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황태자비가 감수해야 할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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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화. 황태자비가 감수해야 할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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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화. 황태자비가 감수해야 할 일
2022.06.11.
눈동자가 갈피를 못 잡고 흔들리고, 언제나 여유롭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뺨과 눈가가 발갛게 달아오른 게 부끄러운 것처럼 보였다.
“너, 너어…….”
나타니엘은 말도 못 하고 입만 벙긋거렸다.
내 몸 위에서 물러난 나타니엘은 내게서 멀리 떨어져서 어색하게 앉았다.
‘처음 뽀뽀한 것도 아닌데 대체 왜 저렇게 당황하는 건데.’
오히려 이쪽이 더 민망할 지경이었다.
평소에는 얄밉게 나불거리던 입이 오늘따라 조용하다.
나는 힐끗 그를 보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뭐예요, 갑자기 어색하게.”
나타니엘은 여전히 얼굴을 양손으로 가린 채로 가만히 있었다.
나는 그냥 입을 꾹 닫아 버렸다.
방 안에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어색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나는 그의 눈치를 보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나타니엘, 궁금한 게 있는데요.”
“뭔데.”
주섬주섬 웃옷을 끼어 입고 내게서 멀어진 나타니엘이 고개를 돌렸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막상 말을 하자니 구질구질한 것 같기도 해서 그냥 입을 꾹 다물었다.
내가 반대한다고 해서 될 일도 아니었고.
“왜? 무슨 일인데.”
침대에 앉은 나타니엘이 내게 물었다.
집요할 정도로 쫓아오는 붉은 시선에 결국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황제 폐하께서 무슨 말 안 하시던가요?”
“폐하께서? 별 이야기 없으셨는데.”
“후……처 이야기라든가…….”
내 말에 나타니엘의 얼굴이 굳었다.
이미 알고 있었구나.
“그 이야기는 어디서 들은 거지?”
“벨리시아 영애가 알려 주었어요.”
“쓸데없는 걸.”
짜증 섞인 말에 입술을 삐죽이며 중얼거렸다.
“일부러 말 안 해 준 건 아니고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아니, 알고 있는데도 아무 말도 안 했잖아요.”
사실 일이 바쁜 것도 있었지만, 그의 얼굴을 보면 이렇게 될 것 같아서 피한 것도 있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안해요. 괜히 이런 이야기 해서.”
“제이나?”
“뭐, 내가 어쩌겠어요. 하라면 하고 구르라면 굴러야지.”
그래도 말이 예쁘게 나가지 않았다.
유치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나타니엘에게 약간의 소유욕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그의 귀엽고 사랑스러운 모습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 줘야 한다고 생각하니 괜히 뿔이 났다.
“괜찮은 사람이 있다면 후처로 맞이해도 돼요. 당신 비밀을 지켜 줄 동지가 많다면 좀 더 편하지 않겠어요?”
갑자기 방 안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공기를 짓누르는 위압감에 어깨가 흔들렸다.
나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뭐, 뭐예요?”
“네 눈에는 내가 그 정도밖에 안 되는 남자로 보이나 보군.”
싸한 눈빛의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말없이 문을 쾅 닫고 나가 버렸다.
방 안에 덩그러니 남은 나는 입술을 꼭 물었다.
* * *
테레사는 황실에서 내어준 마차를 타고 이동했다.
제이나가 선택한 공방은 수도 외곽에 있었다.
신진 예술가의 공방이었는데, 아나이스 황녀가 우연히 발견한 후 후원하고 있다고 했다.
- 가 보면 아마 테레사 양도 첫눈에 반하게 될 거예요.
해맑게 웃는 아나이스 황녀를 떠올린 테레사는 한숨을 내쉬었다.
직접 그녀의 파혼에 관여한 것은 아니었지만, 테레사는 약간의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만일 자신이 막시밀리안에게 더 냉정하게 굴었다면 아나이스에게 그런 일이 안 생기지 않았을까, 하는.
처음 만난 아나이스는 자신에 대해서 전혀 몰랐다.
그녀를 소개받고 나서 테레사는 저에 대한 비난을 모두 받아들일 생각이었다.
하지만 아나이스는 그러지 않았다.
누구보다 순수하게 그녀를 반겨 주었다.
‘더 잘해 주고 싶어.’
제이나와 아나이스, 둘 다 자신보다 어려서 꼭 여동생들이 생긴 것 같아서 좋았다.
