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0화. 부부가 되어 가는 중 (40/145)


40화. 부부가 되어 가는 중
2022.06.18.


내가 꺼낸 말에 놀라서 술이 확 깼다.

나타니엘도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말이 없었다.

우리 둘 사이에는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미간을 구긴 채로 날 보던 나타니엘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손을 뻗어 그의 입을 막아 버렸다.


“아, 그게…….”

반사적으로 한 행동에 나조차 당혹스러웠다.

차갑지만 부드러운 손이 내 손을 잡고 천천히 내렸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몸을 돌렸다.


“그만 돌아가요, 우리.”

무서웠다.

나타니엘은 원래부터 인간에게 관심이 없었다.

그런 남자에게 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냐고 묻다니.

답을 전혀 알고 싶지 않았다.

서둘러 발걸음을 옮기려는 내 손을 나타니엘이 낚아챘다.


“물었으면 대답은 듣고 가야지.”

장난기 가득한 얼굴을 보자 울컥 화가 났다.

억지로 손을 빼려고 하자 이번에는 허리를 잡아당겼다.

그리 강한 힘은 아니었지만, 몸에 제대로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아, 역시 술을 많이 마시는 게 아니었는데.


“별로 듣고 싶지 않거든요.”

“왜?”

“그, 그야…….”

내가 이렇게 한심한 사람이란 걸 나타니엘에게만큼은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겁도 많고, 상대에게 거절당하는 것이 무서운 사람이라는 걸.

나타니엘에게는 늘 괜찮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었다.


‘뭐야, 나…… 꼭 나타니엘을 좋아하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잖아.’

둔기로 머리를 맞은 것 같은 충격이었다.

내가 저 용용이를 좋아한다고?

내가 멍하니 그의 얼굴을 보고 있자 나타니엘이 물었다.


“무슨 일 있어? 갑자기 표정이 똥 씹은 표정인데.”

“아니요, 별거 아니에요.”

아니다, 그럴 리가 없다.

내가 저런 안하무인을 좋아할 리가 없지.

그는 그냥 내 파트너이자 애완동물 정도라고.

나타니엘은 손을 뻗어 내 뺨을 부드럽게 만졌다.

내려다보는 눈에 묘한 이채가 떠올랐다.

동시에 붙들고 있는 손에 힘이 빠졌다.


“저 먼저 안으로 들어갈게요.”

몸이 먼저 반응했다.

그의 품에서 뒤로 빠져나와 뒷걸음질을 쳤다.


“그럼 천천히 들어오세요.”

얼굴이 너무 뜨거워서 정신이 없었다.

돌아가는 길에 몇 번이나 넘어질 뻔했다.

그래서 나타니엘이 뒤에서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보지 못했다.

* * *


 
다이애나는 정신이 없었다.

갑자기 지고하신 황제의 청으로 그분과 춤을 추었다.

그전까지는 그녀를 시골뜨기라고 무시했던 사람들이 한순간에 바뀌었다.

사람들은 그녀에게 말을 걸려 애를 썼고, 황제와 무슨 관계인지 물었다.


“그냥, 제가 오늘 파트너가 없어서 춤 상대가 되어 주신다고 하신 것뿐이에요.”

그러나 다이애나의 대답을 귀족의 대다수는 믿지 않았다.

젊은 시절의 황제, 필립스는 대단히 아름다웠다.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건장한 젊은 황제.

그는 자신의 외모를 이용해 젊은 시절을 즐겼다.

가장 강력한 우군이 되어 줄 여자를 황후로 들이고, 많은 여자를 정부로 가졌다.

정부 중에는 밀리아처럼 아름다운 여자도 있었지만, 다이애나처럼 평범한 여자도 많았다.

그러니 다이애나가 황제의 취향이 아니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귀족들은 다이애나에게 잘 보여서 나쁠 것이 없다고 판단했다.


“그로반 영애, 그럼 수도에서 언제까지 지낼 생각인가요?”

“글쎄요. 황후 폐하께서 내년 사교 시즌까지 머물러도 좋다 하셨어요.”

“그것참 잘되었네요.”

다이애나는 몰려든 친절한 사람들 사이에서 자신의 요정님을 찾으려 애썼다.

이 자리에 오면 만날 수 있을까 생각했는데, 아무리 둘러봐도 찾을 수 없었다.


“저, 궁금한 것이 있는데…….”

“말만 하세요.”

자신을 향하는 시선들에 묘한 희열을 느끼며 다이애나는 남자의 외모를 설명했다.


“어머, 은발의 잘생긴 신사분이라면 막시밀리안 윈터스 소공작이겠네요.”

