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다이애나 그로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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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화. 다이애나 그로반
2022.06.01.
그 뒤로 이 일을 설명하는 막시밀리안의 이야기는 제대로 듣지도 못했다.
속이 울렁거린 탓이었다.
“제이나? 괜찮니?”
막시밀리안은 다급하게 내 쪽으로 넘어왔다.
“으응. 괜찮아. 아까 그 꿈 이야기나 더 해 봐.”
불길함이 전신을 휘감았다.
나는 간신히 냉정함을 되찾았다.
막시밀리안은 내가 안심하는 걸 보고는 입을 열었다.
“꿈 전체가 기억나는 건 아냐. 기억이 드문드문 나는데, 그냥 무슨 수를 써도 테레사가 낫질 않고, 그리고 그렇게 돼서…….”
불치병이라는 사실까지 맞췄다.
하지만 전부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었다.
나는 얼마 전, 그가 연회장에 갑자기 나타났던 것을 떠올렸다.
“그럼 얼마 전에 연회장에 왔던 건? 그것도 꿈에서 보고 온 거야?”
내 물음에 막시밀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숨이 턱 막혀 왔다.
그렇게 쉽게 테레사의 운명이 바뀌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오히려 잘 맞으니까 불안해서. 혹시 네가 테레사를 좀 봐줄 수 있을까?”
그의 물음에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막시밀리안은 안심한 얼굴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 황태자궁에서 며칠 머무르다가 가.”
“아, 아니야. 일단 공작저로 돌아가 있으려고.”
어쩐 일로 내 제안을 거절하는 막시밀리안이 이상하게 얄미웠다.
테레사를 고생시키고, 나는 얼결에 결혼까지 해야 했다.
내 결혼만으로는 그 엄청난 일을 모두 보상할 수는 없어서 소정의 위로금을 내어주기까지.
그렇게 많은 것을 잃고 나서야 철이 들다니.
말이 예쁘게 나올 수가 없었다.
“그 거지 같은 꼴로 돌아다니다간, 윈터스 소공작이 파혼당해서 미쳤다는 소문이 돌겠어.”
“야, 말이 너무 심하잖아.”
내 독설에 막시밀리안이 작게 항의했다.
하지만 난 지지 않고 그에게 한마디 더했다.
“아까 하녀들이 오빠 얼굴 보고 놀란 거 모르지? 그나마 자랑할 게 외모밖에 없는데 관리 좀 잘해. 테레사 언니도 못 알아보겠네.”
독설에 할 말을 잃었는지 막시밀리안은 입을 꾹 닫았다.
그러고는 손으로 얼굴을 매만지며 볼멘소리를 냈다.
“그, 그 정도인가?”
“예. 그 정도입니다, 오라버니.”
그래도 엉망인 얼굴을 보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나는 길게 한숨을 쉬며 그를 일으켰다.
“그러니 가서 좀 쉬다가 가. 공작저로 가면 아버지께도 한 소리 들을 거 아냐.”
“아까는 구박하더니.”
“미워도 가족이라고, 별수 있나.”
막시밀리안의 어깨를 장난스럽게 툭툭 치고는 사람을 불렀다.
“윈터스 소공작께 손님 방 하나를 내어드리렴. 신전에서 신관도 좀 부르고.”
“신관까지는 필요 없는데.”
“주는 대로 받으세요.”
이 세계에서 신관은 정신과 의사와 비슷했다.
성력이 사라진 탓에 육체적 치료는 이미 의사들에게 넘어간 지 오래였다.
신도들이 나날이 줄어들면서 영향력도 함께 약해졌고, 어떻게 해서든 신전을 유지하기 위해 만들어 낸 고육지책이었다.
물론 출장 비용이 비싸서 귀족들이 주로 이용하지만.
“그럼 푹 쉬세요.”
막시밀리안에게 인사를 하고 나오자, 하녀 한 명이 급하게 내게 달려왔다.
“크, 큰일 났습니다, 비 전하.”
“큰일?”
“예……. 어서 황태자 전하께 가 보셔야 할 거 같아요.”
“나타니엘에게?”
혹시 사람 많은 곳에서 새끼 용으로 변한 건가?
내 표정이 어두워지자 하녀가 다급하게 말을 붙였다.
“화가 많이 나신 것 같아서요.”
“응?”
순간 아까 내가 던진 책에 그가 맞은 것이 떠올랐다.
지나고 나니 너무 아팠나?
나는 나타니엘이 있다는 서재로 발걸음을 옮겼다.
* * *
도착한 곳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두껍고 단단해 보였던 서재의 문이 안쪽에서 바깥 방향으로 우그러져 있었다.
문 주변에는 기사들이 서 있었다.