테레사는 궁으로 돌아가는 길에 둘이 좋아하던 베이커리에 들러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목적지로 향했다.
마차는 곧 공방에 도착했다.
한적한 외곽에 있는 공방은 테레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컸다.
그리고 아나이스가 말한 것처럼 놀라울 정도로 아름다웠다.
테레사는 안을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필요한 미술품을 지정해서 주문을 마쳤다.
“그럼, 이번 주말에 궁으로 납품하도록 하겠습니다.”
“부탁하겠네.”
마지막으로 계약서 확인까지 마치고 공방에서 나왔다.
곧바로 마차를 타고 수도의 가장 화려한 란타노이드 거리로 향했다.
이곳의 세레니아 베이커리의 페이스트리가 요즘 장안의 화제였다.
지난번에 집에 선물로 들어온 걸 들고 갔을 때, 제이나와 아나이스가 열광적으로 반응한 것이 떠올랐다.
‘둘이 정말 귀여웠지.’
테레사는 작게 웃으며 이것저것 담아서 포장을 맡겼다.
오늘은 날이 좋았다.
한여름의 하늘은 파란색 물감을 부어 놓은 것처럼 맑고 쨍했다.
포장을 기다리며 콧노래를 부르던 테레사는 누군가의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길 건너에 익숙한 이가 서 있었다.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십여 년을 온몸과 마음을 바쳐 사랑했던 사람을.
“막스…….”
오랜만에 뱉어 본 그의 이름이 어색했다.
막시밀리안 역시 테레사가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살짝 수척해져서 예전보다 훨씬 우수에 찬 모습에 테레사는 심장이 떨렸다.
하지만 그것뿐이었다.
뜨거웠던 감정은 모조리 식어 버렸고, 애틋함과 함께 모두 공중으로 휘발되었다.
“주문하신 건 모두 마차에 실었습니다.”
“아, 고마워요.”
종업원의 안내에 테레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그에게 가볍게 목 인사를 하고 마차에 올랐다.
테레사와 마차가 떠난 자리에 남은 막시밀리안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차마 다가가서 말조차 걸 수 없었다.
그녀는 언제나 막시밀리안에게 먼저 와서 말을 걸고, 웃어 주었다.
너무 당연해서 단 한 번도 그녀가 자신을 모른 척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막시밀리안은 존재 자체를 부정당한 기분이었다.
‘뭘 기대한 거야.’
눈을 감고 벽에 등을 기댔다.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이미 벌어진 일이었고, 과거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그것은 고대 용이 살아 돌아온다 해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도 건강해 보여서 다행이야.”
막시밀리안은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느끼고 몸을 돌렸다.
괜히 함께 있는 모습을 보여 주어 봤자, 좋을 것이 없다는 걸 이제는 알고 있었다.
“윽.”
순간 격렬한 두통에 몸이 휘청거렸다.
- 널 사랑한다고 그랬잖아. 아직도 부족해?
- 그, 그만둬, 막스. 이 손 좀……!
뿌연 시야 사이로 눈물이 가득 고인 테레사의 얼굴이 보였다.
지금보다 더 마르고 수척해진 그녀는 덜덜 떨며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 매번 내게 사랑하냐고 물었잖아. 내가 널 사랑한다니까 흥미가 떨어진 거야?
- 아니야, 그런 거 아니니까……!
- 그럼 이유가 대체 뭔데!
가냘픈 손을 잡고 윽박지르는 자신의 목소리가 뇌를 후볐다.
막시밀리안은 당장이라도 그만두라고 소리치고 싶었으나, 소리는 계속되었다.
- 다른 새끼가 생긴 거야? 아, 그 황태자?
막시밀리안의 커다란 눈동자가 흔들렸다.
툭툭 떨어지는 눈물과 함께 손에 들려 있던 봉투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건, 대체…….”
꿈은 아니었다.
환상이라고 하기엔 테레사의 눈물이 너무 선명했다.
막시밀리안은 한참을 제자리에 서 있었다.
* * *
연회는 아나이스와 테레사의 도움으로 완벽하게 준비가 끝났다.
작은 천국이라는 주제로, 마법사들과 나타니엘을 혹사해 시원하고 쾌적한 환경을 만들어 내는 데 온 힘을 다했다.
덕분에 특별한 휴가를 좋아하는 귀족들이 꽤 많이 참석했다.
혹시나 수도에 남아 있던 귀족들마저도 휴가를 떠나 손님이 하나도 오지 않을까 걱정했던 우리는 답장을 보며 안도했다.
