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아직은 귀엽기만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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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화. 아직은 귀엽기만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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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화. 아직은 귀엽기만 해
2022.06.08.
테레사가 황태자비의 시녀가 되었다는 이야기는 금방 퍼져 나갔다.
아버지는 고맙다는 편지를 내게 보낼 정도였다.
그사이에 메니실 가문과의 일 때문에 고생이 많으셨던 것 같았다.
‘그러게, 있을 때 잘하라고.’
아버지 역시 메니실 가문에 소홀했던 것은 사실이다.
갑자기 잘살게 된 졸부 가문의 추접스러움이라고 해야 할까.
그래도 이것만큼은 원작과 달라서 좋았다.
원작에서는 두 가문의 사이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나빠졌었다.
그 탓에 막시밀리안은 테레사의 장례식도 보지 못했다.
‘아니야. 이런 생각은 그만하자.’
부정적인 생각을 떨쳐 내려 나는 황궁을 구경하는 테레사의 뒷모습을 보았다.
그녀는 아직 살아 있었다.
“비 전하, 저기 황태자 전하세요.”
“어? 아.”
나타니엘은 무슨 일인지 얼굴이 잔뜩 구긴 채로 걸어가고 있었다.
“나타니엘!”
그의 이름을 부르며 손을 휙휙 흔들자 그가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와 테레사를 발견한 그가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황태자 전하.”
“그래. 오랜만이군.”
나타니엘은 테레사의 인사를 받고는 날 보며 물었다.
“뭘 하고 돌아다니는 거지?”
“테레사에게 궁을 안내해 주고 있었어요.”
“그대가?”
내가 길치라는 사실은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황궁에서 몇 번 길을 잃고 해매던 걸 들킨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이제는 길 안 잃어버리거든요.”
“제이나, 목이 빨갛다.”
나타니엘의 무심한 지적에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지를 뻔했다.
“이제는 터질 것 같군.”
“일이나 보러 가요.”
팔꿈치로 그를 밀어내자, 나타니엘은 웃으며 순순히 물러섰다.
그는 허리를 숙여 귓가에 속삭였다.
“이따 저녁때 보지.”
갑작스러운 귓속말에 정지한 나를 두고 나타니엘은 제 갈 길을 가 버렸다.
그의 보드라운 입술이 닿았던 자리를 만지작거리던 나는 문득 내 옆에 테레사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흐음.”
“으악, 뭐예요.”
테레사는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으며 내 옆구리를 쿡 찔렀다.
“요즘 잘되어 가나 봐요?”
“뭐, 뭐가요.”
“황태자 전하랑 말이에요. 두 분이 많이 친해지신 것 같아서요.”
“아, 뭐…….”
잘 지내고 있기는 했다.
걱정한 것과 달리 나타니엘은 꽤 다정한 편이었다. 하지만 그게 다였다.
애매한 내 대답에 테레사는 엄한 표정으로 말했다.
“비 전하는 예전부터 그랬어요. 남의 감정이나 일에는 엄청 관심이 많아서 참견하고 다니는데, 정작 본인의 감정에는 관심이 없죠.”
“지금 저보고 둔하다고 하는 거예요?”
돌려서 이야기했지만 그 말이었다.
테레사는 싱긋 웃으며 내 손을 잡았다.
“그게 황태자비 전하의 매력이긴 하지만, 이제는 본인 감정도 잘 돌봐야 하지 않을까요? 두 분 정말 잘 어울리고 서로를 좋아하는 게 제 눈에도 보이는데.”
싱글벙글 웃는 게 정말로 기뻐 보였다.
나는 테레사의 말에 생각에 빠졌다.
나에게 나타니엘은 그냥 어쩌다 보니 결혼한 남자였다.
가끔 새끼 용의 모습을 하고 있을 땐 깜찍했다.
정말 강아지를 키우는 기분이었다.
그게 다라고.
입술을 삐죽이고 있는데, 멀리서 카시안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뛰어왔다.
“카시안, 궁에서는 뛰면 안 된다고…….”
“비 전하, 큰일 났어요!”
잔소리를 하기도 전에 카시안이 우리를 끌고 응접실로 향했다.
문을 닫고 하녀들까지 다 내보낸 그녀가 작게 속삭였다.
“그 이야기 들으셨어요?”
“무슨 이야기?”
“황실에 후처를 들일 수 있는 법안을 만들었대요.”
순간 카시안이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싶었다.
후처?
이 나라는 일부일처제를 채택한 나라다.