“윈터스 가문이요?”

윈터스 가문은 시골에서 올라온 다이애나도 알고 있었다.

엄청난 부와 권력을 쥔 가문이라는 것도.


“황태자비 전하의 친정이에요.”

이 이야기는 처음 들었다.

다이애나는 멀리서 물을 마시는 제이나를 확인했다.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이미 제이나와는 척을 진 사이인데, 윈터스 소공작과 이어질 수 있을까?


“그로반 영애의 다음 사교 시즌 파트너가 누가 될지 궁금하네요. 혹시 그 전에 폐하의 은혜를 받을지 누가 알아요?”

다이애나에게 잘 보이려 모여든 사람들에게 들으라는 듯이 귀족 하나가 비웃듯 말했다.

미혼 여자에게 하기에는 적절치 못한 발언이었다.


“허허, 그로반 영애에게 그 무슨 실례되는 이야기야!”

오히려 그러길 바라는 주제에 사람들은 다이애나를 감싸는 척했다.

그러나 다이애나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윈터스 공작가 정도라면 황후의 힘으로 그 남자를 얻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그냥 보아도 황후와 황태자비의 사이는 아주 안 좋아 보였으니까.


‘폐하께 부탁드리면 내가 원하는 남자와 결혼시켜 주실지도 몰라.’

다이애나는 황후가 너무 무서웠다.

그런 황후를 이길 수 있을 사람은 황제밖에 없어 보였다.

게다가 윈터스 공작가와 연이 닿은 높은 분은 다이애나에게 보이지 않았다.


‘분명 내 사랑을 응원해 주실 거야.’

잠깐이었지만, 이야기를 나눈 황제는 정말로 로맨틱한 분이었다.

그러니 자신을 도와줄 것이라고 다이애나는 믿었다.

* * *

연회는 무사히 끝났다.

하지만 나와 나타니엘의 사이는 악화 일로로 굴러가기 시작했다.

연회 이후도 나타니엘은 방에 돌아오지 않았다.

황태자와 황태자비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소문은 순식간에 퍼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문제가 뭔데요.”

카시안은 눈을 가늘게 뜬 채로 에이드를 마셨다.


“둘이 원래 좋아서 죽었잖아요.”

“아니, 내가 언제?”

“어, 처음부터요?”

“그런 적 없거든!”

“예, 예 그러시겠죠.”

건성건성 대답하는 카시안을 노려보았지만 소용없었다.


“그런데 진짜 문제가 뭐예요?”

테레사의 말에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조심스럽게 얼마 전 있었던 일을 고백했다.

나타니엘에게 괜찮은 사람이 있으면 후처로 받아들여도 될 것 같다고 말하자 두 사람의 표정이 급속도로 굳었다.


“어차피 그 정도는 각오했으니까.”

“…….”

둘은 말이 없었다.

그리고 눈으로 내게 욕을 하고 있었다.


“왜, 왜 그래?”

“이런 말 하면 좀 그렇지만, 진짜 너무하신 거 아니에요?”

카시안의 목소리에 은은하게 짜증이 배어 있었다.


“아니, 난 그냥…….”

“비 전하, 나타니엘 전하를 좋아하시는 거 아니었어요?”

테레사가 이상하다는 듯이 물었다.


“아, 좋아야 하죠. 좋긴 한데…….”

나타니엘은 내게 애완동물이나 다름없었다.

짧은 팔다리와 날개로 뽈뽈뽈 돌아다니는 게 얼마나 귀여운지.

게다가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는 꼬리라든가.

가끔 맛있는 걸 먹이면 반짝거리는 눈 같은 거 말이다.

물론 사람일 때에는 철저하게 군신 관계로 지냈다.


“좋으면 좋은 거지, 그게 뭐예요. 그럼 전하는 나타니엘 전하께서 다른 여자랑 결혼하고, 그 여자랑 아이를 낳아도 상관없다, 이 말씀이에요?”

카시안의 말에 나는 입을 꾹 닫았다.

그건 기분이 나빴다.

나 말고 다른 여자에게 친절한 나타니엘은 좀 싫었다.

아니, 많이 싫다.


“잘 생각해 보세요, 전하. 분명 나중에 후회하게 될지도 몰라요.”

테레사의 말을 마지막으로 둘 다 입을 다물었다.

나는 복잡한 머리를 정리하며 식은 차만 홀짝거릴 수밖에 없었다.

물론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 * *

트레비아 후작은 자리에 앉아 찻잔의 손잡이를 초조하게 매만졌다.

쉽게 갈 줄 알았던 후처 문제가 황태자의 완고한 태도에 진전이 없었다.