“무슨 일이냐!”
“그, 그게…… 화가 많이 나셔서 마력이 불안정합니다.”
내 눈치를 보던 기사 중 하나가 조용히 몸을 숙여 작게 속삭였다.
마력이 불안정하다고?
나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지만, 그들은 익숙한 듯 보였다.
그리고 말하지 않아도, 그들의 얼굴에 그득한 공포를 쉽게 느낄 수 있었다.
“내가 들어갈게.”
“위험하십니다, 비 전하.”
“들어가서 전하를 진정시키길 바라서 불러온 게 아니냐.”
내 말에 기사가 입을 꾹 닫았다.
나는 손을 흔들어 문을 열게 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아까와 별다를 것 없는 서재였지만, 내부의 분위기가 무거웠다.
“나타니엘?”
한쪽 소파에 걸터앉아 있는 나타니엘이 내 부름에 고개를 들었다.
날카롭게 빛나는 붉은 눈에 나도 모르게 자리에 멈추어 섰다.
생각보다 마력은 무섭지 않았지만, 그에게서 느껴지는 위압감은 확실히 무서웠다.
‘이러다가 비명횡사하는 거 아냐.’
나는 조심스럽게 그의 곁으로 향했다.
맹견에게 다가가는 기분이었다.
“혹시 아까 일 때문에 화났어요?”
나타니엘의 미간이 구겨졌다.
진짜구나.
나는 재빨리 그의 옆자리에 앉아서 방긋 웃으며 손을 잡았다.
“미안해요. 일부러 그런 건 아닌데.”
“…….”
“제가 원래 잘 좀 놀라잖아요. 앞으로는 더 조심할게요.”
슬쩍 그의 눈치를 보았다.
다행히 위압적인 분위기는 많이 가라앉았다.
가만히 날 내려다보던 그가 피식 웃었다.
곧 전신을 짓누르던 힘이 사라졌다.
“정말 태평해.”
장난스러운 말투를 툭 내뱉은 그가 내 머리를 토닥거렸다.
“아니 뭐, 화났다고 하니까 미안하다고 하는 거죠.”
“그대 탓이 아니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럼 뭐 때문에 화가 났는데요.”
조심히 물었지만, 나타니엘은 쉽게 입을 열지 않았다.
“나중에 알려 줄게.”
“뭔데요, 무슨 일인데요?”
“나중에 알려 준다니까.”
나타니엘은 도망치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답지 않게 자리를 피하는 것이 이상했다. 대체 뭐길래?
안 알려 주니 더 오기가 생겼다.
“윽, 뭐 하는……!”
나는 손을 뻗어 내게 등을 보이고 있는 그의 목에 매달렸다.
놀라서 푸드덕거리는 나타니엘을 보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흔드는 대로 흔들려 주는 그가 재밌어서 어쩐지 장난을 치게 됐다.
“아 뭔데요? 왜 안 알려 주는 건데요.”
그의 등에 매달려 칭얼거리자 나타니엘은 작게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의 등을 타고 전해져 오는 진동이 기분 좋게 느껴졌다.
손등을 토닥이는 손바닥에서 그답지 않은 온기가 전해졌다.
그렇게 그 일은 잊히는 줄 알았다.
* * *
잊고 있었던 궁금증을 풀어 준 건 의외의 사람이었다.
“황태자 전하, 비 전하, 황후 폐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시종의 말에 나는 잠시 뇌가 멈추는 것을 느껴졌다.
누가 찾아와?
“볼일 없으니 돌아가라 해.”
내가 버벅거리고 있는 사이 나타니엘이 냉큼 대답해 버렸다.
나는 그를 돌아보며 한마디 했다.
“자, 잠깐만요. 황후 폐하를 밖에다가 두면 안 되죠!”
“어차피 쓸데없는 이야기나 하러 왔을 거다.”
나타니엘은 미간을 구기며 으르렁거렸다.
그의 위협에 살짝 쫄았지만, 슬쩍 시선을 피했다.
절대 안 된다고 더 버틸 거라 생각했던 예상과 달리 그는 순순히 뒤로 물러났다.
나는 한쪽에 놓인 거울로 얼굴과 옷을 살폈다.
나타니엘은 귀찮다는 얼굴로 반대편에 있는 소파로 자리를 옮겼다.
“안으로 모시거라.”
곧 문이 열리고 황후가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그 뒤에 따라 들어오는 여자가 하나 더 있었다.
‘누구지?’
새로 들어온 시녀인가 싶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디 돈 많은 가문의 딸이라도 데려왔나 싶었다.
“어서 오십시오, 황후 폐하.”
자리에서 일어나 예법에 맞춰 인사를 하는 나와 다르게 나타니엘은 고개만 살짝 숙였다.
