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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화. 다시 잘 지내고 싶은데 (41/145)


41화. 다시 잘 지내고 싶은데
2022.06.22.


아직도 화가 많이 난 걸까?

나는 고개를 숙인 채로 손가락만 만지작거렸다.


“저 주간지 때문에 사과하는 거라면 하지 않아도 돼.”

어느새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온 나타니엘이 무심하게 말을 덧붙였다.


“이런 말이 돌지 않도록 밤에는 이곳에서 지내도록 하지.”

툭툭, 손끝으로 종이를 두드리는 소리가 차갑고 무거웠다.

나는 고개를 들어 그의 눈을 보았다.

여느 때보다 채도가 낮았다.


“그럼 이따 저녁때 다시 보지.”

그렇게 말한 그가 몸을 돌려 버렸다.

여기서 나타니엘을 놓치면 안 될 것 같았다.

나는 손을 뻗어 그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고개를 돌려 내려다보는 그의 눈이 시리다.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왜 그러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버린 것 같았다.

아니, 그보다 더 최악이었다.


“저, 저는…….”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해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괜히 서럽고, 그가 얄미웠다.

내 마음 같은 건 전혀 모르면서.


“흐, 흐윽.”

“뭐…….”

나타니엘이 당황해 허둥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이렇게 울면서 상황을 모면하려는 건 딱 질색이었는데,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양 볼에 부드러운 손길이 닿았다.

일렁이는 시야 사이로 나타니엘의 얼굴이 보였다.


“왜 울고 그래.”

퉁명스러운 말투였지만, 눈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나는 참고 있던 눈물이 터져 나왔다.


“우, 울지 말라니까?”

“흐어엉.”

그가 날 미워하는 건 싫었다.

이렇게 멀어지는 건 더 싫었다.

아니, 사실은 다른 여자랑 결혼하는 것도 싫었다.

내가 아는 나타니엘을 다른 사람이 아는 건 더 싫었다.


“왜 우는지는 말해 주고 울어야 할 것 아냐. 난 타인의 감정에 둔해서 말해 주지 않으면 잘 모른다고.”

“미, 미워하지 말란 말이에요.”

“뭐?”

“저 미워하는 거잖아요, 지금. 흐윽…….”

훌쩍거리면서 겨우 말을 했더니 나타니엘은 말이 없었다.

고개를 살짝 들어 그의 얼굴을 보았다.

그는 커다란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나타니엘?”

자세히 보니 귀도 붉고 목도 붉었다.

나는 천천히 내가 무슨 말을 한 것인지 깨닫게 되었다.


“아, 아니, 제 말은……!”

“전하, 황태자 전하!”

시종이 눈치 없이 분위기를 깨 준 덕에 우리는 아주 어색하게 서로를 힐끔거렸다.

나타니엘은 길게 한숨을 쉬고 문을 열고 나갔다.


“무슨 일이지?”

“그, 그게…….”

나타니엘을 쫓아 나간 내 눈치를 보던 시종이 말했다.


“지금 황제 폐하께, 원로인 트레비아 후작이 전하께서 후처를 들여야 한다고 간청하고 있다고 합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나와 나타니엘이 결혼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그런 청을 드려?

원래 그런 건 몇 년째 아이가 없을 때나 하는 말 아닌가?

나는 아직 한참이나 남은 이야기인 줄 알았다. 멀뚱히 서 있는 내 앞에서 나타니엘은 피식 웃었다.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다들 내가 가만히 있으니 호구로 보이나 보는군.”

나타니엘은 뒤를 돌아 내게 말했다.

조금 전의 얼굴은 완전히 사라져서 살기마저 흘렀다.


“여기 있도록 해. 괜히 가서 험한 말 듣지 말고.”

그리고 휙 자리에서 사라졌다.

나는 단번에 그가 마법으로 움직였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당장 폐하가 계신 곳으로 가자!”

“예?”

시종은 내 말에 당황한 얼굴이었다.


“어서 앞장서!”

얼빠진 시종을 다그치며 접견실로 향했다.

부디 내가 도착하기 전에 나타니엘이 사고를 치지 않기를 바라며.


 

* * *

황제는 제 앞에 앉아 있는 트레비아 후작이 어려웠다.

그는 필립스의 스승이었으며 현 황후의 아버지였다.

