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첫눈에 반한다는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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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화. 첫눈에 반한다는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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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화. 첫눈에 반한다는 건
2022.06.04.
“지금 내 호의를 거절하겠다는 뜻이냐?”
“폐하의 뜻은 잘 알겠습니다만, 들으셨다시피 이 문제로 피해를 본 영애를 제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오늘 처음 본 그로반 영애보다 그 영애를 생각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고요.”
나는 다이애나를 보았다.
그녀의 까만 눈동자에 절망이 보였다.
하지만 난 내 사람들이 더 중요했다.
지금까지 마음고생 한 테레사는 특히나.
“차라리 그로반 영애를 황후께서 돌봐 주시는 것이 폐하의 위명에 더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시녀를 들이는 건 내가 결정할 일이었다.
내가 딱 잘라 거절하자 황후도 더는 밀어붙이지 못했다.
“오늘 일을 후회할 거라는 생각은 안 하나?”
“후회라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요?”
“난 미리 둘이 친해질 기회를 주는 거야.”
나는 황후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내가 굳이 그로반 영애와 친해질 이유가 있던가?
“배려는 감사하지만, 아마 후회할 일은 없을 겁니다, 폐하.”
황후의 시선이 나타니엘을 향했다.
그러고는 뜻 모를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래, 아직은 모르나 보군.”
“거기까지입니다, 황후 폐하. 그만 돌아가시지요. 데려온 개도 잊지 마시고요.”
나는 나타니엘의 손을 꽉 잡았다.
말이 좀 심했다.
아무리 그래도 개라니.
모욕을 받았다고 생각했는지 황후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져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알겠네, 가지.”
쿵쿵거리며 불편한 심기를 대놓고 드러내던 황후가 떠난 후, 나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타이밍을 놓친 다이애나가 덩그러니 남은 것이다.
내가 말리기도 전에 나타니엘은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
“꺼져.”
날카로운 기세에 화들짝 놀란 그녀가 벌떡 일어나서 문을 열고 나갔다.
나는 나타니엘을 툭 치며 노려보았다.
“너무 심하잖아요.”
“별로, 잘 모르겠는데.”
어쩐지 그는 잔뜩 뿔이 난 얼굴로 자리로 돌아가 털썩 앉았다.
“저어…… 나타니엘, 부탁이 있는데.”
“뭔데?”
나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아무리 생각해도 시녀를 들이는 편이 나을 것 같아서요.”
“굳이?”
“이번에야 어떻게 해서든 거절했다고 하지만, 몇 번이고 이런 식으로 시녀를 들이라 압박하겠죠. 황후 폐하 사람을 궁으로 들이느니, 저희 쪽 사람으로 빨리 채우는 게 나을 수도 있어요.”
나타니엘은 잠시 말이 없었다.
황태자궁은 다른 궁에 비해 일하는 사람이 적었다.
아마도 갑자기 변신할 때를 대비해 최소 인력만 사용하는 것 같았다.
나타니엘이 다른 귀족들과 달리 시중을 받지 않는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일 것이다.
그런 그의 생활 반경 안으로 아무리 우호적이라지만, 낯선 사람이 둘이나 들어오게 되는 것이다.
내 말에 고민하던 나타니엘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정말요?”
“응. 누굴 들일 생각이지?”
“어, 음……. 잠깐만요.”
문제는 나의 좁고 깊은 친우 관계에 있었다.
빙의 전에는 안하무인, 천상천하 유아독존으로 살아 온 제이나였으니 믿을 맏한 친구가 있을 리가 없었다.
빙의하고 나서는 친구를 사귀기도 전에 결혼을 해서 황궁으로 들어왔으니 아는 사람이 손에 꼽았다.
‘이럴 때 도와주실 어머니도 없으니…….’
그럼 남은 건 둘 뿐이었다.
테레사와 카시안.
둘 다 자격은 충분하니 다행이었다.
아니었으면 시녀 모집 공고를 낼 뻔했다.
“메니실 영애와 벨리시아 영애를 생각 중인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 둘?”
나타니엘은 잠시 말이 없었다.
혹시나 마음에 안 드나?
하지만 메니실 백작가도 벨리시아 후작가도 유서 깊은 가문들이었고, 나와도 친분이 있으니 그리 나쁜 선택은 아니었다.
“뭐, 네 친구는 그 정도뿐일 테니. 그러도록 해.”
허락할 거면 그냥 허락할 것이지 쓸데없는 소리를 덧붙이네?
나는 입술을 삐죽이며 중얼거렸다.
“그러는 나타니엘도 친구 없잖아요.”
내 말에 나타니엘의 미간이 구겨졌다.
하지만 반박할 말이 없는지 입술을 꾹 닫았다.
나는 승리의 미소를 지으며 방을 나섰다.