“황태자가 어디 쉽게 마음을 허락하겠습니까?”

“하지만 지금의 비 전하는 쉽게 받아들이시지 않았습니까.”

그 말에 밀리아는 미간을 구겼다.


“그건…….”

“혹시 그로반 영애가 너무 격이 떨어지는 것이 아니냐는 말이 귀족들 사이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그 말에 황후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도 윈터스 공작가의 제이나와 한미한 남작가의 딸인 다이애나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차이가 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게다가 절박할 줄 알았던 다이애나는 요즘 무슨 생각인지 마음이 꽃밭에 가 있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게다가 후처를 들인다는 법안에 대한 이야기가 퍼지면서 여기저기서 줄을 대려는 귀족이 많습니다.”

“윈터스 공작도 이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그쪽은 아들 문제 때문에 영지에 내려가 있어 아직 모르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곧 알게 되겠지요.”

후작의 말에 황후는 초조한 얼굴로 턱 끝을 매만졌다.

윈터스 공작이 돌아오기 전에 빨리 일을 끝내야 했다.

그까지 엮이게 된다면 복잡해질 테니까.


“다른 영애는 없습니까?”

“다른 영애라면…….”

“제가 후원해 줄 다른 아이 말입니다.”

“물론 구하려면 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조금 시간이 걸릴 것 같습니다.”

후작의 말에 밀리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최대한 빨리 구해 주십시오.”

“그럼 그로반 영애는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비극의 희생양으로 쓸 생각입니다.”

“비극이요?”

황후는 방긋 웃으며 말을 이어 갔다.


“황태자가 죄책감을 느끼도록 할 겁니다.”

“그게 무슨…….”

“아버지께서는 더 아실 필요 없습니다.”

그녀는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후작은 순간 밀리아의 얼굴에서 악마를 떠올렸다.

누군가의 삶이 어찌 되든 전혀 관심이 없다는 듯한 태도가 소름 끼쳤다.

자신의 딸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그리고 하나 더 해 주셔야 할 일이 있습니다.”

황후는 그렇게 말하며 후작을 가까이 불렀다.

* * *

[속보! 황태자 부부 사이에 이상기류가 흐르다?!]

우리 사이에 대한 온갖 소문이 사교계를 몇 바퀴 돌다 못해 시사 주간지에도 뜨면서 나는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이대로는 안 된다.

나는 들고 있던 잡지를 집어 던지고 길게 한숨을 쉬었다.

나타니엘과 제대로 이야기를 나누지 못한 지 벌써 몇 주가 지나고 있었다.


‘대체 뭐 때문에 화가 난 거야.’

고작 정략결혼을 한 주제에 그를 떠보려고 해서 화가 난 걸까?

나는 술에 취해서 괜히 그런 걸 물었다며 자책했다.


‘사과하려고 해도 뭐 만나야 사과를 하지.’

일단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나타니엘을 잡는 것이 먼저였다.

아마 사람의 모습일 때는 절대 나타나지 않을 거다.

그럼 그가 용이 되었을 때를 노려야 했다.

새끼 용의 모습일 때 그는 더욱 충동적이고 유혹에 약했으니까.

나는 당장에 제빵사를 불러 그를 유혹할 특별한 과자를 만들었다.

그리고 건드리면 종소리가 울리는 마법 접시에 담아 매일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경비를 섰다.

접시는 과자 도둑을 잡기 위해 제빵사가 특별히 주문한 것이라고 했다. 종소리는 듣길 원하는 사람에게만 들려 지금 같은 상황에 매우 유용했다.

그렇게 경비를 선 지 삼 일째가 되던 날.

딸랑―.

명쾌한 종소리에 나는 살짝 문을 열었다.

정신없이 버터 바를 먹고 있는 조그마한 등과 바짝 선 꼬리가 보였다.

나는 재빨리 손을 뻗어 그를 낚아챘다


“삐이이이!”

“쉿, 나타니엘. 저예요.”

놀랐는지 큰 소리로 울어 대는 통에 나는 그를 진정시키기 위해 애를 썼다.

내 얼굴을 본 그가 곧 조용해졌다.


[뭐야. 무슨 일이야.]

“그게…….”

저렇게 말하니까 할 말이 없었다.

나는 그의 눈치를 보다가 고개를 푹 숙였다.


“미, 미안해요!”

[뭐가 미안한데.]

“그, 그냥 다요. 제가 그때 다른 여자랑 결혼해도 된다고 했던 거도, 당신한테 날 어떻게 생각하냐고 묻고 도망친 것도 전부 다요.”

나타니엘은 말없이 날 가만히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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