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2화. 부부가 해야 할 일 (42/145)


42화. 부부가 해야 할 일
2022.06.25.


다음 날, 윈터스 공작이 황궁에 들어왔다.

잔뜩 흥분한 그의 모습에 다들 무슨 일이 날까 봐 걱정스러워했다.

접견실에는 불안한 표정의 황제와 딱딱하게 얼굴을 굳힌 황후가 앉아 있었다.

문이 벌컥 열리고 공작이 소리쳤다.


“금쪽같은 딸내미를 내어주었더니 후처라니요!”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에 황제와 황후 모두 귀를 막았다.


“결혼시킬 때는 앞으로 잘해 주시겠다더니, 이제 다른 이야기를 하십니까?”

둘은 슬쩍 공작의 시선을 피했다.

그 모습을 본 공작은 더 열이 뻗쳤다.

공작은 며칠 전, 제이나에게 받았던 편지를 떠올렸다.

[트레비아 후작이 후처를 들여야 한다고 간청했다고 합니다. 어찌 이런 무도한 짓을 할 수 있는지. 저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아버지, 너무 우울하고 슬퍼서 요 며칠 잠을 못 자겠어요. 언제고 딸을 보러 황궁에 놀러 와 주세요.]

공작이 아는 제이나는 명랑하기만 한 아이였다.

누우면 바로 자고, 아무 걱정 없이 살던 아이였는데!

그랬던 제이나가 우울하다며 잠도 못 자고 약한 모습까지 보이자 공작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제이나를 데려갈 때 잘해 주시겠다더니. 제가 누굴 믿고 보낸 겁니까, 폐하!”

황제의 바람기는 공공연한 사실이었지만 이렇게 대놓고 뭐라 하는 사람은 없었다.

황제는 질린 얼굴로 황후를 노려보았다.

네가 벌인 일이니 네가 알아서 하라는 뜻이었다.


“진정하게, 공작.”

“세상 어느 아비가 이런 일을 듣고도 진정할 수 있단 말입니까?”

공작은 부들부들 떨며 이를 갈았다.


“귀족파에게 전해 주십시오. 이 윈터스 공작가에 칼을 꽂으면 어떻게 되는지 제가 똑똑히 알려 주겠다고요.”

윈터스 공작은 황후를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황제는 잔뜩 화가 난 황후를 돌려보냈다.

요즘 트레비아 가문에 시달린 탓인지 영 좋게 보이지 않았다.


“공작, 나타니엘이 후처를 들일 일은 절대 없을 걸세.”

윈터스 공작은 황제를 의심 가득한 얼굴로 보며 중얼거렸다.


“어떤 이유로 말입니까?”

“트레비아 후작과 황후의 이해관계가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야.”

“두 분은 같은 가문 사람인데 이해관계가 일치하지 않는다니요.”

필립스는 길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후작은 고지식하고 사람을 깔보긴 하지만 후작가의 번영을 바라는 사람이지. 지금의 위세가 꺾이지 않도록, 다음 포석을 깔아 두고 있는 거겠지.”

황제가 아는 후작은 그런 사람이었다.

가문의 안위와 후작가의 안녕이 자식의 목숨이나 자존심보다 더 중요한 남자였다.

그러나 황후는 달랐다.


“황후 폐하께서는 그럼 무슨 생각으로 이 일에 찬성한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나도 잘 모르겠네. 밀리아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 건지 요즘은 알 수가 없어.”

“폐하께서 젊었을 때 황후 폐하의 속을 얼마나 썩이셨습니까. 다 그 벌을 받는 게지요.”

윈터스 공작의 폭력에 가까운 진언에 황제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황제의 화려한 불륜사는 아직도 회자될 정도였다.


“하아…….”

황제의 과거사는 능구렁이 같은 그의 최대 약점이었다.

얼마나 많은 여자를 건드리고 다녔는지, 그가 친자 감별을 한 횟수가 역대 황제들이 한 횟수보다 많았다.

다행인지 아닌지 인정된 사생아는 아나이스뿐이었지만.


“이대로 가다가는 분명 다음 대에도 문제가 생길 거야.”

“뭐 그렇겠지요.”

윈터스 공작은 황제의 은근한 요청을 무시하듯 무심한 어조로 말했다.

그러자 몸이 단 황제는 공작을 좀 더 구슬리기 시작했다.


“둘은 갑자기 결혼하지 않았는가? 제이나도 그렇겠지만, 나타니엘도 낯을 많이 가려서 말이야. 둘이 좀 친해지는 데에는 아무래도 시간이 걸리겠지.”

“그래서, 하시고 싶은 말씀이 뭡니까?”

“나는 공작이 트레비아 후작가를 견제해 주길 바라네.”

공작은 그제야 황제가 왜 제이나와 나타니엘의 결혼을 원했는지 알았다.

윈터스 가문은 여태껏 정계에서 한 발짝 뒤로 물러나 있었다.

태생이 무신 가문이어서 그랬던 것도 있었지만, 가진 패가 너무 컸다.

자칫 잘못했다가는 추가 한쪽으로 기울 수도 있었다.


“생각 좀 해 보겠습니다.”

