 식욕이 돌았다.

침대에서 겨우 내려와 아침을 먹고, 커피를 마시며 나는 두 번째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아버지께 편지를 썼다.


 

* * *

트레비아 후작은 힘겹게 약속 장소로 향했다.

마차 안은 찜통처럼 뜨거웠다.

후작은 땀을 비 오듯이 흘리고 있었다.

그는 더운 것이 세상에서 제일 싫었다.

축축하게 흐르는 땀도, 땀과 함께 나는 퀴퀴한 냄새도 모두 싫었다.


“도착했습니다, 후작님.”

“후우, 그래.”

후작은 마차에서 내려 클럽의 문을 열었다.

잠깐 내부가 시원하길 바랐지만 헛된 희망이었다.

클럽 내부 역시 찜통과 다름없었다.


“트레비아 후작님, 오셨습니까.”

“오랜만입니다, 발터 백작.”

이제 중년의 나이인 발터 백작 역시 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에게서 나는 은근한 땀 냄새에 후작은 잠시 숨을 멈췄다.


“다들 안쪽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알겠네.”

내부 온도는 못 참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시원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평소 마석을 이용해 추울 정도의 온도를 유지하던 귀족들에게는 치명적인 온도였다.

문을 열자 남자 대여섯이 앉아 있었다.

서로 인사를 나누면서 자리에 앉았다. 후작은 내부의 후끈후끈한 열기에 한숨을 쉬었다.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모인 이유는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다들 후작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나타니엘의 후처에 관해 상의하기 위해서였다.


“일단 추려 온 목록을 좀 봐야겠습니다. 아무나 고대 용의 핏줄을 잇게 할 수는 없으니까 말입니다.”

트레비아 후작은 인상을 쓰며 리스트를 보았다.

그들의 친족으로만 가득 채워진 목록에 욕이 나왔다.


“이 추잡한 목록은 뭡니까. 아주 욕심이 그득한 게 느껴집니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트레비아 후작은 자신의 방계 친척 중 어여쁜 여자아이 몇 명을 찾아 두었다.

제이나를 곁에 두었다니 최대한 비슷한 사람을 찾는 등 나타니엘의 취향까지 고려했다.

곁눈질을 하며 서로를 견제하던 사람들 사이에서 누군가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저는 이 문제보다 마석 공급이 더 큰 문제인 것 같습니다.”

발터 백작은 퉁명스럽게 중얼거렸다.


“마석 문제가 심각합니다. 지금이야 어떻게든 버티고 있다지만, 이러다가는 큰 문제가 될 것 같습니다.”

백작은 오늘 아침에 산 신문을 사람들 앞에서 펼쳐 주었다.

[충격! 윈터스 공작, 황태자의 후처 소식에 쓰러져.]

[윈터스 소공작, 아버지의 건강 상태 지금은 밝힐 수 없다고 말해.]

[윈터스 공작의 공백으로 마석 생산에 차질, 치솟는 마석 가격.]

[윈터스 소공작, 기존 생산량을 맞추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라 밝혀.]

온갖 헤드라인을 보며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한숨을 쉬었다.

지금 이 찜통 같은 더위를 고스란히 느끼고 있는 것도 모두 이 일 때문이었다.


“혹시 윈터스 공작이 황태자비와 짜고 치는 것 아닙니까?”

“아주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

의외로 윈터스 공작가는 정계에 큰 관심이 없었다.

근거지가 수도에서 먼 북부라는 점도 있었지만, 제국민의 삶에 파고든 마석의 최대 공급처라는 독특한 위치 때문이기도 했다.

가문의 영향력을 고려하여 정치적으로 중립을 지켰던 것이다.

그렇게 수십 년을 지냈기에 그들은 이번에도 당연히 공작가가 중립을 고수할 것이라 생각했다. 설마 윈터스 공작이 이렇게 나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윈터스 공작이 이리되면서 여론이 영 좋지 않습니다. 이게 다 황후 폐하와 후작님의 권력 욕심 때문이라는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천박하게…….”

후작은 이를 갈며 중얼거렸다.