그래서 후처니 뭐니 하는 건 한 번도 걱정해 본 적이 없었는데…….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왜, 얼마 전에 임시 국정 회의가 열렸었잖아요. 그때 트레비아 후작을 중심으로 안건을 올렸대요.”
나는 그제야 황후가 후회할 것이라고 말했던 이유를 깨달았다.
그리고 왜 그로반 영애를 내 시녀로 넣으려고 했는지도.
“황후 폐하도 손해 보는 거 아닌가요? 사실 황태자 전하보다 황제 폐하께서 먼저 후처를 들일 것 같은데요.”
“그 정도로 절박하단 뜻이겠지.”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황후는 이 일에 꽤 진심인 것 같았다.
그 말은 그로반 영애를 시녀로 받지 않았다 해서 쉽게 넘어갈 일은 아니란 뜻이었다.
“아직 확실히 정해진 건 아니니 일단 호들갑 떨지 말고 지켜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테레사가 내 손을 잡으며 위로해 주었다.
사라진 줄 알았던 불안감이 다시금 차오르기 시작했다.
* * *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기다렸다는 듯 황후가 나를 불러 억지를 부렸다.
“데뷔탕트요?”
“그래요. 슬프게도 다이애나가 데뷔탕트를 못 했다지 않아요? 올해가 지나면 데뷔 나이도 지난다기에 비슷한 영애들을 모아 데뷔탕트를 열까 해요.”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일반적으로 시즌이 끝나는 한여름에 데뷔탕트를 할 영애들을 모은다는 게 가능할 리가 없었다.
“시기상 무리인 거 같은데, 가을에 있는 리틀 시즌을 기다리는 건 어떨까요?”
이 뜨거운 여름에 제국의 수도를 지킬 귀족은 손에 꼽았다.
이미 대부분이 휴양지나 영지로 떠났을 것이다.
“황후인 내가 하겠다는데, 그들이 무슨 자격으로 거절한단 말이야? 황태자비는 아직 황실의 인원이 아닌 귀족 자제의 자리가 익숙한가 보군.”
말도 안 되는 생트집이었다.
나는 황후에게 뭐라 한마디 하려다가 입을 닫았다.
어차피 그로반 영애가 나타니엘의 눈에 띄기를 바라서 벌이는 일일 것이니 내가 반대한다고 될 일도 아니었다.
“알겠습니다. 폐하의 뜻이 그러하다면 그리하겠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황태자비가 연 사냥제 연회가 아주 인기가 있었거든. 이번 데뷔탕트도 자네가 맡아 줬으면 하는데…….”
진짜 해도 해도 너무하네.
순간 욕이 나오려는 걸 참았다.
황후가 귀찮게 굴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이 정도로 치졸하게 굴지는 몰랐다.
“아무래도 내가 나이도 있다 보니, 젊은 사람 취향은 잘 모르겠더라고. 비가 다이애나에게 물어보고 취향에 좀 맞춰 줘요.”
후처 후보인 게 뻔한 여자의 취향을 맞춰 주는 황태자비라…….
뒤에서 말이 나올 게 뻔했지만, 거절한다고 말이 안 나올 것 같지는 않았다.
황후의 사람들이 사교계를 꽉 잡고 있었으니까.
나는 일단 일보 후퇴하기로 결심했다.
“알겠습니다, 폐하. 최선을 다해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순순히 받아들이자 황후는 놀란 것 같았다.
그녀가 말을 덧붙이기 전에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그로반 영애와 이야기 좀 해도 될까요?”
“아, 그래. 그러도록 해. 그 아이는 정원에 있을 걸세.”
그렇게 말하며 내게 안내해 줄 시녀를 붙여 주었다.
시녀의 뒤를 따라 정원으로 향하자 작은 대리석 정자에 앉아 있는 다이애나가 보였다.
안으로 들어가자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고개를 숙였다.
“황태자비 전하를 뵙습니다.”
지난번보다 훨씬 다듬어진 예법에 옷도 머리도 모두 세련되게 바뀌어서 인상이 달라졌다.
짧은 시간 안에 이 정도로 바뀌다니.
황후가 쥐 잡듯이 잡은 게 틀림없었다.
“그간 잘 지냈나요?”
“예. 걱정해 주신 덕분에요.”
그런데 어쩐지 그늘이 져 보였다.
나는 가만히 그녀를 보다가 쓸데없는 걱정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목적으로 이곳에 온 것이라면, 어차피 그녀와는 척을 져야 할 사이였다.
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황후 폐하께서 당신의 데뷔탕트를 위해 연회를 준비해 달라 하시더군요. 혹 원하는 것이 있나요?”