스승의 딸과 바람을 피운 데다 무려 불륜이었으니 황제는 언제나 그에게 철저한 을이었다.


“나타니엘이 제 아들이긴 하지만, 아시지 않습니까? 그 녀석은 본인이 하고 싶은 것이 아니면 죽어도 하지 않는 녀석입니다.”

“그러니 어렸을 때부터 그냥 제게 교육을 맡기셨어야 했습니다.”

필립스는 차마 나타니엘이 후작을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일까 봐 걱정돼서 맡기지 않은 거라고 말할 수 없었다.


“둘이 결혼을 한 지 벌써 반년 정도가 지났습니다. 그런데 잠자리를 갖지 않는다니요.”

“황태자가 원래 사람을 많이 가립니다. 곁에 사람을 두기라도 하니 얼마나 다행입니까?”

트레비아 후작은 속으로 황제를 비웃었다.

그가 저렇게 아들을 생각할 리가 없었다. 분명 무서워서일 테지.


“황태자비 전하가 마음에 차지 않는 것인지도 모르지요.”

“후작.”

“그것도 아니라면, 전하께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지요.”

“후작!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게요.”

트레비아 후작은 흥분한 황제를 보며 이 싸움의 승리를 확신했다.


“농사를 지으려면 밭부터 가는 것이 먼저입니다. 어찌 영웅이 된 자로서 여자를 마다하고, 자손을 적게 남긴단 말입니까. 폐하께서 용단을 내려 주시지요.”

황제는 입을 열지 못했다.

차마 아들이 무서워서 그 정도의 명령은 내릴 수 없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이 일은 조금 더 생각을 한 뒤에…….”

필립스가 적당히 자리를 회피하려던 순간.

굉음과 함께 회의실의 문이 산산조각이 났다.

엄청난 풍압에 후작은 물론이고 다른 귀족조차 의자에서 떨어져 나동그라졌다.


“이 무슨……!”

트레비아 후작은 온몸에서 느껴지는 둔통에 얼굴을 찡그렸다.

황제는 쌤통이라고 생각하면서 히죽 웃으며 구경했다.

문을 연 기사는 후작을 살피지도 않고 하얗게 질린 얼굴로 외쳤다.


“크, 큰일 났습니다, 폐하! 황태자 전하께서……!”

나타니엘의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후작은 몸을 움찔 떨었다.

기사의 뒤에서 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후작마저 두려울 정도의 압도적인 기운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봅니다, 후작.”

문을 열고 들어온 나타니엘은 바닥에서 멍청한 얼굴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트레비아 후작을 발견했다.

그는 쭈그리고 앉아서 트레비아 후작의 눈동자를 보며 씨익 웃었다.


“몸 건강히 잘 지내시나 보오.”

명백한 살기에 후작의 몸이 저절로 떨렸다.

나타니엘은 덜덜 떨고 있는 후작의 손을 보며 비소를 띤 채로 말했다.

후작은 평생 살면서 그 무엇도 이토록 두려워해 본 적이 없었다.


“후작이 내 결혼 생활에 대해 왈가왈부한다 들었소.”

“전하의 결혼은 사생활이 아니라 제국의 미래입니다. 그러니 충신으로서 필요한 간언을 드려야지요.”

트레비아 후작은 당당하게 대꾸하려 애를 썼다.

아무리 상대가 황태자라 해도 이쪽은 오랜 공신 가문이었다.

게다가 현 황후의 친정 가문이 아닌가.

그가 황제의 자리에 무사히 오르려면 자신을 함부로 대할 수 없을 것이다.

귀족파의 수장이 바로 트레비아 후작이었으니까.


“히이익!”

나타니엘은 무표정한 얼굴로 옆에 서 있는 기사의 검을 뽑아 후작의 목에 들이댔다.

트레비아 후작은 착각한 것이 있었다.

나타니엘은 제국의 안위나 자신의 미래에 별 관심이 없었다.

그의 삶에는 기분 좋은 것과 나쁜 것.

극단적인 선택지만 있었을 뿐.


“만일 그 입을 한 번만 더 함부로 놀리면 그때는 목이 붙어 있을 거라 장담할 수 없네, 후작.”

후작의 눈썹이 공포와 굴욕에 파르르 떨렸다.


“지, 지금 절 협박하시는 겁니까!”

“협박이라니. 난 자네의 미래를 당겨 주는 것뿐이야.”