* * *
문을 열고 뛰쳐나온 다이애나는 공포에 몸을 벌벌 떨었다.
본 적도 없는 마수를 만난 것 같은 기분이었다.
황후는 화가 났는지 자신을 두고 가 버려서 이곳에서 어떻게 나가야 할지도 몰랐다.
“저, 여기서 어떻게 나가야 하죠?”
하녀를 잡고 묻자 그녀는 친절하게 길을 알려 주었다. 다이애나는 무거운 발을 끌고 밖으로 향했다.
아직도 자신을 향해 붉은 안광을 번뜩이던 나타니엘을 떠올리면 다리가 떨렸다.
‘대체 그런 남자를 어떻게 꼬시라는 거야.’
황후는 머리가 돈 게 틀림없었다.
처음 방에 들어갔을 때는 나타니엘의 외모에 놀란 것도 사실이었다.
신전에서 보았던 조각 같은 얼굴의 남자는 냉랭한 분위기를 풍겼다.
흐트러진 검은 머리카락 아래의 뚜렷한 이목구비와 남자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하얗고 투명한 피부.
높은 콧대가 하얀 피부 위에 음영을 드리워서, 더욱 그의 얼굴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특히 무심하게 자신을 보던 그 붉은 눈동자는 맑고 채도가 높아서 꼭 루비처럼 보였다.
다이애나는 순간 그를 가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흥분하여 체면도 잊은 채로 환호성을 지를 뻔했다.
“하아…….”
하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자신의 이름을 듣고 돌변한 남자는 동화에서 나온 위대하고 자애로운 용이 아니었다.
그저 난폭한 괴물에 가까웠다.
다이애나는 다시 한번 그때를 떠올리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어, 여긴…… 어디지?”
정처 없이 발이 닿는 대로 걸어서 여기가 어딘지 알 수 없었다.
주변을 살피며 복도를 걷던 다이애나는 테라스에 앉아 있는 누군가를 발견했다.
길을 물을까 싶어 다가가려다가 그 자리에 멈춰 섰다.
“헉.”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은발의 남자는 우수에 찬 얼굴로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우아하게 뻗은 콧대 위로 달빛이 내려앉았다.
다이애나는 멍하니 그 광경을 지켜보며 중얼거렸다.
“요정?”
천천히 고개를 돌린 남자가 다이애나를 발견했다.
동그랗게 휘어지는 푸른 눈동자가 아름다웠다.
“누구……?”
“아, 나가려다 길을 잃어서요.”
다이애나는 의식적으로 자기 이름을 숨겼다.
조금 전의 경험으로 그녀의 이름이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확실히 배웠다.
“아. 그러시군요. 여기서 조금만 더 가면 됩니다.”
막시밀리안은 친절하게 다이애나를 정문까지 바래다주었다.
별 뜻 없이 베푼 친절이었으나, 다이애나는 자신이 특별 취급 받는다고 생각했다.
시골에서 지낸 탓에 이 정도로 예의를 지키는 남자는 처음 만나 보았기 때문이다.
황족보다 더 우아한 남자의 에스코트에 설렐 수밖에 없었다.
“도착했습니다, 레이디.”
“가, 감사합니다.”
정문 앞에서 돌아서려던 막시밀리안의 옷을 다이애나가 붙잡았다.
“저, 혹시 다음에도 만날 수 있을까요?”
막시밀리안은 놀랐지만 모르는 척했다.
옷차림을 보아하니 시골에서 올라온 아가씨 같았다.
그래서 자신을 모르는 것인가 싶어서 적당히 둘러대기로 했다.
“물론입니다. 기회가 된다면요.”
사교계에서는 이 대답이 ‘내가 먼저 연락할 일은 없으니 꿈 깨.’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다이애나는 막시밀리안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시골에서 왔다.
다이애나는 황후궁으로 향하며 꿈에 부풀었다.
조금 전까지의 공포는 순식간에 날아가 버렸다.
그녀는 오라버니를 닮아 욕심이 많고, 쓸데없이 의욕적이었다.
그리고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는 여자였다.
다이애나가 황후의 궁에 도착했을 때는 의욕으로 두 눈을 불태우고 있었다.
* * *
결정하고 나자마자 바로 메니실 가문으로 편지를 보냈다.
답장은 금방 왔다.
얼굴을 보고 이야기하고 싶다는 답장이 왔는데, 그러려면 제일 먼저 해결해야 할 일이 있었다.
“이제 그만 돌아가요.”
“그렇지 않아도 돌아갈 생각이야.”
처음 왔을 때보다는 나아졌지만, 막시밀리안은 여전히 상태가 좋지 않았다.
여전히 제대로 먹지 못하는지 핼쑥했다.
“아직도 그런 꿈을 꿔요?”