다이애나의 치장은 황후 쪽에서 전담하기로 했기에 더 이상 우리가 할 일은 없었다.
드디어 당일.
나는 새벽부터 치장으로 정신이 없었다.
연회 준비 때문에 바쁜 와중에도 테레사의 도움으로 드레스를 맞추었다.
옷을 입고 치장을 하는 동안 테레사가 물었다.
“그럼 그로반 영애의 첫 춤 상대는 누가 되는 거예요?”
“글쎄. 딱히 파트너가 있다고는 듣지 못했는데.”
내 말에 테레사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궁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황후가 나를 얼마나 괴롭히려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별일 없을 거야, 테레사.”
“그래야 할 텐데요.”
나는 재빨리 화제를 돌리려 옷에 관해 물었다.
테레사는 내 의도를 알아차린 것처럼 웃으며 다른 이야기를 했다.
머리를 올리고 목걸이까지 하고 나자 누군가가 문을 두들겼다.
“황태자 전하가 오셨나 봐요!”
카시안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문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그녀의 예상대로 나타니엘이 들어왔다.
“들어오세요, 전하. 비 전하는 안쪽에 계십니다.”
반가워하는 그들에 비해 나는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그날 이후 나타니엘은 방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래서 오늘도 나타나지 않을까 걱정하기까지 했다.
‘아무리 화려해도 나타니엘의 외모를 죽이지는 못하네.’
내 드레스처럼 연한 하늘색 천 위에 은실로 수를 놓아 만든 화려한 제복은 그에게 잘 어울렸다.
나는 멍하니 그의 얼굴을 보다가 정신을 차렸다.
키득거리며 웃는 테레사를 노려보고는 나타니엘에게 다가갔다.
“옷이 잘 어울려.”
“고마워요. 나타니엘도 잘 어울려요.”
자기 할 말을 다 한 나타니엘은 입을 꾹 닫았다.
그날 내가 한 말이 실수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물론 속이야 상하긴 했지만, 나타니엘이나 황실을 생각한다면 그들이 하는 말도 일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나와 나타니엘의 어색한 생활이 계속되고 있었다.
“잘 다녀오세요.”
테레사와 카시안의 배웅을 받으며 연회장으로 향하는 내내 서로 말이 없었다.
숨이 막힐 것 같은 분위기에 결국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오늘 데뷔하는 아가씨들이 몇 명 더 있을 거예요.”
“그렇군.”
단답형의 대답에 살짝 화가 났다.
하지만 오늘 같은 날 싸워 봤자 좋을 게 없었다.
나는 오랜만에 간신배의 자세를 발휘해 나타니엘의 비위를 맞추기로 했다.
“오늘 디저트로 얼그레이 자몽 케이크가 나오는 거 알아요?”
좋아하는 디저트에 관한 말을 꺼내자 반응이 있었다.
예전이라면 몰랐겠지만, 턱을 바짝 당기고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는 건 신경 쓰고 있을 때 나오는 얼굴이라는 걸 이젠 알았다.
“이따 제가 가져올 테니 하나 먹어 봐요.”
“응.”
나는 특별히 공을 들인 디저트 코너에 대해 잔뜩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그때마다 기대에 차서 얼굴색이 변하는 나타니엘을 보는 건 꽤 즐거운 일이었다.
귀엽기도 하고.
한참 초콜릿 분수에 대해 열띤 설명을 하던 찰나.
황후의 시녀가 찾아와서 조용히 나타니엘을 불렀다.
“황후 폐하께서 긴히 말씀을 전하라 하셨습니다.”
“무엇을?”
“단둘이 있을 때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나타니엘은 잠시 말이 없더니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면 안 들으면 되겠군. 난 황후 폐하께 비밀리에 명을 받고 싶지 않아.”
설마 거절할 줄은 몰랐는지 시녀의 얼굴에 당혹스러움이 떠올랐다.
나타니엘은 내 손을 잡고 연회장으로 들어가려 했다.
“아, 안 됩니다!”
“죽고 싶나?”
짜증이 난 나타니엘을 막기에 그녀는 너무 힘이 없었다.
나는 나타니엘을 달래며 시녀에게 말했다.
“나는 없다고 생각하고 말하거라.”
잠시 눈을 굴리며 망설이던 시녀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는 그로반 영애가 파트너를 구하지 못했다며, 혹시 황태자 전하께서 영애와 춤을 춰 줄 수 있는지 물으라 하셨습니다.”
그녀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생각한 것 이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