“그래, 쉽게 내릴 결정은 아니라는 건 알고 있네. 하지만 우리 자식들을 생각해서 잘 좀 부탁하네.”

황제는 인자한 웃음을 지었다.

공작은 그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난 것 같아 화가 울컥 치밀었지만, 상대가 황제인지라 간신히 눌러 냈다.


 

* * *

편지를 보내고 나서 얼마 뒤, 아버지께서 찾아오리라고는 예상하였다.

문제는 저렇게 화가 난 채로 오실지 몰랐다는 것이다.


“이놈의 집구석은 멀쩡한 놈이 하나도 없구나! 아, 전하께 하는 말은 아닙니다.”

“…….”

나타니엘과 함께 있는데도 아버지는 황제와 황후의 욕을 거침없이 해 댔다.

물론 나타니엘이 그런 걸 신경 쓸 사람은 아니었지만.


“나 참, 그러게 누가 젊은 시절에 죄를 짓고 살라고 했답니까? 행여나 하는 마음에 말씀드리는 건데, 전하께서 딴 여자에게 마음에 가신다면 제게 말씀하십시오. 둘이 갈라서더라도 신경 쓰지 않을 테니까요.”

“아버지! 그만 좀 하세요.”

수위가 아슬아슬하게 올라가는 통에 결국 내가 한마디 해야만 했다.

나타니엘은 별거 아니라는 듯 유려하게 말했다.


“걱정하지 않아도 되오. 다른 여자를 맞이할 생각은 전혀 없으니.”

말이라도 저렇게 해 주니 고맙긴 했다.

나타니엘은 아버지의 한탄과 욕을 조금 더 받아 주고 자리를 떴다.

단둘이 남게 되자 아버지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폐하께서 우리 가문이 트레비아 후작가를 견제해 주길 바라시더구나.”

“으, 아버지, 너무 부담 갖지 마세요. 그런 거 안 하셔도 돼요.”

평소 같았으면 우리 관계에 신경도 쓰지 않았을 황제가 왜 이번에는 달랐는지 알 것 같았다.


“얄밉긴 해도 맞는 말이긴 하다. 만일 이대로 황후와 귀족파가 후처로 자기네 가문 사람들을 들이려 하면 어쩐단 말이냐?”

“음.”

나타니엘이 그 여자들을 받아들일 리가 없었지만, 아버지의 걱정이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었다.


“하여튼, 너도 전하랑 좀 더 잘 지내 보도록 해.”

“저희 잘 지내거든요.”

퉁명스러운 대답에 아버지는 잠시 침묵을 지키셨다.


“하여튼 알아서 할게요.”

아버지의 얼굴에 무언가 많은 감정이 스쳐 갔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셨다.

그러나 곧 사달이 났다.

* * *

아침부터 기분이 저조했던 나타니엘은 점심을 먹고 나서 새끼 용의 모습으로 변했다.

나는 그를 안고 여느 때와 같이 업무를 보던 집무실에 숨어 있었다.

품에 안겨서 새근거리면서 잘 자는 나타니엘의 등을 토닥이며 그의 책상에 앉았다.


“음?”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서류들 사이로 구겨진 자국이 있는 종이 몇 장이 보였다.

나는 나타니엘이 자고 있는지 확인하고, 손가락으로 슬쩍 빼서 보았다.


“와아…….”

종이에 가득 적힌 노골적인 요구에 당혹스러웠다.

심지어 후처로 들일 수 있는 여자들의 목록까지 적혀 있었다.


“삐이…….”

품에 안겨 있던 나타니엘이 움찔하더니 눈을 떴다.

그는 내 손에 들린 서류를 보더니 휙 날아가면서 낚아챘다.

그러고는 짧고 통통한 손으로 힘껏 찢어서 쓰레기통에 버려버렸다.


“그거 찢어도 되는 거예요?”

[상관없다.]

마법으로 흔적마저 없앤 나타니엘은 길게 하품했다.

앞발로 펜을 톡톡 건드리며 장난을 치는 그의 모습을 보며 물었다.


“압박이 심한가 봐요?”

[별로.]

“이렇게 상소문이 많이 올라오는데요?”

[원래 그런 거 신경 안 써.]

나는 손으로 그를 번쩍 들어 올려 날 바라보게 했다.

파닥파닥하면서 빠져나가려는 그를 양손으로 단단히 고정했다.

새끼 용의 모습일 때는 체격 차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내가 하자는 대로 하는 수밖에 없었다.


“날 좀 봐 봐요.”

내 말에 마지못해 나타니엘이 고개를 돌렸다.

양 볼을 빵빵하게 부풀린 채로 동그란 눈으로 날 보았다.


“이대로 계속 버틸 수는 없잖아요.”

[나는 그대의 말대로 기다려 주는 것뿐이다.]

준비가 되었냐고 하면 솔직히 아니었다.

나와 나타니엘은 서로를 알게 된 지 반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우리가 불같은 사랑을 불태우던 사이도 아니고, 그렇다고 의무적으로 잠자리를 갖고 싶지는 않았다.


“일단 저희 침대 사정을 황후에게 흘린 사람부터 찾아야겠어요.”