당장 공작을 찾아갈까 했지만, 쉽게 만나 줄 것 같지 않았다.


“일단 공작가에 사람을 심어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아내 봅시다. 만일 정말로 이게 모두 연극이면 그 역풍은 고스란히 그들이 맞아야 할 테니까요.”

후작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쉽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윈터스 공작가는 국경에서 적국과 대치하는 가문이다.

그런 가문에 심복을 심는다면, 자칫하면 반역으로 몰릴 수도 있었다.

표정이 어두운 사람들을 쓱 훑어본 후작은 일을 빨리 처리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일단 다음 주 중에 폐하께 대귀족 회의를 소집하자고 부탁드려야겠습니다. 이런 일은 질질 끌수록 지칠 뿐이니까요.”

발터 백작의 말에 다들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정말 덥군.”

그는 끈적한 땀을 물수건으로 닦아 내며 중얼거렸다.

후작은 손을 뻗어 물컵을 쥐었다.

그의 바람과 달리 물은 미적지근했다.

* * *



“대성공이에요.”

테레사는 방긋 웃으며 나에게 신문을 건네주었다.

신문에는 온통 아버지에 대한 걱정과 그 이유가 된 후처 관련 법안을 통과시킨 귀족들에 대한 원색적인 비판으로 가득했다.


“얼마 전에는 황태자 전하께 여자를 들이밀었다는 소문이 난 가문의 마차가 테러를 당했다지 뭐예요.”

카시안은 이 모든 일이 재밌다는 듯이 웃었다.

아버지께서는 이 일에 반대하는 몇몇 가문에만 마석을 충분히 지급했다.

나 역시 내 이름으로 마석을 사서 평민들에게 풀었다.

그러자 시간이 지날수록 분위기가 점점 험악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거. 그 비밀 모임에 참석한다는 귀족들의 모임이에요.”

카시안은 내게 명단을 넘기며 말했다.

나는 그것을 쓱 훑어보고 중얼거렸다.


“이 정도 되는 가문이 이런 추저분한 일에 발을 담그다니.”

내 투덜거림에 카시안이 말했다.


“추접스럽다니요, 거기 있는 가문들은 모두 위대하신 고대 용의 핏줄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고 생각하는 광신도 반, 차기 권력을 노리는 야심가들 반일걸요?”

“그게 무슨…….”

나는 여태껏 권력을 얻기 위해 나타니엘에게 새로운 여자를 붙여 주려 한다고 믿었다.

현 황제의 권력 구도가 딱 그렇게 흘러갔기 때문이다.

황제는 강한 힘을 가졌던 전 황후 가문의 손을 빌려 권력을 쥐었다.

그리고 그 황후가 죽자 권력은 자연스럽게 지금의 트레비아 후작가로 이동했다.


“뭐, 그것도 이유가 없지 않아 있지만, 황태자 전하의 힘을 눈으로 본 사람들에게는 더욱 매력적이기도 하겠죠. 그 힘의 일부를 물려받은 사람이 자신들의 핏줄이 될 테니까요.”

확실히 나타니엘의 힘은 초월적이었다.

가까이에 있는 나조차 놀랄 때가 있으니까.

하지만 용의 모습일 때의 나타니엘은 그냥 귀여운 애완동물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비 전하,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요즘 황태자 전하와 아주 깨가 쏟아지니, 금방 아이가 생길 거예요. 그럼 모두 해결되겠죠.”

카시안의 말에 나는 먹던 차를 뿜을 뻔했다.

그 깨는 진짜 웃느라 쏟아지는 거고요.

심란해진 나는 둘을 보내고 침대에 누웠다.

우리가 연기를 시작한 지 벌써 열흘 정도가 되어 갔다.

나와 나타니엘은 그 뒤로 매일같이 동침하고 있다.

물론 원래도 잠은 같이 잤지만.

그 전과 달리 진한 신체 접촉이 더해진 잠자리였다.

하지만 요즘 들어 단순히 보여 주기 위한 선을 넘기 시작한 느낌이다.

나는 위험할 뻔했던 어젯밤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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