얼굴에는 누가 보아도 짜증이 가득했다.
“여기까지는 어쩐 일이십니까?”
말투에서도 불만이 묻어 나왔다.
나는 재빨리 그를 노려보았지만 소용없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황후는 나타니엘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자리에 앉은 황후는 방긋 웃으며 나를 보았다.
어째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당연히 둘이 잘 지내는지 궁금해서 왔지요. 황태자비, 이제 슬슬 궁에 익숙해졌습니까?”
“황후 폐하 덕에 잘 지내고 있습니다.”
으레 하는 말이었지만 나타니엘은 그런 내가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이다.
날 노려보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움찔했다.
“그래요. 잘 지낸다니 다행이군요. 생각해 보니, 내가 하나뿐인 황태자비를 너무 신경 쓰지 않은 것 같아서요.”
그렇게 말한 황후는 뒤에 있는 여자를 불렀다.
갈색 머리에 예쁘장하게 생긴 여인은 어쩐지 죄를 지은 사람처럼 뻣뻣해 보였다.
“내가 후원을 하기로 한 아이예요. 다이애나, 인사하렴.”
“아, 안녕하세요. 다이애나…… 그로반입니다.”
나는 그녀의 이름을 듣고 할 말을 잃었다.
지금 황후가 나한테 싸우자고 결투장을 던진 건가?
분명 황후는 내가 어떤 이유로 아닉스 그로반을 처단했는지 알 것이다.
그런데 그 동생을 후원해 주겠다고 데려오다니.
우리의 시선이 곱지 않은 걸 느꼈는지 다이애나가 고개를 숙였다.
그래, 네가 무슨 죄가 있겠냐, 싶었다.
그때 잠자코 있던 나타니엘이 나섰다.
“그로반 남작이 죄를 지어서 제가 벌을 내린 걸 알고 계실 텐데요. 그 딸을 후원하시겠다는 겁니까?”
“오라비가 죄지 이 아이에게 무슨 죄가 있겠나?”
황후는 굉장히 뻔뻔한 얼굴이었다.
맞는 말이긴 했다. 그녀가 말하니 기분이 나쁠 뿐이었지.
“그래서 말인데, 제이나. 그대가 이 아이를 시녀로 거두는 건 어떻겠나? 생각해 보니 원래, 황후가 황태자비에게 시녀를 주는 것이 법도인데 아직 내게 한 명도 받지 못했으니 말이야.”
아, 그건 싫은데.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설마 그 제안을 제가 받을 거라고 생각하신 건 아니죠?”
“왜 안 받겠다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구나. 어차피 그자의 일과는 상관없는 여자 아니니.”
이건 감정적인 부분의 일이었다.
차마 당사자 앞에서 그로반 영애를 시녀로 두면 어떻게 될지를 일일이 나열할 수 없어 입을 꾹 닫았다.
나중에 보자, 너.
“지금 벌을 내린 당사자에게 저 머저리 같은 여자를 가까이 두라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뭐…… 뭐라?”
나타니엘다운 응대였다.
“하나만 묻지, 영애. 자네는 그로반 남작이 뭐 때문에 벌을 받았는지 아나?”
“그, 그건…….”
화가 난 나타니엘의 기세는 나조차 두려울 정도였다.
아니나 다를까 다이애나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표정을 보아하니 알고 있나 보군. 황후 폐하, 하나만 물어보겠습니다. 만일 저희가 저 여자를 시녀로 들이면 이 사건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나타니엘의 분노를 정면으로 받은 황후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의자 뒤로 몸을 밀어냈다.
저렇게 새가슴인데 매번 이런 일을 잘도 꾸미는 게 한편으로는 대단하다고 느껴질 지경이었다.
“아…… 아량이 넓다고 생각하지 않겠나.”
“아량이라니요. 분명 그로반 남작에게 부당한 벌을 준 거라고 생각할 겁니다. 그러니 그 여동생을 거두어 가문의 입을 막는 거라고 생각하겠지요.”
그렇게까지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나타니엘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그리고 피해자가 진짜로 그 일을 겪은 게 맞느냐는 소리가 돌 겁니다.”
마지막으로 한 그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우리의 선택으로 테레사가 위험해질 수 있다니.
그녀에게 오늘 처음 만난 다이애나보다 훨씬 마음이 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여전히 말도 안 되는 논리로 나타니엘과 싸우고 있는 황후를 향해 똑똑히 말했다.
이렇게 말하지 않으면 그녀는 물러서지 않을 테니까.
“죄송하지만, 황후 폐하. 그로반 영애를 궁에 들일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고운 황후의 얼굴이 단번에 구겨졌다.