[그래, 그게 먼저겠군. 사용인 관리는 전적으로 그대의 몫이야. 맡기도록 하지.]

“좋아요.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제가 생각해 왔으니 들어 볼래요?”

씩 웃으며 장난스럽게 말하자 그는 작게 신음을 흘렸다.


 

* * *

나는 곧바로 황후에게 침실 사정을 누설한 하녀를 찾기 시작했다.

사실 이 일이 조용히 지나갔다면 찾으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일파만파 소문이 나서 다른 귀족들까지 이 일에 참여하기 시작한 이상 가만히 있긴 어려웠다.


“기록을 뒤져 보니 세 명의 하녀가 황후궁의 시녀장과 연이 있더군요.”

하녀를 찾는 데 도움을 준 건 테레사였다.

황궁에서 일한다는 건, 누군가의 추천이 있어야 가능했다.

혼전에는 나타니엘이 굳이 하녀들의 출신까지 따질 필요가 없었기에 황후의 사람들이 몇몇 황태자궁에 들어와 있었다.


“이 셋 중 하나이거나 모두일 수도 있겠네.”

“제 생각에는 이 하녀인 것 같아요.”

카시안은 목록 중의 한 명을 지목하며 말했다.


“얼마 전에 황후궁에 출입한 기록이 있다고 아나이스 황녀가 알려 주었거든요.”

나는 그녀의 이름과 출신을 확인했다.


“일단 이 리나라는 아이는 그대로 두고, 나머지 둘은 다른 궁에 배치해 줘.”

“네, 알겠습니다. 그럼 리나는 어떻게 할까요?”

나는 그녀가 일하는 장소를 확인했다.

나와 나타니엘이 지내는 층이 아닌 다른 층에서 식당 일을 주로 하고 있었다.

아마도 사용인들 사이에서 우리 이야기가 돈 것 같았다.


“적은 가까이 두라는 말이 있지. 리나는 침실을 담당하는 하녀로 임명할까 해.”

“괜찮으시겠어요?”

테레사는 걱정스러운 얼굴이었다.

그녀 역시 나와 나타니엘 사이의 소문을 익히 들었을 것이다.

워낙 화제이니 모를 수가 없겠지.


“응, 괜찮을 것 같아.”

이대로 넘어가 줄 생각은 없었다.

* * *

나는 목욕 시중을 들기 위해 들어온 하녀들을 보았다.

불안한 얼굴로 눈알만 데굴데굴 굴리는 소녀는 꽤 순진해 보였다.


‘그런 일을 할 것 같지는 않은데.’

불안한 기색을 숨기지도 못하는 것이 아무리 봐도 대범한 일을 저질렀을 것 같지 않았다.

테레사는 그들을 휘익 둘러보더니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은 중요한 날이니, 비 전하의 몸단장에 특히 신경을 쓰도록 하여라.”

“예.”

나는 하녀들의 안내를 받으며 황태자궁에서 가장 큰 욕실로 향했다.

결혼식 날 처음 사용하고는 단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던 장소였다.

욕탕에서 몸을 충분히 이완시키고, 마사지로 몸의 근육을 풀었다.

그 뒤에 피부에 좋다는 허브로 만든 오일을 발랐다.

은은하게 나는 우디 향에 기분이 좋아졌다.


“으, 으악!”

여유가 있는 나와 다른 하녀들과 달리 리나는 실수 연발이었다.

들고 있던 향유 병을 깨뜨리지 않나, 내 뒤를 쫓아 오다가 넘어지기도 했다.

아마 오늘 숙소에 들어가서 하녀들에게 한 소리 들을 것이 틀림없었다.


“여기 있습니다, 전하.”

“그…… 그래.”

그리고 몇 달 만에 만나는 슈미즈가 그곳에 있었다.


“어째 저번보다 더 얇아진 것 같은데?”

“여름이라 더 시원한 소재로 만들어서 그렇게 보이는 것뿐이랍니다.”

하녀들은 활짝 웃으며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했다.

내 몸 위에 슈미즈를 입히고 그 위에 가운을 입혔다.

하녀들은 말은 안 하고 있었지만, 오늘 있을 일에 잔뜩 흥분한 것처럼 보였다.


‘그건 나와 나타니엘이 하는 건데, 대체 왜…….’

자세한 이유는 알고 싶지 않았으므로 나는 재빨리 생각을 지워 버렸다.

침실에 들어온 나는 입고 있던 가운을 벗었다.

얇은 슈미즈 사이로 차가운 냉기가 스며들었다.


“으, 이거 진짜 얇잖아.”

손바닥으로 손을 쓸어내리며 나는 천천히 침대 위에 웅크리고 앉았다.

분명 몇 달 전에도 똑같은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때와 다른 점이 있었다.

바로 내 심장이 터질 것처럼 빠르게 뛰고 있다는 것이었다.


‘왜 이렇게 긴장되는 거야.’

맨날 같이 자고 뽀뽀도 여러 번 해 봤는데, 대체 왜!

나는 침대 옆에 있는 냉수를 벌컥벌컥 단숨에 들이마셨다.

똑똑.

드디어 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들렸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