그녀는 잠시 고민하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연회를 열면 대부분의 귀족 남성들이 오나요?”
“별일 없으면요.”
내 대답에 어두웠던 그녀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꼭 기다리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그렇게 나타니엘을 만나고 싶었던 건가?’
속이 부글부글 끓어 올랐다.
이런 자리에 앉아서 저 여자의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 나 자신에게 화도 났다.
그저 감정을 꾹 참아 내며 그녀의 말을 들어야만 했다.
* * *
연회 준비를 위해 나는 아나이스를 불렀다.
아무래도 그로반 남작가의 여식을 위한 연회인데 테레사에게 일을 맡기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다행히 아나이스는 기쁘게 일을 도와주겠다며 찾아왔다.
우리는 대략적인 컨셉을 잡고, 필요한 것들을 찾았다.
아직 수도를 떠나지 않은 귀족들의 숫자가 생각보다 많아서 다행이었다.
일단 초대장부터 돌리고 나자 내부 장식이 문제였다.
준비 일정이 짧아서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았다.
우리는 아침부터 밤까지 부지런히 일했다.
결국 보다 못한 테레사가 나섰다.
“나도 할게요.”
“테레사, 굳이 도와주지 않아도 되는데.”
“맞아요. 저희 둘이 할 수 있어요.”
아나이스 역시 눈치껏 일이 있었던 걸 알았기에 그녀를 말렸다.
“지금 둘 꼴을 봐요. 거의 시체가 걸어 다니는 수준이라니까요.”
테레사의 말에 나와 아나이스는 서로의 얼굴을 보았다.
둘 다 완전히 지쳐 있었다.
가뜩이나 창백한 아나이스의 얼굴에는 핏기가 없었고, 눈 밑이 어둑어둑해서 병자의 모습에 가까웠다.
진짜로 휴식을 취해야 할 것 같았다.
오늘은 외출을 해서 장식으로 사용할 조각을 확인해야 했다.
대량 생산 전에 나온 시제품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정도이니 테레사가 갔다 와도 상관없을 것이다.
“하아……. 그래요. 오늘은 테레사에게 부탁할게요.”
“둘은 어서 가서 쉬어요.”
테레사의 성화에 나와 아나이스는 어기적어기적 걸어 나와 각자의 방으로 돌아갔다.
오랜만에 들어온 침실은 저녁노을에 오렌지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아늑한 분위기의 침대를 보자 당장이라도 몸을 뉘고 싶었다.
‘그러고 보니, 요 몇 주 나타니엘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했네.’
나는 하녀의 도움을 받아 목욕을 하고 마사지를 받았다.
온몸이 노곤하게 풀려서 금방이라도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하녀를 내보내고 침대 위에 몸을 날렸다.
“삐!”
“헉! 나타니엘.”
나는 재빨리 이불을 들어 올렸다.
까만 새끼 용이 화가 난 얼굴로 날 노려보았다.
“어디 다치지는 않았어요?”
내 말에 나타니엘이 가만히 내 얼굴을 보더니 휙 몸을 돌려 버렸다.
어라?
“나타니엘?”
이름을 불러도 그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꼬리만 바짝 세운 모습이 암만 봐도 화가 난 모양새다.
나는 잠시 지난 몇 주를 떠올렸다.
매번 일에 지쳐 쓰러져서 잠만 자던 나날이었다.
나타니엘과 대화를 제대로 한 게 언제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화났어요?”
아니지, 이런 질문은 하면 안 되지.
“나타니엘, 나 좀 봐 봐요.”
톡톡 등을 두들기자 그가 스윽 고개를 돌렸다.
동그란 붉은 눈이 초롱초롱한 게 너무 귀여웠다.
아, 난 그가 용용이 모습일 때는 정말 약하다.
[뭐야.]
“오랜만에 얼굴 보는 거잖아요. 근데 안 보여 주려고 하니까 그런 거죠.”
[언제부터 신경 썼다고.]
흥, 소리를 내며 고개를 휙 돌리는 모습이 삐진 강아지처럼 보였다.
나도 모르게 그를 꽉 끌어안았다.
품에 안겨 오는 조금 딱딱하고 서늘한 몸에 마음이 놓였다.
언제부터 그를 이렇게 편하게 대할 수 있게 되었을까.
“삐! 삐이, 삐.”
발버둥 치며 삐삐거리는 모습이 귀여웠다.
나도 모르게 그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쪽, 하는 민망한 소리와 함께 펑 소리가 나면서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마주한 나타니엘의 얼굴이 완전히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