지금 상황을 흥미진진하게 지켜보던 황제는 나타니엘이 진짜로 일을 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결혼하고 나서 좀 유해져서 그렇지, 나타니엘은 원래 성격이 나빴다.


“나타니엘, 그 검은 내려놓고 말하거라. 이 신성한 땅에 피를 흘려서는 안 된다는 건 너도 알지 않느냐?”

“그럼 피 한 방울 안 남게 증발시키면 되는 것입니까?”

황제는 침을 꿀꺽 삼켰다.

눈이 완전 돈 자의 눈이다.


“이 모든 것은 위대한 제국의 안녕을 위해서입니다!”

“후작, 그 입 좀 다물게!”

그 와중에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되는지 후작이 입을 나불거렸다.

나타니엘이 검을 치켜들었다.


 

* * *

시종을 다그쳐서 달려간 접견실의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그리고 그 문 틈새로 나타니엘이 칼을 치켜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이러다가 정말로 일을 치겠구나 싶어 일단 힘껏 소리부터 쳤다.


“나타니엘!”

내가 부르는 소리에 반응한 건지, 나타니엘의 몸이 잠깐 멈췄다.

접견실로 들어간 나는 나타니엘의 팔을 붙들었다.


“이런다고 해결되는 거 아니에요.”

그의 붉은 눈이 내게 닿았다.

불쾌함이 그대로 담긴 시선에 나는 열심히 그를 설득했다.


“저 사람을 이 자리에서 죽이면, 다른 귀족들이 더 귀찮게 굴 거라고요.”

실제로 원작에서도 그랬다.

트레비아 후작은 나타니엘에게 제국을 위해 희생을 강요했고, 그 자리에서 목이 잘려 죽었다.

황궁이 세워진 자리는 용의 성지로, 피를 묻히면 안 된다는 불문율이 있었다.

귀족들은 나타니엘이 그 불문율을 어긴 것을 빌미로 황태자를 헨리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그 일은 나타니엘이 인간에게 질린 계기가 되었다.

갈등하던 나타니엘은 결국 칼을 내렸다.

황제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자리에 털썩 앉았다.

트레비아 후작은 이미 기절해 버려서 말이 없었다.

나타니엘은 후작을 발로 툭툭 건드리며 말했다.


“만일 앞으로도 이런 이야기가 들리면 그때는 가만두지 않겠습니다.”

나는 그의 팔을 잡아끌어 정원으로 나왔다.

적당히 구석진 자리로 끌고 가 벤치에 앉았다.

아직도 화가 났는지 입매가 딱딱하게 굳어 있다.


“그렇게까지 할 일은 아니었잖아요.”

내 말에 나타니엘의 얼굴이 구겨졌다.

그는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대는 내가 다른 여자를 들여도 화도 안 나나 보는군.”

“아니, 그런 게 아니라요.”

그렇게 말을 하니 좀 이상한데.

나타니엘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고민했다.


“저도 당연히 기분이 나빴죠.”

정말이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모습을 보자 참았던 화가 울컥 올라왔다.


“내게 무슨 하자가 있는 것처럼 굴잖아요. 당연히 화가 나죠.”

“그럼 왜 화를 내지 않았지?”

“그랬다가 제 주변이 피해를 볼 수도 있으니까요.”

나는 무사할 수 있었다.

권력의 정점에 가까운 위치에 있으니까.

나타니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말은 즉, 내가 친하게 지내던 사람들은 다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번 일도 그래요. 나타니엘은 황태자니까 쉽게 건드리지 못하죠. 그래서 당신의 비인 제가 문제인 거처럼 말하는 거잖아요.”

내 말에 나타니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좀 분해 보이기도 했다.


“죽이겠다고 마음먹었던 자를 살려 둔 건 처음이다.”

“어휴. 고작 이런 일로 죽이면 어떻게 해요.”

나 역시 매우 화가 났고, 분이 다 풀린 것도 아니었다.


“살아서 더욱더 고통을 느끼게 해 줘야지.”

나는 활짝 웃으며 나타니엘의 손을 잡아 주었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며 중얼거렸다.


“가끔 보면 그대가 나보다 더 무서운 것 같다.”

“그러니까 앞으로 잘해요.”

나는 그의 등을 찰싹 때려 주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은혜는 열 배로 갚고, 원한은 백 배로 갚아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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