“어? 응.”
막시밀리안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테레사는 혹시 몰라서 황태자궁의 시녀로 들일 거예요.”
“뭐? 정말?”
“네. 그러니 걱정하지 말아요. 제가 가까이서 지켜볼 거니까요.”
황태자비의 시녀로 있으니 다른 위협도 현저하게 줄 것이고, 건강에 문제가 있을 시에는 내가 빠르게 대처할 수 있었다.
게다가 친구인 카시안도 불러들였으니 가까이서 지켜볼 수 있는 사람이 둘이나 된 것이다.
“고마워. 이렇게까지 신경 써 줘서.”
“오라버니가 예뻐서 해 주는 거 아니니까 고마워할 필요 없어요. 테레사는 내 친구이기도 하니까요.”
내 독설에도 막시밀리안은 마냥 좋은지 웃기만 했다.
그는 몇 번이고 고맙다고 인사를 하며 황성을 떠났다.
막시밀리안을 배웅한 뒤 착잡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도 테레사를 생각하는 건 진짜인 것 같았다.
‘하긴 원작에서도 후반부에서는 죽고 못 살긴 했지.’
물론 그 전에 적립해 둔 쓰레기 짓 때문에 완결까지 욕을 먹었지만.
어쩌면 원작의 연장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기분이 가라앉았다.
어디서부터가 원작이고, 어디서부터가 바뀐 현실인지 경계가 모호해진 기분이 들었다.
‘어차피 하기로 한 거, 끝까지 해 보는 거야.’
물러설 생각은 없었다.
실패하더라도 후회하지 않을 수 있게 최선을 다할 예정이다.
* * *
막시밀리안을 보내고 며칠 뒤.
테레사와 카시안이 황궁으로 찾아왔다.
“전하, 그간 잘 지내셨어요?”
“그럼요. 저야 잘 지냈답니다.”
황궁에 찾아온 테레사는 전보다 훨씬 표정이 좋아졌다.
역시 막시밀리안은 암세포 같은 존재구나.
나는 새삼 그를 떠올리며 테레사를 향해 활짝 웃었다.
하녀들이 차를 내오고 나서 나는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미 편지로 용건을 적어 두었지만, 이런 일은 직접 말해야 한다고 생각해서요.”
이미 편지에 시녀로 들이고 싶다는 이야기를 적었기 때문에 둘 다 각오가 서린 표정이었다.
“내가 성질머리가 이래서 딱히 친한 친구도 없고, 어머니도 없으니 부탁할 만한 사람도 없어서요. 두 사람이 내 시녀가 되어 주었으면 좋겠어요.”
“물론입니다, 전하.”
“저도 하겠습니다, 비 전하.”
둘은 곧바로 수락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둘 다 고마워요. 쉽게 결정할 수 있던 일은 아니었을 텐데.”
현재 귀족들은 황제와 나타니엘을 주축으로 한 황제파와 황후와 트레비아 후작가를 중심으로 한 귀족파, 그리고 윈터스 공작가를 중심으로 하는 중도파로 나뉘어 있었다.
중도파였던 메니실 가문과 벨리시아 가문의 이해관계까지 고려하면, 쉽지 않은 선택이었을 것이다.
“어차피 전하께서 결혼하시면서 언젠가 결정해야 할 일이었어요.”
“그래도 고마운걸요.”
든든한 아군이 생긴 느낌이다.
여전히 긴장해 있는 날 보며 카시안이 장난스럽게 웃고는 말을 덧붙였다.
“그럼 괜찮은 남자라도 소개해 주시든가요.”
“아……. 그건 좀.”
내가 망설이자 둘은 소리를 내어 웃었다.
딱딱한 분위기가 조금 풀렸다.
그렇게 차를 마시던 중 테레사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사람들이 뭐라 하지 않을까요? 그…… 제가 막스와 파혼한 사이잖아요.”
“윈터스 가문이 메니실 가문에 지은 죄가 많아서 들였다고 생각할걸요?”
실제로 두 가문의 사이는 예전만 못했다.
아버지도 눈치를 보았고 백작은 말은 못 했지만, 불만이 꽤 쌓여 있었다.
다른 자리도 아니고, 황태자비의 시녀 자리이니 테레사의 앞날에 분명 도움이 될 일이긴 했다.
잘만 풀리면 이번 일로 두 가문의 사이가 전보다는 좋아질지도 몰랐다.
“그럴까요?”
“넌 걱정이 많아서 탈이라니까.”
적당한 지점에 카시안이 끼어들어 테레사의 부정적인 생각을 그만두게 했다.
이래서 둘이 친한 거구나 싶었다.
“앞으로 잘 부탁해요, 둘 다.”
“네. 불러만 주세요, 황태자비 전하.”
나는 둘의 손을 꼭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